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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0: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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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200060416 |
제목:막달라 마리아의 복된 신앙
본문:요한복음 20장 1-18절
<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
지난주에 에이트 빌로우(Eight Below)란 영화가 개봉되었습니다. 남극에서 활동하는 한 탐험대원들이 사고를 만나 거의 죽을 뻔 했지만 죽기까지 충성한 8마리의 썰매 개들 때문에 간신히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상악화와 부상치료로 탐험대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살려준 8마리의 개를 남극에 남기고 급히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개를 사랑했던 주인공은 곧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남극을 떠났지만 여러 사정으로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개들은 남극에서 175일 동안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 투쟁하고, 주인공은 자기들을 살려준 개를 배반할 수 없다고 개를 찾아나서 결국 찾는다는 내용입니다.
주인에게 충성하는 개 이야기는 너무 많습니다. 이태리 어느 소읍에는 ‘피도’라는 개의 동상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피도가 물에 빠졌다가 죽음 직전에 한 사람에게 구출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피도를 집에 데려다가 키웠는데 피도는 주인의 은혜를 알고 얼마나 주인을 사랑하는지 주인이 직장에 갈 때에는 매일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오고 직장에서 퇴근할 무렵에서 매일 정류장까지 가서 주인을 맞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2차 대전 중에 주인이 버스를 타고 돌아오다가 그만 버스가 폭탄을 맞아 주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피도는 정류장에서 주인을 기다리는데 주인이 오지를 않습니다. 그때부터 계속 그 자리를 지키며 13년 동안이나 그 정류장을 떠나지 않고 죽은 주인을 기다리다가 결국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개도 자기를 구원한 주인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은혜를 받았다면 결코 그 은혜를 배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은 주님이 사망권세를 정복하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부활절은 325년 니케아에서 회의에서 춘분이 지나고 첫 만월 후 첫째 주일을 부활절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음력을 따르기 때문에 매년 부활절이 다르게 됩니다. 부활절은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부활시키고 새롭게 출발하는 날로 삼아야 합니다.
< 막달라 마리아의 복된 신앙 >
오늘 본문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가 막달라 마리아처럼 복된 존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주님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왔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왜 그녀가 그때 주님의 무덤으로 갔습니까? 유대인들의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무덤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안식일이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안식 후 첫날 새벽에 급히 서둘러 주님의 무덤을 찾은 것입니다.
그처럼 무덤에 와서 보니까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그녀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즉시 돌아가서 베드로와 사도 요한을 불렀습니다. 결국 베드로가 무덤 안에 들어갔는데 본문 6-7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세마포만 놓여 있었고, 예수님 머리를 싼 수건은 딴 곳에 개켜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덤 안을 살핀 후에 베드로와 사도 요한은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이 없네!”하고 별 반응도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무리 남자라지만 정말 정도 없고 눈물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명색이 한명은 수제자이고, 한명은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는데 그렇습니다. 그러나 본문 11절 말씀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을 도저히 떠날 수 없어서 무덤 밖에 서서 울면서 몸을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이 장면만 봐도 그녀가 참 주님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그녀처럼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그녀는 일곱 귀신에 들렸다가 치유 받고 그 은혜를 기억하며 개 피도처럼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에도 끝까지 그 현장을 떠나지 않았고, 죽으신 다음에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런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나는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누가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은혜를 체험합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자가 주님을 만나고, 또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자가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체험합니다. 교회도 자주 찾아야 합니다. 기도하러 찾고, 봉사하러 찾고, 필요한 것 없나 살피러 자주 찾아야 합니다. 또한 어떤 시련이 있어도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이 후퇴하지 말고 결코 불평과 원망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십자가로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은혜를 정말 감사하면 우리는 어떤 시련이 있어도 막달라 마리아나 개 피도처럼 주님 곁을 떠나지 말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끝까지 해야 합니다. 감정과 기분대로 살지 않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변덕이 많은 연약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 하나만은 어떤 충성스런 개보다 더 충성하게 하소서!”
개도 죽기까지 충성하니까 사람들이 동상을 세워준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하면 우리는 반드시 주님의 사랑을 받고 주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축복받지 않아도 우리는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에 끝까지 목숨을 거는 영적 프로가 되어야 합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프로는 자신의 일에 목숨을 걸지만 아마추어는 자신 일에 변명을 겁니다. 우리는 잘못에 대해 결코 남 탓을 하지 않고, 변명도 하지 않고, 금방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일을 끝까지 목숨 걸고 하고, 끝까지 주님의 뜻과 주님의 길과 주님의 편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2. 주님을 믿고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마리아가 울면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자 본문 12절 말씀을 보면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 시체 뉘었던 머리 편과 발 편에 앉아있었습니다. 조금 전에 없었던 두 천사가 갑자기 나타난 것을 보면 웬만한 담력 있는 남자도 놀라서 간이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본문 13절에서 “왜 우느냐?”고 하자 그녀는 “사람들이 주님의 시체를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해서 울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담대하고 침착한 모습입니까? 이 장면을 보면 요한일서 4장 18절에 나오는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진짜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면 삶의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고, 절망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최종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살면서 빈 무덤과 실패의 현장을 바라보지 말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절망을 보지 말고 희망을 보고, 단점을 보지 말고 장점을 보고, 실패를 보지 말고 패기를 가져야 합니다.
물론 담대하게 살라는 것이 눈물이 없는 사람이 되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슬픔의 눈물은 흘리지 말아야 하지만 마리아처럼 사랑의 눈물은 많이 흘려야 합니다. 어렸을 때 울면 바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울지 않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감동과 감사의 눈물을 많이 흘릴 줄 아는 사람이 승리자입니다.
우리에게 은혜가 넘칠 때는 대개 눈물이 있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는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고 많이 울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두려운 일과 고난과 실패 앞에서는 결코 눈물을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3. 주님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 사람은 3명의 마리아였습니다. 한 명은 ‘성모 마리아’이고, 또 하나는 ‘베다니의 마리아’이고, 또 하나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 중에서도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따라다니며 조용히 헌신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도 그녀의 헌신과 사랑을 막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5-56절 말씀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몇 명의 여인과 함께 예수님을 섬기려고 갈릴리 지역에서 예루살렘까지 그 먼 길을 오직 섬기기 위해 예수님을 좇아왔습니다. 그녀는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받겠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직 드리고 바치고 헌신하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본문 15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녀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하셨는데 그녀는 예수님이 동산지기인 줄 알고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라고 간청했습니다. 남자 시체가 얼마나 무거운데 연약한 여인이 그것을 가져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앞뒤 재보지 않고 자기가 가져가겠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그녀는 예수님께 헌신적이었습니다.
사랑은 계산이 없는 것입니다. 아직 부활을 믿지 못했던 그녀가 그토록 주님을 위해 헌신했다면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는 더욱 주님께 헌신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때로 주님을 위한 일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맡겨져도 마리아처럼 “제가 맡겠습니다. 제가 가져가서 해결해보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며칠 전에 임병철 선교사님 내외를 만나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분은 선교사 되기 전부터 선교사님들을 개인적으로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항상 선교를 강조하고 실천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전 가족이 선교에 똘똘 뭉쳤습니다. 그렇게 사니까 그 가정이 얼마나 축복을 받는지 모릅니다.
선교사님의 여동생은 지금 뉴욕에서 백만장자입니다. 남동생도 몇 개의 대형마켓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모님 가족도 그렇게 복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헌신하는데 오직 윗동서 한 사람만 부자이고 호인인데 헌금하는 데는 인색하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그 동서의 땅이 정부에 수용되어서 30억 정도를 받았는데 선교헌금을 하나도 안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선교에 적극적인 시누이가 끊임없이 잔소리를 했습니다. “오빠! 하나님이 그렇게 많이 주셨으면 10분의 1은 선교헌금으로 바쳐야지! 바칠 줄 모르면 빼앗겨! 그러나 바치면 더 받아!”
그렇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손대는 것마다 사기를 당하고 사고를 당한다고 합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책 한 권 쓸 정도로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도 사기를 당합니다. 그래서 신기하게도 헌신 안 하는 만큼 그 이상으로 돈이 나갔다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듣고 임 선교사님 사모님이 언니에게 선교 도전을 했더니 그 언니가 이번에 가족들 유럽 여행을 하려고 했던 돈을 몽골 선교본부로 보냈다고 합니다. 동생이 선교지에서 힘들게 선교하는데 자신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유럽 여행을 가면 무슨 사고라고 날 것 같아서 선교헌금으로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얘기를 듣고 다 웃었지만 사실 웃을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분명한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드리면 신기하게 더 받습니다. 그러나 드리지 않으면 신기하게 더 빼앗깁니다. 임병철 선교사님은 자신의 전부를 다 드리는 삶을 살고 있지만 결국 보면 누구보다 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드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더 큰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4.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제가 시체를 가져가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도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에 감격해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시며 본문 16절에서 “마리아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막달라 마리아는 금방 주님의 음성인 줄 알아차리고 너무 반가워서 “랍오니여(선생님이여)”라고 소리치면서 예수님 품에 안기려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본문 17절에서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그리고 어떤 명령을 그녀에게 주십니까? “너는 네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즉 주님의 부활하셨음을 형제들에게 전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 품에 있고 싶지만 주님은 우리들에게 더 차원 높은 자세를 원하십니다. 즉 주님을 만났거든 그 주님을 세상에 나가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가 전하려는 자세는 없고 기도원에서 기도만 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 삶을 찬송가 499장 3절은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결국 막달라 마리아는 신비주의적 삶을 포기하고 가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전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전도는 우리 삶의 최대 목표이고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날, 무디 목사님이 전도설교를 하니까 한 청년이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전도가 중요한 줄 알지만 먼저 은혜가 있어야 복음을 전하지요.” 무디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그건 핑계야! 원망과 불평과 핑계는 영혼과 공동체를 죽이는 독약이네. 은혜가 있어야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게. 핑계하는 삶에는 은혜가 없어! 전도는 사명이고 명령이야! 먼저 전하면 은혜가 생기네.”
우리가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려면 무엇을 받고 나서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먼저 해야 할 것을 해야 합니다. 항상 ‘받을 생각’보다 ‘할 생각’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복음 전파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우리를 바로 천국에 데리고 가지 않는 이유는 부활의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물질과 재능과 영광을 복음 전파에 사용해야 합니다.
19세기 초, 마취제가 없을 때, 가장 무서운 말은 “수술해야 합니다”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수술의 고통 때문에 자살하는 환자도 많았습니다. 개복수술은 거의 죽음을 뜻했고, 그나마 대부분의 수술은 사지(四肢) 절단 수술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취 없이 팔다리를 끊어야 하기 때문에 수술을 얼마나 빨리 하느냐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1812년 프랑스의 군의(軍醫) 라레는 전쟁터에서 24시간 동안 200건의 사지를 절단하는 엄청난 기록을 남겼습니다. 1840년대에는 영국의 로버트 리스턴이 세계에서 제일 수술을 잘하는 의사였는데 그의 수술에는 많은 구경꾼들이 몰렸다고 합니다. 리스턴 박사는 항상 “여러분, 시간을 재보세요”라는 말을 신호로 현란하게 칼을 놀리며 재빨리 수술했는데, 그렇게 분초를 다투며 서두르니까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생겼습니다.
어느 날, 리스턴은 약 2분30초 만에 한 환자의 다리를 절단했는데, 수술 중에 환자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들던 조수가 박사의 칼에 손을 베었습니다. 결국 환자와 조수는 상처부위가 곪아 며칠 후에 패혈증으로 사망했고, 그 옆에서 견학하던 한 의사도 박사가 휘두르는 칼에 음부를 찔려 그 자리에서 쇼크로 죽어서 그 일은 수술 사망률 300%를 기록한 전설적인 수술로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그처럼 무조건 빨리 수술을 해야 하는 문제가 1847년 영국의 제임스 심슨 경이 클로로포름 마취법을 발견하면서 해결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수술은 빠른 수술보다는 정확한 수술을 중시하게 되었고 환자의 고통도 현저하게 감소되었습니다. 그래서 클로로포름의 발견은 외과의학의 신기원을 이룬 가장 위대한 발견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나중에 심슨 경이 죽기 얼마 전에 제자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위대한 발견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 심슨 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생애의 최대의 발견은 예수님이 불쌍한 죄인인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처럼 우리는 우리의 모든 성공과 소유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부활신앙의 증인이 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사십시오 >
우리는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신앙을 가지면 얼마나 마음이 넉넉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만나도 “그럴 수도 있지! 이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라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왜 저 사람이 저러나?”라고 오해하지 말고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살면서 이익만 보려고 하지 말고 때로는 손해도 보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이익이 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져줄 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란 져주는 것입니다. 이제 남편에게 열심히 져주고, 아내에게 열심히 져주십시오. 결혼은 지겠다고 각오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열심히 져주어야 합니다. 져주면 이길 수 있고, 져주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앞의 이익과 성취에만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좋은 일도 잠시 동안은 나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렸지만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민족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의 가정과 민족을 구하려고 요셉을 앞서 애굽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현실로 판단하지 말고 믿음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주님 안에서는 절망과 죽음과 고난도 끝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수고가 결코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기쁨과 감사를 잃지 말고 죽기까지 순종하며 믿는 사람답게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초대 교회사를 보면 당시에는 성경도 많지 않았고, 글을 아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각 마을에서는 믿는 사람 중에 글을 아는 사람을 ‘조사(助事)’로 임명해서 목사 없이 예배를 드릴 때는 성경을 읽고 간단하게 설교도 하게 했습니다.
한번은 한 시골교회에서 저녁 예배를 드릴 때 조사가 시편 23편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읽어야 하는데 호롱불 밑에서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아서 조사가 이렇게 읽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을 자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조사가 그 말씀을 읽고 생각하니까 너무 말씀이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잠깐 설교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이 내 목을 자르셔도 저는 만족할 것입니다. 저는 죽어도 좋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성도들도 너무 은혜가 되어서 저마다 손을 들면서 “저도 죽어도 좋습니다. 주님이 저의 목을 자르셔도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신앙이 필요합니다. 요새 교인들의 믿음과 헌신도 많이 약해졌습니다. 이제 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새롭게 무장해서 믿는 사람답게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또한 절망 중에 희망을 노래하고, 전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죽기까지 헌신해야 합니다.
옛날의 순교자들은 죽을 때도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주님을 만나는 미팅 시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천국 문이 열립니다. 부고장은 천국시민증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더 나은 삶을 위한 통과의례입니다. 주님은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힘든 일을 당해도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 어두워졌다고 기차에서 뛰어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곧 밝은 세계가 나타납니다. 고난의 터널은 조금 후에는 끝납니다. 고난은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위험이 안전보다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로서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세상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을 가지면 믿음은 그만큼 떨어집니다. 우리는 세상 명예와 권력과 재물에 너무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최선을 다해 전도와 선교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그처럼 세상 것을 잠깐 쓰고 버릴 일회용품 정도로 여기고 선한 일에 기쁘게 사용하면 진짜 하늘나라에 갈 때에는 기쁘게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스탈린의 딸이 뉴스위크지에 스탈린이 운명할 때 장면을 기고했는데, 스탈린은 죽을 때 공포와 두려움에 젖어 죽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죽을 때 찬송을 부르며 죽습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또한 성도에게는 어떤 시련도 정지가 아니라 전진입니다. 항상 부활의 신앙으로 무장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anqyul@naver.com
본문:요한복음 20장 1-18절
<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
지난주에 에이트 빌로우(Eight Below)란 영화가 개봉되었습니다. 남극에서 활동하는 한 탐험대원들이 사고를 만나 거의 죽을 뻔 했지만 죽기까지 충성한 8마리의 썰매 개들 때문에 간신히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상악화와 부상치료로 탐험대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살려준 8마리의 개를 남극에 남기고 급히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개를 사랑했던 주인공은 곧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남극을 떠났지만 여러 사정으로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개들은 남극에서 175일 동안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 투쟁하고, 주인공은 자기들을 살려준 개를 배반할 수 없다고 개를 찾아나서 결국 찾는다는 내용입니다.
주인에게 충성하는 개 이야기는 너무 많습니다. 이태리 어느 소읍에는 ‘피도’라는 개의 동상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피도가 물에 빠졌다가 죽음 직전에 한 사람에게 구출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피도를 집에 데려다가 키웠는데 피도는 주인의 은혜를 알고 얼마나 주인을 사랑하는지 주인이 직장에 갈 때에는 매일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오고 직장에서 퇴근할 무렵에서 매일 정류장까지 가서 주인을 맞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2차 대전 중에 주인이 버스를 타고 돌아오다가 그만 버스가 폭탄을 맞아 주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피도는 정류장에서 주인을 기다리는데 주인이 오지를 않습니다. 그때부터 계속 그 자리를 지키며 13년 동안이나 그 정류장을 떠나지 않고 죽은 주인을 기다리다가 결국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개도 자기를 구원한 주인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은혜를 받았다면 결코 그 은혜를 배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은 주님이 사망권세를 정복하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부활절은 325년 니케아에서 회의에서 춘분이 지나고 첫 만월 후 첫째 주일을 부활절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음력을 따르기 때문에 매년 부활절이 다르게 됩니다. 부활절은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부활시키고 새롭게 출발하는 날로 삼아야 합니다.
< 막달라 마리아의 복된 신앙 >
오늘 본문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가 막달라 마리아처럼 복된 존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주님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왔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왜 그녀가 그때 주님의 무덤으로 갔습니까? 유대인들의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무덤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안식일이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안식 후 첫날 새벽에 급히 서둘러 주님의 무덤을 찾은 것입니다.
그처럼 무덤에 와서 보니까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그녀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즉시 돌아가서 베드로와 사도 요한을 불렀습니다. 결국 베드로가 무덤 안에 들어갔는데 본문 6-7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세마포만 놓여 있었고, 예수님 머리를 싼 수건은 딴 곳에 개켜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덤 안을 살핀 후에 베드로와 사도 요한은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이 없네!”하고 별 반응도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무리 남자라지만 정말 정도 없고 눈물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명색이 한명은 수제자이고, 한명은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는데 그렇습니다. 그러나 본문 11절 말씀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을 도저히 떠날 수 없어서 무덤 밖에 서서 울면서 몸을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이 장면만 봐도 그녀가 참 주님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그녀처럼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그녀는 일곱 귀신에 들렸다가 치유 받고 그 은혜를 기억하며 개 피도처럼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에도 끝까지 그 현장을 떠나지 않았고, 죽으신 다음에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런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나는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누가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은혜를 체험합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자가 주님을 만나고, 또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자가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체험합니다. 교회도 자주 찾아야 합니다. 기도하러 찾고, 봉사하러 찾고, 필요한 것 없나 살피러 자주 찾아야 합니다. 또한 어떤 시련이 있어도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이 후퇴하지 말고 결코 불평과 원망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십자가로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은혜를 정말 감사하면 우리는 어떤 시련이 있어도 막달라 마리아나 개 피도처럼 주님 곁을 떠나지 말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끝까지 해야 합니다. 감정과 기분대로 살지 않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변덕이 많은 연약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 하나만은 어떤 충성스런 개보다 더 충성하게 하소서!”
개도 죽기까지 충성하니까 사람들이 동상을 세워준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하면 우리는 반드시 주님의 사랑을 받고 주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축복받지 않아도 우리는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에 끝까지 목숨을 거는 영적 프로가 되어야 합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프로는 자신의 일에 목숨을 걸지만 아마추어는 자신 일에 변명을 겁니다. 우리는 잘못에 대해 결코 남 탓을 하지 않고, 변명도 하지 않고, 금방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일을 끝까지 목숨 걸고 하고, 끝까지 주님의 뜻과 주님의 길과 주님의 편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2. 주님을 믿고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마리아가 울면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자 본문 12절 말씀을 보면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 시체 뉘었던 머리 편과 발 편에 앉아있었습니다. 조금 전에 없었던 두 천사가 갑자기 나타난 것을 보면 웬만한 담력 있는 남자도 놀라서 간이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본문 13절에서 “왜 우느냐?”고 하자 그녀는 “사람들이 주님의 시체를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해서 울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담대하고 침착한 모습입니까? 이 장면을 보면 요한일서 4장 18절에 나오는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진짜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면 삶의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고, 절망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최종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살면서 빈 무덤과 실패의 현장을 바라보지 말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절망을 보지 말고 희망을 보고, 단점을 보지 말고 장점을 보고, 실패를 보지 말고 패기를 가져야 합니다.
물론 담대하게 살라는 것이 눈물이 없는 사람이 되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슬픔의 눈물은 흘리지 말아야 하지만 마리아처럼 사랑의 눈물은 많이 흘려야 합니다. 어렸을 때 울면 바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울지 않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감동과 감사의 눈물을 많이 흘릴 줄 아는 사람이 승리자입니다.
우리에게 은혜가 넘칠 때는 대개 눈물이 있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는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고 많이 울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두려운 일과 고난과 실패 앞에서는 결코 눈물을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3. 주님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 사람은 3명의 마리아였습니다. 한 명은 ‘성모 마리아’이고, 또 하나는 ‘베다니의 마리아’이고, 또 하나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 중에서도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따라다니며 조용히 헌신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도 그녀의 헌신과 사랑을 막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5-56절 말씀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몇 명의 여인과 함께 예수님을 섬기려고 갈릴리 지역에서 예루살렘까지 그 먼 길을 오직 섬기기 위해 예수님을 좇아왔습니다. 그녀는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받겠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직 드리고 바치고 헌신하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본문 15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녀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하셨는데 그녀는 예수님이 동산지기인 줄 알고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라고 간청했습니다. 남자 시체가 얼마나 무거운데 연약한 여인이 그것을 가져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앞뒤 재보지 않고 자기가 가져가겠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그녀는 예수님께 헌신적이었습니다.
사랑은 계산이 없는 것입니다. 아직 부활을 믿지 못했던 그녀가 그토록 주님을 위해 헌신했다면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는 더욱 주님께 헌신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때로 주님을 위한 일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맡겨져도 마리아처럼 “제가 맡겠습니다. 제가 가져가서 해결해보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며칠 전에 임병철 선교사님 내외를 만나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분은 선교사 되기 전부터 선교사님들을 개인적으로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항상 선교를 강조하고 실천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전 가족이 선교에 똘똘 뭉쳤습니다. 그렇게 사니까 그 가정이 얼마나 축복을 받는지 모릅니다.
선교사님의 여동생은 지금 뉴욕에서 백만장자입니다. 남동생도 몇 개의 대형마켓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모님 가족도 그렇게 복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헌신하는데 오직 윗동서 한 사람만 부자이고 호인인데 헌금하는 데는 인색하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그 동서의 땅이 정부에 수용되어서 30억 정도를 받았는데 선교헌금을 하나도 안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선교에 적극적인 시누이가 끊임없이 잔소리를 했습니다. “오빠! 하나님이 그렇게 많이 주셨으면 10분의 1은 선교헌금으로 바쳐야지! 바칠 줄 모르면 빼앗겨! 그러나 바치면 더 받아!”
그렇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손대는 것마다 사기를 당하고 사고를 당한다고 합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책 한 권 쓸 정도로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도 사기를 당합니다. 그래서 신기하게도 헌신 안 하는 만큼 그 이상으로 돈이 나갔다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듣고 임 선교사님 사모님이 언니에게 선교 도전을 했더니 그 언니가 이번에 가족들 유럽 여행을 하려고 했던 돈을 몽골 선교본부로 보냈다고 합니다. 동생이 선교지에서 힘들게 선교하는데 자신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유럽 여행을 가면 무슨 사고라고 날 것 같아서 선교헌금으로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얘기를 듣고 다 웃었지만 사실 웃을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분명한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드리면 신기하게 더 받습니다. 그러나 드리지 않으면 신기하게 더 빼앗깁니다. 임병철 선교사님은 자신의 전부를 다 드리는 삶을 살고 있지만 결국 보면 누구보다 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드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더 큰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4.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제가 시체를 가져가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도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에 감격해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시며 본문 16절에서 “마리아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막달라 마리아는 금방 주님의 음성인 줄 알아차리고 너무 반가워서 “랍오니여(선생님이여)”라고 소리치면서 예수님 품에 안기려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본문 17절에서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그리고 어떤 명령을 그녀에게 주십니까? “너는 네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즉 주님의 부활하셨음을 형제들에게 전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 품에 있고 싶지만 주님은 우리들에게 더 차원 높은 자세를 원하십니다. 즉 주님을 만났거든 그 주님을 세상에 나가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가 전하려는 자세는 없고 기도원에서 기도만 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 삶을 찬송가 499장 3절은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결국 막달라 마리아는 신비주의적 삶을 포기하고 가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전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전도는 우리 삶의 최대 목표이고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날, 무디 목사님이 전도설교를 하니까 한 청년이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전도가 중요한 줄 알지만 먼저 은혜가 있어야 복음을 전하지요.” 무디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그건 핑계야! 원망과 불평과 핑계는 영혼과 공동체를 죽이는 독약이네. 은혜가 있어야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게. 핑계하는 삶에는 은혜가 없어! 전도는 사명이고 명령이야! 먼저 전하면 은혜가 생기네.”
우리가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려면 무엇을 받고 나서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먼저 해야 할 것을 해야 합니다. 항상 ‘받을 생각’보다 ‘할 생각’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복음 전파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우리를 바로 천국에 데리고 가지 않는 이유는 부활의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물질과 재능과 영광을 복음 전파에 사용해야 합니다.
19세기 초, 마취제가 없을 때, 가장 무서운 말은 “수술해야 합니다”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수술의 고통 때문에 자살하는 환자도 많았습니다. 개복수술은 거의 죽음을 뜻했고, 그나마 대부분의 수술은 사지(四肢) 절단 수술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취 없이 팔다리를 끊어야 하기 때문에 수술을 얼마나 빨리 하느냐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1812년 프랑스의 군의(軍醫) 라레는 전쟁터에서 24시간 동안 200건의 사지를 절단하는 엄청난 기록을 남겼습니다. 1840년대에는 영국의 로버트 리스턴이 세계에서 제일 수술을 잘하는 의사였는데 그의 수술에는 많은 구경꾼들이 몰렸다고 합니다. 리스턴 박사는 항상 “여러분, 시간을 재보세요”라는 말을 신호로 현란하게 칼을 놀리며 재빨리 수술했는데, 그렇게 분초를 다투며 서두르니까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생겼습니다.
어느 날, 리스턴은 약 2분30초 만에 한 환자의 다리를 절단했는데, 수술 중에 환자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들던 조수가 박사의 칼에 손을 베었습니다. 결국 환자와 조수는 상처부위가 곪아 며칠 후에 패혈증으로 사망했고, 그 옆에서 견학하던 한 의사도 박사가 휘두르는 칼에 음부를 찔려 그 자리에서 쇼크로 죽어서 그 일은 수술 사망률 300%를 기록한 전설적인 수술로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그처럼 무조건 빨리 수술을 해야 하는 문제가 1847년 영국의 제임스 심슨 경이 클로로포름 마취법을 발견하면서 해결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수술은 빠른 수술보다는 정확한 수술을 중시하게 되었고 환자의 고통도 현저하게 감소되었습니다. 그래서 클로로포름의 발견은 외과의학의 신기원을 이룬 가장 위대한 발견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나중에 심슨 경이 죽기 얼마 전에 제자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위대한 발견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 심슨 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생애의 최대의 발견은 예수님이 불쌍한 죄인인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처럼 우리는 우리의 모든 성공과 소유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부활신앙의 증인이 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사십시오 >
우리는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신앙을 가지면 얼마나 마음이 넉넉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만나도 “그럴 수도 있지! 이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라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왜 저 사람이 저러나?”라고 오해하지 말고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살면서 이익만 보려고 하지 말고 때로는 손해도 보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이익이 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져줄 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란 져주는 것입니다. 이제 남편에게 열심히 져주고, 아내에게 열심히 져주십시오. 결혼은 지겠다고 각오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열심히 져주어야 합니다. 져주면 이길 수 있고, 져주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앞의 이익과 성취에만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좋은 일도 잠시 동안은 나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렸지만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민족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의 가정과 민족을 구하려고 요셉을 앞서 애굽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현실로 판단하지 말고 믿음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주님 안에서는 절망과 죽음과 고난도 끝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수고가 결코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기쁨과 감사를 잃지 말고 죽기까지 순종하며 믿는 사람답게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초대 교회사를 보면 당시에는 성경도 많지 않았고, 글을 아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각 마을에서는 믿는 사람 중에 글을 아는 사람을 ‘조사(助事)’로 임명해서 목사 없이 예배를 드릴 때는 성경을 읽고 간단하게 설교도 하게 했습니다.
한번은 한 시골교회에서 저녁 예배를 드릴 때 조사가 시편 23편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읽어야 하는데 호롱불 밑에서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아서 조사가 이렇게 읽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을 자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조사가 그 말씀을 읽고 생각하니까 너무 말씀이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잠깐 설교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이 내 목을 자르셔도 저는 만족할 것입니다. 저는 죽어도 좋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성도들도 너무 은혜가 되어서 저마다 손을 들면서 “저도 죽어도 좋습니다. 주님이 저의 목을 자르셔도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신앙이 필요합니다. 요새 교인들의 믿음과 헌신도 많이 약해졌습니다. 이제 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새롭게 무장해서 믿는 사람답게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또한 절망 중에 희망을 노래하고, 전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죽기까지 헌신해야 합니다.
옛날의 순교자들은 죽을 때도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주님을 만나는 미팅 시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천국 문이 열립니다. 부고장은 천국시민증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더 나은 삶을 위한 통과의례입니다. 주님은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힘든 일을 당해도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 어두워졌다고 기차에서 뛰어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곧 밝은 세계가 나타납니다. 고난의 터널은 조금 후에는 끝납니다. 고난은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위험이 안전보다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로서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세상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을 가지면 믿음은 그만큼 떨어집니다. 우리는 세상 명예와 권력과 재물에 너무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최선을 다해 전도와 선교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그처럼 세상 것을 잠깐 쓰고 버릴 일회용품 정도로 여기고 선한 일에 기쁘게 사용하면 진짜 하늘나라에 갈 때에는 기쁘게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스탈린의 딸이 뉴스위크지에 스탈린이 운명할 때 장면을 기고했는데, 스탈린은 죽을 때 공포와 두려움에 젖어 죽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죽을 때 찬송을 부르며 죽습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또한 성도에게는 어떤 시련도 정지가 아니라 전진입니다. 항상 부활의 신앙으로 무장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anqyu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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