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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요14:1-6 |
|---|---|
| 설교자 : | 한완상 형제 |
| 참고 : | 새길교회 |
우리는 길 잃고 방황할 때가 있습니다. 이 시대가 또한 혼돈과 방황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깨닫지 못해 또한 잘못된 길로 갈 때가 흔합니다. 이 상황이 올곧은 원리를 제시하고 있지 못합니다. 정말 생명에 이르는 진리의 길이 보이지 않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포하신 예수님을 다시 한번 쳐다보아야 합니다.
첫째, 길 되신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길이 보이지 않거나 길이 아예 없을 때 우리는 불안해질 뿐만 아니라 위험을 맞게 됩니다. 길이 없으면 목표를 설정할 수 없고 또 그 목표가 있다하더라도 그곳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실패와 좌절만을 거듭할 뿐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가짜 길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하기 쉽습니다. 이런 때 길 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빛은 목표와 그것에 이르는 길을 함께 보여주는 희망입니다. 나침반이면서도 항구에 이르게 하는 힘입니다. 오래 전 세기적 살인마였던 金大斗가 사형 당하기 전 "왜 내 일생에는 빛이 없습니까?"라고 절규했던 일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빛의 길일뿐만 아니라 그 길이 험난할 때 함께 길을 동행해주는 동행자(同行者)요 동고자(同苦者)가 되십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안전하게 동행해 주시는 길벗이 되십니다. 절망에 사로잡혀 엠마오로 내려가던 길에 그들과 동행해 주시면서 희망과 용기를 주셨던 길벗이 바로 예수님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길이라고 고백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자신이 스스로 길이라는 뜻입니다. 길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갑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밟고 지나가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길로 가게 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이 밟히고 계십니다. 지난날 폭압정치가 기독교 신앙을 핍박할 때 십자가나 예수님 상을 밟고 지나가게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상을 밟았던 사람들은 밟았기 때문에 육신의 생명을 건졌습니다. 이 경우에도 예수님은 용기 없는 사람들에게 생명이 되셨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용기 있는 순교자의 삶이 더 값지지만, 길 자체가 되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육체의 삶과 영원의 삶을 허락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께서 밟히심으로써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우리는 사랑합니다. 밟히시는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과 같습니다.
둘째로, 진리 되신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세상 지식이 진리에 이르지 못할 때는 오히려 그것이 위험합니다. 자연과학의 지식, 사화과학의 지식들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박살내는데 활용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지 않습니까? 세상 진리는 마치 선험적(先驗的)이고, 객관적인 차가운 원리처럼 인식됩니다. 이러한 세상 진리에 대해서 가르치는 교사들은 많습니다만, 세계는 여전히 비리와 부정과 전쟁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리 그 자체라는 뜻은 진리가 선험적인 추상원리가 아니라 구체적 역사 현실에서 나타나는 삶,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과 직결된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애초부터 학살사건, 피난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진리의 출현은 反진리의 세력에 의해 학살당하고 피난가야하며 배척 당하고, 배반당했던 것입니다. 진리는 채찍을 맞았습니다. 진리는 빌라도 법정에서 극형선고를 받고 골고다로 끌려갔습니다. 反진리의 세력에 의해 조롱당하고 고난 당하면서 마침내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습니다. 진리는 외쳤습니다.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연약한 듯한 인간의 절규를 내 쏟았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진리입니다. 이와 같은 십자가의 진리를 기적을 구하는 당시 유대인들이나, 지혜를 찾았던 당시 희랍인들은 도무지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전적으로 무죄인(無罪人)이셨던 예수께서 극악무도한 죄인(罪人)들이 당했던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는 이 모순, 이 역설(逆說), 이것이 바로 진리의 참모습입니다. 세상에서 사랑이 증오에 의해 추방당하고, 밝음이 어둠에 의해 몰려나고, 평화가 전쟁에 의해 파괴되고 정의가 불의에 의해 조롱당하는 역사 현실에서는 항상 진리는 고난과 죽음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리가 그렇다면 영원히 패배하는 것입니까? 부활사건은 처형당한 진리의 궁극적 승리를 의미합니다. 진리가 박해 당하는 현실 속에 항상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이 그곳에서 박해 당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진리로 고통 당하는 우리를 굳세게 잡아주기 위해서 입니다. 군사재판장에서 여러 피고인 중, 비겁하며 연약한 피고들도 있습니다만, 한 피고인이 용기 있게 증언할 때 그것이 그 다음 피고인들에게 엄청난 용기를 준다는 사실을 저는 체험했습니다. 진리가 고난과 죽임을 당하는 곳에 부활의 빛은 더욱 찬란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부활의 힘은 곧 사랑입니다.
셋째로, 생명 되신 주님을 생각해 봅시다.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하면 그것은 가짜 길입니다(나치, 공산주의, 군국주의). 진리가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할 때 그것은 사이비 진리입니다(백백교, 인민사원). 비록 길이 험하고 위태하더라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때 참 길이요 비록 진리가 군사재판에 선다 하더라도 영생으로 인도할 때 그것은 참 진리입니다. 올곧은 진리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비록 객관적으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길에 걸어간다 하더라도 그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평화가 큰 강물처럼 흐르게 됨을 체험하면서 감사하게 됩니다. 옥중에서 육체의 죽음을 기다리면서 사도 바울이 지녔던 그의 생사관(生死觀; 빌립보 1:21-24)은 바로 이와 같은 주님의 평안을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순간순간 영원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비결이 바로 길, 진리, 생명 되신 예수를 몸으로 느끼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제 1993년도 다 저물었습니다. 이런 때 우리의 유한한 삶을 새삼 깨달으면서 스스로에게 도마가 던졌던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과연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영생에 이르는 진리의 길인가? 과연 내 길이 예수의 길인가? 아니, 예수인가? 정말 나의 유한한 이 삶이 영원에 잇대어 있는가? 만일 여러분들 중에 예수의 길에 들어서서 외로움을 느낀다면 바로 여러분 곁에 주님이 동행자로 계심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또한 그 길에서 곤욕을 치른다면,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과 골고다의 주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견딜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그 찬란한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며 그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시간의 짧음을 가장 예민하게 느끼게되는 이 연말(年末)에 시간의 수인(囚人)인 우리가 시간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주님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잊지 맙시다. 이런 때 길, 진리, 생명 되시는 주님을 뜨겁게 온몸으로 체험하는 은총의 시간을 가집시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첫째, 길 되신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길이 보이지 않거나 길이 아예 없을 때 우리는 불안해질 뿐만 아니라 위험을 맞게 됩니다. 길이 없으면 목표를 설정할 수 없고 또 그 목표가 있다하더라도 그곳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실패와 좌절만을 거듭할 뿐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가짜 길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하기 쉽습니다. 이런 때 길 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빛은 목표와 그것에 이르는 길을 함께 보여주는 희망입니다. 나침반이면서도 항구에 이르게 하는 힘입니다. 오래 전 세기적 살인마였던 金大斗가 사형 당하기 전 "왜 내 일생에는 빛이 없습니까?"라고 절규했던 일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빛의 길일뿐만 아니라 그 길이 험난할 때 함께 길을 동행해주는 동행자(同行者)요 동고자(同苦者)가 되십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안전하게 동행해 주시는 길벗이 되십니다. 절망에 사로잡혀 엠마오로 내려가던 길에 그들과 동행해 주시면서 희망과 용기를 주셨던 길벗이 바로 예수님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길이라고 고백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자신이 스스로 길이라는 뜻입니다. 길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갑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밟고 지나가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길로 가게 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이 밟히고 계십니다. 지난날 폭압정치가 기독교 신앙을 핍박할 때 십자가나 예수님 상을 밟고 지나가게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상을 밟았던 사람들은 밟았기 때문에 육신의 생명을 건졌습니다. 이 경우에도 예수님은 용기 없는 사람들에게 생명이 되셨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용기 있는 순교자의 삶이 더 값지지만, 길 자체가 되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육체의 삶과 영원의 삶을 허락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께서 밟히심으로써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우리는 사랑합니다. 밟히시는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과 같습니다.
둘째로, 진리 되신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세상 지식이 진리에 이르지 못할 때는 오히려 그것이 위험합니다. 자연과학의 지식, 사화과학의 지식들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박살내는데 활용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지 않습니까? 세상 진리는 마치 선험적(先驗的)이고, 객관적인 차가운 원리처럼 인식됩니다. 이러한 세상 진리에 대해서 가르치는 교사들은 많습니다만, 세계는 여전히 비리와 부정과 전쟁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리 그 자체라는 뜻은 진리가 선험적인 추상원리가 아니라 구체적 역사 현실에서 나타나는 삶,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과 직결된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애초부터 학살사건, 피난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진리의 출현은 反진리의 세력에 의해 학살당하고 피난가야하며 배척 당하고, 배반당했던 것입니다. 진리는 채찍을 맞았습니다. 진리는 빌라도 법정에서 극형선고를 받고 골고다로 끌려갔습니다. 反진리의 세력에 의해 조롱당하고 고난 당하면서 마침내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습니다. 진리는 외쳤습니다.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연약한 듯한 인간의 절규를 내 쏟았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진리입니다. 이와 같은 십자가의 진리를 기적을 구하는 당시 유대인들이나, 지혜를 찾았던 당시 희랍인들은 도무지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전적으로 무죄인(無罪人)이셨던 예수께서 극악무도한 죄인(罪人)들이 당했던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는 이 모순, 이 역설(逆說), 이것이 바로 진리의 참모습입니다. 세상에서 사랑이 증오에 의해 추방당하고, 밝음이 어둠에 의해 몰려나고, 평화가 전쟁에 의해 파괴되고 정의가 불의에 의해 조롱당하는 역사 현실에서는 항상 진리는 고난과 죽음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리가 그렇다면 영원히 패배하는 것입니까? 부활사건은 처형당한 진리의 궁극적 승리를 의미합니다. 진리가 박해 당하는 현실 속에 항상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이 그곳에서 박해 당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진리로 고통 당하는 우리를 굳세게 잡아주기 위해서 입니다. 군사재판장에서 여러 피고인 중, 비겁하며 연약한 피고들도 있습니다만, 한 피고인이 용기 있게 증언할 때 그것이 그 다음 피고인들에게 엄청난 용기를 준다는 사실을 저는 체험했습니다. 진리가 고난과 죽임을 당하는 곳에 부활의 빛은 더욱 찬란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부활의 힘은 곧 사랑입니다.
셋째로, 생명 되신 주님을 생각해 봅시다.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하면 그것은 가짜 길입니다(나치, 공산주의, 군국주의). 진리가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할 때 그것은 사이비 진리입니다(백백교, 인민사원). 비록 길이 험하고 위태하더라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때 참 길이요 비록 진리가 군사재판에 선다 하더라도 영생으로 인도할 때 그것은 참 진리입니다. 올곧은 진리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비록 객관적으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길에 걸어간다 하더라도 그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평화가 큰 강물처럼 흐르게 됨을 체험하면서 감사하게 됩니다. 옥중에서 육체의 죽음을 기다리면서 사도 바울이 지녔던 그의 생사관(生死觀; 빌립보 1:21-24)은 바로 이와 같은 주님의 평안을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순간순간 영원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비결이 바로 길, 진리, 생명 되신 예수를 몸으로 느끼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제 1993년도 다 저물었습니다. 이런 때 우리의 유한한 삶을 새삼 깨달으면서 스스로에게 도마가 던졌던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과연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영생에 이르는 진리의 길인가? 과연 내 길이 예수의 길인가? 아니, 예수인가? 정말 나의 유한한 이 삶이 영원에 잇대어 있는가? 만일 여러분들 중에 예수의 길에 들어서서 외로움을 느낀다면 바로 여러분 곁에 주님이 동행자로 계심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또한 그 길에서 곤욕을 치른다면,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과 골고다의 주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견딜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그 찬란한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며 그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시간의 짧음을 가장 예민하게 느끼게되는 이 연말(年末)에 시간의 수인(囚人)인 우리가 시간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주님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잊지 맙시다. 이런 때 길, 진리, 생명 되시는 주님을 뜨겁게 온몸으로 체험하는 은총의 시간을 가집시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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