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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수의 근원지를 바꾸어놓은 여인

요한복음 최영실............... 조회 수 2212 추천 수 0 2008.06.02 19:4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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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4:1-42 
설교자 : 최영실 교수 
참고 : 새길교회 
요한복음 4장 1∼42절의 긴 단락에는 역사적 인물로서 전승되어 온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보도가 들어 있다. 많은 설교자는 이 본문에서 예수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너는 남편이 다섯 있었고, 지금 있는 남자도 너의 남편이 아니다"라고 말한 구절만 주목하면서, 이 여인을 '헛되고 헛된 것들'을 구한 여인으로, 혹은 결혼생활에 실패한 여인으로 말해왔다. 또한 그들은 이 여인이 여러 남자를 두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목말라 하다가, 예수가 그녀의 과거를 모두 알아 맞추자 회개하여 돌아온 여인으로 부각시킨다. 복음 성가에 수록된 '우물가의 여인처럼'의 노랫말은 바로 이러한 여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을,
그때 주님 하신 말씀, 내 샘에 와 생수를 마셔라,
오 주님 채우소서,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하늘 양식 내게 채워주소서, 넘치도록 채워주소서

요한복음에서 보도하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은 복음성가가 노래하고 있는 '우물가의 여인'같은 그런 여인인가? 그녀는 단지 '헛된 것들'을 구하면서 자신의 생에 목말라한 여인이었는가? 요한복음서 기자는 어떻게 이 '사마리아 여인'에 관해 보도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우리는 본문 전체를 직접 살펴보아야 한다.

요한복음 기자는 우선 1∼7절에서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를 보도한다. 예루살렘 지역에서 활동하던 예수는 바리새인들 때문에 그곳을 떠나 갈릴리로 가면서, 사마리아를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행에 지친 예수가 '수가'라는 동네의 한 우물가에 앉아 있다가 그 시간에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한다. 이것이 유대 남자와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의 시작이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그들이 만난 장소가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준 땅과 가까운 곳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요4:5∼6)라는 것을 상세히 설명한다.
그런데 창세기의 보도에 의하면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 '세겜'에 들어가서 돈을 주고 사서 후손들에게 물려준 곳이다. '세겜'은 예루살렘 북쪽 약 65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곳에는 에발 산과 그리심 산이 마주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여호와를 위해 최초로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야곱이 제단을 쌓은 곳도 바로 이곳이다. 그뿐 아니라 '세겜'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모여서 여호와를 예배하고 계약 갱신 식을 거행하고 왕위 식을 거행한 이스라엘의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솔로몬의 사후, 바로 이곳 '세겜'에서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이 반목하고 백성들이 둘로 나뉘게 되는 비운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유대 민족은 르호보암이 이끄는 남왕국 예루살렘 지역과 여로보암이 통치하는 북왕국 이스라엘로 분단된 채, 반목과 살육이 계속되는 비극의 긴 역사를 시작했다.
남왕국 유대와 북왕국 이스라엘 사이의 반목과 증오는 주전 722년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패망시킨 후 앗수르를 사마리아주로 명하고, 혼합 정책에 의해 메데와 페르시아 지역의 구다 사람들을 사마리아 지역에 이주시켜 혼인하게 함으로써 더욱 첨예화되었다. 남쪽 유대인들은 북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지칭했는데, 이 말은 최대의 욕설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순수한 유대인의 혈통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이방의 더러운 피와 혼합된 자라는 사실을 경멸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순수한 혈통을 내세우며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 노예보다 더 경멸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주전 587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70년 후 귀환하여 성전을 건축하면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전적으로 배제시켰고, 이 일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결국 주전 4세기에 북이스라엘은 알렉산더 대왕의 허락을 받아 세겜에 있는 그리심 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건축했다. 유대인들은 이 그리심 산에 세워진 북 이스라엘의 '성전'을 이방 종교와 혼합된 더럽고 배교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주전 135∼104년 사마리아의 세겜과 그리심 산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사마리아 성읍을 포위 공격하며 무자비하게 파괴시켰다. 자신들의 '성전'이 파괴된 이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들에 대한 사마리아인의 적대감은 고조되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요한복음이 기록된 시기인 1세기경 유대와 사마리아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저주받고 불결한 죄인인 '이방인' 취급을 하면서, "이방인의 고을에도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가르쳤다. 마태복음 10장 5절에 예수의 말로 되어 있는 이 말은 이러한 당시 유대인의 교설을 반영하고 있다. 사마리아인들도 그에 맞서 예루살렘 사람들을 증오했고, 유대사람들이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지 못하게 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증오에 찬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 지역을 지나가는 유대 사람들을 살해했고, 그것에 대해 유대인들이 보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와 제자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유대와 사마리아는 실질적으로 분단되어 있었다.
요한복음 4장 1∼2절의 보도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상황 때문에 예수가 사마리아 지역을 활동지역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단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잠깐 통과하려 했던 것임을 암시한다. 그런데 요한복음 기자는 왜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이 만난 장소를 '세겜'이라 지칭하지 않고,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라고 명시하는 것인가? 그것은 비록 남쪽 유대 지역과 세겜이 있는 북쪽 이스라엘이 분단된 채 서로 반목하고 있지만 본래 그들은 한 조상을 가진 한 동족이며 형제였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은 본래 한 민족이었던 이스라엘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던 거룩한 땅이었으며, 그곳에는 그들의 조상들이 함께 마셨던 '야곱의 우물'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유대인들에 의해 '더러운', '저주받은 땅'으로 불리며, 멸시받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유대인들로부터 저주받는 이 사마리아의 '세겜' 땅에서 유대 남자인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이 지금 만나고 있다.

요한복음 기자는 4장 9∼15절의 단락에서, 긴 여정에 지친 모습으로 '물을 달라'고 요청한 예수에 대해 사마리아 여인이 제일 먼저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관해 보도한다. 이것을 주목해보면, 사마리아 여인은 결코 자신의 개인적인 결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여인이 아니다. 그녀는 깊은 민족 의식을 가지고 유대 남자인 예수에게 도전한 여인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피로한 모습으로 물을 달라'고 요청하는 예수에게 순순히 물을 떠주는 대신, "당신은 유대 남자이면서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는 말로 대응한다. 요한복음 기자가 9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유대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하여 상종하지 않았다. 더욱이 유대 남자들은 '사마리아 여자는 요람에서부터 월경을 하기 때문에 나면서부터 부정하고, 다른 사람을 부정타게 만드는 자'라는 교설에 의해 '사마리아 여자들'을 부정하고 더러운 죄인으로 낙인찍고 상종하지 않음은 물론, 같은 그릇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여인의 대응은 이렇게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 특히 사마리아의 여인들을 차별하는 것에 대한 항거다.
여인의 항의에 대해 예수는 "네게 물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생수를 구했을 것"이라고 응답한다. 여인은 다시 도전한다. "당신은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한 분입니까? 그는 우리에게 이 우물을 주었고 그와 그의 아들들과 또 가축까지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이러한 여인의 말은, 예수가 참으로 '야곱보다 더 위대한 분'이어서 그녀뿐 아니라 동족인 사마리아 사람들의 고통과 억압을 풀어주며 목마름을 해결해줄 수 있는 자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전적 반문은 그녀의 민족의식과 메시아 대망을 반영해준다. 25절의 보도에 의하면 여인은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여인이었다. 그 때문에 여인은 생수를 주겠다고 말하는 예수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대신 과감하게 도전하며 묻는다.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의 도전과 반문 앞에서 그 자신이 목마른 사람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줄 종말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야곱의 우물로부터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듣자 사마리아 여인은 다른 것을 더 묻지 않고 즉시 예수를 '주'라고 부르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달라고 요청한다. "주여, 그 물을 내게 주어서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러 여기 다니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이러한 여인의 요구는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의회원이었으며 바리새파 남자인 니고데모의 행동과 비교된다. 니고데모는 예수의 말에 대해 시종일관 "어찌하여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다가, 결국 예수로부터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책망만 받고 만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니고데모와 달리 즉시 예수에게 과감하게 요구하고 있다. 당신이 나와 우리 민족의 고통스러운 삶과 목마름을 영원히 해결해 줄 수 있는 이라면, 그 생수를 지금 우리 민족 모두에게 달라!

요한복음 기자는 이어지는 4장 16∼19절에서 지금까지의 내용과 전혀 다른, 마치 한 여인의 과거와 결혼생활을 문제삼는 새로운 주제로 옮겨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을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단락에서 요한복음 기자는 우선, 예수를 향하여 '너는 누구인가?'라고 물은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대해 예수가 누구인지를 밝히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사마리아 여인이 어떻게 예수에 관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게 되었는지를 증언하려고 한다.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의 요청에 대해 아무 것도 주지 않은 채 단지 "너는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한다. 여인이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하고 답하자, 예수는 여인에게 "네가 남자가 다섯 있었고 지금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남편이 없다고 한 네 말이 옳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여인이 남자를 여러 명 갈아치우면서 방종한 생활을 한 여인으로 취급해버려서는 안 된다. 당시 사회에서 여자에게는 남편을 버릴 권리가 전혀 없었다. 남자들만이 여인을 마음대로 사고 팔며, 또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 합법적으로 그 아내에게 이혼장을 주고 내어버린 후 다른 여자를 취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부당한 법 체제 아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생존을 위해 여러 명의 남자를 거칠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그녀를 보호해줄 남편도 없이 고통 당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여인이다.
"인간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고", "사람의 깊은 속까지 아는" 예수는 결코 그 여인을 죄인으로 규정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여러 남자를 거치면서도 남편이 없는' 그녀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꿰뚫어본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가 단순히 여섯 남자를 둔 과거를 알아 맞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여러 남자를 거치면서도 '남편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그녀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주여, 내가 보니 당신은 예언자로소이다"하고 고백한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예언자'로 고백한 것은 놀라운 메시아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다양한 그리스도론적 칭호로 증언되면서, 특별히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던 '예언자'로서의 메시아인 '타헤브'처럼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모두 알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예언자'적 메시아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율법을 내세우고 있던 유대인들은 "나사렛에서 어떻게 예언자가 날 수 있겠느냐?"고 말하면서, 예수를 종말에 하느님이 보낼 메시아로서의 '예언자'로 보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 그녀와 말을 주고받고 있는 유대남자가 종말에 하느님이 보내어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알려줄 '예언자'라는 사실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를 종말의 '예언자'로 확신하면서, 그녀가 처음부터 관심 했던 민족의 분열과 갈등의 문제를 질문하기 시작한다. "우리 조상은 이 산 위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당신들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여인의 질문은 단순히 종교적 예배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이 주장하던 거짓된 예루살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대 항변이다. 모세 오경에서 입증하고 있는 것처럼 사실상 '세겜'에 있는 '그리심 산'은 아브라함과 야곱, 모세, 여호수아와 사사시대에 이르기까지 예배와 정치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다윗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운 이래, 특히 솔로몬 이후 남과 북이 갈라지면서 남쪽 유대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거룩한 곳으로 명하면서, '유대로부터 구원이 온다'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유포시켰다. 그리고 예루살렘 이외의 곳에 세워진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자들을 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하였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러한 예루살렘의 지배 이데올로기 자체의 부당성을 고발하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는 "이 산 위에서도 아니요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곳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예배드려야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말한다. 또 예수는 '하느님은 영'이시라는 것과, 그에게 예배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예수의 진술은 '영'과 '진리'인 '예수 자신과 아버지'에 대립하여 불의와 거짓을 조장하는 자들, 곧 종교적 예배를 지배와 차별의 이데올로기로 이용하고 있는 예루살렘주의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다.
예수가 이 모든 것을 말해주자 사마리아 여인은 놀랍게도 현재형으로 "그분이 오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줄 것인데,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여인에게 예수는 자신이 바로 그녀가 대망하고 있는 종말의 '바로 그'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그이다". 이로써 사마리아 여인은 민족적인 갈등과 분단의 문제를 깊이 인식하면서 예수에게 끈질기게 도전하며 질문한 결과, 종말의 메시아에 의해 일어날 '모든 것'을 '지금' 알게 된다. 그것은 갈라진 민족을 하나로 회복시키고, 거짓 이데올로기에 의한 모든 차별과 갈등과 증오를 해소시킬 종말의 메시아가 '지금 바로 그녀 앞에 살아 있는 인간 예수로 서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 즉시 물동이를 버리고 동네로 들어가 그녀가 예수에게 듣고 인식하게 된 종말의 '모든 것'을 증언한다. "당신들은 모든 것을 나에게 말해준 분이 그리스도인지를 와서 보시오." 여기에서 여인은, 많은 사람이 원문을 잘못 번역하고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가 그리스도인지를 반신반의하면서 말한 것이 아니다. 여인은 "모든 것을 나에게 말해준 사람을 와서 보라"고 말하면서, 그가 사마리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던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직접 와서 보고 확인하라고 말한다.
요한복음에서 '와서 보라'는 말은 사람들을 지금 역사 안에서 일하고 있는, 살아 있는 예수에게로 인도하며, 그 예수가 바로 종말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가 자신의 실존을 꿰뚫어본 것처럼 목마름을 호소하는, 살아 있는 예수가 종말의 메시아인 바로 '그'라는 사실을 꿰뚫어보았다. 그녀는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그녀가 깨달았던 '모든 것'을 증거 하면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직접 역사의 예수에게로 부른다. "너희는 와서 역사의 예수를 보라!"
30절은 여인의 증언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 동네로부터 나와서 예수에게로 갔다"고 보도한다. 그리고 39절은 그 동네에서 온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그 여인이 증거한 말 때문에 예수를 믿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언급한다. 사도행전의 보도에 의하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한 사람은 열두 제자에 의해 세워진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이며, 그후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로 가서 그들에게 성령의 세례를 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기자는 사마리아에 그리스도를 전한 최초의 사람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며 이 여인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요한복음 기자는 사마리아 선교가 제자들이 아닌,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채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던 한 사마리아 여인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예수가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는 동안 먹을 것을 사려고 동네에 갔던 제자들이 음식을 가지고 돌아온 이야기를 삽입하여 예수가 동네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추수 때가 이미 왔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리고 "씨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기뻐하지만 한 사람은 뿌리고 한 사람은 거둔다"는 격언을 이용하면서,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를 보내어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했다. 수고는 남들이 했는데 너희는 수고의 결실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씨 뿌리는 한 사람'과 '수고한 사람'은 예수나 예수의 제자들이 아니다. 예수는 추수를 하기 위해 '보내는 사람'이며, 제자들은 '남들이 한 수고의 결실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일 뿐이다. 31∼34절의 보도에 의하면 예수의 제자들은 그때까지 예수를 단지 '선생'인 '랍비'로 알뿐이며, 예수가 누구며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씨를 뿌린 사람'은 동네에 들어가서 최초로 메시아의 '모든 것'을 전함으로써 많은 사마리아 사람을 믿게 만든 '사마리아 여인'이다.
요한복음 기자는 편집사적인 기술로 '수고한 사람'에 관해 말한 다음, 곧 이어 다시 한번 '그 동네에서 온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를 믿은 것'은, '그 여인이 예수가 모든 것을 자기에게 말했다고 증거 했기 때문'이라고 부연한다. 요한복음의 증언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들로부터 '더러운 이방인의 땅'으로 저주받던 그곳, 사마리아에 예수가 누구인지를 올바로 증거한 사마리아의 첫 복음 선포자로서 우뚝 서 있다.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이런 보도와 함께 요한복음 기자는 40∼42절을 통해 놀라운 한 역사적 사건을 보도한다. 그것은 유대사람들의 멸시와 차별로 말미암아 유대 사람들에 대해 깊은 증오감에 쌓여 있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 남자인 예수에게 자기들과 함께 '거하기'를 청하고, 예수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 동네에서 이틀 동안 함께 '거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거한다'는 단어는 구원사적 용어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를 '로고스가 육이된 자'로 증언하면서 "그가 우리 안에 거하여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1장 35∼39절에서 제일 처음 예수의 제자가 된 안드레와 다른 한 제자가 예수와 함께 거한 사건을 보도한다. 그러나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 기적을 행한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믿었지만 예수는 그들의 속마음을 다 아셨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거하지 않았다"고 보도한다. 그런데 예수는 여인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함께 거하기를 청하자, 이틀이나 그 동네에서 사마리아 사람들과 함께 '거한' 것이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올바로 꿰뚫어본 한 여인의 놀라운 인식과 증언은 증오와 살육으로 얼룩진 유대와 사마리아의 증오를 깨뜨렸다. 유대 남자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함께 거하며 기뻐하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냈다. 유대와 사마리아의 뿌리깊은 증오와 분단의 벽은 허물어졌다. 저주받던 땅 '세겜'은 기쁨과 화해와 축복의 땅으로 회복되었다. 이제 '구원은 유대로부터 온다'고 말하면서, 차별과 분단을 조장시켜온 유대주의 이데올로기는 깨뜨려졌다. 지금까지 저주받던 땅 '사마리아'에서 하나됨을 이루는 종말적 구원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이 놀라운 사건은 전적으로, 이름도 없이, 경멸적인 언사로 불리던 한 '사마리아 여인'에 의해 비롯되었다.
그런데 요한복음 기자는 42절의 첨가문을 통해 종말의 메시아는 민족의 문제에 국한된 존재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의 '구주'라는 사실을 부연한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인에게 말한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는 그대의 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그분의 말을 듣고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요". 동네 사람들의 이 말은 결코 여인의 증거를 무효화시키거나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처음에는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에게 왔지만 이제는 역사의 예수를 대면하고 그분이 바로 '세상의 구주'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일 뿐이다.
이스라엘 선생이며 의회원인 나다나엘도,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들도 이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나다나엘은 예수를 떠나갔으며, 유대인들은 모든 것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여 예수를 귀신들린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욕하며 죽이려 했다. 참으로 예수의 제자들조차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올바로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를 꿰뚫어보고 증거 했으며, 그로 인해 마침내 사마리아 사람들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올바로 직시하게 되었다.
이 모든 증언을 통해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에 관해 '모든 것'을 읽게 되었다. '사마리아 여인', 그녀는 결코 자신의 개인적인 애정 문제에 목말라한 여인이 아니다. 그녀는 민족 전체의 문제로 말미암아 목말라하면서, 유대주의에 대해 항의하며 그 불의를 폭로한 여인이다. 그리고 역사의 예수가 바로 모든 불의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철폐하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생수를 주기 위해 지금 사마리아에 와 있음을 꿰뚫어보고, 그 '모든 사실'을 사마리아 땅에 증거한 여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유대와 사마리아 사이의 증오와 분단의 벽을 허물고, 화해와 하나됨을 이룩해 낸 여인이다. 아니, 그녀는 근본적으로 '구원은 유대로부터 온다'는 차별과 분단의 이데올로기를 깨뜨려 버리고, '생수의 근원지'를 바꾸어 놓은 여인이다. 모든 목마른 사람이 마시게 될 '생수'가 저주받던 땅 '사마리아로부터 흘러나오게 한' 여인이다.
오늘 우리 민족은 사마리아 여인이 살고 있던 때처럼 한 민족, 한 동족이 남과 북으로 나누인 채 반목하고 있다. 그리고 남과 북의 불의한 지배자들은 서울과 평양을 이데올로기화해서 증오를 조장하며 분단을 고착시키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 처해 있는 오늘 우리에게 요한복음이 증언하는 '사마리아 여인'은 '예루살렘'도 '그리심 산'도 아닌 곳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제3의 길, 곧 증오와 원수 됨을 깨뜨리고 민족을 하나로 회복하는 '그분'을 선포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있다. 모든 차별과 분단을 조장하는 거짓 이데올로기를 철폐하고 하나됨을 이루어, 저주받은 땅 '사마리아'를 축복과 화해의 땅으로 회복시키는 '씨앗'이 되라고 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 조상이 준 한 우물에서 모두 함께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마시라고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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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61 마가복음 믿음이란 무엇인가? 막10:46-52  권진관 형제  2008-06-02 1934
17460 마가복음 메시아 칭호의 배경과 의미 막8:27-30  이경숙 교수  2008-06-02 1836
17459 마태복음 새로운 세계, 새로운 관계 마11:2-11  이재정 목사  2008-06-02 1800
17458 마태복음 잠만 주무시는 하나님 마8:23-27  이정선 목사  2008-06-03 2105
17457 마태복음 열정 예수 마9:35-38  이정선 목사  2008-06-03 2181
17456 마태복음 저주받은 도시들 마11:20-24  박광현 목사  2008-06-03 1840
17455 마태복음 크리스마스의 기분과 예수가족의 아픔 마1:18-25  한완상 형제  2008-06-06 1948
17454 여호수아 약속하시는 하느님 수1:1-9  권진관 형제  2008-06-06 2121
17453 마태복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마11:28-30  서중석 목사  2008-06-06 7843
17452 누가복음 쓸모없는 종 눅17:7-10  길희성 형제  2008-06-06 1650
17451 마가복음 삶의 두 열매 막7:16-20  이정배 목사  2008-06-06 1802
17450 이사야 치유의 구원 사42:3-4  최만자 원장  2008-06-06 1768
17449 누가복음 팔이 밖으로 굽으시는 우리 하나님 눅4:22-30  한완상 형제  2008-06-06 1718
17448 마태복음 죄짓게 한 자에게 화가 있다 마5:20-26  최영실 교수  2008-06-06 1654
17447 마태복음 말씀과 실천 마7:24-27  정하영 목사  2008-06-06 1807
17446 시편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121:1-8  김이곤 목사  2008-06-06 2910
17445 시편 목자는 계십니까? 시23:1  김남준 목사  2008-06-06 2453
17444 시편 염려를 넘어서서 시23:2  김남준 목사  2008-06-06 2239
17443 시편 영혼의 침체와 회복 시23:3  김남준 목사  2008-06-06 2387
17442 시편 영혼의 회복을 주심은 시23:3  김남준 목사  2008-06-06 2141
17441 요한계시 마지막 추수 계14:장  강종수 목사  2008-06-08 1472
17440 고린도전 하나님의 동역자 고전3:9  이승남 목사  2008-06-11 3066
17439 누가복음 역사의 예수를 따라 눅7:33-35  권진관 형제  2008-06-15 1554
17438 신명기 삼가 잊지 말라 신8:11-20  박동현 목사  2008-06-15 1984
17437 고린도후 어느 여학생의 고난 고후1:3-7  길희성 형제  2008-06-15 1837
17436 마태복음 전통적 가치와의 갈등과 극복 마5:38-42  최만자 자매  2008-06-15 1603
17435 출애굽기 망각의 죄 출22:20-26  박충구 목사  2008-06-15 2023
17434 누가복음 하나님 닮기: 거룩하신 하나님, 자궁의 하나님 눅6:38  한완상 형제  2008-06-15 2156
17433 누가복음 부모의 권위 눅12:51-53  한인철 목사  2008-06-15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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