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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요12:2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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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서창원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
계절적으로는 3월의 마지막 주간이며 봄입니다. 교회력으로는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며 수난의 명상에 참여하는 사순절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고난을 신앙적으로 뒤따르는 우리에게는 수난의 뜻을 깊이 이해하고 참여할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 성서의 말씀은 유대 명절인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면서 헬라인들이 주님을 찾아온 기사입니다. 유대 역사가인 요세프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유월절에 270만 명의 순례객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팔레스틴 전국 각처 그리고 해외로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외국인들이었습니다. 성서학자들의 추정으로 이 헬라인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기보다는 개종한 이방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이들은 로마 제국의 영역 안에서 문화적으로 학문적으로 우월성을 자랑하던 헬라인들이었습니다.
당시 헬라의 철학적 사상들은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플라톤 사상, 견유학파, 회의주의 학파, 스토아 학파, 피타고라스 학파, 에피큐로스 학파 등 각양 각색의 철학적 사상이 범람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 경향으로는 올림푸스 신들 외에도 디오니소스 또는 바카스 신, 그리고 오르페우스의 종교가 있었고 주민들은 헤르메스와 판(Pan)신을 섬겼습니다. 각종 혼합된 밀의 종교가 횡행했습니다.
이 시대는 급변하는 시기로 헬라인들은 전통적인 과거의 종교는 새로운 역사와 세계를 끌어갈 수 있는 힘이 없다고 절망적 인식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영감과 신탁의 말씀에 굶주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시 가장 동방의 변방인 팔레스틴을 찾아 새롭게 부각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 예수를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예수께 접근하는 대신 헬라식 이름을 가진 필립과 안드레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들이 듣고 이해하고 만나보았던 철학적 종교적 가르침이나 진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엄청난 것을 예수님에게서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이 헬라인들에게 선포하신 가르침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당시의 모든 철학의 가르침이나 종교적 진리에 또 하나의 추가적인 종교적 선언이 아니라, 모든 철학과 종교를 뛰어 넘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진리의 선포인 것입니다.
이 헬라인에게 전한 진리의 말씀의 핵심은 '수난의 길'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추구합니다. 참다운 삶을 갈구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역설적으로 생명의 길은 수난의 길을 통해야 한다고 교훈 하십니다. 모든 종교는 생명의 근원과 진리에 대한 교훈이 있으며 고난에 대한 의미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은 엄청난 역설을 말씀하십니다. 죽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참 생명의 신앙은 즉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려면 죽고 사는 것을 믿는 십자가의 신비와 능력을 믿어야 하는 생명의 신앙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기독교가 선포해 온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헬라인은 지식을 구하고, 유대인은 이적을 바라지만, 나는 십자가를 증거한다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능력은 어리석고 미련한 것처럼 보이는 역설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랑할 것도 이 십자가의 도인 것입니다. 인간의 영(프쉬케)이 영원한 생명(죠에)을 얻기 위해서는 이 역설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는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열매를 못 맺지만 하나의 밀알이 썩어지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고난의 적극적 의미로서 이 고난의 길이야말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하는 창조의 과정인 것입니다. 한 생명의 출현은 복잡한 생명의 그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생명체, 연속의 맥을 이어주는 것도 한 생명체의 자기 헌신과 소모와 멸절이 없이는 다음 세대의 생명체로의 창조가 불가능합니다. 즉 자기가 죽어지는 사랑의 행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한 알의 밀알이 죽어지는 고난의 적극적 의미를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영성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영성의 내용 구조는 물론 사랑입니다. 또 주님께서 이 헬라인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수난에의 동참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보다 높은 이상과 보다 바람직한 사회와 개인적 삶의 실현을 추구하는 모두에게 부과되는 봉사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고난의 가치를 인식하고 깨달아야만 동참할 수 있는 순례의 길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고난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얻고 체험하게 됩니다. 우선 자기 훈련, 통찰력의 성장, 삶과 세계의 다양성을 배우고 이해하게 됩니다. 따라서 자기의 편견과 아집을 벗어나는 이치와 상상력이 풍부해지며 생각과 태도에 있어서 폭과 깊이가 있어집니다.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지혜와 경륜을 얻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상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고난은 큰 스승이 됩니다. 하물며 진리의 순례를 떠나는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 없는 신앙은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은 모범답안이 있는 확실한 모형이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진리의 방법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모범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진리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가르침대로 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분을 따르는 것은 방법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격을 신뢰하고 이분의 인격을 믿는 만큼 따른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주님에 대한 인격적인 믿음이 동반되지 않고는 따를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은 수난과 동시에 절대적 모험의 길입니다. 이분에 대한 인격적 신뢰가 동반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길입니다.
우리는 얼만큼 그분을 따를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불안하게 됩니다. 주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분은 본을 보여주시며, 우리의 순례의 길의 희망적 근거이며 보증이 되십니다. 그래서 이 길은 수난의 길이며 소망의 본입니다.
주님이 선포하신 도는 십자가의 道입니다. 이 길은 수난의 길이며, 생명의 길이며, 풍성케 하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 맺는 길이며, 소망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근원으로 통하는 길은 분명 수난의 길입니다. 골고다를 가는 길목에는 비아 돌로로사(Via Dorolosa)가 있습니다.
이 사순절에 주님의 수난을 깊이 명상하시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십자가가 나와 어떤 실존적, 영적 관계가 있는지 점검합시다. 주님의 십자가를 명상하고 묵상할 때 나에게 영적 감동과 의미가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수난에 참여할 때 우리는 엄청난 하나님의 신비와 진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새 지식을 추구하는 헬라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오늘 성서의 말씀은 유대 명절인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면서 헬라인들이 주님을 찾아온 기사입니다. 유대 역사가인 요세프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유월절에 270만 명의 순례객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팔레스틴 전국 각처 그리고 해외로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외국인들이었습니다. 성서학자들의 추정으로 이 헬라인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기보다는 개종한 이방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이들은 로마 제국의 영역 안에서 문화적으로 학문적으로 우월성을 자랑하던 헬라인들이었습니다.
당시 헬라의 철학적 사상들은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플라톤 사상, 견유학파, 회의주의 학파, 스토아 학파, 피타고라스 학파, 에피큐로스 학파 등 각양 각색의 철학적 사상이 범람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 경향으로는 올림푸스 신들 외에도 디오니소스 또는 바카스 신, 그리고 오르페우스의 종교가 있었고 주민들은 헤르메스와 판(Pan)신을 섬겼습니다. 각종 혼합된 밀의 종교가 횡행했습니다.
이 시대는 급변하는 시기로 헬라인들은 전통적인 과거의 종교는 새로운 역사와 세계를 끌어갈 수 있는 힘이 없다고 절망적 인식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영감과 신탁의 말씀에 굶주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시 가장 동방의 변방인 팔레스틴을 찾아 새롭게 부각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 예수를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예수께 접근하는 대신 헬라식 이름을 가진 필립과 안드레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들이 듣고 이해하고 만나보았던 철학적 종교적 가르침이나 진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엄청난 것을 예수님에게서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이 헬라인들에게 선포하신 가르침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당시의 모든 철학의 가르침이나 종교적 진리에 또 하나의 추가적인 종교적 선언이 아니라, 모든 철학과 종교를 뛰어 넘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진리의 선포인 것입니다.
이 헬라인에게 전한 진리의 말씀의 핵심은 '수난의 길'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추구합니다. 참다운 삶을 갈구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역설적으로 생명의 길은 수난의 길을 통해야 한다고 교훈 하십니다. 모든 종교는 생명의 근원과 진리에 대한 교훈이 있으며 고난에 대한 의미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은 엄청난 역설을 말씀하십니다. 죽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참 생명의 신앙은 즉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려면 죽고 사는 것을 믿는 십자가의 신비와 능력을 믿어야 하는 생명의 신앙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기독교가 선포해 온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헬라인은 지식을 구하고, 유대인은 이적을 바라지만, 나는 십자가를 증거한다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능력은 어리석고 미련한 것처럼 보이는 역설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랑할 것도 이 십자가의 도인 것입니다. 인간의 영(프쉬케)이 영원한 생명(죠에)을 얻기 위해서는 이 역설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는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열매를 못 맺지만 하나의 밀알이 썩어지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고난의 적극적 의미로서 이 고난의 길이야말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하는 창조의 과정인 것입니다. 한 생명의 출현은 복잡한 생명의 그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생명체, 연속의 맥을 이어주는 것도 한 생명체의 자기 헌신과 소모와 멸절이 없이는 다음 세대의 생명체로의 창조가 불가능합니다. 즉 자기가 죽어지는 사랑의 행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한 알의 밀알이 죽어지는 고난의 적극적 의미를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영성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영성의 내용 구조는 물론 사랑입니다. 또 주님께서 이 헬라인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수난에의 동참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보다 높은 이상과 보다 바람직한 사회와 개인적 삶의 실현을 추구하는 모두에게 부과되는 봉사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고난의 가치를 인식하고 깨달아야만 동참할 수 있는 순례의 길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고난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얻고 체험하게 됩니다. 우선 자기 훈련, 통찰력의 성장, 삶과 세계의 다양성을 배우고 이해하게 됩니다. 따라서 자기의 편견과 아집을 벗어나는 이치와 상상력이 풍부해지며 생각과 태도에 있어서 폭과 깊이가 있어집니다.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지혜와 경륜을 얻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상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고난은 큰 스승이 됩니다. 하물며 진리의 순례를 떠나는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 없는 신앙은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은 모범답안이 있는 확실한 모형이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진리의 방법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모범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진리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가르침대로 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분을 따르는 것은 방법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격을 신뢰하고 이분의 인격을 믿는 만큼 따른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주님에 대한 인격적인 믿음이 동반되지 않고는 따를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은 수난과 동시에 절대적 모험의 길입니다. 이분에 대한 인격적 신뢰가 동반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길입니다.
우리는 얼만큼 그분을 따를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불안하게 됩니다. 주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분은 본을 보여주시며, 우리의 순례의 길의 희망적 근거이며 보증이 되십니다. 그래서 이 길은 수난의 길이며 소망의 본입니다.
주님이 선포하신 도는 십자가의 道입니다. 이 길은 수난의 길이며, 생명의 길이며, 풍성케 하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 맺는 길이며, 소망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근원으로 통하는 길은 분명 수난의 길입니다. 골고다를 가는 길목에는 비아 돌로로사(Via Dorolosa)가 있습니다.
이 사순절에 주님의 수난을 깊이 명상하시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십자가가 나와 어떤 실존적, 영적 관계가 있는지 점검합시다. 주님의 십자가를 명상하고 묵상할 때 나에게 영적 감동과 의미가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수난에 참여할 때 우리는 엄청난 하나님의 신비와 진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새 지식을 추구하는 헬라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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