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요20:19-23 |
---|---|
설교자 : | 이재철 목사 |
참고 : | 주님의교회 |
오래 전 3개 부처의 장관을 역임한 원로께서 사석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각각 다른 부처의 장관을 세 번씩이나 했다고 해서 절더러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들 합니다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같은 사람을 발굴하여 적재 적소에서 활용하신 대통령께서 위대하셨던 겁니다."
훌륭한 지도자란 숨어있는 인재를 발굴하여 중용할 줄 아는 자라는 의미에서 그 분의 말씀은 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다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직전 그 분은 이렇게 결론을 맺었습니다.
"실은 대통령보다 더 위대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절 이렇게 만들어 주시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저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수십년 전 중국 땅에서 죽어 없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정말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정녕 위대하십니다. 그 원로의 말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제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때에도 주님의 위대하심을 고백치 않을 수 없습니다. 20대에 암흑 속에서 허랑방탕하던 저를, 30대 중반까지 쓰레기 같은 삶을 살던 저를 오늘의 저로 가꾸어 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 아니셨던 들 오늘도 저는 어디에선가 저의 귀한 인생, 생명을 덧없이 탕진하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 아니셨더라면 제 아내나 자식들은 어디선가 저로 인해 남몰래 괴롬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기는커녕 오늘도 저로 인해 수많은 영혼들이 저와 더불어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은 정말 위대하시다는 그 원로의 말씀에 저는 100%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위대하신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두려움에 떨며 문들을 걸어 잠근 채 다락방에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 제자들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배신했던 인간같잖은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 배신자들을 꾸짖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평강을 부어 주셨습니다. 생각할수록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문 21절을 통하여 주님의 더욱 위대하심을 발견케 됩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
배신자였던 그들에게 평강을 부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계속하여 당신의 제자로 변함없이 중용해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여전히 허물투성이지만, 여전히 문제 덩어리지만, 그러나 당신의 제자로 계속 신뢰해 주시겠다는 언약이었습니다. 위대한 주님께서는 그들을 교정시켜 주실 능력을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하여 사도들의 행적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핍박이나 환란은 물론이요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도들은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위대한 분은 한때 형편없는 배신자들을 그런 사도로 만들어 주신 주님이셨습니다.
그 위대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주님이심을 알고 계십니까? 그 위대하신 주님께서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하셨습니다. 그 분 아니셨던 들 우리 같은 죄인이 어찌 이 구원의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위대하신 주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중심이 그 분을 향하는 한, 앞으로도 우리를 계속 가꾸어 가 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 위대한 주님의 은혜를 깨달아 그 은혜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제 위대하신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가꾸시며, 어떻게 역사해 가시는지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것은 한 특정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 모두의 공통된 고백이 될 것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교육전임을 맡고 있는 김효숙입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께서 저를 이 자리에 세워주시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셨는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저는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날마다 드러나는 모나고 형편없는 부분들을 하나님께서 갈고 닦으셔서 겨우 세움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막내 아들을 얻기 위해 4명의 딸을 먼저 얻으셔야 했던 부모님의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아버님께선 첫째 딸도, 막내 딸도, 그렇다고 귀하게 얻은 막내 아들도 아니지만, 유난히 몸이 약해 병치레가 잦았던 셋째 딸인 저를 특별히 사랑해 주셨습니다. 아버님께선 다른 식구들이 미처 가보지 못한 멋진 곳에도 자주 데려가 주셨고, 매일 저녁 간식을 사들고는 으례 저를 먼저 찾으시곤 하셨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시던 어머님께선 다른 형제들을 생각해 아이들을 편애하지 마시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게 되었음에도, 아버님께선 어머님과 다른 형제들이 모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른 형제들보다 더 많은 용돈과 그 위에 사랑을 얹어 주셨습니다. 이렇듯 어릴 적부터 저는 다른 형제들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 채 아버지의 편애를 즐기기만 하던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장자만이 입을 수 있었던 채색옷을 입고 마냥 즐거워했던 요셉처럼 말입니다.
또한 어릴 적 저의 모난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제가 사용하고 난 공책입니다. 제 공책은 어느 것 하나도 처음 살 때 만큼의 양이 남아있질 않았습니다. 글자모양이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두 글자 이상만 지운 흔적이 있어도 그 한 장 전체를 찢어버리는 이상하리만큼 완벽주의적인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해서 제가 사용한 공책들은 대개 10장을 넘기지 못한 채 남겨졌습니다. 그 완벽주의는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모양으로까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모난 저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릴 때면 또 한 곳 생각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마당입니다. 동네에 넓은 뜰이라곤 교회 뒷뜰 밖에 없었기에 자연스레 매일같이 해거름이 질때까지 교회 뒷뜰에서 놀았습니다. 또한 이렇듯 교회에 자주 가다보니 교회학교 발표회가 있을 때엔 항상 주역을 독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이기적이고 완벽주의 적인 성격에 사람들의 시선과 칭찬을 받게 되면서부터는 점점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적으로 저는 또래들 보다는 저를 인정해주는 선배들이나 어른들과 어울리는 것이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저는 적어도 또래의 친구들 보다는 훨씬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수준이 맞지 않는 또래들 보다는 윗사람들과 사귀려는 교만한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고 1 겨울방학 때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다니던 교회는 무엇보다도 성령체험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고, 그로인해 산상기도와 수련회를 목적으로 한 기도원행이 잦았습니다. 그때 저는 또래들이 가는 겨울등산이나 기차여행이 아닌, 어른들과 선배들이 참여하는 기도원행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 또한 또래들보다 우월함을 나타내고자 하는 교만함에서 비롯된 선택이었습니다. 무엇에도 지기 싫어했던 저는 은혜받는 데에도 지기 싫었습니다. 해서 집회장소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맨 앞자리까지 갔습니다. 집회를 인도하시는 목사님께선 늘 들었던 그 말씀을 전하시기 시작해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런데 그토록 익숙하게 들었던 그 말씀이 들려오자마자 제 눈과 마음 깊은 곳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서 시작된 눈물인지 닦아도 닦아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바로 너를 위해 내가 죽었단다. 다른 사람들을 생각지 않는 이기주의자, 자신을 해치며 다른 사람들까지 위협하는 완벽주의자, 무엇보다도 자신만을 섬기는 너를 위해 내가 죽었단다. 그러한 네 모습까지도 사랑하기에 내가 죽었단다."
그때 저는 몇 천 명이 앉아있는 그 큰 홀의 사람들이 다 들을 것 같은 소리로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그 이전에도 그토록 울어본 적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제 인생에서 단 한 번 있을 울음이었습니다. 얼마를 정신없이 울다보니 제 마음속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나 같은 사람까지도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겠노라고 서원기도를 드렸습니다.
이후 저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주어지는 봉사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것조차 욕심스럽게 감당해 갔습니다. 봉사의 기회가 전혀 없어 교회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날에도, 그저 교회에 가 의자라도 한 번 쓸고 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학학력고사 전 날까지도 학교 도서관에서 몰래 빠져 나와 성가연습을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자유롭고 넓은 세계인 대학생활이 시작되었고, 그 생활에 몰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제는 제 스스로 무언가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 삶의 방향은 뒤틀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비롯된 눈물이 제 교만의 탑을 녹이는가 싶더니, 다시 그 탑엔 하늘을 찌를듯한 교만의 벽돌이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외형적으론 아직도 주일성수하고 봉사많이 하는 별 문제없는 모범적인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부러 기독교 서클엔 가지 않으려고 애썼고, 마치 하나님을 속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 보시기에도 애매한 약속을 하여 몇 번을 교회에 가지 않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마음 한 켠엔 끊임없이 자유를 넘어선 방종으로의 욕구가 있었고, 또 다른 한 켠엔 그러한 방종으로 인한 무거움이 점점 더해 갔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4학년 2학기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교수님의 연락을 받고 찾아 간 저는 거의 하나님의 뜻같은 돌파구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졸업생 중 단 한 명만이 채용될 수 있는 아동학과 부설 유아원에서 교사로 일하라는 제안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졸업도 하기 전에 취직이 된 셈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평생을 서원한 것을 잊어 버리기에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약속을 그럴듯하게 변명하고 도망치려는 저에게 유아원 교사로 있었던 10개월의 기간은, 마치 큰 물고기 뱃속에서 철저히 고독해야만 했던 요나의 시간과도 같았습니다.
더 이상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었던 그 해 여름, 유아원 방학을 이용해 고 1 겨울방학 때 하나님을 만나 서원기도 드렸던 기도원으로 올라갔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서원의 짐을 내려놓고 와야만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한 여름의 굵은 소나기가 천둥 번개와 함께 세차게 내린 날이었습니다. 평소 천둥 번개가 칠 때면 이중 창문을 잠근 채 커튼을 치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쓴 후 생각나는 잘못들을 다 아뢴 후에야 잠들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평소 그토록 무섭게만 느껴지던 천둥 번개가 전혀 무섭지 않았습니다. 굵은 소낙비를 맞아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마치 하늘을 향해 결판이라도 내려는 듯이 산 위에 앉아 그 비를 다 맞으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어릴 적, 철도 들지 않고 사고의 폭도 좁았던, 아무런 세상경험도 하지 못했던 그때의 서원을 제발 잊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하늘이 맑게 개이면서 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었단다."
그 음성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보여주신 것은 국자였습니다. 절대로 모양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튼튼한 쇠국자였습니다. 그 환상을 본 제가 하나님께 드린 첫 마디는 "저라구요. 하나님?"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만약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살아갈 나의 인생을 그릇으로 표현하신다면 아무렇게나 사용되거나 값싼 그릇이 아니라, 귀한 잔치에서만 볼 수 있는 고급 그릇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 이기적인 마음과 교만함이 빚어낸 환상의 그릇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 순간적으로 불평했습니다.
"어째서 제가 제대로 된 그릇에 속하지도 않는, 또한 혼자서는 절대로 귀한 음식을 담고 있지도 못하는 바보스런 국자란 말인가요?"
저는 그 당시 국자란 저의 삶의 형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절 배신하신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열심히 기도하는 가운데 기도응답을 잘못 받은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또한 저를 만드신 하나님 보다 오히려 제 자신에 대해서 만큼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의 확신이었습니다. 불평 가운데 기도를 마친 저는 어릴 적부터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선배에게 그 기도응답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 이야기를 들은 선배는 "결국 하나님께서 너를 쓰시겠다는 거로구나"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께서 제가 가지고 있던 환상의 그릇을 깨시고 국자를 보여주신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국자는 귀한 음식들, 귀한 그릇들이 놓여있는 곳에는 꼭 필요한 도구입니다. 이 국자는 혼자서는 제대로 설 수도 없는 볼품없는 그릇이기에 반드시 주인의 손이 닿아야만 사용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국자는 생명을 살리는 음식을 담고 있는 것으론 아무 의미가 없는 그릇입니다. 다만 귀하게 놓여있는 그릇 속에 주인이 담아주는 생명의 음식을 담아 그 그릇에 옮겨주는 도구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제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혼자서는 볼품없지만 하나님 손에 붙들리기만 하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인생,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음식을 그릇 그릇마다에 옮기는 국자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깨달음을 가지고 산길을 내려온 저는 유아원 교사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리곤 3개월 후에 있을 신학대학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가야할 길이 어떤 길인지, 제 몫의 인생그릇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장신대 도서관을 매일같이 다니며 하루 14시간씩 공부했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3개월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은 시간이었기도 하지만, 그 당시 다른 신학생들은 도와줘도, 이미 아들을 서원기도 드린 상태에서 당신의 딸마저 목회자의 길을 걷게 할 수 없다는 부모님의 반대 때문이라도, 그 해에 꼭 합격되어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원하는 일, 제가 결정하는 일이라면 한 번도 가로막거나 반대하지 않으셨던 아버님마저도, 이 길만은 가지 말라고 만류하셨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아버님의 처음이자 마지막 반대셨습니다. 저를 도와줄 마지막 분이셨던 아버님마저 포기하라고 하셨기에 저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제 곁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고, 그 고독함 때문에 그때처럼 제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곁을 한번도 떠나신 적 없으시고, 버리시지도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에 저는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하나님의 치밀하신 계획하심과 신실한 인도하심 가운데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신학수업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학수업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선 참 값진 깨달음과 귀한 만남의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깨달음 가운데 가장 절실했던 것은, 나름대로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만 얼마나 많은 불신앙의 모습과 연약함이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더불어 그 사람을 날마다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이 얼마나 성실하신지, 또 얼마나 열심히 일하시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신대원 2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신학수업과 더불어 어느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사역을 시작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저의 모난 부분들을 다듬어가시는 속도는 더 빨라졌고, 그로 인한 성숙의 아픔도 더해 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도로서 모양을 갖추기 위해 부수고 깨어내야 할 부분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교역자로서 준비되어야 하는 어려움에, 그때까지 전혀 겪지 않았던 여성으로서의, 여성교역자만이 겪어야 할 일들 또한 있었습니다. 어릴적부터 외아들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였고, 교회에서나 학교에서 여자이기 때문에 불공평한 대접을 받아본 일이 없었는데, 오히려 사역하면서부터 그 불공평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공평한 일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주일 저녁, 교육전도사들이 저녁예배 전 찬양인도를 맡기로 한 교육회의결과에 따라 제 순서가 되어 찬양인도를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여교역자를 본당의 단 위에 세운 일이 없는 그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 저는 그 날 이후 다시는 찬송인도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끊임없이 비참해지는 저 자신이 불쌍해 견딜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전 그 일로 설 자리도 없는데 왜 제게 신학을 하게 하셨고, 또 이곳에 세우셨는지에 대해 밤새 괴로워해야만 했습니다. 힘든 그 밤을 보내고 다음 날이 되어 저는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제 1 남선교회 회장님이었습니다. 전화의 내용은, 어제 찬양인도할 때 너무 나 큰 은혜를 받았으니, 이번 주에 있을 1 남선교회 주최 철야집회 때 찬양만을 인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한 찬양의 달란트를 받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는 저에게 그 전화는, 네 혼자서가 아니라 내 손에 붙들여야만 살 수 있다는 하나님의 위로의 전화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쌓였던 교만의 탑이 높았던 만큼이나 저는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더 많은 계단을 내려와야 했습니다. 물론 때때로 닥친 어려움은 모두가 하나님의 선한 뜻에 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이시듯, 의롭지 못한 사건들과 사람들을 만나게 하심으로도 저는 또 부수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축하를 받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그 다음 주일의 일입니다. 교회로부터 다른 사역지를 알아보라는 일방적인 통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결혼을 했으니 아기를 낳을텐데 교회가 산후휴가를 주는 비효율적인 운영은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후 여교역자 모임에서 많은 교회들이 여성교역자들의 능력을 인정해 청빙하면서도 산후휴가는 주지않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 일이 계기가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빈틈없는 예비하심 가운데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딸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한 아이의 엄마로서만이 아니라 맡겨진 모든 아이들의 영적인 엄마가 되는 좀 더 넓은 가슴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제게 주어진 시간과 주어진 건강, 주어진 삶의 여건들이 PART TIME사역자로서 헌신하기엔 너무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선 주님의 교회에서 전임사역자로 일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한 집안의 며느리, 한 가정의 주부, 한 아이의 엄마로서 전임사역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재철 목사님과 여러 동역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참된 종으로서의 자세를 배우고, 또 성도님들과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사랑을 나누는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전임 사역자로 온전히 헌신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고,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 달 전 쯤 아버님께서 소천하시던 날 새벽의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소천하시기 그 전날, 다음 날 새벽기도 인도를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든 저는 급한 전화벨 소리를 듣고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아버님께서 호흡곤란을 일으키셔서 응급실에 계시다는 연락이었습니다.
막 CT촬영을 마치고 실려 나오시는 아버님은 호흡곤란과 허리통증으로 매우 고통스러워 하고 계셨습니다. 평소 혈압이 높으신데 심적 스트레스가 겹쳐서 심장의 대동맥이 파열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가 몸 속으로 계속 흐르고 있는 상태여서 수술도 불가능하고, 상태가 어떻게 진전될 지는 아무런 예측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고통스러워 하시는 아버님 곁에서 이제까지 못했던 이야기도 드리고 싶고, 함께 기도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밤새 병원에 있던 저는 그 날 새벽기도를 인도하기 위해 눈물을 닦고 교회로 떠나 와야 했습니다. 전임 사역자로서 저는, 개인의 일들을 접어둔 채 하나님의 일들에 우선적으로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되어 새벽기도를 인도하기 위해 예배실로 올라가려는 바로 그때에 교회 전화벨이 또한번 급하게 울렸습니다. 아버님께선 제가 교회로 떠나오자 얼마 후 임종하셨다는 연락이었습니다. 마음같아선 서둘러 가서 아버님의 마지막 온기남은 손이라도 잡아보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서둘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 아버님의 영혼을 부탁드립니다"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강한 힘에 이끌려 예배실로 올라갔고, 이제껏 살아오면서 키웠던 온 힘을 다해 눈물을 참으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겨우 새벽기도를 마친 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원으로 달렸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은 이미 따뜻함이 남아있을 마지막 모습조차 볼 수 없는 냉동실에 안치되신 상태였습니다. 며칠 후 하관식을 마친 그 날, 식구들은 그제서야 제게 물었습니다. "왜 그 날 빨리 오지 않았느냐고." 식구들은 임종소식을 들은 제가 서둘러 올 줄 알고 병원측의 양해를 얻어 40분이나 중환자실에서 시신을 둔 채 기다렸던 것입니다. 아버님이 특별히 사랑하셨던 저로 하여금 아버님께 고맙다고 말씀을 드릴 마지막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안타까움이야 세상에 있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이 큰 것이지만, 저는 제게 여전히 괜찮다고 하시며 웃으실 아버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살아오는 동안 어느 것 하나도 반대치 않으셨던 아버지, 그러나 사랑하는 딸이 너무 고생스러울까 목회자의 길만은 반대하셨던 아버지께서 끝내 묵묵히 바라보시다가, 엊그제 추석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언제 목사고시 합격자 발표가 나느냐는 물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딸의 고생스러움이 마음아파 묵묵히 계실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 그러나 딸의 길이 바로 그 길임을 받아들여야 하기에 더 열심히 하길 바라셨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서야할 그 자리를 지키고 내려오느라 마지막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을 결코 섭섭해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계셨던 이 땅의 자리는 이제 비어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의 자리엔 오히려 새로운 소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 소망은 아버지께서 이 땅에서 다하지 못한 아버님의 사랑의 몫을 아버님께 가장 많은 사랑의 빚을 진 제가 감당하며 살아가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저는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형제들의 아픔을 외면한 채 아버지의 사랑만을 즐겼던, 세상 누구보다도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을 해치면서까지도 완벽하려 했던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별 볼품없으면서도 하늘 찌를 듯한 교만의 탑을 쌓아온 사람입니다. 그토록 저 자신만을 생각하며, 자신의 것에 머무르기만을 좋아했던 형편없는 저를, 하나님께선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위한 생명의 양식을 나르는 국자인생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저를 인도하신 하나님께선 앞으로도 결코 쉬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저의 부족함을 날마다 가르치고 고치시면서 저를 통해 일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선 저를 이 자리에 세우셨듯이 바로 성도님들 또한 지금의 삶의 자리에 세우신 것입니다. 저를 세우고 보내신 하나님께서 그 열심과 신실함으로 성도님들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신다면, 성도님들을 통해선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 일들이 펼쳐지겠습니까?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허물투성이지만 위대한 주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이 그 분을 향하는 한 날마다 우리를 가꾸어 주시고, 우리를 통하여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허물투성이인 저희들을 주님의 제자로 인정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은 부족하지만 위대하신 주님께서 날마다 교정해 주시고 가꿔주시기에 오늘도 저희들은 믿음의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들의 중심이 늘 우리를 우리 삶의 자리로 보내신 하나님을 향하게 하셔서, 지금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 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