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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 어린양으로 입성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소재열 목사............... 조회 수 2776 추천 수 0 2007.12.27 23: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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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2:12-19 
설교자 : 소재열 목사 
참고 : 의정부평안교회 http://www.uppch.org 
시골에서 아들을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냈습니다. 어려운 시골 살림에 아들을 대학에 보낸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농사를 지어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노동일을 하고 남의 일을 도와주면서 번 하루하루의 품삯을 모아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이 다니는 대학교로 찾아왔습니다. 아들은 여러 친구들과 함께 아버지를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말 그대로 남루한 옷을 입고 등장한 전형적인 시골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친구가 물었습니다. “이분은 누구시냐.” 그 때 아들이 당황하면서 “시골에서 오신 동네 아저씨야”라고 답변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어리둥절했습니다. 이 참담한 광경에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한 아들의 무지와 허세는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무지와 허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가 이 땅에 사랑의 징표로 보낸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켜 주기에 예수님은 너무나 초라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초라한 분은 자신들을 책임져 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화려한 정복자도 아니었고 그런 모습으로 오지도 않았습니다.

1. 본문의 배경

요한복음 12:1절은 유월절 엿새 전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한 말씀은 그같은 사건이 있는 다음날 일어난 일입니다(12:12절). 그러니까 유월절 5일전에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들었다”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한 명절이란 유월절입니다. 그 유월절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유월절이라는 절기를 맞이하여 많은 사람들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유대인들의 구원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구원이라고 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명절에는 타지역에 흩어져 있던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절기에 동참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기 때 예루살렘을 향하여 성지순례 길에 오릅니다. 그들은 성지인 예루살렘을 순례해야 구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 우리는 성지순례라는 말을 사용하면 안됩니다. 그 용어는 구원관에 대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냥 현지답사 내지는 관광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월절 절기가 지난 후  49일째가 지난 50일째에 오순절의 절기까지 지키고 가려고 유월절에 예루살렘에는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유월절에 참석하고 약 50일 정도를 기다리면 두 번의 절기에 동참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구원은 더욱 확실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독 유월절 절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유월절 명절 때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처럼 절기에 동참해야 구원이 있기에 다른 유대인들처럼 절기에 동참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오신 목적 그 자체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2.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스가랴 9:9절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은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새끼”를 타고 오실 것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위해서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지금 유월절 어린양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위해서 오신 메시아, 즉 왕이라고 합니다. 메시아란 구약의 표현이고 그리스도란 신약의 표현입니다.
왕인 메시아는 구약성경에서 어떤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까? 유월절 어린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 그리고 “겸손”한 분으로 오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한 본문은 이같은 예언대로 오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린양 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이루시는 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 때문에 예수님은 유월절 절기에 맞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결국 예루살렘 입성은 십자가에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희생을 당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마지막 밤을 보내면서 유월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애굽의 장자를 다 죽일 때 이스라엘의 장자는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어린양의 피 때문에 우리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처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유월절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 많은 군중들이 유월절 절기를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다는 것은 아직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유월절을 지킴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아파트를 건축할 때 먼저 모델 하우스를 짓습니다. 모델 하우스를 통해 장차 건축할 아파트의 본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본 아파트가 다 건축하면 모델하우스는 헐어버립니다. 이제 모델 하우스는 본 아파트로 흡수 통합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약의 유월절은 모델하우스에 해당됩니다. 그 유월절이 보여주고자 하는 본 모습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면 이제 그 유월절을 지킨 것이 아닙니다. 그 유월절 절기의 의미는 이제 예수님 안으로 흡수 통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절기에 자신이야말로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위해서 오셨음을 알게 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3.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며 겸손한 왕으로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처럼 애굽에서 430년 동안 억압받는 자기 민족을 구출해 준 지도자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3절)라고 소리칩니다. 유대인들의 군중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힘으로 로마 정부를 전복시키는 능력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메시아이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왕이요, 메시아라고 한다면 모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으로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의 의도를 몰랐습니다. 제자들 조차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알게 되었다(16절)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을 정복하는 그런 힘을 가지고 오신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나귀는 고귀한 동물로 분류된 것은 사람들의 짐을 운반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복자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울 때 종마를 타고 도시에 입성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구약이 예언한 그 분이라는 점입니다. 또다른 의미는 예수님은 그런 힘의 정복자도 아니요,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그런 거창하고 화려한 왕으로 오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평화의 왕, 겸손한 왕으로 오셨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겸손한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해 시켜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들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비롯됩니다. 그 단절과 파괴는 우리들의 삶을 파괴합니다. 불안하게 합니다. 우울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예수님께서 좋은 관계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하나님과 우리들과의 관계가 장상적이지 못할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 관계가 좋다면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달라지게 됩니다. 좋은 신앙의 열매가 있게 됩니다.
나의 신앙생활의 열매들이 무슨 열매인가를 확인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열매, 나쁜열매가 맺어지고 있다면 그는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정상적인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회개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4. 예수님의 주변에는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군중들 속에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구경꾼들도 있었습니다. 따르기는 따르는데 예수님을 오해하고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거부하는 바리새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이들은 종교적인 특권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을 거느리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자신들의 기득권의 침해를 받을까 염려하는 세력들이었습니다(19절).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47-50절에서 고기를 잡는 그물 비유에서 그물 안에는 온갖 고기들이 있지만 육지로 가져가서 그 고기들을 분류하듯이 마지막 종말에도 그런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주변에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자들은 분류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면서 믿지 않고 있다거나, 오해한 자들은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모른다는 무식이 핑계될 수 있는 조건이 전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어떠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자들입니까?
우리들의 삶의 모습들과 신앙생활의 반응들을 보면 전혀 예수 믿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다는 것이 두렵습니다. 여전히 싸웁니다. 여전히 상대의 수치와 상처를 공개하고 폭로합니다. 시기합니다. 여전히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과연 예수 믿는 자들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들은 지금 알곡과 가리지가 함께 공존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알곡입니까 가라지입니까? 알곡의 반응들이 나의 모습 속에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말씀에로 초대

이상과 같은 말씀이 오늘 나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나와 상관없는 먼 이야기 정도로 생각한다면 나에게 그 어떠한 변화의 모습도 없을 것입니다. 나의 신앙생활의 열매들이 나의 믿음에 따른 반응인지 아닌지를 묵상하면서 문제의 원인을 진단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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