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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생수: 예루살렘도 그리심산도 아닌 곳.

요한복음 최만자............... 조회 수 2002 추천 수 0 2008.02.26 23: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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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4:11-21 
설교자 : 최만자 자매 
참고 : 새길교회 
요즈음 시대를 파라다임 전환의 시대라고 합니다. 파라다임이란 한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신념이나 가치, 혹은 행위를 결정하는 규범의 범례입니다. 전통이 위기를 맞는 것은 그 전통으로 오늘날 삶의 문제에 대한 답을 줄 수 없을 때이며, 그렇게 되면 그 전통은 의미를 잃으며 권위를 상실하게 되고 새로운 전통이 형성되어 집니다. 즉 지금의 세상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신뢰하여온 전통적 가치기준들이 오늘의 삶의 물음에 답하지 못하기 때문에 파라다임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파라다임을 바꾸게 하는 요인, 곧 해석학적 요인은 자연, 문화, 여성, 민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쉽게 이 말이 이해될 수 있는 예는 자연과의 관계 이해라고 봅니다. 즉 지금까지는 인간이 자연을 대상화하여 마음대로 개발하고 인간 중심으로 이용하여 온 관계였습니다. 그 결과 자연은 황폐하여졌고 인류는 생태계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자연을 대상적인 물질로 보는 이해는 인류의 문제에 답을 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인격적이고 유기체적인 관계로 상호 존중하고 의존하는 관계로 정립되어야 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또 한가지 요즈음 종교간의 관계 문제에 있어서도 기독교가 타종교에서도 배워야 한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기독교가 가장 우수한 혹은 인류 구원의 유일한 진리로 믿어온 신도들에게는 혼란스러운 말이 됩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기독교의 진리로 믿어온 것은 서구세계의 기독교입니다. 따라서 제3세계의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면서 진리라는 것은 하나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표현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또 진리라고 규정하는 것이나 지금까지 규정하여 온 것은 힘있는 집단 곧 지배집단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신학에 있어서도 선교라는 개념은 서구 자본주의와 서구문화의 토양에서 발전된 것으로서 기독교를 전 세계로 확장시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이는 기독교왕국에서 자라난 승리주의 군사주의적 태도로서 기독교는 그러한 생각으로 제3세계에 군림하였던 것입니다. 서구에서 1000-1950년대까지(동방교회와 분리된 이후의 기독교) 로마 카톨릭교회와 구라파와 미국의 개신교회는 바로 그러한 기독교 왕국 형태의 선교 모델이었습니다. 그 교회관은 교회가 절대권을 가지며,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였고, 성과 속 분리의 철저한 이원론적 사고를 가지고서 세상은 망할 곳으로 무가치하게 간주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태도에서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였고 일차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계시고 세상에는 없는 분이었습니다. 하나님 - 교회 - 세상이라는 구조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의 개념과 구조이해가 바뀐 것은 1962년-1965년 로마 카톨릭교회의 제2 바티칸 공의회에서 사회와 세상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 즉 세상은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곳으로 새롭게 교회가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태도의 변화와, 1968년 개신교의 세계교회협의회(WCC) Upsala 대회에서 논의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o, Mission of God)의 신학에 의하여 교회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세상이 중심이며 하나님은 세상 안에 계시고 그 세상을 사랑하시고 그 곳에서 직접 선교하고 계신다는 하나님 - 세상 - 교회라는 새로운 관계 이해를 정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교회는 세상을 지배하는 교권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섬기기 위하여 존재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역사와 삶의 현장에 하나님이 개입하는 신학에 의하여 평신도 사역이 부상되었고 평신도 신학이 발전하였습니다. 20세기 중엽 이후 역사는 경제적 가난과 정치적 억압으로 눌려 있던 제3세계의 민중의 자의식이 확대되었고, 남성지배에 눌렸던 여성들의 자기 인식이 새로워지면서 역사의 주체의식이 발로되었으며, 이에 따라 교회는 새로운 이해지평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3세계의 문화의 다양성, 그 경험의 다양성은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이해할 것을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서구 기독교가 제국주의적 의식으로 자기 문화를 우월하게 교육시키면서 보잘 것 없고 원시적인 천박한 문화로 파괴하여 온 제3세계 문화에 대하여 이제는 그 태도를 회개하고 그 문화의 본질, 진리를 바르게 알고 그것과 대화하며 수용함이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즉 자연과 유기체적 관계를 유지하여온 원주민의 영성은 오히려 인류문명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있어서는 더 우월한 가치를 제시하고 있으므로 원주민의 영성이 더 개발되고 확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가난과 억압 속에 고난의 경험과 실존적 삶의 다양한 경험을 가진 민중과 여성들의 영성이 오늘 세계를 살아갈 진리를 비추는 자원이 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학의 변화를 살펴 본 것은 이런 가치들의 변화를 맞으면서 그 변화의 동력과 원리가 무엇이며 변화시키는 본질과 그 기준이 무엇인가를 오늘의 성서본문과 연결하여 생각하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신학의 파라다임의 전환은 교권주의 다시 말해 그 종교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날 때 가능하며 그 전환된 파라다임으로 온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본문은 요한복음 4장 1-42절의 전체 단락 가운데의 한 부분입니다.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사마리아 지역의 선교의 문을 열었던 역사적 인물로 전승되어온 이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우리에게 가까운 것은 복음성가의 주인공이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사실 이 찬송을 부를 때 우리 자신도 이 세상에서 헛된 것을 구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는 허망함과 오직 영원하신 주인이 주시는 생수가 나에게도 넘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됩니다. 인생이 언제나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소유할 수 없는 갈증 속에 사는 존재이기에 이 노래는 모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주님께서 주시기를 간절히 갈망하게 됩니다. 또 대체로 이 본문은 그 여성이 도덕적으로 무질서한 생활을 하였고, 인생에 실패한 불행한 여자라고 하여 동정을 받았으며, 예수 때문에 비로소 새 삶을 얻게 되었다는 주의 은혜에 초점을 두고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여성은 그가 처한 삶의 조건들이 비록 비참한 것이었어도 의식과 지향은 고고하였고,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으며, 본질적인 물음과 그 해결을 소망하는 높은 차원을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관심은 이 여성에게 집중하기보다는 본문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의 핵심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즉 사마리아와 유다의 갈등문제에 초점을 두고 이 이야기를 생각하려 합니다. 사마리아와 유다의 갈등은 매우 뿌리깊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에 대한 편견은 신약성서 곳곳에서 보입니다. 원래 한 통일국가였던 이스라엘은 솔로몬이 죽은 후 기원전 922년 남북 왕국으로 분열됩니다. 북쪽 지역은 원래 사마리아지역의 세겜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곳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이스라엘 12지파들이 야훼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지파동맹의 장소입니다. 요셉의 시신을 애굽에서 옮겨와 묻었던 곳도 세겜입니다. 이 곳은 계약백성의 성립과 그들 족장들에 대한 전승과 기억을 생생히 간직한 곳이며 북쪽 지방의 정치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세겜은 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 계곡에 위치한 성읍으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면서 마지막 그리심산에서 율법을 지키는데 따르는 축복을 한 곳이라고도 합니다. 이 곳은 기원전 2,000년 경 가나안의 성읍 중 중요한 곳의 하나였으며,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처음 방문한 곳이고, 야곱은 이 땅을 사서 후손에게 주었습니다. 솔로몬 후 왕국이 둘로 나뉘어지는 역사에 여로보암 1세가 왕의 거주지로 삼은 첫번 성소이기도 합니다. 이 북쪽의 비극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하여 왕국이 멸망당하면서 더 깊어졌습니다. 앗수르는 혼혈정책을 써서 이스라엘인 상류층을 앗수르로 이주시키고 앗수르인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켜 혼합종족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절반만의 유대인이 되어 순수혈통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유대인이 부르는 것은 순수한 혈통을 갖지 못한 자들이란 경멸에 찬 호칭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이방의 노예보다 더 경멸하였다고 합니다. 이 앗수르의 포로정책은 기원전 587년 남왕국 유다가 바빌론에 의하여 포로로 잡혀간 상황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바빌론은 비록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갔지만 자치구역에서 자기들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포로기 동안에 오히려 민족의 역사와 신앙을 새롭게 정립하고 미래 역사를 위한 민족 공동체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바빌론 포로와 다른 상황에서 고난을 당한 사마리아인들은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동족으로부터 멸시를 받는 고통의 세월을 살아야 했습니다. 538년 바빌론 포로에서 귀환하게 된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전재건과 새 역사의 건설에 사마리아인들을 철저하게 배제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은 격분하게 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의 허락으로 그리심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경전을 모세 오경 다섯권만으로 사용하여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이단인 유대교를 믿게 된 것입니다. 이제 유다와 사마리아는 완전한 종교분리의 상태가 되었으며, 기원전 135-104년(마카비 하스몬 왕조 중)에 유다는 그리심산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사마리아 성읍을 공격하여 무자비하게 파괴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사마리아와 유다 사이의 적대감은 더욱 깊어졌고 요한복음이 쓰여진 1세기 말 경에도 두 지역의 관계는 악화의 상태였습니다. 유다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사마리아인들은 증오에 차서 유대인들을 살해하였으며 유대인들은 그에 보복하는 악순환을 가졌다고 합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근친증오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5절에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마가복음 6:7 이하와 누가복음 9:1 이하에는 사마리아 고을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마태가 써넣은 구절이라고 보아야 합니다)는 예수가 제자를 파송하면서 한 말인데 마태가 당시의 유대인의 상식을 써넣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가 나눈 대화는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이 만난 곳은 사마리아 지역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 바로 세겜지역입니다. 예수가 물을 좀 달라고 하는 요구에 대하여 이 여성은 유다 남자인 당신이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라고 도전적으로 질문합니다. 이 여성은 자기의 생애에 짓눌린 가련한 모습이라기보다는 유다 남자에게 도전하면서 사마리아와 유다의 갈등 문제를 근본적으로 질문하는 도전적 모습입니다. 이 여인의 질문에는 유다 남자인 당신은 사마리아와 유다 간의 이 심각한 갈등문제를 알고 있습니까? 그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봅니까? 라는 동족증오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쏟아 놓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이 여인은 조상 야곱을 들먹입니다. 당신이 야곱보다 큰 분입니까? 이것은 비록 이렇게 처참히 나뉘어진 동족이지만 원래는 한 조상의 뿌리를 가졌던 것이 아닙니까? 라는 한 종족의 뿌리를 상기시키는 물음으로 보입니다. 분열된 지역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고 있는 처지의 여인, 성 차별과 종족 차별의 이중적 고난에 대한,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한 조상의 후손으로 함께 살아야 할 민족의 생명에 대하여 갈증을 느끼는 물음입니다. 이제 다음의 관심은 예배드리는 장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질문합니다.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리는 것과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 것' 어느 것이 옳은 것이냐 라는 질문입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에 의하여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된 도시입니다. 원래 가나안 성읍으로 여부스족이 살고 있었던 곳입니다. 다윗은 그 곳을 점령하여 왕국의 수도로 삼았고,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고 성막을 세워 다윗성이라 하였으며, 나중에 그 곳에 장사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그곳에 건축하였고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역이 되었습니다. 왕국이 분열된 이후에는 남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587년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멸망당하였다가 538년 파사와 고레스의 유대인 귀환정책에 힘입어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헬라시대, 마카비시대,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유대인들에게는 신성하고도 거룩한 도시로 계속 숭경되었습니다. 예루살렘주의(Zionism)는 유대인의 배타적이며 절대적 유대우월주의를 나타내는 종교 이데올로기의 극치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은 정말 유대로부터만 구원이 옵니까? 예루살렘만 신성한 곳입니까? 예루살렘주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는 역시 도전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두 곳 모두 아닌데서 예배할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하였습니다(4장 22절의 유대로부터 구원이 온다는 표현은 후대의 삽입으로 봅니다). 여기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말은 어떤 내면적인 신앙이나 신비적인 신앙을 뜻하기보다는 오히려 유다적인 것의 더 근본적인 부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예수가 유대인을 비난할 때 '거짓'으로 표시하는데 '영과 진리'는 '거짓'에 대비되는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거짓에서 낳고, 진리를 말할 때 알아듣지 못하며, 자신들의 죄에서 죽을 것이라고 하는 말과 연관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참 실재, 자유롭게 하는 힘,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하는 힘을 말합니다. 곧 유다의 거짓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참 실재를 만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예배는 영과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 됩니다.
그리심산도 예루살렘도 아닌 곳 - 영과 진리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는 제도와 교권에 눌린 생명들의 해방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에게는 숨쉬어야 할, 온전해야 할 생명들의 자유와 해방이 모든 것보다 우선적인 것이었고, 예수는 제도, 기구, 종교 이데올로기의 권력에 의한 모든 것은 참 종교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여인과의 대화에서 두 종교 이데올로기가 한 여성의 생명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어 놓았는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온 사마리아인의 고난을 보았습니다. 성서에서 사마리아인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누가 기자는 위선적인 유다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허상을 고발하면서 예루살렘 종교 이데올로기가 죄인으로 규정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얼마나 생명을 존중하며 깊은 인간애를 가지고 있는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이야기를 통하여 보면 예수는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새 삶의 역동성을 준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의 뒷부분에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를 예언자로 인지합니다. 이것은 그의 메시아 대망에 연결됩니다. 민족분단의 문제를 인식하고 가슴아파하고 그 해결을 소망하는 메시아에 대한 대망을 반영합니다. 메시아는 현재가 고달프고 힘든 사람들이 갈망합니다. 부자는 천국을 그리워하지 않지만 가난한 이들은 새 세상을, 천국을 매일 매 순간 그리워합니다. 인생을 풍요롭게 살맛나게 하는 것은 종교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종교가 교권, 제도, 교리 등에 한정될 때 그 속에 속한 공동체의 생명은 죽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지향이 생명 자체, 삶 자체일 때 그 속에 속한 모든 생명은 살아납니다. 우리는 예수에게서 바로 그 생명사랑을 봅니다. 기독교의 미래는 생명자체에 대한 연민, 진지한 관심, 삶의 본질에 대한 궁극적 응답에 일차적으로 관심을 가질 때에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그 정체성의 위기를 호교론적으로 또는 배타적으로 대처할 것이 아니라 악의 세력이 누르고 있는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악이 물러가고 인간다운 삶의 조건들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 위기는 극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난과 눈물을 아는 그리고 삶과 영혼의 심연에서 분출되는 삶의 에너지를 볼 수 있을 때 기독교의 능력은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된 신학의 전환들은 바로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께서 보이신 그 생수로부터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리심산도 예루살렘도 다 부인하고 생명과 삶의 온전함을 생수의 근원으로 보는 예수에게 신학의 생수의 근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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