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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만남

요한복음 이정배 목사............... 조회 수 1724 추천 수 0 2008.05.30 19: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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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2:43-51 
설교자 : 이정배 목사 
참고 : 새길교회 
 지난 8 15를 계기로 제2건국을 선포한 정부는 한국사회에 만연된 고질적 갈등들, 예컨대 지역간의 문제를 비롯하여 노사문제 그리고 분단된 민족간의 이념적 갈등까지도 품어 안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화와 시장경제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음으로 해서 불평등의 구조가 심화되고, 부익부 빈익빈 사회로 가고 있으며, 주변세계의 영향력으로 인해 정책의 일관성을 상실한 채 갈팡질팡하고 있는 듯 싶습니다. 이는 제도적 변화나, 정부의 의지만으로 새로운 건국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또한 세계화의 요구를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인간 개개인의 변화,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동반되어야 함을 지시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삶을 예수에 비추어 끊임없이 생각하고, 예수 그 분이 원했던 것을 자신이 원하며, 그가 미워했던 것을 함께 미워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도록 노력을 하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제자가 되어 그를 따르는 구체적 모습이 삶 속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서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을 안내하는 책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큰 목적을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성서 내에는 제자가 되고 그를 따르는 길을 각기 다른 시각에서 말해 줍니다. 먼저 복음서는 자신이 가진 모든 재물, 가족, 명예 등을 놓아두고 예수의 길로 나아가는 그야말로 무소유, 무집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와 직접적으로 삶을 대면했던, 아직 교회공동체가 성립되기 이전의 기독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한편 바울 서신은 기독교의 제도화된 모습 속에서 그리고 헬레니즘의 영향력 하에서 육의 삶, 육체적 정욕을 따르지 않고 육체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적 생활을 하는 것을 제자가 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육, 육체란 유대인들의 율법적 세계관까지를 지시하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요한복음서는 독특한 시각을 지니고 있는 바, 기존의 편견, 자신만의 잣대로 세계를 바라보았던 가치관, 인생관 이데올로기와 같은 것으로부터 놓여짐을 받는 것, 그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내적 고투를 귀하게 생각하며 그것을 제자 됨의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하루는 빌립이 친구 사이인 나다나엘에게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를 만나러 가자고 하였습니다. 빌립은 이미 예수의 행적을 부분적이나마 경험했기에 예수가 훌륭한 예언자 이상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친구에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유대인으로서 정통 유대적 가치에 깊이 젖어 있던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에 응하지 않았고 응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빌립에게 반문하며 나사렛, 그 형편없는 미천한 민중들의 동네에서 무슨 선한 것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를 지적합니다. 어떤 의미 있는 존재가 역사 속에 태어난다면 그곳은 예루살렘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 보라'는 낯선 부름에 나다나엘은 응하였고 그로 인해 예수와의 뜻밖의 경험, 네가 나를 보기 전에 내가 너를 먼저 보았다는 예상치 못한 말씀을 들었다고 성서는 기술해 줍니다. 바로 요한복음서 기자는 이러한 부름 앞에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을 지켜온 모든 것을 덮어두고 예수 앞에 선 나다나엘의 그 모습 속에서 예수 따르는 의미를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도리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편견과 아집, 좋게 말해서 자신의 가치관, 익숙해진 삶의 방식을 바꾸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심지어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하느님 말씀,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이 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자기 성격대로 예수를 믿게 되고 자신의 삶의 확장을 위해서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와만 같다면 이 세상은 한없이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살 때가 어디 한 두 번이겠습니까? 그래서 정작 '와 보라'는 부름이 인생에 여러 차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습적이며 길들여진 자신의 모습에 빠져 뜻밖의 경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리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복음 역시 기쁜 소식이며 뜻밖의 사건을 의미합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총이라 말하는 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특별한 것과의 만남, 기도하다가, 책을 읽다가, 자연 앞에서, 친구와 만나면서 지금껏 자신이 살아보지 못했던 전혀 낯선 것을 만나는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는 아니 그 속에 몸담고 있는 우리도 21세기라는 새로운, 미지의 세계와 만날 내적인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기존의 자신의 넉넉함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여 새로운 만남을 겁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오래된 편안함과 친숙함에 길들여져 동질화된, 좁고 닫힌 끼리끼리의 만남에 머물러 있습니다. 새로운 만남이 없고 그로 인해 생겨난 치열한 갈등이 없는 삶, 그것은 마치 동종교배와도 같은 삶입니다.
인간 세계 내에서 족외혼이 강조되어온 것은 비슷한 종과의 만남으로 인해 다음 세대들의 열등함을 우려해서입니다. 그러나 인간사회에는 낯선 경험을 두려워하고 자기에게 익숙하고 친숙한 소리에만 귀를 기울임으로 창조의 불꽃이 사라지고 영적인 진보를 이룰 수 없는 열등한 존재들만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동식물세계에서의 이종교배를 인간 삶에 있어서 전혀 뜻밖의 만남, 예기치 못한 경험과의 만남으로 비유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까요?
이런 생각 중에 우리는 20세기 최고 신학자들의 자서전적 수상집 '나는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Wie ich mich geandert habe?)라는 책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래 이 책은 독일 튜빙겐 대학의 에큐메니칼 신학자인 몰트만의 70세 생일을 기해 기획된 것으로서 그와 동년배인 동료신학자들의 신학적 여정, 자신들의 신학과 신앙이 어떻게 달라져 왔는가가 진솔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H. K ng, J. Metz 그리고 D. S lle와 같은 시대의 대신학자들 모두에게 있어서 자신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욕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거의 50년간을 교회를 섬기고 신학활동을 한 이들의 삶이 어떻게 낯선 경험, 우연한 만남, 곧 은총을 통해서 달라져 왔는가를 보는 것은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지금 우리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고 미래를 예견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몰트만 같은 이는 신앙이란 본래 확실한 믿음의 전제에서 시작되기보다는 처음부터 불확실하게 출발하는 모험이라 하였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신비의 초대에 응하여 삶을 발견해 나가는 여행이라는 것입니다. 삶의 여정에서 부닥치는 낯선 경험들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신학적 진술이 끊임없이 검증될 수 있어야 살아 있는 신앙, 신학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신앙 혹은 신학이란 본성상 '뜻밖의 은총'을 향해 열려져 있는 것으로서 '인간이 원하는 대로 불지 않고, 불고 싶은 대로 부는 하느님 영에 자신을 맡기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도로테 죌레란 여성신학자 역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파스칼과 키에르케고르의 하느님만을 알다가 아우슈비쯔 경험을 통해 신의 죽음을 말하기 시작했고 여성의 문제에 눈뜨면서 하느님의 여성성을 다시 찾게 되고 향후 자신은 저항의 개념을 함축하고는 신비주의를 하느님 본성으로 하여 신학적 삶을 살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런 제목의 설교를 하게 된 직접적 이유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책에서 보이는 박노해란 저자의 삶이 주는 감동 때문이었습니다. 한때 사회주의 혁명가로 [노동의 새벽]을 외치며 최 일선에서 활동하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두 평 남짓한 공간에서 생활한지 7년, 금년 8 15 특사로 풀려난 박노해, 그 좁은 공간에서 표현된 한국사회 및 인간에 대한 깊은 염려 및 종교적 성찰은 우리에게 너무도 큰 자극과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여전히 평등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으되 인간의 영성과 존재의 생명가치에 새롭게 눈뜨고 있는 박노해의 글은 한 사람의 삶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일평생 자신의 삶을 지탱해 왔던 사회주의 이념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었는지, 현실적으로 다가온 자신의 실패를 어떻게 용서하고 받아들였는지, 이 일을 위해 그 좁은 감옥에서 지난 7년간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니 애처로웠고 마음이 시려왔습니다.
그가 달라질 수 있었던 이유, 자신의 실패한 현실을 스승 삼아 생명 및 영성의 가치에 새롭게 눈뜰 수 있었던 것은 7년 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소로 가던 호송차 안에서 한 여인과의 우연한, 예기치 못한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박노해임을 알게 된 그 여인은 흐느끼듯이 다음과 같은 말을 고해성사처럼 쏟아놓았다고 합니다. "어디 좋은 세상이 거져 오나요. 단번에 오나요. 우리 빼앗긴 것이 한꺼번에 되찾아지나요. 설사 빼앗긴 돈과 권리를 되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빼앗긴 삶과 인간성과 상처받은 영혼을 어디에서 찾을까요. 내가 먼저 좋은 사람으로 변하려는 노력 없이 여전히 가난한 제 돈과 시간과 관심을 쪼개서 참여하고 보태려는 구체적 실천 없이 좋은 미래를 어디에서, 누구에게 바랄 수 있겠나요. 어찌 보면 좋은 세상은 우리 안에 자라나고 있는 건데, 지금 나부터 그렇게 살면 되는 건데, 좋은 사람으로 살면서,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어깨를 맞대고 확실히 힘 모아 나가면 사실 우리가 타도하는 저들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데 . . . 선생님 저 이제 나가서 잘 살겠습니다. 좋은 세상 이루어 좋은 사람되도록 제 자신과 싸우면서 그 힘을 보태겠습니다. . . ." 자신이 노동의 투사 박노해임을 알고 짧은 시간 마치 고백성사하듯 흐느끼며 말하는 그 여인의 말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돌아오는 박노해에게 큰 아픔이며 슬픔이었고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것을 무너뜨린 운명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날 박노해는 지금까지의 삶에 아무런 변명도 비껴감도 없이 정직하게 자신을 한없이 무너뜨렸다고 합니다. 무너지고 깨어지는 것만이 자신이 할 일이고 남은 마지막 희망이었다고도 말합니다. 이 여자가 남긴 화두 - 좋은 세상은 이미 내 안에 자라고 있는데 나부터 그렇게 살면 된다는 인간에 대한 희망의 이야기는 화두가 되어 청송감옥생활 내내 그를 몰아쳤습니다. 박노해는 그 여인을 하늘이 보낸 여인으로 생각하며 그 여자 앞에 자신 있게 다시 설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한 여인과의 만남, 그녀의 솔직한 고백을 통해 박노해는 자신이 몸담아 왔던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었고 그 속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새롭게 꿰뚫어 볼 수 있었습니다. 현실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도록 한 엄청난 변화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데올로기를 벗겨 버린 그는 생활민중들 앞에서 이처럼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잘못했습니다. 정직하게 무너지고 깨어지겠습니다"라고, 그리고 '삶의 신비'라는 시에는 "현실은 나의 스승, 패배는 나의 깨침, 슬픔은 나의 정화, 고통은 나의 창조"라고 썼습니다. 박노해는 오늘 성서의 이야기처럼 '와 보라'는 낯선 여인의 부름에 응하였습니다. 그래서 현실이라는 스승 앞에, 아니 예수, 진리이신 그 분 앞에 정직하게 설 수 있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희망의 뿌리가 솟아났고 그를 생명과 영성의 사상가로 키워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우연한 만남은 도처에서 발생되어집니다. '와 보라'는 부름은 한번도 중단된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살아 계시는 한 이러한 초대는 언제든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습적, 반복적 삶의 습관, 변화를 두려워하며 늘 익숙한 것에 길들여져 있는 그래서 마음이 좁아지고 닫혀져 있는 상태에서 사건으로서의 은총은 발생될 수 없습니다. 마치 달팽이처럼 자신의 체면, 외모, 명에, 가진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겉은 한없이 두터워졌으되 내면이 물러 있는 자기만의 성에 갇혀 있는 모습 속에서 하느님 은총, 낯선 경험은 존재하되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한번도 현실 앞에 있는 그대로 서지 못하였으므로 우리는 현실에 무기력했습니다. 나의 부끄러움을 보여 주는 현실은 피하고 싶은 것이었기에 한번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은총, 우연한 만남이 없는 삶은 무기력할 뿐 아니라 항시 부정직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다나엘을 향해 네가 나를 보기 전에 내가 너를 먼저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던 나다나엘의 모습, 있는 그대로의 그의 현실을 예수께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편견과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현실 앞에 바르게 설 수 없었던 나다나엘을 부름으로써 예수는 나다나엘에게 현실을 돌려주었습니다. 새로운 경험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정말 오늘 우리가 달라지기를 원하며, 변화를 원한다면, 내 삶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 낯선 소리로, 우연한 사건으로 세미하게 다가오는 그분의 은총을 붙잡을 일입니다. 수 없는 우연한 만남, 낯선 경험들이 얼마든지 주변에 가까이 다가와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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