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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혼자가 아니라

요한복음 최용우............... 조회 수 1864 추천 수 0 2008.10.30 08: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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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6:25-33 
설교자 : 이재철 목사 
참고 : 1996년8월 18일 
제목:내가 혼자가 아니라
본문:요한복음 16 : 25∼33
설교: 이재철  주일 설교말씀1996년8월 18일

지난 4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일본 도쿄에서, 어머니와 아들이 굶어 죽은 지 한달 만에 발견된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부검 결과, 금년 77세의 어머니와 41세의 아들은 모두 영양 실조로 숨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병든 아들은 병상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기에 노모가 연금으로 생계를 꾸려야만 했습니다. 매월 10만엔의 연금을 받아 85,000엔의 아파트 월세를 지불한 후, 월 1만 5천엔으로 연명해 오다가, 끝내 11년만에 차례로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시체는 아파트 앞에 매일 수북히 쌓여 있는 신문을 이상하게 생각한 이웃의 신고로, 죽은지 한 달만에 발견되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도시 한 가운데에서 모자가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는데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먼저 굶어 죽은 다음 어머니가 죽었는지, 아니면 어머니의 시체를 본 뒤에 아들이 숨을 거두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들은 모두 쓸쓸하게 죽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손바닥만한 아파트 단칸방에서 어머니와 아들이 차례로 죽어갈 때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바로 그 어머니와 아들이야말로 고독한 현대인, 즉 우리모두의 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죽을 것 같습니까?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 임종을 맞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게는 자고 나니 죽어 있더라는 식입니다. 잠든 가족 곁에서 홀로 쓸쓸히 죽었다는 말입니다. 아니, 내가 죽는 순간 나의 가족들이 깨어 나를 지켜본다 한들, 내 가족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겠습니까? 나를 위해 대신 죽어줄 가족이 있겠습니까? 아니면 나와 함께 죽어줄 가족이 있겠습니까?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도 인간은 철저하게 혼자 죽는 것입니다. 쓸쓸하기는 매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날 때는 또 어떠합니까? 태어날 때 역시 홀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태속에 쌍둥이가 들어 있다 할지라도 동시에 태어나는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한 사람씩 차례로, 철저하게 홀로 세상의 문을 열고 나와야만 합니다. 홀로 고독하게 태어났다가 홀로 고독하게 죽는 것이 바로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렇다면 고독한 출생과 고독한 죽음 사이에 있는 인간의 삶은 어떠합니까? 탈무드는 인간의 나이에 따라 인생을 7단계로 나누고 있습니다.

① 한살은 임금님 : 모두 왕을 모시듯 달래고 어르고 비위를 맞추어 준다.
② 두살은 돼지 :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구별치 못한 채 마구 흙탕 속을 헤집고 다니기 때문이다.
③ 열살은 양 : 자기를 치장하며 멋을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의미다.
④ 열여덟살은 말 : 크게 자라서 자기의 힘이나 재능을 남에게 과시하려는 때다.
⑤ 결혼하면 당나귀 : 가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터벅터벅 걸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⑥ 중년은 개 :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윗사람에게 꼬리치고 아양을 떨면서 호의를 구걸하지 않으면 안된다.
⑦ 노년은 원숭이 : 늙어서는 어린이로 되돌아가지만 아무도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재주를 부리는 젊은 원숭이들에게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 탈무드의 내용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가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숨이 차도록 터벅터벅 걸어도 사람들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족들을 부양키 위해 비굴할 정도로 꼬리를 치고 다녀도 내 가족들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나이 늙어 은퇴한 뒤에는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 속에서 살고 싶은데,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은 고독한 존재란 것입니다. 그 주위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할지라도 결국 인간은 철저하게 홀로 태어나, 철저하게 홀로 살다가 철저하게 홀로 죽는 고독하기 짝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류 최초의 부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동시에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아담이 먼저 창조된 후에 하와가 창조되었습니다. 그들은 각각 홀로 창조된 것입니다. 아담은 흙으로 빚으신 대 반해 하와는 아담의 갈빗대로 만드셨습니다. 아담은 남자로 만들어졌지만 하와는 여자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결코 일치될 수 없는 엄연한 차이가 상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아담과 하와는 함께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철저하게 홀로인 고독한 존재였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부터 인간을 고독한 존재로 만드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고독은 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가득 메운 군중 속에 있으며, 고독은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고독은 타인과의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지붕 아래에 사는 가족 사이에도, 함께 잠자리를 하는 부부사이에도 도저히 메꾸어질수 없는 고독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을 그처럼 고독한 존재로 만드셨겠습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오늘의 본문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때가 되면 더 이상 비사로 말씀치 않겠다고 하셨으나 제자들은 지금 주님께서 비사로 말씀치 아니 하셨다고 해서, 그때를 지금 당장이라고 속단하여 주님을 완전히 알고 주님을 믿노라 확신에 찬 고백을 했건만,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주님에 대한 제자들의 배신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음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31∼32a)

주님을 향해 확신의 고백을 행하는 제자들, 그 자신만만한 얼굴에서 주님은 벌써 배반의 기미를 읽고 계십니다. 그들의 고백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주님을 찬양하던 바로 그 입으로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리라는 것을 지금 주님은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남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3년 동안이나 사랑하셨던 당신의 제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배신의 길을 떠나는 그 제자들이 얼마나 가증스럽겠습니까? 그리고 미련없이 배신의 길로 돌아서는 제자들의 등을 보시는 주님께서 얼마나 고독하셨겠습니까?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버림받는 스승―인간에게 이보다 더 고독한 순간이 또 따로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고독할 수밖에 없는 고독의 순간에 놀랍게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32b)

모든 정황으로 볼 때, 지금 주님께서는 처절한 고독으로 인해 몸서리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주님께서는 전혀 고독치 않으셨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한 채 주님을 버리고 떠나버렸을 때, 그래서 혈혈단신이었을 때, 바로 그때 주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실하게 만나고 체험하고 느끼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정녕 고독하셨기에 고독치 않으셨고, 진정 혼자 셨기에 결코 혼자가 아니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고독하게 만드셨겠습니까? 왜 더불어 살면서도 홀로 일 수밖에 없도록 창조하셨겠습니까?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생명이요 진리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동행케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고독이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이요, 군중 속에서 홀로 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란에 살던 아브라함은 그 곳에서 우상 장사로 상당한 재산을 모은 부자였습니다. 부자는 보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켜야 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화를 싫어합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단 한 말씀에, 그것도 `너의 본토 친척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는 그 한 말씀을 듣고 정말 자신의 부의 기반인 하란을 떠나 미지의 가나안 땅으로 향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땟거리도 없는 거지였다면 이판 사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명실공히 갑부였습니다. 그 갑부가 어떻게 하나님의 그 한 말씀에 그토록 철저하게 순종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사야서가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혈혈 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 (사51:2)

아브라함에게는 분명한 직업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돈이 있었습니다. 친척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도 있었습니다. 전혀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를 가리켜 혈혈단신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에게는 자랑스런 자신의 직업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고독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돈으로도 메꿀 수 없는 고독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친척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독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임을 느낄 수밖에 없는 깊은 존재적 고독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느 것, 그 누구로도 해결될 수 없는 그 깊고도 깊은 존재적 고독으로 인해, 아브라함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바꾸어 말해 아브라함이 고독을 알지 못했더라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재산과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하기만 했다면, 그는 그 당시 하란의 다른 사람들처럼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결코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 인생은 정말 고독하게 공동묘지에서 끝나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 세상의 것으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목마름, 메울 수 없는 고독이 있었기에 하나님과 더불어 고독치 않을 수 있었고,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언제나 홀로일 수밖에 없음을 통감하는 자이었기에 하나님과 함께 결코 혼자일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깊은 고독, 그것은 그 무엇보다 귀한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왕을 향하여 칼을 겨누고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이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우면서도 얼마나 급했던지 신도 신지 못한 채 맨발로 도망 길에 올랐습니다. 자식의 칼날을 피해 도망가는 아버지, 그 순간 그 아버지보다 더 고독한 사람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비록 다윗 곁에 600여명의 측근들이 있었다 할지라도 다윗은 뼈저린 고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독 속에서 맨발로 도망가던 다윗이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감람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쿠데타군의 공격을 피해 맨발로 도망갈 지경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멀리 도망가는 것외에 무슨 상책이 또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 다윗이 감람산 꼭대기에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음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자식에게 버림받는 그 뼈저린 고독의 구렁텅이 속에서 다윗은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더 깊은 만남을 가졌던 것입니다.

자기에게 칼을 뽑아 들고 덤벼드는 아들 압살롬의 모습 속에서,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이면서 천방지축 하나님께 덤비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와 함께 하시면서 자기를 사랑하시사 바로 세워 주시기원하는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경황 중에 하나님을 경배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뼈저린 고독 속에서 만난 그 하나님의 마음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칼을 들이댄 아들 압살롬을 미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홀로 문루 위로 올라가 통곡했습니다.

"내아들 압살롬아, 내아들, 내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위해 대신 죽었더면, 압살롬 내아들아"(삼하 18:33)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식으로부터 버림받는 고독으로 인해 하나님과 더불어 그의 인생은 더 이상 고독치 않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고독 역시 복된 고독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재판정에 섰을 때에 한 사람도 나를 도와주지 않고 모두 나를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를 버리고 간 그들이 엄한 벌을 받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딤후 4:16)

바울이 가는 곳마다 바울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해 줄 것 같이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체포되어 재판정에 섰을 때 그들은 모두 바울을 버리고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가장 도움이 필요할 때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들을 원망치 않고 오히려 그들이 벌을 받지 않기를 기도 드립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고 그 참담한 고독으로 인해 주님과 더 깊은 교재가 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고독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고독을 두려워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 없이 고독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이 세상의 것만으로 행복하다면, 그 사람은 머지 않아 정말 고독하게 흙으로 돌아가버리고 말 것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까닭없이 등을 돌리고 떠나갔습니까? 돈으로 채워지지 않는 고독을 느끼고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 싸여서도 혈혈단신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더 깊이 만날 은총의 때입니다. 인간은 홀로 태어나 홀로 살다가 홀로 죽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고독을 아는 자는 하나님과 함께 태어나서 하나님과 함께 살다가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떠나는 자입니다. 진실로 고독한 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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