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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않는 탕자

요한복음 최용우............... 조회 수 1642 추천 수 0 2008.12.06 21:5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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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0:22-23 
설교자 : 이우근 변호사 
참고 : 법무법인 한승 대표변호사/새길교회 2007.9.9주일설교 

아버지의 재산을 빼앗듯 받아 챙긴 동생은 집을 나가 오래 동안 방탕한 끝에 마침내 참회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반면에, 형은 집을 떠난 일도 없고 아버지의 재산을 축낸 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집으로 돌아올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형은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처럼 동생을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동생을 증오했고, 돌아온 동생을 반기는 아버지의 태도에 분노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소외되어 있음을 깨달은 동생은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지만, 형은 아버지의 집에 함께 있다는 외형적 현상에 사로잡혀 아버지와 사실상 단절된 내면적 소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동생이 돌아온 탕자였다면, 형은 돌아오지 않는 탕자였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탕자…. 이것이 한국 교회와 신자들의 자화상 아닐까? 교회 안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종교적 소속감이 하나님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떠나 있는 삶의 자리, 그 소외된 자리를 깨닫지 못하게 만듭니다. 기도를 드리고 사도신경을 암송한다고 해서 모두가 신앙인인 것은 아닙니다. 비 신앙적 종교인일 수 있습니다. 교회전용버스로 여기저기서 실어 나른 신도들을 드넓은 교회당 안에 그득그득 채워 넣는 것이 꼭 올바른 신앙공동체는 아닙니다. 비 신앙적 종교집단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하고 부르짖는 자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 그렇게 삶을 살아내는 자들이 바른 신앙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열정적인 철야기도가 한낮의 삶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광장을 메우는 부활절 새벽 연합기도회, 조국통일과 민족화합을 위한 1,000만 성도 40일 철야금식기도회, 전국토의 복음화를 위한 미스바 구국 기도회,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 성령충만 대부흥 성회…. 이름조차 외우기 힘든 대형 집단기도회를 한국 교회처럼 줄곧 개최해 오고 있는 데도 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기도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신자들 스스로가 변화되지 못하고 시대와 사회를 감화시키지 못하는 곳 또한 한국 교회 외에는 달리 없습니다. 밤새워 기도하는 일에는 열심들이지만, 한낮에 바르게 사는 일에는 낙제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분열과 분쟁, 목회세습과 재정의 비리들이 모두 밤새워 기도하는 목회자들과 독실한 신자들에 의해 저질러져 왔습니다. 철야기도로 밤을 꼬박 지새우고 나온 아침부터 서로 헐뜯고 저주하며 속이고 싸웁니다.

금식은 밥을 굶어 위장을 비우는 고행이 아닙니다. 나를 비워 이웃에게 마음을 여는 ‘삶의 개방’입니다. 철야기도는 밤을 새워 수면을 거부하는 졸음참기의 자학이 아닙니다. 내 거짓됨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영성의 개방’입니다. 밤새워 기도하는 열심보다 한낮의 삶을 바르게 살아내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기도는 모름지기 은밀한 자리에서 은밀하게 하라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갈멜 산에서 바알제사장들의 기도는 하늘이 떠나갈 듯 시끄러웠지만, 엘리야의 기도는 고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엘리야의 기도에 임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오늘 이 땅의 소란스런 예배시간에 교회를 찾아오신다면, 그 참을 수 없는 “아멘, 아멘.”의 가벼움, 그 견디기 어려운 “주여, 주여.”의 시끌벅적함에 아마 고개를 가로 저으며 돌아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장탄식과 함께 말입니다. “이것은 내가 가르친 것이 아니다.”

나는 신약성서의 짧은 한 구절에 깊은 충격을 받고 정신이 아득해진 경험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유일한 참 대제사장인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안의 지성소나 성소에 들어가신 적이 없습니다. 유대인의 뜰도, 여인의 뜰도 아닌, 가장 외곽에 위치한 이방인의 뜰 한 쪽 곁에 있는 솔로몬의 행각을 거닐었을 뿐입니다.

이방인의 뜰이란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자리’입니다. 예수님을 이방인의 뜰, 솔로몬의 행각, 그 소외된 자리로 내쫓은 제사장과 종교인들은 목숨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투철한 야훼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진리는 그들 편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 안에 예수님의 자리는 과연 어디인가? 교회의 머리인 예수를 솔로몬 행각처럼 가장 소외된 자리에 내쫓고 직업종교인들과 시끄러운 신자들이 지성소고 성소고 뜰이고 모두 차지해버린 것은 아닌지? 마치 돌아오지 않는 탕자들처럼.

예수님을 솔로몬의 행각, 그 소외된 자리가 아니라 성소에, 지성소에 바르게 모시고 있다면 어떻게 총회장 선출에 엄청난 액수의 돈이 뿌려지며, 어떻게 재정의 비리로 교회분규가 일어나며, 어떻게 목회세습 따위로 교회를 부끄럽게 할 수 있을까?

자기 신앙의 무오류와 절대성을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이 예수님을 이방인의 뜰, 솔로몬의 행각으로 밀어냈습니다. 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 율법적 근본주의자들이야말로 돌아오지 않는 탕자들이었습니다.

구약의 60%가 운문, 즉 시로 씌어졌습니다. 예수님도 비유를 즐겨 쓰셨습니다. 운문의 상징과 은유와 비유를 단 하나의 사실적 의미로 환원할 수는 없습니다. 성서의 어느 단어 하나, 어떤 문장 한 줄에도 문자주의적 절대성을 부여하고 “나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고 자랑하는 근본주의는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대망하던 메시아’라고 선포한 세례요한은 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다가 뜻밖에 엉뚱한 물음을 예수님에게 내놓습니다. “오실 메시아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눅 7:20) 어느 누구도 감히 자기 신앙을 오류 없는 완전한 믿음이라고 주장할 수 없게 만드는 두려운 장면입니다.

의인은 자기의 죄를 괴로워하고 죄인은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법입니다. 종교사학자 쟈크 엘륄은 “인간은 자기의 죄 때문에 악한 것보다 자기의 선 때문에 더 악해진다.”고 지적했습니다.

파스칼은 팡세에 “자기의 신앙에 만족해 있는 것보다 더 큰 불신앙은 없다.”고 썼습니다. 주일 아침마다 습관적으로 무덤덤하게 읊조리고 넘어가는 사도신경을 바른 신앙고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보자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대로 지나쳤습니다. 천대받는 사마리아 사람만이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묻습니다. “누가 진정한 이웃이냐?”(눅 10:36) 성직자인 제사장, 종교적 신분을 가진 레위인은 이 자격심사에서 모두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종교적 권위와 열렬한 신앙고백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밖에는 다른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기도하는 사람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밖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 역시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많습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이 1,000만을 넘습니다. 그러나 ‘고백밖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신자들’ 또한 허다합니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강단에 올라 회개를 외치는 설교자들이 수만 명에 이릅니다. 그러나 ‘설교밖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설교자들’이 어디 하나 둘 뿐일까?

오늘 우리의 죄라면 아마 기도밖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죄, 고백밖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죄, 설교밖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죄일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헌금을 내고 신앙고백을 하고 뻔한 설교로 한 시간을 때우고는 안식일을 잘 지켰노라고 강변합니다.

서로 나누지 않으면, 마침내 나뉘고 맙니다. 나눔과 나뉨은 글자 한 획의 차이밖에 없지만 그 품은 뜻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치닫습니다.

나누면 둘이 되어야 할 텐데, 오히려 하나로 뭉치게 됩니다. 이것이 천사의 수학입니다. 나누지 않으면 하나 그대로 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둘도 나뉘게 됩니다. 이것이 아마도 악마의 수학일 것입니다.

미국의 전체 사회복지비용 중 절반 이상이 민간의 기부금으로 충당되고 있습니다. 정부예산은 반도 채 안 됩니다. 그중의 70% 이상이 개인들의 기부금입니다. 기업의 기부금은 30% 미만입니다. 국민들 개개인이 많이 나누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눔을 외치면서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않는다면, 사랑하라고 외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용서를 간구하면서 남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치면서 헐벗은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젊은 선교사들에게 유서를 쓰게 하고 위험한 전쟁지역에 내보내면서 자기 자신은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신뢰와 감화를 주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곁에서 고통 받는 소외된 이웃들, 저 탄식하며 부르짖는 뭇 생명들을 외면한 채 “이 세상에서도 복 받아 잘 살고, 저 세상에서도 영생을 얻어 잘 살아야겠다.”는 이기심 많은 사람들이 단지 주일 아침마다 교회당에 나와 입으로 사도신경을 암송하고 얼마간의 헌금을 드렸다는 이유만으로 슬쩍 얻어내는 구원이라는 것을 나는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눈 먼 구원이라면 차라리 사양하겠습니다.

예배를 영어로 service라고 합니다. servant, 종, 노예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의 신실한 종으로 서는 것, 그것이 곧 예배라는 뜻이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신실한 종으로 서서 그의 말씀과 명령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 예배요 바른 서비스입니다. 몸과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서 단지 입으로만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립서비스, 입술의 예배에 불과한 거짓말입니다. 립서비스에는 사람도 잘 속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속으실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라. 이것이 너희가 드려야 할 영적 예배다”(롬 12:1) 입술이 아니라 삶으로 드리는 예배, 립서비스가 아니라 라이프서비스(life service)로 드리는 예배가 영적인 예배, 참 예배라는 뜻입니다. 헬레니즘에 뿌리를 둔 그노티시즘(靈知主義)의 영육이분설(靈肉二分說)이 지배하던 시대에, 사도바울은 몸과 영혼을 하나로 묶는 통전적 신앙을 말했던 것입니다.

‘영적 예배’의 헬라어 원문은 로기켄 라트레이안(λογικην λατρειαν)입니다. 이것은 영어로 reasonable service 즉 합리적인 예배, 합당한 예배라는 뜻입니다. 로기켄은 로고스와 어원이 같습니다. 로고스는 말씀, 이성, 합리적 정신 등을 뜻하는 말로서 감성, 감정, 열정을 뜻하는 파토스에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날의 삶 속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똑바로 걷는 합리적 발걸음이 바른 예배라고 가르쳤습니다. 전자악기의 증폭된 음향으로 시끌벅적한 가스펠송, 찬양과 경배, 가스펠 댄스, 복음율동, 두 손을 높이 들고 눈물로 울부짖는 기도 소리,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아멘 아멘, 주여 주여…. 그 파토스의 열광을 로고스의 예배라고, 신령과 진정의 예배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있되 아버지의 마음을 떠나버린 큰 아들처럼, 교회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되 신앙공동체의 참 뜻을 등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떠나버린 신자들이라면, 그들은 언제까지나 돌아올 줄 모르는 탕자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떠나있다는 자각, 이 깊은 소외의 깨달음 없이는, 비록 고백과 예배의 현장 속에 있다 하더라도, 이방인의 뜰이나 솔로몬의 행각이 아니라 저 성소 안에, 아니 지성소 안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하더라도, 저 무수한 축원과 설교의 홍수 속에, 화려한 교회당에서 열광적이고 신비한 성령충만의 은사 속에 흠뻑 젖어있다 하더라도, 비록 그렇더라도 우리는 아직 돌아오지 않는 탕자들일 뿐입니다. 종교적 비 신앙인이요, 비 신앙적 종교집단의 구성원들일 따름입니다.
오늘 우리는 돌아온 탕자인가, 혹은 종내 돌아오지 않는 탕자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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