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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뉘었던 곳

요한복음 최용우............... 조회 수 1415 추천 수 0 2008.12.10 00: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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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20:1-18 
설교자 : 이재철 목사 
참고 : 주님의교회 
제목:시체 뉘었던 곳
본문:요한복음 20 : 1∼18
설교:(주일 설교말씀 1997년9월 21일)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는 날 이른 새벽,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을 때, 응당 그곳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시신을 쌓던 세마포와 수건, 즉 수의만 그 곳에 잘 정리된 채 개켜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난 8월 넷째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의 시신이 도난 당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하셨음을 증명해 주는 부활의 증거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 예수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남기신 예수님의 돈으로 구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단 1원의 유산도 남기지 못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수의는 산헤드린 의원이었던 니고데모가 자기 돈으로 구하여 예수님의 시신에 입혀 드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돌무덤 역시 예수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를 위하여 예비해 두었던 새 무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흘에 걸쳐 누워 있었던 그 무덤 속에 본래부터 예수님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시어 분명한 삶의 족적을 남기시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 자신의 것 하나도 없이 남이 제공한 수의를 입고 남의 무덤 속에 사흘동안 누워 계신 예수님의 시신을 머리속에 자세히 그려 보십시오. 그것 자체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 욥기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욥 1:21a)

여기에서 적신이란 `붉을 赤' `몸 身', 즉 아무것도 걸치지 아니한 벌거숭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공동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벌거벗고 세상에 내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니라"
표준 새번역은 그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 갈 것입니다"

한마디로 `공수래 공수거'란 말입니다. 당신의 것 하나도 지니시지 못한 채 남의 무덤에 누워 계신 예수님의 시신을 보십시오. `공수래 공수거'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마저 빈 손으로 오셨다가 빈손으로 무덤에 누워 계시다면, 하찮은 우리가 어찌 `공수래 공수거'란 하나님의 법칙에서 예외일 수가 있겠습니까?

진리란 결코 먼 곳이나 특별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 늘 평범한 곳에,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위에서 매일 접하고 있는 죽음 속에서 `공수래 공수거'란 하나님의 진리는 오늘도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듣고 망각치 않는 자만 빈손으로 무덤 속에 눕기 전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 세상에서 청빈의 도를 실천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철저하게 청빈하셨습니다. 그 분은 재물의 유혹에 빠지신 적도 없었고, 단 한번이라도 물질로 인해 양심을 저버리고 불의와 타협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그 분은 한평생 청빈을 벗삼아 사셨습니다. 그것은 그 분이 무능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분이 선택하셨던 바른 삶의 결과였습니다. 그렇기에 그 분은 그 청빈 속에서도 당신의 생명을 송두리째 나누어주실 만큼 부요하셨습니다. 그 분의 삶이 이처럼 청빈으로 시작하여 청빈으로 끝날 정도로 청빈의 부요함 속에 거하였던 것은, 그 분은 누구보다도 `공수래 공수거'란 하나님의 법칙을 분명히 알고 계셨던 까닭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 중 하나님 앞에 직접 들고 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음을 잘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자기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의 부귀영화를 주겠노라고 예수님을 유혹했을 때 그 분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습니다. 그런 것이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믿고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평생 그와 같은 청빈의 삶으로 일관하셨다면, 그리스도인 된 우리 역시 그 분을 본받아 청빈의 도를 따르지 않을 수 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청빈의 삶을 구현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청빈하면 수도원을 먼저 떠올립니다. 청빈이란 세상을 등진 수도원에서나 가능하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인식입니다. 청빈을 소유 정도 문제, 혹은 가난하거나 부유한 상태의 문제로 받아 들여서는 청빈이란 수도사의 전유물로 오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현해야 할 청빈이란 첫째로, 까를로 까레또가 그의 저서 <사막에서의 편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자유'입니다.

여기에서의 자유란 유행 풍조 허영 헛된 체면으로부터의 자유요 해방을 의미합니다.
현대인들의 집안을 들여다보십시오. 계층에 따라 가구며 집기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똑같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유행과 사치를 따른 결과입니다. 젊은이들의 혼수품도 예외는 아닙니다. 계층별로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이것 역시 풍조와 체면에 구속당해 있는 연고입니다.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남으로부터 업수히 여김을 받지 않기 위하여, 인정받기 위하여 똑같은 것 혹은 보다 나은 것 들을 구입하는 어리석음과 낭비를 현대인들은 얼마나 자주 저지르고 있습니까?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을 청빈과 동떨어지게 하는 유행 허영 풍조 헛된 체면이란 그것 자체가 무서운 유혹입니다. 청빈이란 이 모든 유혹으로부터의 해방이요, 자유입니다.

청빈이란 아무것도 구입 않거나 소유하지 않고 그저 알몸으로 빈손 빈 주머니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물건을 살 수도 있고 지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행이나 체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구입하고 소유하는 것―바로 이것이 청빈입니다. 무엇을 소유하고 있던 그 모든 것이 꼭 필요한 것들이기에 가진 모든 것들이 일상의 삶 속에서 사장됨이 없이 아름답게 이용되는 삶―이것이 곧 청빈의 삶입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는 것은 최악이지만 물질을 아름답게 이용하는 것은 그 물질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요한복음 12장 6절은 예수님의 제자중 가룟 유다는 돈을 관리하는 회계였음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도 돈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 중에 예수님께 돈을 헌금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가 하면 폭풍도 말 한마디로 잠재우는 능력을 베푸시는 주님이셨기에 헌금액수가 결코 작지 않았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걸치거나 지니시지 않고 알몸으로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청빈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는 분명히 돈이 있었습니다. 회계를 두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돈이 많았습니다. 그 돈으로 옷도 사 입으셨을 것이고 먹을 것도 구입하셨을 것입니다. 전도여행을 다니시면서 경비로도 지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불필요한 것의 유혹에 빠지신 적이 없었기에, 유행과 사치 그리고 허영과 헛된 체면으로부터 철저하게 자유한 분이셨기에, 그 분은 우리 모두에게 청빈의 본보기가 되신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이 구현해야 할 청빈이란 곧 봉사입니다. 만약 누구든지 필요한 것만을 소유하되 불필요한 것을 구입하지 않고 남는 여유 분을 자기를 위하여 쌓아 두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결코 청빈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구두쇠요 인색한 인간일 따름입니다.

청빈한 자가 필요한 것만을 소유하는 것은 그 나머지 분을 자기를 위해 쌓아 두기 위함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봉사의 도구로 선용하기 위함입니다. 아니 꼭 필요해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마저 자신의 것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그것 역시 언제나 봉사의 도구로 내어놓을 준비가 기꺼이 되어 있는 자입니다. 이것이 진정 청빈한 자가 소유 가운데에서 무소유의 부요함을 누릴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기에 청빈과 봉사는 언제나 동의어요, 봉사를 떠난 청빈한 삶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기업을 소유한 기업가라 할지라도 자신의 기업을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사회를 위한 봉사의 도구로 활용하고 선용한다면, 그는 청빈한 사람입니다. 학문이 깊은 학자가 자신의 학문으로 사람들에게 겸손히 봉사하며 산다면 그가 거지보다 나은 옷을 입고 있을지라도 그는 청빈한 사람입니다.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대통령이 권력을 진정으로 백성을 섬기기 위한 봉사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면, 그가 그 나라에서 가장 웅장한 대통령궁에서 살고 그 나라에서 가장 큰 차를 타고 다닌다 할지라도 그는 청빈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자기만을 위해 사는 자가 있다면, 그는 그저 가난한 사람일 뿐 청빈한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이 구현해야 할 청빈이란 곧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부당하게 물질을 추구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바르게 쓰는 것보다 바르게 얻는 것이 더 중요함은, 바르게 얻지 아니한 것은 결코 선한 봉사의 도구로 이용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바르게 얻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쳤음을 의미하는데, 그런 사람이 그렇게 얻은 것으로 어찌 남을 위해 바르게 사용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물질을 구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용하는데 이르기까지 물질과 관련된 삶의 전 과정이 하나님을 향한 바른 신앙고백이 될 때에만 청빈은 가능한 것입니다. 청빈이 있는 곳에만 정의와 진리와 사랑이 실천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물질을 불의하게 얻고 불의하게 사용하는 곳에는 정의와 사랑과 진리의 구호만 있을 뿐, 그 실체는 형성될 수가 없습니다.

에베소서 5장 8절∼9절이 이렇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 라. 빛의 열매는 모두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우리가 빛의 자녀로서 행하여야 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란 우리의 삶중 어디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합니까? 의식주는 인간의 삶을 가능케 해주는 기본적 요소이며, 그것은 물질을 떠나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삶 자체가 물질 가운데에서 물질과 더불어 영위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빛의 자녀로써 행하여야 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란 물질관계에서 반드시 결실되어져야만 합니다. 바꾸어 말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함은 물질과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관계에서 불량하고 불의하며 거짓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물질을 숭상하는 우상숭배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빛이 아니라 단지 캄캄한 암흑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청빈의 삶을 구현하지 않으면 안될 까닭이 또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착하심과 의로우심과 진실하심은 이 물질 세상 속에서, 물질과의 관계 속에서 실체화되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질에 관한 한 유행과 허영, 풍조와 헛된 체면으로부터 완전 자유 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생명마저 내어놓으실 정도로 당신께 속한 모든 것을 봉사의 도구로만 선용하셨습니다. 그처럼 단 한가지라도 당신만의 것으로 삼지 않으신 채, 남의 수의를 입고 남의 무덤 속에 시신으로 누워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야말로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해 당신의 착하심과 의로우심과 진실하심을 보여드리는 삶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처럼 청빈의 삶을 몸소 실천하셨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에 대하여 본문 12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았더라"

검은 옷을 입은 악마가 언제나 어둠의 상징이라면 흰 옷입은 천사는 광명, 하나님의 빛을 뜻합니다.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하는 무덤에서조차 청빈의 표상으로 누워 계셨던 바로 그곳, 예수님의 시체가 뉘었던 그 곳,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셨던 그 현장―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광명이, 하나님의 빛이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진실로 진리를 위하여 선택한 청빈의 삶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정의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취한 청빈은 영원히 빛난다는 것입니다. 자유와 봉사와 신앙고백을 위하여 구현된 청빈보다 더 광명한 삶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과 얼마전 너무나도 대조적인 두 여인의 죽음과 장례식을 목격하였습니다. 한 여인은 영국의 다이애나비였고, 나머지 또 한 명은 인도의 테레사 수녀였습니다. 한 여인의 삶이 얼마나 인간이 호사스럽게 살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면, 또 한 명의 삶은 인간이 얼마나 청빈하게 살 수 있는 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한 여인의 삶이 인간이 얼마나 자기를 위해 살 수 있는지를 증거해 주었다면, 또 다른 여인의 삶은 인간이 얼마나 타인을 위해 봉사하며 살 수 있는지를 증거해 주었습니다. 한 여인의 죽음이 얼마나 인간의 삶이 허망한지를 증명해 주었다면, 다른 여인의 죽음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가치로운지를 실증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영국의 총리는 장례식에서 다이애나비를 성자로 불렀고 영국의 언론도 그렇게 취급했습니다. 테레사 수녀 역시 장례식에서 성자로 불리웠습니다. 적어도 그 면에서 두 여인은 동일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두 여인 중 누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성자의 삶을 구현했는지를! 누구의 삶이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날 것인지를! 이미 하나님 앞에 섰을 두 사람의 영혼 중 어느 여인이 이 땅의 자신의 삶에 대해 가슴을 치며 후회했었겠는지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그 두 여인의 삶을 판단하고 평가하듯이 우리 각자의 삶 또한 사람에 의해, 아니 하나님에 의해 반드시 판단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든 `공수래 공수거'란 하나님의 법칙임을 잊지 마십시오. 청빈의 삶을 추구하고 구현하십시오. 그 삶만이 영원한 빛으로 남습니다. 그때에만이 후회없이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청빈을 추구하는 자만이 하나님과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이 세상의 유행과 허영, 잘못된 풍조와 헛된 체면으로부터 진정 자유하게 해 주십시오. 나의 소유가 모두 봉사의 도구로 선용되게 하시어 소유 속에서 무소유의 부요함을 누리게 해 주십시오. 물질과 관련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게 해 주십시오. 진실로 청빈한 자가 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사람을 바르게 사랑할 수 없음을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청빈한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진리가 이 땅에 구현되게 해주십시오. 청빈한 우리의 삶이 이 세상을 밝히는 하나님의 빛이 되게 해 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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