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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요9:1-13 |
|---|---|
| 설교자 : | 이재정 목사 |
| 참고 : | 새길교회 |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이전 주일을 제한 나머지 40일간을 말합니다. 본래 사순절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금식하며 시험받으신 40일에서 유래하고 있지만 교회의 전통에서 보면 이 기간 동안에 세례를 받을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과정이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사십일 간의 고행은 고난의 역사를 현장에서 경험하신 것이었으며 동시에 예수의 저항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에 우리의 신앙을 다시 바로잡고 부활절을 예비하여 거듭나는 믿음의 준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순절의 주제는 죄입니다. 히브리 예언자로부터 세례요한에 이르기까지, 어거스틴이나 단테에 이르기까지, 칼 바르트나 라인홀드 니버에 이르기까지 죄를 언제나 인간 조건의 중심에 두어 왔습니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 동안에 죄에 대한 이해와 강조는 바뀌어 왔습니다. 죄의 원인을 자신의 책임 또는 사회 구조의 문제점보다는 다른 명분으로 해명하여 온 것입니다. 가령 살인자의 경우도 그의 정신적 불안정 때문이라던가, 마약범의 경우도 그의 성장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등의 이유를 붙여 온 것입니다. 과거의 교회는 죄의 회개나 죄의 책임을 강조해 왔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하나님의 너그러움을 강조하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고, 모든 것을 용납하시며, 모든 사람을 축복해 주시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더욱 심각한 어둠의 세계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강대국은 원폭실험으로 환경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 국제적으로 위협을 주고 있으며, 인종차별이나 국가간의 전쟁은 끊이지 않고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풍요로움과 소비를 내세우는 오늘날 세계에는 지금 매 5초마다 두 사람이 기아에 못 이겨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를 계산해 보면 하루에 평균 34,000명, 일년에 일천이백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는 것입니다. 전세계의 인구 가운데 27%나 되는 약 15억이 넘는 사람들이 기아상태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 가운데에서도 61%가 아시아인입니다. 인도에는 기아선상을 헤매는 인구가 무려 4억3천만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인도는 우리의 투자 대상국이 되어 있고 그 곳에서 더 돈을 벌어들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무서운 관계가 이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유엔이 밝힌 최소 생존경비가 1년에 370달러라고 하니 하루에 일불 정도로 연명해야 하는 비극이 지구의 도처에 있음을 새삼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개발도상국이 지고 있는 막대한 외채가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이런 나라들의 외채의 합계는 무려 1조 9천억불에 달하고 있으며 이 짐은 이 나라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지구의 삼림 파괴는 이제 심각한 사막화의 현상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봄비가 내려 그나마 가뭄의 해갈에 도움을 주고는 있지만 이 비 속에 얼마나 강한 산성이 들어 있는지 잘 모릅니다. 우리는 또한 인구의 증가도 심각한 상황으로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이제 다시 우리의 죄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죄를 나타내는 희랍어가 하마르티아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화살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간 것을 말합니다. 목표를 벗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삶의 목표가 있는데 그것을 벗어날 때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한자가 표현하고 있는 죄는 그물 밑에 새 두마리가 서로 등을 지고 날아가려는 것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표적을 상실한 것만이 아니라 위기의 상황에서 서로 돕고 협력하지 못하고 등을 진 채 각자의 길을 고집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는 결코 테크니컬 파울 같은 것이 아닙니다. 베네딕트(Benedict)의 말처럼 죄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고, 이웃을 등지고 그리고 참된 삶을 포기한 것을 의미합니다. 목표도 한계도 무너진 상황입니다. 우리 말에 "차마 그것만은"이라는 절대적인 한계가 무너져 버리고 누구나 무엇이든 해버리는 비극의 결과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오늘 복음서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는 눈 먼 사람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신체적인 장애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날 때부터 보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주변이 완전히 어둠에 갇히면 우리는 아무리 좋은 눈을 가지고 있어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그 어두움은 그의 잘못도 그의 부모의 죄의 결과도 아닙니다. 그가 결코 그런 어둠 속에 버려진 삶을 살도록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를 이 세상에 보낸 것은 빛 속에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사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의 눈을 뜨게 한 것은 그에게 볼 수 있는 권리와 그 능력을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는 자신이 빛이며 자신이 있는 동안, 즉 예수와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빛 가운데 사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보지 못하는 죄는 그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빛을 빼앗아간 세력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13절의 결론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데려 갔다는 것입니다. 왜 바리사이파에게로 갑니까? 그것은 바리사이파가 바로 그 시대에 어둠을 몰아넣고 아무도 보지 못하게 만든 원흉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파는 그 시대를 어둠으로 몰아넣고 어둠의 세력이 된 것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하나님의 목표와는 전혀 다른 그 반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예수의 빛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목표를 다시 설정해야만 합니다. 시편 108장에 보면 시인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마음을 정했습니다. 하나님.
마음을 정했습니다.
노래하리이다.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리이다.
나의 마음아 눈을 떠라. 비파야 거문고야 눈을 떠라
눈을 뜨라는 이 외침은 그냥 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어둠을 뚫고 빛의 세계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눈을 뜨는 목표를 이렇게 결론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새벽을 흔들어 깨우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새벽을 깨우고 어둠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빛의 세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 세계를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자가 천명으로 불어나고, 가장 하잘것없는 자가 강대한 민족을 이루는" 세계가 그의 목표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백성이 올 수 있도록 그 걸림돌을 치워내야만 합니다. 예수가 눈먼 자의 눈을 덮고 있던 그 걸림돌을 치워 버렸듯이 우리는 지금 이 어둠의 역사를 만들어 놓고 있는 비극의 현상을 깨뜨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 아직도 어둠 속에서 희망도 생명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웃, 즉 눈먼 자가 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순절에 이 세상의 어둠과 함께 우리 자신의 책임을 돌이켜 보며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빛의 세상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낼 수 있는 길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에게 나면서부터 눈이 멀었던 사람을 데리고 갔던 그 사람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의 용기와 믿음과 지혜가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사순절의 주제는 죄입니다. 히브리 예언자로부터 세례요한에 이르기까지, 어거스틴이나 단테에 이르기까지, 칼 바르트나 라인홀드 니버에 이르기까지 죄를 언제나 인간 조건의 중심에 두어 왔습니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 동안에 죄에 대한 이해와 강조는 바뀌어 왔습니다. 죄의 원인을 자신의 책임 또는 사회 구조의 문제점보다는 다른 명분으로 해명하여 온 것입니다. 가령 살인자의 경우도 그의 정신적 불안정 때문이라던가, 마약범의 경우도 그의 성장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등의 이유를 붙여 온 것입니다. 과거의 교회는 죄의 회개나 죄의 책임을 강조해 왔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하나님의 너그러움을 강조하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고, 모든 것을 용납하시며, 모든 사람을 축복해 주시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더욱 심각한 어둠의 세계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강대국은 원폭실험으로 환경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 국제적으로 위협을 주고 있으며, 인종차별이나 국가간의 전쟁은 끊이지 않고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풍요로움과 소비를 내세우는 오늘날 세계에는 지금 매 5초마다 두 사람이 기아에 못 이겨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를 계산해 보면 하루에 평균 34,000명, 일년에 일천이백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는 것입니다. 전세계의 인구 가운데 27%나 되는 약 15억이 넘는 사람들이 기아상태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 가운데에서도 61%가 아시아인입니다. 인도에는 기아선상을 헤매는 인구가 무려 4억3천만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인도는 우리의 투자 대상국이 되어 있고 그 곳에서 더 돈을 벌어들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무서운 관계가 이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유엔이 밝힌 최소 생존경비가 1년에 370달러라고 하니 하루에 일불 정도로 연명해야 하는 비극이 지구의 도처에 있음을 새삼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개발도상국이 지고 있는 막대한 외채가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이런 나라들의 외채의 합계는 무려 1조 9천억불에 달하고 있으며 이 짐은 이 나라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지구의 삼림 파괴는 이제 심각한 사막화의 현상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봄비가 내려 그나마 가뭄의 해갈에 도움을 주고는 있지만 이 비 속에 얼마나 강한 산성이 들어 있는지 잘 모릅니다. 우리는 또한 인구의 증가도 심각한 상황으로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이제 다시 우리의 죄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죄를 나타내는 희랍어가 하마르티아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화살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간 것을 말합니다. 목표를 벗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삶의 목표가 있는데 그것을 벗어날 때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한자가 표현하고 있는 죄는 그물 밑에 새 두마리가 서로 등을 지고 날아가려는 것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표적을 상실한 것만이 아니라 위기의 상황에서 서로 돕고 협력하지 못하고 등을 진 채 각자의 길을 고집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는 결코 테크니컬 파울 같은 것이 아닙니다. 베네딕트(Benedict)의 말처럼 죄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고, 이웃을 등지고 그리고 참된 삶을 포기한 것을 의미합니다. 목표도 한계도 무너진 상황입니다. 우리 말에 "차마 그것만은"이라는 절대적인 한계가 무너져 버리고 누구나 무엇이든 해버리는 비극의 결과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오늘 복음서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는 눈 먼 사람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신체적인 장애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날 때부터 보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주변이 완전히 어둠에 갇히면 우리는 아무리 좋은 눈을 가지고 있어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그 어두움은 그의 잘못도 그의 부모의 죄의 결과도 아닙니다. 그가 결코 그런 어둠 속에 버려진 삶을 살도록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를 이 세상에 보낸 것은 빛 속에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사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의 눈을 뜨게 한 것은 그에게 볼 수 있는 권리와 그 능력을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는 자신이 빛이며 자신이 있는 동안, 즉 예수와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빛 가운데 사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보지 못하는 죄는 그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빛을 빼앗아간 세력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13절의 결론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데려 갔다는 것입니다. 왜 바리사이파에게로 갑니까? 그것은 바리사이파가 바로 그 시대에 어둠을 몰아넣고 아무도 보지 못하게 만든 원흉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파는 그 시대를 어둠으로 몰아넣고 어둠의 세력이 된 것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하나님의 목표와는 전혀 다른 그 반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예수의 빛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목표를 다시 설정해야만 합니다. 시편 108장에 보면 시인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마음을 정했습니다. 하나님.
마음을 정했습니다.
노래하리이다.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리이다.
나의 마음아 눈을 떠라. 비파야 거문고야 눈을 떠라
눈을 뜨라는 이 외침은 그냥 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어둠을 뚫고 빛의 세계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눈을 뜨는 목표를 이렇게 결론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새벽을 흔들어 깨우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새벽을 깨우고 어둠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빛의 세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 세계를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자가 천명으로 불어나고, 가장 하잘것없는 자가 강대한 민족을 이루는" 세계가 그의 목표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백성이 올 수 있도록 그 걸림돌을 치워내야만 합니다. 예수가 눈먼 자의 눈을 덮고 있던 그 걸림돌을 치워 버렸듯이 우리는 지금 이 어둠의 역사를 만들어 놓고 있는 비극의 현상을 깨뜨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 아직도 어둠 속에서 희망도 생명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웃, 즉 눈먼 자가 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순절에 이 세상의 어둠과 함께 우리 자신의 책임을 돌이켜 보며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빛의 세상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낼 수 있는 길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에게 나면서부터 눈이 멀었던 사람을 데리고 갔던 그 사람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의 용기와 믿음과 지혜가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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