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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의 기억

사도행전 최용우............... 조회 수 2357 추천 수 0 2004.03.11 14: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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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5:1-12 
설교자 : 정경일 형제 
참고 :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지난해 말, 어떤 분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새길교회의 교리와 제도에 대해 몇 가지 묻겠다고 하시더니 대뜸 "새길교회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인정합니까, 인정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렇게 '예 / 아니오'로 답할 것을 요구하는 질문을 빠르게 몇 가지 더 하셨는데, 저는 그 내용을 떠나 그분의 위압적 태도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마음이 불편해진 제가 "신앙의 내용을 그렇게 예 / 아니오 식으로만 묻고 답할 수 있는 겁니까?"라고 반문했을 때, 그분은 "진리의 문제는 그렇다."며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심문관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고, 그것은 제게 한동안 상처로 남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경험은 저만의 특별한 경험이 아닌 것 같습니다. 새길교회 자매·형제님들 중에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여기를 떠나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위태로운 공동체로 스스로 찾아온 까닭을 들어보면, 의외로 동료 기독인들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이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 안타까운 건 가까운 동료들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는 이들이 대부분 "믿음 좋다"는 기독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신앙이 열성적일수록 오히려 사랑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것, 진리에 헌신한다고 할수록 동료들을 정죄하는 심문관이 되기 쉽다는 것은 무섭기조차 합니다.

  지금껏 기독교는 이웃종교와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한 불관용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역사를 더 깊이 보면, 그 불관용의 절정이 오히려 내부의 '다름'에 대한 공격성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불관용의 기억과 구조

  지난 이천년 동안 기독인들은 소위 '정통신앙'을 지킨다는 미명하에 서로에게 다른 신앙방식을 가진 기독인들을 배제해왔습니다. 가장 잔혹한 전쟁의 하나였던 유럽의 '30년 전쟁'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극한 대립에서 비롯되었고, 종교개혁자들 간의 불관용으로 초래된 폭력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자신도 한 때는 관용을 호소했던 루터는, 천년왕국신앙에 바탕한 뮌쩌의 농민반란을 진압할 때 "타살하라, 학살하라, 교살하라."며 영주들에게 살인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또한 깔뱅도 자기와 신학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세르베투스를 화형시킨 바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실현지라는 제네바는, 깔뱅의 지지자들이 침례교인들을 잡아다 베니스 갤리선 노예로 팔아버리는 일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행할 정도로 악명 높은 불관용의 도시였습니다. 과연 폴 틸리히가 "악마적 잔혹성"이었다고 탄식할만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죽여 왔다는 것은 기독교의 크나큰 비극입니다.

  그런데 이런 불관용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개방성을 결여한 지나친 자기 확신입니다. 신앙의 확신성을 갖는다는 건 믿는 이들의 덕목이지만, '물음'을 동반하지 않는 확신은 오만으로 돌변하기 쉽습니다. 더 이상 질문하기를 멈춘 이들은 진리를 독점하고, '나'의 신앙만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신앙의 목적인 하느님을 사유화하는 것이지요.

   획일성에 대한 욕망도 불관용의 특징입니다. 물론 신앙의 일치는 공동체의 힘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하게 항목화된 도그마의 외적 수용 여부에만 의거할 때, 내부의 '다름'은 불온시되고 또한 배제되기 십상입니다. 한 공동체가 외부의 다름보다 그 내부의 다름을 더 못 견뎌 한다면 사랑의 공동체라는 이상은 더욱 요원해지는 것이겠지요.

  또한 불관용의 기독교는 권력의 길을 열망합니다. 대표적으로, 초기 기독인들이 박해 이후의 새로운 상황에 맞는 신앙의 중심을 세우기 위해 시작한 교리 논쟁이 금세 권력투쟁의 양상으로 변질되고 만 것은 불관용의 한 전형을 보여줍니다. 기독교의 기본신조를 확정한 니케아 회의에서 이단과 정통을 나누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권력이었습니다. 이미 그때부터 기독인들은 당연히 생겨날 수밖에 없는 신앙과 신학의 차이를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합의하는 어려운 길보다는 힘으로 간단히 해결하는 쉬운 길에 유혹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권력에 기대는 점에서는 소위 이단과 정통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후에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네스토리우스는 당시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이렇게 청원했습니다.

  위대하신 통치자여. 나를 내 교회의 모든 적들로부터 구해주소서. 그리하면, 내가 당신께 천국을 드리겠나이다. 우리의 교리에 반대하는 이들을 억압할 때 내 편이 되어 주소서. 그리하면 당신의 적들을 억압할 때 당신 편이 되겠나이다

  이처럼 교회 안에 적을 만드는 불관용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힘을 잃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불관용이 교회의 외적 성장에는 효과적인 에너지이기 때문일 겁니다. 심지어 일부 기독인들이 한국교회의 분열사에는 경쟁적 열심을 갖게 해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하느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합리화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물론 미움의 역사가 하느님의 섭리였다는 건 도저히 수긍할 수 없지만, 그 분열이 외적 성장의 동력이었다는 것은 일면 타당한 말입니다. 어쩌면 분열해 나온 교회에 대한, 그리고 분열해 나간 교회에 대한 지독한 미움으로 더욱 열심을 냈던 것인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불관용과 미움을 에너지로 성장한 교회에 하느님이 함께 하실 수 있을 지 정말 의문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어두운 면을 목격하며, 저는 한 가지 물음을 갖습니다. 이러한 불관용이 기독교의 기원에서부터 생겨났던 태생적 한계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그 답을 얻기 위해 저는 1세기의 예수와 예수 따르미들의 삶의 자리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관용의 기억

  예루살렘 회의와 베드로

  서기 64년 경 예루살렘에서는, 이방인의 율법 준수를 둘러싼 안디옥 교회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종교회의가 열렸습니다. 제가 이 회의에 관심 갖는 것은 그것이 초대교회의 관용을 보여준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적 분파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것은 일면적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여러 면에서 관용의 태도를 인상 깊게 보여주었습니다.

  한 번은 새로운 입문자들이 늘어나면서 분배 문제로 분란이 생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 문제를 들고 나온 이들은 헬라계 기독인들이었습니다. 이 때 종교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유대계 사도들은 분배의 권한을 헬라계 사람들에게 모두 맡겼습니다. 갈등의 과정에서 상대에게 모든 권한을 내어주는 용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회의에 참석한 바울에 대한 태도도 이들의 관용을 보여줍니다. 사실 바울은 예루살렘 공동체에 몹시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아무리 회심했다 해도 과거에 원수였던 이와 함께 예배하며 토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바울은 스데반 살해에 깊이 개입했고, 교회를 잔멸하겠다며 각 집에 난입해 기독인들을 잡아다 감옥에 가뒀으며, 그러고도 모자라 달아난 기독인들마저 잡아오겠다며 시리아로 떠났던 사람입니다. 아마 당시 예루살렘 공동체 안에는 그와 직·간접적으로 원한 관계에 있던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바울에 비해 예루살렘 공동체는 도덕적으로 한결 유리한 입장입니다. 게다가 이미 안팎으로 사도적 정통성까지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구태여 예루살렘으로 온 까닭도 그 때문이었겠지요. 따라서 예루살렘 공동체는 과거의 악을 꼬투리 삼아 바울을 정죄하며 자신들의 입장을 충분히 관철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공동체는 바울을 따뜻하게 환영합니다. 물론 일부 바리새파 출신의 기독인들이 바울을 성토했지만, 베드로의 관용 있는 연설에 온 무리가 조용해졌고, 바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후 회의 과정에서 크고 작은 갈등도 있었겠지만, 결국 예루살렘 교회와 바울은 서로에게 조금씩 양보하며 타협에 이르렀습니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이방 선교의 특수성을 인정했고, 바울도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 문화적 원칙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습니다. 만약 예루살렘 공동체가 바울에 대한 인간적 원한에만 사로잡혀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회의 전후 과정에서 저는 동료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베드로의 태도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는 예수의 다음 자리를 차지하겠다며 욕심을 부리고 칼을 들어 적의 귀를 자르던, 과거의 다혈질 베드로와 사뭇 달라 보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의 변화는 우유부단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원칙 없는 태도라고 비난하지만, 저는 오히려 인격적 성숙을 느낍니다. 진리 앞에서는 냉정할 정도로 단호해야 한다지만, 그 진리가 사랑 자체라면 자기 입장만을 고집하기보다는 동료들을 배려하고 관용하는 것이 진리에서 어긋나는 것일까요?

  신학자 보른캄은 만약 예루살렘 회의가 실패로 끝났다면,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존재하다가 사라졌을 것이고, 바울의 교회도 하나의 밀의종교로 떠돌다가 사라졌을 거라고 평가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따름의 길은 서로를 존중하는 관용을 통해 열린 것이지요. 많은 이들이 인정하듯 바울의 회심이 없었다면 오늘의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회의는 베드로의 관용이 없었어도 역시 오늘의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을 가능케 한 변화에는, 그의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예수의 죽음을 무력하게 지켜보고 숱한 절망의 밤을 지나며 되찾은 '관용의 기억'이 있었습니다.

  예수와 관용의 공동체

  예수의 공동체는 지금 보아도 참 희한한 모임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어부나 농부들도 있었고, 늘 옷 속에 칼을 품고 다니던 젤롯당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아리마대 사람 요셉 같은 부자나 니고데모 같은 종교지도자, 그리고 백부장 고넬료 같은 로마인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당시의 율법지배 사회에서 죄인으로 분류되던 세리나 창녀, 또 나병환자들도 있었고요. 겉보기에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들이 함께 먹고 마시며 여행하는 모습은 신기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뿐인가요? 이들의 기대와 목적 또한 각기 달랐습니다. 어떤 이들은 맹렬하게 정치적 해방을 추구하거나 권력을 탐했고, 또 어떤 이들은 내면의 종교적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공동체를 단일한 계급과 이념의 집단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지요.

  이토록 다양한 배경과 기대를 감안하면 예수의 공동체 안에 갈등과 충돌이 빈번했으리라는 건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내적 평정을 이룬 성인(聖人)들의 공동체가 아니었기에 서로에게 실망하며 다투기 일쑤였습니다. 공동체를 이끄신 예수께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와 동료들 사이에도 다툼이 잦았습니다. 한번은 너무 화가 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며 꾸짖으신 적도 있었지요.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런 일상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공동체에서는 그 누구도 결코 배제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가롯 유다마저도.

  배신의 밤, 유다는 군인들과 함께 다가와 예수에게 "선생님, 안녕하십니까?"라며 친밀하게 입을 맞춥니다. 예수는 그에게 "친구여"라고 불러 줍니다. 그것은 유다의 거짓 우정을 폭로하며, 지난 여행에서 함께 나누었던 참된 우정을 상기시키는 탄식의 호명이었습니다. 그분은 자기를 죽음으로 내모는 유다마저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관용을 보여주신 거죠.

  이처럼 예수의 공동체는 갈등의 부재가 아니라 갈등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 삶의 가능성을 실현했습니다. 다행입니다. 우리가 출발한 자리에는 불관용이 아니라 관용의 보드라운 새싹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관용과 공존의 꿈

  하지만 관용의 기억을 되찾는 여행에서 돌아온 제게 오늘의 현실은 더욱 낯설어 보입니다. "그 친구 신앙은 좋은데 사람은 영 아니야.", "그 친구, 기독교인이긴 해도 사람은 괜찮아."라는 말이 상식처럼 통용되는 현실은, 예수와 그의 벗들이 살아 보인 관용의 삶과 너무 멀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교회는 당분간 불관용을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습니다. 불관용은 앞으로도 외적 성장에는 유용한 에너지가 될 테니까요. 교회의 근본 위기는 권력이 되기 위해 사랑을 포기하는 데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때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관용의 기억을 되찾아 서로의 신앙과 삶을 존중하는 관용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일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회복의 가능성을 새길의 역사와 현실에서 조금씩 느끼며 또 배워왔습니다. 만인사제의 신념에 따라 내부의 지배와 불관용의 길을 거부해온 것, 너무 예민하다 싶을 정도로 서로의 마음결을 살피는 섬세함, 그리고 개성 강한 이들이 우애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모습도 신선한 관계성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면서도 내부의 질서를 잃지 않고 있는 것은 아무도 서로를 다스리려 하지 않았던 예수 공동체의 모습과 닮아 보입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자기성찰의 물음 앞에 서 있습니다.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관용의 공동체를 이루려 애쓰고 있는가? 각자의 생각만이 옳다고 고집하며 일방적으로 가르치려들기보다는 먼저 배우며 경청하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가? 때때로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동료의 잘못을 책망하게 될 때도 결코 사랑을 잃지 않는 예수의 마음을 닮고 있는가? 이 물음들에 대한 답을 찾아 나갈 때 새길의 의미와 목적도 분명해지겠지요.

  저는 매일 꿈을 꿉니다. 먼 훗날 기독교의 관용의 역사를 탐구하려는 이가 있을 때, 지금의 저보다는 덜 당황하며 더 많은 관용의 증거들을 찾을 수 있기를. 언젠가 기독교가 관용의 기억을 되찾았을 때, 그것을 가능케 한 역사에서 새길의 작고 겸허한 이름을 발견할 수 있기를. 그 꿈이 꿈으로만 끝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불관용의 현실을 거스르는 관용의 예수 따르미로 살게 합니다.

  오늘의 기도는 18세기, 가톨릭 국가 프랑스에서 개신교도라는 이유로 배제당하고 살해당하던 이들의 인권과 자유를 위해, 나이 이른이 넘어 죽는 날까지 싸웠던 가톨릭 신자 볼테르의 기도로 대신하겠습니다.

이제 나는 인간들이 아닌 신에게,
즉 온갖 존재와 전 세계와 모든 시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당신에게 호소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참으로 불균등하지만,
당신이 보기에는 똑같은 처지와 조건들 사이에 놓여 있는 작은 차이들,
즉 인간이라 불리는 티끌들을 구별하는
이 모든 사소한 차이들이
증오와 박해의 구실이 되지 않게 해주소서.
관용의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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