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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빛

요한복음 길희성............... 조회 수 1965 추천 수 0 2008.01.13 16:3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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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1:17-27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 부활'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흰옷 입은 천사, 빈 무덤, 믿기 어려운 기적입니까? 의심 많은 도마, 실의에 차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 혹은 예수의 임종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그의 무덤을 찾아가서 부활의 첫 증인이 된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입니까?
부활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성탄과 더불어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의미를 결정해 주는 결정적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은 둘 다 '빛', 생명의 빛으로 상징됩니다. 성탄은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주님의 탄생이기에 빛의 사건입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기 못하였다"(요 1:5). 부활도 컴컴한 무덤 속 죽음의 어둠을 깨고 환한 생명의 빛을 본 사건입니다. 성탄과 부활은 어둠 속에 빛으로 찾아오셔서 어둠을 밝히는 빛의 역사를 행하시다가 어둠의 세력에 희생당하신 예수께서 생명의 빛으로 다시 살아나신 사건입니다. 그럼으로써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 영원히 살아 계신 주님께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인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빛 아래서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 빛의 자녀로 살려 하고 있으며, 이 부활의 생명력으로써 죽음의 역사 속에서 생명의 역사를 창출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라고 부활하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부활은 첫째로 예수 자신에게 비추인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의 빛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지극히 모시면서, 그의 뜻을 행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하시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효자 예수의 억울함을 아버지께서 친히 풀어주신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2:23-24절에 보면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를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습니다. 그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빛은 예수께서 사신 의로운 삶, 그의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약속의 말씀, 그의 가르침, 그의 행적, 그의 죽음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입증해 준 것입니다.
부활은 둘째로 예수의 제자들에게 비추인 빛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자기 민족을 해방시키고 구원해줄 메시아인줄 알고 따라다녔으나, 스승의 참담한 죽음을 목격하고 실망과 좌절, 허탈감과 배신감 속에서 예수를 떠나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 흩어졌던 제자들을 다시 모이게끔 한 것은 이 부활의 빛이 그들에게 비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로 이 실패한 예수,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고 자신 있게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제자 중의 제자, 그러면서도 여러 모로 우리와 같이 연약하고 비겁했기에 자기가 따라다니던 스승을 세번씩이나 모른다고 잡아뗄 수밖에 없었던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로마에서 자기 스승의 길을 좇아 십자가의 처형을 감수하게 만든 것도 그에게 비추인 부활의 빛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메시아라는 황당무계한 말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유대교 전통의 반역자들이라 하여 그들을 핍박하고 다니는 데 앞장섰던 바울로 하여금 이방인을 위한 제일의 선교사, 세계 기독교의 창시자와 같은 존재로 변화시킨 것 역시 다마스커스로 향하는 길 위에서 그에게 강력하게 비춘 부활의 빛이었습니다. 이 빛에 의해 고꾸라져 눈이 멀었다가 다시 시력을 회복한 사울은 바울로 거듭나서 십자가에 달린 자가 메시아라는 역설의 극치를 복음의 핵심으로 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증거하기를, "유대 사람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합니다. 이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고전 1:22-25)라고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증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부활은 또한 초대교회에 비추인 빛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엄청난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승리하는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부활의 빛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고난과 역경의 삶을 이기고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패배 속에서도 승리를 노래할 수 있었던 것도 부활의 빛 때문입니다. 낮은 데로 임하는 십자가와 자기비하의 삶 속에서도 초대교회에 차고 넘치는 기쁨과 감사, 은혜와 감격이 있었던 것은 부활의 빛이 그들을 감싸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을 의심하는 것은 곧 교회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나 매한가지입니다. 교회의 존재 자체가 부활의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실패한 예수,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구세주로 선포하는 이 놀라운 반전은 부활에 대한 확신 없이는 생각할 수 없으며, 도망갔던 제자들이 다시 모여 예수를 전하는 교회공동체를 이루게 된 사실도 부활 없이는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교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고전 15:14)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미쳤다고 이 엄청난 고난을 당하면서 십자가에 '저주받은' 예수를 전하러 다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어려운 삶의 여건 속에서도 이렇게 승리에 찬,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산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과 오늘날 우리들의 삶은 무척이나 대조적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안락한 삶과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우리는 우울하게, 무겁게, 근심과 염려, 두려움 속에서 어둡게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바로 부활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들의 삶을 이토록 우울하게 짓누르고 있는 것입니까? 물론 세상의 온갖 염려와 근심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잘 안되는 사업 걱정, 실직의 두려움,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 뜻대로 되지 않는 인간관계들, 병고와의 싸움, 감당하기 너무 무거운 사회적 책임들, 짜증나는 교통지옥도 한 몫 단단히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언제나 속상하게 만드는 한심한 사회, 정치적 병리현상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어두운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는 보이지 않는 힘은 죽음입니다. 아직은 오지 않았고 언제 올지는 모르나 반드시 찾아와서 우리의 삶을 망쳐놓을 죽음의 그림자 말입니다. 이 죽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기에 더욱 음흉하고 두려우며, 언제 찾아올지 모르기에 아무 때나 올 수 있어서 더욱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아직 안 왔는데도 언제나 와 있는 묘한 존재입니다. 마치 언제 덥석 우리의 목덜미를 잡을는지 모르는 원수처럼 우리 곁을 배회하며, 언제 불쑥 나타날지 모를 대면하기조차 싫은 방문객처럼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죽음입니다. 이 죽음의 그림자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우리의 삶 전체를 어둡게 색칠하는 물감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안고 살기에, 죽음의 권세를 물리쳤다는 확신에 산 초대교회 신자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4-56)라고 승리의 노래를 구가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생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헛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랑도, 불멸의 예술도, 위대한 사상도, 찬란한 문명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전후로 두개의 영원한 어둠 사이에 끼어진 한 순간의 에피소드, 한 순간의 의식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면, 실로 무엇이 정말로 우리에게 값어치 있는 일이 되겠습니까? 초로와 같은 것, 아침 안개처럼 바람에 걷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 인생이라면 무엇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겠습니까?.
허무한 것은 우리 인간들만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무상하고 덧없는 것들입니다. 꽃은 무엇 때문에 하염없이 피고 지며, 달은 무엇 때문에 찼다가 기울어지기를 반복합니까? 쉬지 않고 흐르는 물, 끝없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뜬구름조각들, 이 모두가 존재의 슬픔을 말해주기에 옛 시인들과 철인들은 그것들에서 덧없는 인생 자체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도, 모든 피조물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허무에 굴복해 있으며,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기를 갈구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로마 8:20-22).
사실 인간이 하는 모든 '위대한' 사업이란 그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죽음과의 치열한 싸움입니다. 아마도 고대 이집트 문화가 이 면에서는 가장 대표적일 것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건설해 놓은 엄청난 건축물들­피라미드로 상징되는 거대한 무덤의 문화, 상상을 초월하는 웅장한 신전들은 마치 죽음의 힘을 거부하는 듯 우뚝 서 있지만, 4,5천년이 지나 그것들을 찾는 오늘의 관광객들로 하여금 오히려 거기서 인생 무상을 더 뼈저리게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노력들은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죽음에 거슬려서 의미를 세워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인간의 가련한 몸짓일 뿐입니다. 모든 가치를 삼켜 버리는 죽음의 힘 앞에서 무언가 가치를 확인하려는 몸부림인 것입니다. 이른바 '불멸'의 업적이라는 것들을 우리 인간이 그렇게도 치열하게 추구하는 것은 죽음을 거부하고 허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본능적인 몸부림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태어납니다. 죽을 존재로 태어나며 죽을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태어나는 존재들입니다. 갓난아이는 태어날 때 엄청난 죽음의 모험을 감행하면서 태어나기에 아마도 우리는 일생 이 죽음의 악몽을 벗어나기 어려운 존재일는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는 한 때 모태 속의 지극히 편안하고 안정된 삶으로부터 벌거벗은 채 이 세상으로 내동댕이쳐진 것입니다. 실로 엄청난 충격이며 그 불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황량한 곳이 어디란 말이며, 여기가 정말 내가 살만한 곳인가? 갓난아이가 생각은 못하겠지만 분명 이렇게 느낄 것입니다. 이 때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이 와 닿고 젖이 물려집니다. 죽음의 공포를 안고 태어난 어린 생명을 향해 "괜챃다. 걱정 말아라"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전달됩니다. 너는 살만한 곳에 태어났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이 설득작업은 주위의 가족과 친족들을 통해, 그리고 사회와 문화라는 것을 통해 지속되고 확대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는 마치 우리로 하여금 갓난아기 때 겪었던 죽음의 충격을 잊게 하려는 장치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잊혀지지도 않을 뿐더러 잊게 하려는 온갖 장치가 아주 무력한 것임이 드러나는 때가 반드시 온다는 데에 있습니다. 인생은 정말로 오케이가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허위의식일 뿐이라고 실존주의자들은 우리를 고발합니다. 인간이 건설해 놓은 사회와 문화는 바로 이 '괜찮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은 이 모든 사회와 문화적 장치들이 부질없음을 말해줍니다. 인생은 끝내 허물어지는 것이며 무의미한 것임을 뼈아프게 상기시켜 줍니다. 인류가 죽음에 대항하여 엄청난 노력을 들여 구축해 놓은 삶의 질서는 정작 죽음 앞에 선 자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하며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곱하기 제로의 힘입니다. 아무리 큰 숫자라도 곱하기 제로 하면 제로가 됩니다. 죽음 앞에서는 크고 작은 것, 잘나고 못나고가 아무 의미가 없이 평등합니다. 죽음은 곱하기 제로와 같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힘입니다. 모든 것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며, 모든 것을 어둡게 색칠하는 어둠의 힘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죽음은 아예 생각도 하지 말자고 합니다. 살아 있을 때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걱정할 것 없으며, 죽으면 아무것도 모를 터이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궤변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순간순간 즐거운 일만 생각하고 즐거움을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씁니다.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전 15: 32)라는 향락주의가 유일한 대안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죽음이란 생각 안한다고 찾아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죽음을 생각하면서 인생의 지혜를 배웁니다. 반대로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인생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것인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에게 임박한 죽음도 의식하지 못한 채 한없는 노욕을 부리는 철부지 정치인과 기업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쓴웃음을 짓기도 합니다. 인생에는 나아갈 때가 있는가 하면 물러날 때도 있는 법이며, 펼칠 때가 있으면 접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인데, 시간의 흐름을 거슬려 끝없이 자기 욕심을 성취하려는 추한 인간상을 우리는 요즈음 너무 많이 목격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 죽음에 대한 명상(meditatio morti)은 예로부터 인간 지혜의 원천입니다. 인간이 인간임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일이며,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는 일이야말로 모든 지혜의 근본입니다. 자기가 죽을 존재(mortal)임을 모르고 신과 같이 불멸하는 존재(immortal)라고 착각하고 인간으로서의 겸손을 모르는 것이야말로 예로부터 교만(hybris)이라 해서 죄의 근본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모든 것이 허무에 종속된 것이 우주와 인생의 본래적 모습은 아니라고 기독교 신앙은 증언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허무에 종속된 데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기독교는 인간의 죄악을 말합니다. 허무는 존재의 본래적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아름답고 선한 것입니다. 죄로 인해 뒤틀리기 시작하여 비로소 허무에 종노릇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고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것이 성서의 증언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신앙은 죽음보다도 죄를 더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경험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생의 종말이 불행이요 비극이지만, 죄 많은 인생을 산 사람의 종말은 더 괴롭고 비참합니다. 인생을 값없는 일에 허비하고 가는 사람의 종말은 더 쓸쓸하고 허전한 법입니다. 인생을 선하고 떳떳하게 산 사람, 값어치 있고 창조적으로 산 사람은 죽음을 그다지 두려워하지도 않고 애석해하지도 않는 법입니다. 사실, 참으로 선하고 인간답게 살다가 간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오히려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통로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런 이기적 욕망도 없이 순수한 삶은 산 사람에게 죽음의 두려움이 있을리 만무합니다. 공자님도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가하다"고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장자도, 부처님도, 예수님도 죽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기적 욕심이 없는 사람, 세속적 집착이 없는 사람, 정도를 걸으면서 후회 없이 인생을 산 사람들은 마치 익은 열매가 나무에서 저절로 떨어지듯 조용히 숨을 거두고 우주의 생명과 하나가 될 뿐입니다. 빛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창조하고 산 사람들에게 죽음의 공포는 없는 법입니다. 공자님은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한탄한 적은 있지만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도덕적 세계를 믿었고 끝내 옳은 것이 승리하리라는 것을 깊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죽음을 앞에 두고 고뇌하셨으나, 그것은 결코 예수께서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못다한 하나님 나라 운동, 회개를 모르는 완악하고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을 남기고 불의한 세력에 의해 너무나 일찍 가야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고뇌 가운데서도 결국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진정으로 죽음을 이기는 길은 사리사욕을 버리고 인생을 올바르게, 인간답게, 보람있게, 당당하고 떳떳하게 사는 길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길, 영생의 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는 데에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악과 사망의 힘을 이기신 새로운 인간, 두번째 아담 예수에게 우리의 생명의 물줄기를 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의 부활의 빛으로 인해 빛의 자녀로서 살기 위해서입니다.
첫번째 아담은 범죄하여 우리 모두에게 죽음을 안겨 주었지만, 두 번째 아담, 새 사람 예수는 우리에게 생명을 안겨준 존재입니다. 그는 어둠과 죽음의 역사 속에서 빛과 생명의 역사를 창출하신 새로운 존재이며, 만물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15: 20-23, 45-49).
한 사람 예수의 부활이 어째서 모든 이에게 희망이 됩니까? 도대체 2,000년 전 그의 부활과 현재의 나의 삶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예수의 부활은 그가 전한 하나님 나라, 즉 종말이 도래한다는 확실한 징표였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은 만인의 부활의 확실한 징표입니다. 예수는 우리 모두의 부활을 선취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영원하신 하나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의 본래적 모습을 순수하게 실현하신 분입니다. 실패한 아담이 아니라 아담 속에서 실현되지 못했던 참 인간, 참 생명을 먼저 실현하심으로써 우리 모두의 희망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가리켜 죽은 자 가운데서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도 그의 뒤를 따라 만물이 소생하는 부활의 봄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이 종말의 확실한 징표를 붙들고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처럼 이미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기쁨의 원천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때, 시온의 영광이 밝아오는 날, 나팔 소리 힘차게 울리 때, 우리의 썩을 몸은 썩지 않을 몸으로, 육적인 몸은 영적인 몸으로 변화하여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나타날 것이며, 온전한 인간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 있어서 부활은 단지 먼 훗날 일어날 미래적 사건만이 아니라 현재적 사건이며, 영생은 지금 여기서 경험되는 진리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에 생명의 물줄기를 대고 그 안에 있으면 누구나 새로운 피조물로서 이미 영생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읽은 부활하신 예수의 말씀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가 지극히 사랑한 사람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그의 여동생 마르다를 위로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라버니가 살아날 것이다." 마르다는 이 말을 세상의 종말이 올 때 일어날 만인의 일반적 부활로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생은 사후를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 여기서 나를 믿고 나에게 생명의 물줄기를 대고 나와 함께 사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친히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생명의 역사를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부활이 먼 훗날의 얘기가 아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바로 우리 신자들의 삶 그 자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세례를 통해 과거의 잘못된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기적으로 자신만을 위해 살던 닫혀진 삶이 이웃과 하나님을 향해 열린 새로운 삶으로 변화하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야말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누리는 부활의 체험이라는 것입니다(로마 6:1-4).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여기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하는 존재들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나름대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그의 부활에 동참하는 크고 작은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신문기사에 연세대 재활의학과 교수들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한 마지막 밤에 그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을 기념하여 이 의사분들이 예배 속에서 직접 환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순서를 재현한 것입니다. 하늘같은 의사 선생님이 엎드려 발을 씻어주자 할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젊은 의사들은 앞으로 좀더 낮은 데로 임하는 의사가 되자고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먼 옛날의 얘기도 아니고 먼 훗날의 얘기도 아닙니다. 낮은 데로 임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곳 어디서나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반복되며, 자기만을 알고 살던 이기적이고 닫혀졌던 사람이 이웃의 아픔에 마음이 열려 남을 섬기는 존재로 변화될 때 예수의 부활은 무수히 반복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변화를 뜻하며,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남을 뜻합니다. 부활은 인간다운 인간의 탄생 그 자체이며, 변화를 통해 끊임없이 완성을 추구하는 인간성의 완성 그 자체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완성된 인간 그 자체입니다. 그는 이제 첫번째 새 아담으로서 지금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영으로 살아 계시면서 우리들을 자신의 빛나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께서 하시는 일입니다"(고후 3: 18).
물론 우리가 현재 체험하는 부활의 생명은 세상 끝날 만물이 새로워질 때 경험할 것에 비하면 약하고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종말의 역사는 이미 시작되었고,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는 이미 새로운 생명이 싹트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를 두려움 없이 희망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어둠 속에 사는 존재가 아니라 부활의 빛 아래 사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죽어야 할 가련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만물도 새롭게 보입니다. 더 이상 죽어 없어질 허무하고 슬픈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한탄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온 세상을 덮었던 캄캄한 어둠은 부활의 밝은 빛 아래 사라졌고, 이제 모든 것이 밝아졌습니다. 우리는 이제 철없는 어린아이들처럼 즐거워해도 누가 뭐라고 우리를 탓할 수 없으며, 그야말로 장미빛 인생과 세상을 노래해도 누가 우리를 철부지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주의 동산에서 마음껏 기쁘게 뛰노는 어린아이들인 것입니다. 찬란한 부활의 빛이 이미 우리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며, 이미 우리는 사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빛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머지 않아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썩어질 몸을 벗어버리고 썩지 않을 몸을 입을 것이며, 육적인 몸을 벗어버리고 영적인 몸을 입을 것이며, "하늘에 속한 그 분, 곧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5:47-49). 부활의 빛 아래 우리의 모든 냉소주의, 회의주의, 의심의 안개는 걷히고 세계와 인생은 죽음과 허무의 그림자를 떨쳐버리고 예수와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권면의 말씀으로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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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9 요한복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요3:1-21  조용기 목사  2008-09-23 2170
388 요한복음 한국교회의 회복을 위한 대안-(1)기독교사상의... 요6:38-40  강종수 목사  2008-09-21 1397
387 요한복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요9:1-3  한인섭 형제  2008-09-20 1540
386 요한복음 하나님의 나라와 영의 나라 요3:1-8  정용섭 목사  2008-09-18 1675
385 요한복음 비뚤게 보기와 바로 보기 요9:24-34  정용섭 목사  2008-09-18 1914
384 요한복음 하나님의 DNA 요1:12-13  서중석 목사  2008-09-15 1679
383 요한복음 환경'을 '보호'한다구요? 요6:11-13  류상태 목사  2008-09-15 1313
382 요한복음 그 새벽 첫 소식 요20:1-10  김기동 자매  2008-09-08 1330
381 요한복음 다 이루었다'는 말씀-생의 마지막 평가 요19:28-30  최만자 자매  2008-09-08 1715
380 요한복음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요15:1-8  조용기 목사  2008-09-06 2133
379 요한복음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셔라 요7:37∼38  조용기 목사  2008-09-06 2655
378 요한복음 요14:5-7  추응식 형제  2008-08-26 1390
377 요한복음 뜻대로 하소서(順命) 요15:13  김용덕 형제  2008-08-26 1444
376 요한복음 삶으로 드리는 예배 요4:19-24  류상태 형제  2008-08-26 2039
375 요한복음 생수의 근원지를 바꾸어놓은 여인 요4:1-42  최영실 교수  2008-06-02 2214
374 요한복음 생명의 씨알 요12:20-24  서창원 목사  2008-06-02 2051
373 요한복음 심는 자의 기쁨 요4:27-38  황성규 목사  2008-05-30 2098
372 요한복음 우연한 만남 요2:43-51  이정배 목사  2008-05-30 1724
371 요한복음 예수와 우리 사이 요15:12-15  권진관 형제  2008-05-29 1658
370 요한복음 예수님과 도적 요10:10  조용기 목사  2008-05-28 1901
369 요한복음 나는 누구입니까? (정체성의 위기) 요14:1-6  조용기 목사  2008-05-19 2307
368 요한복음 수난의 길 요12:20-26  서창원 목사  2008-05-19 1641
367 요한복음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요13:3-15  강남순 교수  2008-05-19 2393
366 요한복음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 요4:23  김남준 목사  2008-05-16 2169
365 요한복음 고난과 성령 요14:15-17  권진관 형제  2008-05-13 1524
364 요한복음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 요4:5-18  조용기 목사  2008-04-25 2403
363 요한복음 바이블 코드 요5:39  민영진 목사  2008-04-25 2240
362 요한복음 현실주의를 뛰어넘어 믿음의 결단으로 요11:28-44  권진관 형제  2008-04-25 1847
361 요한복음 예배 드리는 태도는 삶의 태도입니다 요4:23  김남준 목사  2008-04-11 2929
360 요한복음 다시 찾는 십자가 요19:34-35  김남준 목사  2008-04-02 775
359 요한복음 진리의 보고(寶庫)이신 그리스도 요14:6  김남준 목사  2008-03-10 1844
358 요한복음 신학의 생수: 예루살렘도 그리심산도 아닌 곳. 요4:11-21  최만자 자매  2008-02-26 2002
357 요한복음 신앙은 기도와 비례한다 요14:13-14  강종수 목사  2008-01-20 2249
356 요한복음 우리의 자유가 움직일 때 요20:19-31  서공석 목사  2008-01-13 1767
» 요한복음 부활의 빛 요11:17-27  길희성 형제  2008-01-13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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