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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다'는 말씀-생의 마지막 평가

요한복음 최만자............... 조회 수 1715 추천 수 0 2008.09.08 00:5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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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9:28-30 
설교자 : 최만자 자매 
참고 : 새길교회 2006.3.26주일설교 
지금 우리는 기독교회가 부활절 전 40일간을 정하여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경건한 생활을 노력하는 사순절의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제정 초기에는 매우 엄격하게 금식을 하며 지키던 것이 점차 완화되어 오늘날에는 구제와 경건한 생활의 훈련을 하며 보내는 경향으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역사적 예수의 삶과 죽음의 과정에서 살펴보고 그 의미를 되새기려고 합니다.

복음서에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일곱 가지로 나타나고 있는데 요한 복음서에는 세 가지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9:26-27절에는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는 효심 깊은 모습을 들려줍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오늘 읽은 성서 본문에는 ‘내가 목마르다’라는 것과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 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은 누가복음 23장 46절에 나오고 이 말씀 후 운명하셨다고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들은 고통과 절망을 대체로 나타내고 있는데 오늘 읽은 요한복음 19:30절에 나오는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은 그와 대조되는 성취와 승리의 소리라고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에 대한 내용들은 쉽게 이해가 가는 것이지만 이 성취와 승리를 표현하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왜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완성이요 승리라고 생각하셨으며 어찌하여 그 고난이 완성이요 승리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이 궁금증은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의 신학에서는 전혀 고민거리가 아닙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통신학에서는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대속사건’이라는 해석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은 바로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는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 곧 대속사건이 예수의 죽음과 동시에 다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초라하기 그지없고 그의 추종자들을 절망감에 빠지게 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대속의 사건’으로 해석함으로서 그들의 절망으로부터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메시야로서의 예수를 전파하는 역동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매년 속죄일에 염소 두 마리를 준비하여 한 마리는 성전에서 희생 제물로 잡아 불에 태우고 다른 한 마리는 찌르고 때리고 하여 광야로 내쫓는 의식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염소가 백성들이 지은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의 죽음을 이런 속죄 물로 해석하였습니다. 특히 마가복음은 인자가 고난을 받고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된 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세 차례나 예언합니다. 예수의 죽음은 많은 사람 위해 자기 목숨 내어 주신 대속 사건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은은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가 바로 예수를 말하는 것으로 동일시하는 신학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 사상은 바울서신에서도 나타납니다. 바울은 특히 예수의 십자가에 기독교의 중심을 두는 신학을 정립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이나 갈라디아서 2장 20절 등에서 이사야 53장을 자명하게 연결시켜 예수의 죽음은 바로 구약예언의 성취라는 정통성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해석들은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찾아내기 보다는 신앙으로 고백되어지는 예수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다니엘 7:13-14에 나오는 인자 사상의 메시야를 대망한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인자는 영광과 심판자로 오는 전통적 메시야 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고난 받는 종’으로 오는 이사야 53장에만 나오는 메시야 상은 별로 주목 받지 못하였던 상황이었는데 기독교는 그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 사상을 예수와 동일시하고 예수 십자가의 고난을 대속적 고난으로 승화시킴으로서 명실 공히 십자가를 기독교 상징의 중심에 세웠습니다. 이런 해석은 기독교 역사를 따라 오늘에 까지 지배적인 신학으로 자리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 지면서 과연 역사적 예수가 이사야 53장의 종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그의 사역을 하였고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졌다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예수가 과연 십자가 위에서 이런 의식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자신의 인생을 평가하고 있을까?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극한적 고통의 순간에 이렇게 자신감에 차서 ‘다 이루었다’고 자신의 생을 평가할 수 있었을까? 물론 그 사실을 역사적으로 추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현대신학에서는 예수의 죽음이 보편적인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건이었다고 말하는 정통주의 신학적 해석은 더 이상 현대인에게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피의 희생을 강요하는 고대의 성전예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희생제물 사상이 이해되고 용납되지만, 그러나 이 속죄신학은 현대인의 정서에는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며 적용이 어려운 신학적 구조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회해하기 위해 자기 아들의 피를 요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잔인한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고난은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예수의 행동은 지극히 수동적이며 그의 세상을 향한 혼신을 다 한 투쟁적 삶 또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무의미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죽음’이라는 인간의 거대한 실존적 고통 앞에서 혼돈과 절망에 몸부림 친 역사적 예수의 실존적 모습을 외면한다면 그의 인성은 기독교의 전통 유산 안에 매몰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대속론으로 도그마화한 신학의 도식적 해석을 넘어서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 그의 인간 실존적 모습을 추적함으로서 그 의미를 새롭게 찾아야 할 때에 이르렀습니다. 공관 복음서들은 예수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기운 앞에 얼마나 초조해하고 두려워하였으며 극도의 고독에 몸부림치고 괴로워하였는가를 숨김없이 보여줍니다. 차정식 교수는 ‘뒤집어 읽는 신약성서’라는 책에서 예수가 십자가 앞에서 인간 실존적인 부대낌을 받았다고 표현합니다. 예수가 잡히셨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죽음이 다가옴을 조금씩 더 민감하게 예감하면서 공포와 고뇌로 떨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막 14:3-26). 그리고 그 고난을 비껴가고픈 호소를 토해냅니다. “아바 아버지여 당신은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치워주옵소서.”(막 14:36) 이 말은 ‘나는 더 살고 싶다, 나를 살게 해 주오’라는 간청을 하는 말로 들린다고 차 교수는 말합니다. 죽음에 임한 모든 인간의 생존본능을 자연스럽게 노출하는 예수의 모습을 봅니다. 따르고 함께 하던 제자들은 모두 깊은 잠에 취해 있고 말할 수 없는 고독과 외로움과 공포의 시간을 맞고 있는 예수를 발견합니다. 예수의 살려 달라는 간구는 생의 본능 뿐 아니라 자신에게 죽음만이 유일한 선택인지의 여부를 확인받고자 하는 열망을 또한 담고 있습니다. 그 고통을 비낄 수만 있으면 비껴가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그럼에도 복음서 기자는 여기서 예수의 또 다른 면모를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는 간구로서 그 모든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서는 예수의 승화된 의지를 보여줍니다. 비록 두렵고 떨려서 비껴가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비껴가서는 안 될 길이라면 그것과 대면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생의 강한 욕구를 노출하면서도 그러나 그 이상의 신념과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차원을 넘어서는 또 다른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라 일생을 제대로 마무리 하고자 하는 성숙한 의지입니다. 공포의 차원을 넘어서 생의 다른 차원에 들어서면서 그제야 예수는 자고 있는 제자들이 측은하게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차 교수는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론적 해석과 교리가 이루어지기에 앞서 자기 자신의 죽음에 직면하여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고통을 노출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예수를 동시에 보게 됩니다.

오늘 요한복음 기자가 말하는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이 두면의 모습과 연결되는 내용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잔을 내게서 치워 주소서’라고 간청하는 것은 그가 십자가 형을 비껴 갈 수 있는 타협의 여지와 자신이 다른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유혹을 물리치고 ‘나는 십자가를 비껴 갈 유혹을 물리치고  이제 그 끝자락인 죽음 앞에 이르렀습니다. 아 나는 다 이루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어 보입니다. 편안한 길, 안락한 길을 버리고 괴롭고 힘든 길을 택하여 살아온 그의 삶이었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그날그날 밥벌이 하면서 지나면 그 뿐일 인생을 굳이 많은 사람들의 아픔에 동참하면서 그들의 서러움에 끼어들면서 모두 함께 잘 사는 세상 만들어 보자고 온갖 괴로움 다 당하다가 십자가 까지 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얼마나 불행한 한 청년입니까? 공중의 새도 집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곳 저 곳 방랑하며 다녔고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 천대도 받았고 미치광이로 몰리기도 하였습니다. 며칠 전에 들은 이야기 인데 세상 살면서 억울함을 수도 없이 당한 한 사람이 억울함을 풀길이 없어하다가 예수의 상 앞에 나아가 내 이 억울함을 좀 풀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더니 예수께서 나 보다 더 억울하냐? 하고 되물었다는 것입니다. 김명수 교수는 예수의 공생애 기간의 삶의 모습의 특징은  탈 가정, 탈 고향, 탈 소유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인간에게 안락과 평안을 주는 모든 요소들을 자발적으로 버리고 오직 타자를 위한 삶의 길을 걸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 선교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제자들에게도 자신처럼 소유, 연고지, 가정이라는 세 가지 인연의 사슬로부터 해방 될 것을 촉구합니다.  공의 삶을 위해서는 사의 삶을 먼저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적인 삶은 무엇인가? 자기 욕망을 채우는 삶이다. 공적인 삶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에 대하여 엄격한 삶이다. 곧 자기를 비우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예수를 본래 하나님과 동일한 모습 지녔으나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셔서 만물의 주로 삼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삶과 그가 자신의 생의 마지막 즈음에 하는 고백도 예수와 유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문에서 나를 건져주랴’라는 삶의 여정에서 겪는 고난으로 좌절하고 몸부림치는가 하면 생의 마지막 지경에서는 ‘나는 이제 내 길을 다 달려왔고 믿음을 지켰다’라고 고백합니다. 자기 욕망을 비우는 행위 곧 타자를 위한 행위, 공공의 이익을 위한 행위를 예수는 그의 삶에서 일관했고 그를 따르는 우리들에게 이 길을 걸어라 하고 요구합니다.

예수의 일생은 좌절과 제기의 반복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브루츠 M. 메츠거는 예수의 생애를 세 기간 으로 나눕니다. 첫째는 모호한 해(The year of obscurity)의 기간으로 예수는 작은 무리를 이루고 세례자 요한과 함께 활동하던 시기로 회개의 필요성을 외치고 민족의 영적 각성을 위해 활동하면서 점차로 요한 보다 더 많은 제자들을 끌기 시작한 시기이며,  둘째는 대중적 호감의 해로 갈릴리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일반 대중의 호응을 크게 얻고 대중의 인기를 끌었고 날이 갈수록 그의 가르침의 영향권 아래로 사람들이 모여 들어왔습니다. 세 번째로는 배척당하는 해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가끔 노출되었던 적개심이 더욱 심화되었던 기간입니다. 유대지도자들의 외적인 반대의 증가와 자기를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 대한 예수의 요구로 말미암아 (막 8:34-38, 10:21-22, 요 6:60-66) 군중들 사이에서 예수의 인기는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제자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으며(요 6:66) 베드로가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한 후 자신이 바로 고난과 죽임을 당하는 메시야 임을 말하였습니다.  예수는 군중 설교를 줄이고 자기의 죽음과 제자들의 사명 수행에 대비시키기 위해 제자들에게 겸손과 희생과 사랑을 가르치는데 전념하였고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는 수없는 배반당함과 좌절이 계속된 삶의 여정에서 끝까지 진리 앞에,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삶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에 결국 이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이렇게 힘든 과정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뜻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것은 입신양명이나 종교의 도그마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사람들, 백성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요한 13:2에는 예수가 마지막 때가 오는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명수 교수는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받은 이유를 그의 성전 숙청 사건에 있다고 봅니다. 십자가는 당시 정치범들에게 적용하는 형벌이었고 예수는 정치범이었다고 합니다. 성전을 숙청한 사건은 바로 당시의 무서운 권세를 누렸던 성전세력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예수는 당시의 백성들을 고통당하고 못살게 하는 핵심적인 불의의 구조가 성전세력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그들과 맞서서 그 세력을 무너뜨리는 것이 백성을 살리는 길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저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성전세력과의 대결을 포기 할 수 없었고 따라서  모진 십자가라는 형벌을 비껴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곧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았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그래서 고통당하는 백성들을 사랑한 예수의 자발적 선택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록 죽었지만 진리 앞에 서서 다 이룬 생애였습니다.

사순절을 지키는 대부분의 교회들의 행사들이 요란스럽습니다. 철야기도, 새벽기도를 비롯하여 금식하고 침묵하는 등등. 오래전에도 한번 말씀드렸지만 신학대학교 교정에 나무 십자가를 세워 놓고 한 학생이 예수를 재연하여 직접 십자가에 하루 종일 달려 고통을 체험하고 그 아래 여러 학생들이 예수의 제자들의 모습을 또한 재연하는 행사를 하는 것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의 고통을 실제적이고 감각적으로 느껴보려는 노력들은〈Passion of Christ〉와 같은 영화에 열광하며 예수에 대한 사랑으로 눈물 흘리고 감사하는 모습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감각적 고통에만 집착하는 예수의 고난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의 보혈로 내 죄가 눈처럼 희어진다는 대속 교리에 집착한 예수의 고난 이해는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많은 부분 은폐시킨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대속적인 화학적 작용에만 집중하고 그가 왜 무엇을 위해 고통당하였고 죽었는가에 대하여 오히려 침묵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대속론이냐 아니냐는 소모전적 논쟁은 의미 없을 것입니다. 칼 라너의 지적대로 예수가 인간으로 겪은 고난은 그것이 생물학적 종말을 뜻하고 죽음에 대하여 ‘왜?’ 라는 개인적 질문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인간적 고난과 동질적인 것입니다. 저는 예수의 이 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생을 ‘다 이루었다’(다 해내었다, 세상의 불의한 악의 세력과 대항하여 이겼다)는 고백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를 따르는 우리도 생의 마지막에 남길 말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이야기가 누구나 통과해야 하는 죽음이라는 인생의 담론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 자신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게 될까요? 우리들 중에 내 인생은 완성이다 라고 소리를 크게 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은 완성입니까? 미완성입니까?  나의 선택과 상관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내가 원하고 계획하는 대로의 인생행로가 쉽사리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세상 살면서 겪은 슬픔과 고뇌와 고통은 기쁨과 환희보다 더 많은 듯한 것이 보통 인생들의 여정이 아니겠습니까? 가수 최진희 씨가 부른 노래 가운데 ‘인생은 미완성’이란 노래도 있는데 이런 우리 인생의 굴곡을 바로 노래에 실은 것일 것입니다.

고난과 좌절로 점철된 삶의 여정에서도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길을 지켜가신 예수의 자신의 생애에 대한 마지막 평가를 다시 기억하면서 우리도 우리 생의 마지막 평가를 어떻게 내리게 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순절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비문에는 어떤 글들이 쓰여질까? 예수 따르는 사람으로 내 일생은 괜찮은 것인가? 다 이루진 못했어도 적어도 나의 갈 길을 다 달렸다고, 나의 최선을 다 하였다는 고백은 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성전 세력은 무엇이며 그것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악의 세력에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라는 물음들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사순절을 맞아 진정으로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 실존적인 고통을 그대로 가지면서도 최종 결단을 내려야할 때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섰던 그 예수를 따른다는 우리들은, 그의 탈 소유, 탈 연고적 삶의 모습을 따른다는 우리들은, 그런 우리의 삶은 예수를 따르지 않는 사람보다는 좀 다른 차원을 가지는 모습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길이 고통스러워 흔들릴 찌라도 결국 그 진리를 따르고 진리의 길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 ‘죽지만 그러나 결국 다 이루는’ 그런 인생을 보내기를 원합니다. 예수를 따르지 않는 사람보다는 조금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 기도하고 실천하는 사순절을 보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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