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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요20:1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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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서공석 목사 |
| 참고 : | 새길교회 |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장면과 도마 사도의 신앙고백을 전합니다. 도마 사도가 예수에게 말하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은 초대교회 공동체가 예수를 하나님과 같은 분으로 믿던 신앙 언어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보지 않고 믿는 이는 복되다"는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는 보고 확인하는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복음이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개신교와 카톨릭이 분리된 16세기부터 개신교에서는 믿음이라는 말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많이 강조한 반면에 카톨릭은 교리 언어의 지적 수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한쪽이 느낌이라는 주관적인 해석을 강조하였고 다른 쪽에서는 지적승복이라는 객관적인 면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요한복음이 말하는 믿음은 과연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는, 믿음은 "진리를 행하는 것", 그리고 "자기의 행실이 하나님 안에 이루어진 일임을 들어내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실천이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또한 마태복음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는 더욱 명백하게 긍정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더러 '주님, 주님'하는 사람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입니다"(7:21). 그렇다면 신앙은 하나의 실천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있어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있어야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신앙은 어떤 실천을 의미한다는 것이라고 요한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구약성서는 모세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부분이었습니다. 그 기도는 제가 아주 좋아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백성이면 함께 가셔야 되지 않겠느냐는 간곡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신다는 약속을 하시자, 모세는 하나님께 청합니다. "당신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야훼이신 하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내 모든 선한 모습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며, 야훼라는 이름을 너에게 선포하리라. 나는 돌보고 싶은 자는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고 싶은 자는 가엾이 여긴다." 여기서도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볼 수 있는, 확인할 수 있는 대상으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변하여 하나님의 선한 모습, 곧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모습이 되는 곳에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천 안에 보이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함께 계심은 우리의 실천을 낳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계심을 믿는 사람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달라진 실천을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구약성서의 마지막 구절은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모습만은 볼 수 있으리라"고 전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지나가시면 사람들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모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뒷모습을 본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을 파견하는 장면에서 오늘의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들은 용서받을 것이요,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성령은 죄의 용서라는 말씀입니다. 죄를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을, 예수의 제자들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줄 수도 있고 용서해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으로 우리가 이해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한번 말하고 부정적으로 다시 한번 말하는 것은 유태인들의 화법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 받을 것입니다"(16:16)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높은 사람들과 강한 사람들로부터 부정적 체험을 많이 하였기에 이런 부분에서 부정적인 부분이 우리를 위한 메시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화법에서 우리는 긍정적인 부분만 들어야 복음서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었다는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베드로를 문을 잠그는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가 "너희들은 너희들도 들어가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서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버렸다"고 비난하십니다. 율사들과 바리사이파들이 닫은 하늘나라의 문을 여는 것이 베드로의 열쇠인데, 우리는 왜 그런지 베드로의 열쇠라는 말이 나오면 '아이쿠 저건 닫는 열쇠구나'라고 생각을 합니다. 따라서 죄의 용서에 대한 오늘의 복음에서도 우리가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는 것이고 그것은 곧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한 실천을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 용서를 받게끔 예수의 제자들은 노력하는 사람들이라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셨다"는 것은 구약성서 창세기(2:7)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숨을 불어 넣으셨다"는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을 새롭게 만드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숨결을 불어넣으시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으며, 나중에 나무 열매를 먹고 난 다음에는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먼지니까 먼지로 돌아가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니 사람의 정체성은 흙이고 먼지밖에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것, 또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숨결'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의미합니다. 결국 부활하신 예수는 성령을 주셔서 사람들을 새롭게 만드셨고, 그 새로움은 죄의 용서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죄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은 예수의 사명을 요약하여 죄의 용서라고 말합니다. 예수가 인간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받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를 증거 하여 하는 말이 "보라, 세상의 죄를 치워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 세상의 죄를 치워 없애시는 분이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해야 하는 일도 결국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모두 죄에 물들었다고, 우리도 "예수 구원, 불신 지옥"하며 외치고 다녀야 하겠습니까? 제가 며칠 전 서울역 지하철 입구 보도를 지나는데 굉장히 소란스러웠습니다. 보니까 등산복 조끼에다가 '예수 구원 불신 지옥'이라 써 붙인 2-30명이 들어와서 북적거리며 떠드는데 붉은 색 조끼가 아주 섬짓하더군요. 요즈음 그렇지 않아도 전자파니 하면서 복잡한 전철 안에서 고생들을 많이 하는데 거기서 또 사람들한테 이렇게 불안을 조성하고 그렇게 불편을 주어도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어떤 방식으로 죄의 용서를 실천하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의 이름으로 돌로 치려던 여인을 살려 놓으신 다음 유대인들과 예수가 하시는 대화(요한 8:12절 이하)에서, 예수는 당신은 아버지의 일을 실천하고, 그 여인을 율법의 이름으로 돌로 치려던 사람들은 마귀의 일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귀가 너희들의 아비이기 때문에 그 아비의 일을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사람을 죽입니다. 이 장면의 유대인들은 율법이 소중한 나머지 결국 사람을 죽이려 합니다. 재물, 권력, 명예 등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또한 사회가 존속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지만, 예나 오늘이나 사람이 사람을 소외시키고 또한 죽이는 좋은 계기가 되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사람은 사람 외의 것이 소중하게 보이면 즉시 사람을 소외시키고 죽입니다. 그래서 옛날 격언에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그런 것들 앞에 '나누고, 봉사하고, 살리고, 용서하는 것'이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포하는 일이라고 가르치신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이 소중해서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으로 항상 다른 사람을 소외시키나, 예수는 이런 것을 나누고 봉사하고 용서하는 수단으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없애시는 예수의 모습을 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죄라는 말로써 사회가 말하는 범죄를 생각합니다. 아니면 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우리 삶의 공간을 만듭니다. 나는 범죄하지 않았고 성서가 말하는 계명도 범하지 않았으니 정상적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서가 죄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각과 행동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신앙인이 됩니다.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누가 17:11-19)에서 치유를 받은 열 사람 중 한 사람이 돌아 왔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 .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렸다"는 말은 신앙행위를 했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는 예수의 말씀은 받은 것에 대한 감사는 신앙의 시작임을 말해 줍니다.
우리의 생명을 우리가 받았다고 생각하면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없는 생명입니다. 마태복음이 전하는 탈란트의 비유(25:14-30)에 보면 다섯 탈란트와 두 탈란트를 받은 사람들은 그 받은 것을 버려서, 곧 활용하여 더 벌었지만 한 탈란트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받은 것을 손에 쥐고 자기의 미래를 생각하고 땅에 묻었습니다. 그래서 얻은 한 탈란트마져 잃게 되는 것입니다. 무상으로 주어진 생명이면 무상으로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로 생각되면,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다른 형제들을 외면하지 못합니다. 자기 주변 형제를 외면하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이 신약성서가 말하는 죄입니다.
오늘 복음이 성령을 받으면 죄의 용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령은 우리를 이기심에서 벗어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같은 요한복음이 전하는 성령에 대한 말씀을 들어봅시다. "진리의 영, 그분이 오시면 여러분을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16:13). "진리는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8:32). 성령이 주어지면 우리가 자유로워진다는 말씀입니다. 받은 생명이기에 이기심에 구애받지 않고 베풂의 기회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이해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린이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자기밖에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자라서 어른이 되어서도 자기밖에 생각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미숙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모두 미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데에 아무런 저항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모든 사람을 위한 헌신이 우리에게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런 미숙을 넘어서 베풀고 용서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고 삶이었습니다. 사실 형제를 외면하고 아버지 앞에 좋은 자녀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조명하기 위해 예수가 말씀하신 비유(마태 18:23-35)가 있습니다. 주인에게 일만 탈란트를 빚진 종이 주인으로부터 채무 면제라는 베풂의 혜택을 받고, 나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의 채무를 가진 사람에게 그 주인과 같이 채무를 면제해 주는 베풂의 자유를 행사하지 않고 채무 변제를 무자비하게 요구합니다. 이것이 복음이 말하는 죄입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던들 그들에게 죄가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15:22). 예수는 형제자매들에게 베풀고 나누라고 가르치신 분입니다. 이 실천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행동하게 하십니다. 하나님 자녀의 행실이 진리이고 이 진리가 있는 곳에 우리의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시야를 넘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넓은 시야를 가지게 해 주시는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의 숨결인 성령은 그것을 위해 우리의 자유가 움직이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기가 잘되기 위한 수작을 하는 길이 아닙니다. 또 성서 안에는 사람이 희생해서 하나님이 잘 된다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나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내 생명의 봉사를 필요로 하는 곳에 내 자신을 쏟으라는 것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안에 일관되게 흐르는 말씀입니다. 고통을 비껴간 삶이 성공한 삶이 아닙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에 우리 삶의 의미가 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말하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 자신을 섬기고 편안함을 찾으면 비록 성공한다 하더라도 대단히 한시적인 것입니다. 국군묘지에 가서 젊은 나이에 숨져간 수많은 젊은이들의 무덤을 봅시다. 우리 주변에 고통스럽게 살다가 많은 한을 품고 숨져간 이들을 생각해 봅시다. 불과 몇 주 전에 어느 신문 보도에서 본 것입니다. 42세의 남편과 30세의 부인이 결혼식을 했는데 그 남편은 몇 달 전에 폐암 말기 환자로 진단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남편은 구두미화원이었고 부인은 어느 식당의 종업원이었다가 만나서 십년을 함께 산 후였습니다. 결혼식을 하고 남자는 즉시 병원에 실려가서 그 이튿날 운명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이런 여건에서 결혼식을 한 이유는,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함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 세상에서 함께 살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삶의 이런 수수께끼들, 이런 미결의 이야기들에 대한 대답이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도 미결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이 하신 완결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선하시고 베푸시는 분이고 자비로운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함께 계심을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그 함께 계심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유가 움직일 때, 우리 안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 실현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우리들의 모습 안에 나타납니다. 그것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선포하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자유가 움직일 때 우리는 우리의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죄스런 상태에서 벗어나서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성령이 주어졌다는 것은, 사람은 한 인간 개체, 자기만을 생각하고 사는 한 인간 개체보다 더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가 움직일 때 우리가 체험하는 사실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그러면 요한복음이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개신교와 카톨릭이 분리된 16세기부터 개신교에서는 믿음이라는 말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많이 강조한 반면에 카톨릭은 교리 언어의 지적 수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한쪽이 느낌이라는 주관적인 해석을 강조하였고 다른 쪽에서는 지적승복이라는 객관적인 면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요한복음이 말하는 믿음은 과연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는, 믿음은 "진리를 행하는 것", 그리고 "자기의 행실이 하나님 안에 이루어진 일임을 들어내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실천이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또한 마태복음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는 더욱 명백하게 긍정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더러 '주님, 주님'하는 사람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입니다"(7:21). 그렇다면 신앙은 하나의 실천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있어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있어야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신앙은 어떤 실천을 의미한다는 것이라고 요한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구약성서는 모세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부분이었습니다. 그 기도는 제가 아주 좋아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백성이면 함께 가셔야 되지 않겠느냐는 간곡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신다는 약속을 하시자, 모세는 하나님께 청합니다. "당신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야훼이신 하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내 모든 선한 모습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며, 야훼라는 이름을 너에게 선포하리라. 나는 돌보고 싶은 자는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고 싶은 자는 가엾이 여긴다." 여기서도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볼 수 있는, 확인할 수 있는 대상으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변하여 하나님의 선한 모습, 곧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모습이 되는 곳에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천 안에 보이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함께 계심은 우리의 실천을 낳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계심을 믿는 사람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달라진 실천을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구약성서의 마지막 구절은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모습만은 볼 수 있으리라"고 전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지나가시면 사람들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모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뒷모습을 본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을 파견하는 장면에서 오늘의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들은 용서받을 것이요,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성령은 죄의 용서라는 말씀입니다. 죄를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을, 예수의 제자들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줄 수도 있고 용서해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으로 우리가 이해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한번 말하고 부정적으로 다시 한번 말하는 것은 유태인들의 화법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 받을 것입니다"(16:16)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높은 사람들과 강한 사람들로부터 부정적 체험을 많이 하였기에 이런 부분에서 부정적인 부분이 우리를 위한 메시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화법에서 우리는 긍정적인 부분만 들어야 복음서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었다는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베드로를 문을 잠그는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가 "너희들은 너희들도 들어가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서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버렸다"고 비난하십니다. 율사들과 바리사이파들이 닫은 하늘나라의 문을 여는 것이 베드로의 열쇠인데, 우리는 왜 그런지 베드로의 열쇠라는 말이 나오면 '아이쿠 저건 닫는 열쇠구나'라고 생각을 합니다. 따라서 죄의 용서에 대한 오늘의 복음에서도 우리가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는 것이고 그것은 곧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한 실천을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 용서를 받게끔 예수의 제자들은 노력하는 사람들이라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셨다"는 것은 구약성서 창세기(2:7)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숨을 불어 넣으셨다"는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을 새롭게 만드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숨결을 불어넣으시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으며, 나중에 나무 열매를 먹고 난 다음에는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먼지니까 먼지로 돌아가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니 사람의 정체성은 흙이고 먼지밖에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것, 또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숨결'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의미합니다. 결국 부활하신 예수는 성령을 주셔서 사람들을 새롭게 만드셨고, 그 새로움은 죄의 용서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죄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은 예수의 사명을 요약하여 죄의 용서라고 말합니다. 예수가 인간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받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를 증거 하여 하는 말이 "보라, 세상의 죄를 치워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 세상의 죄를 치워 없애시는 분이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해야 하는 일도 결국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모두 죄에 물들었다고, 우리도 "예수 구원, 불신 지옥"하며 외치고 다녀야 하겠습니까? 제가 며칠 전 서울역 지하철 입구 보도를 지나는데 굉장히 소란스러웠습니다. 보니까 등산복 조끼에다가 '예수 구원 불신 지옥'이라 써 붙인 2-30명이 들어와서 북적거리며 떠드는데 붉은 색 조끼가 아주 섬짓하더군요. 요즈음 그렇지 않아도 전자파니 하면서 복잡한 전철 안에서 고생들을 많이 하는데 거기서 또 사람들한테 이렇게 불안을 조성하고 그렇게 불편을 주어도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어떤 방식으로 죄의 용서를 실천하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의 이름으로 돌로 치려던 여인을 살려 놓으신 다음 유대인들과 예수가 하시는 대화(요한 8:12절 이하)에서, 예수는 당신은 아버지의 일을 실천하고, 그 여인을 율법의 이름으로 돌로 치려던 사람들은 마귀의 일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귀가 너희들의 아비이기 때문에 그 아비의 일을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사람을 죽입니다. 이 장면의 유대인들은 율법이 소중한 나머지 결국 사람을 죽이려 합니다. 재물, 권력, 명예 등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또한 사회가 존속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지만, 예나 오늘이나 사람이 사람을 소외시키고 또한 죽이는 좋은 계기가 되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사람은 사람 외의 것이 소중하게 보이면 즉시 사람을 소외시키고 죽입니다. 그래서 옛날 격언에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그런 것들 앞에 '나누고, 봉사하고, 살리고, 용서하는 것'이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포하는 일이라고 가르치신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이 소중해서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으로 항상 다른 사람을 소외시키나, 예수는 이런 것을 나누고 봉사하고 용서하는 수단으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없애시는 예수의 모습을 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죄라는 말로써 사회가 말하는 범죄를 생각합니다. 아니면 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우리 삶의 공간을 만듭니다. 나는 범죄하지 않았고 성서가 말하는 계명도 범하지 않았으니 정상적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서가 죄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각과 행동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신앙인이 됩니다.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누가 17:11-19)에서 치유를 받은 열 사람 중 한 사람이 돌아 왔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 .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렸다"는 말은 신앙행위를 했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는 예수의 말씀은 받은 것에 대한 감사는 신앙의 시작임을 말해 줍니다.
우리의 생명을 우리가 받았다고 생각하면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없는 생명입니다. 마태복음이 전하는 탈란트의 비유(25:14-30)에 보면 다섯 탈란트와 두 탈란트를 받은 사람들은 그 받은 것을 버려서, 곧 활용하여 더 벌었지만 한 탈란트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받은 것을 손에 쥐고 자기의 미래를 생각하고 땅에 묻었습니다. 그래서 얻은 한 탈란트마져 잃게 되는 것입니다. 무상으로 주어진 생명이면 무상으로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로 생각되면,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다른 형제들을 외면하지 못합니다. 자기 주변 형제를 외면하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이 신약성서가 말하는 죄입니다.
오늘 복음이 성령을 받으면 죄의 용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령은 우리를 이기심에서 벗어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같은 요한복음이 전하는 성령에 대한 말씀을 들어봅시다. "진리의 영, 그분이 오시면 여러분을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16:13). "진리는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8:32). 성령이 주어지면 우리가 자유로워진다는 말씀입니다. 받은 생명이기에 이기심에 구애받지 않고 베풂의 기회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이해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린이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자기밖에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자라서 어른이 되어서도 자기밖에 생각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미숙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모두 미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데에 아무런 저항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모든 사람을 위한 헌신이 우리에게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런 미숙을 넘어서 베풀고 용서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고 삶이었습니다. 사실 형제를 외면하고 아버지 앞에 좋은 자녀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조명하기 위해 예수가 말씀하신 비유(마태 18:23-35)가 있습니다. 주인에게 일만 탈란트를 빚진 종이 주인으로부터 채무 면제라는 베풂의 혜택을 받고, 나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의 채무를 가진 사람에게 그 주인과 같이 채무를 면제해 주는 베풂의 자유를 행사하지 않고 채무 변제를 무자비하게 요구합니다. 이것이 복음이 말하는 죄입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던들 그들에게 죄가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15:22). 예수는 형제자매들에게 베풀고 나누라고 가르치신 분입니다. 이 실천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행동하게 하십니다. 하나님 자녀의 행실이 진리이고 이 진리가 있는 곳에 우리의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시야를 넘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넓은 시야를 가지게 해 주시는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의 숨결인 성령은 그것을 위해 우리의 자유가 움직이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기가 잘되기 위한 수작을 하는 길이 아닙니다. 또 성서 안에는 사람이 희생해서 하나님이 잘 된다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나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내 생명의 봉사를 필요로 하는 곳에 내 자신을 쏟으라는 것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안에 일관되게 흐르는 말씀입니다. 고통을 비껴간 삶이 성공한 삶이 아닙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에 우리 삶의 의미가 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말하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 자신을 섬기고 편안함을 찾으면 비록 성공한다 하더라도 대단히 한시적인 것입니다. 국군묘지에 가서 젊은 나이에 숨져간 수많은 젊은이들의 무덤을 봅시다. 우리 주변에 고통스럽게 살다가 많은 한을 품고 숨져간 이들을 생각해 봅시다. 불과 몇 주 전에 어느 신문 보도에서 본 것입니다. 42세의 남편과 30세의 부인이 결혼식을 했는데 그 남편은 몇 달 전에 폐암 말기 환자로 진단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남편은 구두미화원이었고 부인은 어느 식당의 종업원이었다가 만나서 십년을 함께 산 후였습니다. 결혼식을 하고 남자는 즉시 병원에 실려가서 그 이튿날 운명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이런 여건에서 결혼식을 한 이유는,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함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 세상에서 함께 살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삶의 이런 수수께끼들, 이런 미결의 이야기들에 대한 대답이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도 미결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이 하신 완결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선하시고 베푸시는 분이고 자비로운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함께 계심을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그 함께 계심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유가 움직일 때, 우리 안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 실현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우리들의 모습 안에 나타납니다. 그것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선포하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자유가 움직일 때 우리는 우리의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죄스런 상태에서 벗어나서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성령이 주어졌다는 것은, 사람은 한 인간 개체, 자기만을 생각하고 사는 한 인간 개체보다 더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가 움직일 때 우리가 체험하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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