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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사도행전 최용우............... 조회 수 2135 추천 수 0 2007.12.17 00: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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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7:16-34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드디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옴 진리교 사건이 일단락 지어 가는 모양입니다.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하는 사람들은 종교란 도대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라고 개탄하게 되었습니다. 종교는 사람을 선하게 살게 하며 영원한 세계로 인도해주는 천사적인 면이 있는가 하면 독선과 편견과 증오심을 고취시켜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악마적인 면이 공존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떻게 저렇게 배울 만큼 다 배운 사람들, '멀쩡한' 사람들이 저런 황당무계한 종교를 믿을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종교도 이해하기 어렵고 인간도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인 것 같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들은 사람들을 보면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최고 교육을 받은, 그야말로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옴 진리교 뿐입니까? 텍사스 왜코에서는 이른바 다윗파가 수백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1970년대 중남미의 가이아나에서도 수천 명이 집단자살을 했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기억에도 오대양 사건, 그리고 최근의 다미 선교회, 영생교, 대성교회 사건 등,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이비 내지 유사 종교에 몸을 담고, 거기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며 살고 있습니다. 최근 오클라호마 시에서 일어난 일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단순히 어떤 나쁜 사람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테러행위가 아닙니다. 어쩌면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을는지도 모릅니다. 누구든 자기가 정말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자기가 정말 나쁜 일을 한다고 믿고 하는 사람은 없을는지도 모릅니다. 무언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면서 일을 저지릅니다. 아무리 끔찍한 일을 행한다해도 모두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으면서 행하는 것입니다. 오클라호마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결코 나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가 아니라 일종의 확신범들에 의하여 행해진 것입니다. 처음에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여론이 애꿎게 아랍인들 혹은 무슬림들을 의심했지만 범인은 놀랍게도 멀쩡하게 생긴 백인들, 애국심으로 충만한 전형적인 American boy들이었습니다. 정말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고 그만큼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언뜻 보면 이들은 종교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나, 그들은 결국 어떤 종교적 사명감을 가지고서 행동한 사람들이라고 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언가에 대한 강한 집념과 신념이 있었습니다. 순수한 미국을 지켜야 된다는 광신이 있었고 이에 동반하는 피해망상증 같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 대립과 체제 경쟁이 끝난 오늘날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인간의 말초적 감각에 호소하는 극우파들이 급속히 부상하고 있는 것을 목격합니다. 최근 타임지에도 사라지지 않는 히틀러 망령을 다루었지만, 일본, 미국, 그리고 러시아에서도 극우파 내지 비뚤어진 민족주의자들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이념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피와 끈끈한 정에 호소하면서 자기 민족의 영광과 국가의 이익만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집단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세계는 냉전시대보다도 더 위험한 곳으로 변하고 있다는 불안감이 점점 증대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다시 한번 묻게 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믿고 붙잡지 않으면 못 사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어딘가에 자신의 전 존재를 내 맡기고 헌신해야 할 대상과 목적을 발견해야만 하는 존재이며, 없으면 아무 것이라도 붙잡고 자신의 삶을 바쳐야 마음이 안정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한 마디로 말해 '종교적 인간', 신앙적 인간입니다. 신앙이란 무관심이나 냉담과는 반대되는 말로서, 뜨거운 정열과 헌신, 관심과 관여, 개입과 투신을 뜻합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대로, 신앙은 궁극적 관심입니다. 이렇게 보면 신앙은 인간의 보편적 현상입니다. 신앙은 가질까 말까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다 자신의 정열과 궁극적 관심을 쏟을까 하는 선택의 문제일 뿐입니다.
인간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님을 찾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자신의 원형인 하나님, 자신의 본향과도 같은 하나님을 찾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찾는 가장 궁극적인 선, 최고의 가치이며 목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선, 즉 좋은 것을 찾고 있습니다. 다만 참으로 좋은 선 중에 선인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잘못 알아 그것을 찾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신을 섬길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어떤 신을 섬기느냐 일 뿐입니다. 인간은 신이 없으면 하나 만들기라고 해야 하며, 올바른 신을 알지 못하면 엉터리 신, 우상이라도 붙잡아야만 사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이 엉터리 신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는 각자가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면 알 것입니다. 자기가 가장 마음을 두고 사는 대상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됩니다. 맘몬, 명예, 권력, 골프, 등산, 향락, 무슨 이념이나 사상, 자식과 가족, 등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다 조금씩 이런 것들을 섬기고 있기에 모두 다신론자들, 아니면 우상숭배자들입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끊임없이 한 우상에서 다른 우상으로 전전하는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우상을 타파하지 않으면 우리는 순수한 하나님 신앙을 유지하기 어려운 존재들입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사도행전의 바울 사도의 이야기도 이 점을 우리에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데살로니카, 베뢰아 등 그리스 지방에서 제 2차 전도여행을 하다가 유대인들의 훼방으로 디모데와 헤어진 후 홀로 아테네로 가서 거기서 디모데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격분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유대인들과는 회당에서, 그리스인들과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광장(아고라)에서, 혹은 아레오파고스라는 언덕에서 닥치는 대로 토론과 논쟁을 벌렸습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아테네에서의 바울의 전도에 대한 이 간단한 보도를 통해서 우리는 당시 아테네의 모습을 어느 정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도시 곳곳에 신전과 제단이 있었고, 장터와 같은 광장이 있어 사람들이 붐비었으며, 아테네의 법정이 있던 아레오파고스 언덕도 아테네 생활과 문화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만나 변론을 벌린 사람들 가운데는 철학의 도시답게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의 철학에 심취한 지식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 학파들은 아테네가 도시국가의 전성기를 지나 해체기에 들어서면서 유행하던 개인주의적 철학들로서, 특히 스토아 학파에는 바울 당시에 세네카, 에픽테투스, 마르커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유명한 사상가들이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유태인이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바울의 눈에 비친 아테네는 온갖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면서 복을 비는, 아니 때로는 자기가 복을 빌고 있는 신의 이름조차도 모르고 제사 드리고 있는, 그야말로 기복적, 주술적 신앙으로 가득한 한심한 도시였으며, 몇몇 고상한 철학을 말하는 학자들이 있었지만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아무런 비판적 시각도 갖고 있지 않는 한심한 곳으로 비쳐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예수와 부활 얘기를 하자 또 무슨 이상한 신을 섬기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개중에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바울을 아레오파고스라는 언덕 혹은 법정(지금도 그리스에 남아 있어서 관광객들의 방문지 중에 하나가 됨)으로 데리고 가서 더 상세히 얘기를 듣고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아테네 사람들에게 참 신앙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자 일장 연설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선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의 종교성, 즉 신을 두려워하고 섬기고자 하는 마음 자체는 높이 평가했습니다: "내가 보니,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라고 바울은 이야기의 서두를 꺼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도자로서의 바울의 뛰어난 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이 미신을 믿는다고 무조건 그들을 정죄하고 비판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서도 무엇인가 긍정적인 것을 발견하고 인정한 것입니다. 복음의 이해를 위한 단초 내지 다리 역할을 할 점을 그들에게서 재빨리 알아차린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아테네 도처에서 발견되는 신당들과 제사행위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역겨운 생각이 들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동정심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로부터 전도의 방법과 태도에 대한 하나의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있어야 전도는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그에게서 하나님의 믿음으로 나아가게끔 하는 어떤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해야지 무조건 당신은 안 된다고 멸시하거나 위협해서는 안 되고, 상대방의 관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사람 모양 무조건 일방적으로 자기 얘기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초기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의 종교적 전통을 무조건 멸시하고 한국인들은 그야말로 한심한 정령숭배나 미신에 빠져 있는 백성으로 여겼던 것은 2,000년 전 바울의 선교방법만도 못했던 것입니다(요즈음도 노방전도니 지하철 안에서 목청 높여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는 사람들은 용기는 대단하지만 상대방은 전혀 안중에 없는 전도방식이기에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것).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이 아무리 종교적으로 그릇된 방향으로 살고 있다 하더라도 일단 그들에게서 하나님이 심어준 종교심, 종교성이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죽하면, 얼마나 답답하고 불안하면,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글을 새겨놓은 제단에서 제사를 드렸겠습니까? 바로 여기서 바울은 당신들이 알지 못하고 섬기는 그 신을 내가 알려주겠노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다가간 것입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고 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인생이 답답하고 허전해서, 두렵고 불안해서 견디지 못해 무언가를 섬기기는 해야 할 것 같아 이리 저리 찾아 헤매다가 아무거나 맞다들이면 그것이 진정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또 알려고도 하지도 않고 빠져 들어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현대인들이 지식도 많고 과학적 상식도 많으나, 옛날 사람들보다 과연 영적으로 더 성숙하고 지혜로워졌는지는 심히 의문입니다.
사실,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아테네 사람들을 우리가 웃을는지 모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가운데 누가 과연 신을 안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신을 과연 알 수 있겠는가 우리는 심각하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신이란 포이어바흐의 비판대로 우리들 인간 자신의 희망을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 때가 있습니다.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어 놓고서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 아닌가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종교성이란 영원히 암중모색만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영원히 자기가 만들어 놓은 우상만을 섬길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운명입니까?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것이 우리들의 종교생활이라는 말입니까? 생각만 해도 섬뜩한 일입니다. 이 모든 종교의 열정이 허구라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인간은 저쪽에서 오는 빛은 전혀 없이 홀로 찾아 헤매다 마는 외로운 존재들입니까? 아니, 저쪽이 과연 있는지 없는지, 있다 해도 누군 지도 모르고 숭배하는 아테네 사람들과 같은 존재들이 아닙니까? 신은 영원히 숨어 계시고 우리는 혼자서 짝사랑만 하다가 끝나버리는 것입니까?
여하튼,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알지도 못하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열심히 비는 아테네 사람들의 모습에 바울은 크게 개탄했으며 동시에 깊은 연민의 정을 느꼈던 것입니다.

일단 아테네인들의 종교성을 인정한 바울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숭배하고 있는 그 숭배의 대상에 대하여 알려주겠노라"고 제안합니다. 여기서 우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바는,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섬기는 분이 사실은 다름 아닌 자기가 믿고 있는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들이 사실은 바울이 믿는 참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자 하는 데, 혹은 그래야만 하는데, 다만 무지 때문에 이렇게 바람직하지 못하게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심 많은 여러분, 당신들은 사실상 나의 하나님을 찾고 있으며 그 분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라는 것이 바울의 절묘한 입장이었습니다. 다만 당신들이 모르니까 이렇게 잘못된 생각으로, 잘못된 행동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얘기입니다. 이렇게 보면, 모든 인간은 알든 모르든 정녕 한 분이신 하나님을 찾고 있는 셈이며, 이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가를 모르기에 엉뚱하게 생각하고 엉뚱하게 섬기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우리가 타종교를 생각할 때에도 적어도 이 정도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저들도 하나님이 생명을 부여해 준 하나님의 자녀로서 나의 하나님을 갈망하고 찾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들에게 내가 아는 하나님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러나 깊은 인간 이해에 바탕을 둔 바울의 이 같은 선교학적 접근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전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즉 그가 어떤 분이었나 하는 그의 신관이었습니다. 그것은 실로 혁명적일 정도로 해방적인 하나님이었습니다. 적어도 기복적인 다신 숭배에 빠져 있던 아테네 사람들에게는 그러했고 아마도 오늘날 우리 한국의 신앙인들에게도 역시 그러할는지도 모릅니다:

1) 하나님은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하늘과 땅의 주님이며,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전에 거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실로 해방적 신관입니다. 신전을 만들고 신상을 안치하고 그 앞에 제단을 설치해서 제물을 바치는 이 모든 행위를 단칼에 베어버리는 듯한 말입니다. 하나님을 신전과 제단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말이며, 동시에 인간을 신전과 제단으로부터 해방해 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 소문난 제단들이 많지요. 거기에 나가면 무슨 특별한 은혜라도 있는 듯이 말하며, 심지어는 꼭 거기 나가야 구원이 있는 것처럼 떠들어댑니다. 혹시 우리는 새길 제단을 그렇게 생각하고나 있지 않는지요? 만일 우리 교회가 또 하나의 제단이라면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이미 너무 많은 제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개신교에서는 제단이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제사는 구약시대와 더불어 종말을 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건물 하나 없이 궁색하게 지내는 것은 하나님을 교회당 안에 가두는 또 하나의 제단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본래 구약에서도,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 전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의 정착민들, 원주민들처럼 성전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이기에 어디서나 장막을 치고 야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순수한 야훼 하나님 신앙의 근본 정신입니다. 예수께서도 그러기에 "이 산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데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무슨 부족한 것이 있어서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섬김을 받으려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엄청난 해방적 메시지입니다. 모든 제사 종교는 신들이 정말 제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사를 받아 흠향한다 혹은 받아 잡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신들이 인간에게 의존하고 마침내는 신들을 뇌물성 제사 행위로 강요하는 단계에까지 갑니다. 그리하여 사제들은 신들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도 지배합니다. 사제들, 성직자들, 목사들은 종종 신이 필요로 한다고 말하면서 신자들을 협박하거나 갈취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주님의 사업이라고 피와 땀을 제공했으며 헌금을 강요받았습니까? 하나님은 온 천하에 무엇 하나 아쉬움이 없는 최고로 자유로운 분입니다. 무엇을 강요할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헌금을 하고 교회를 운영하고 하는 일들은 모두 우리 자신을 위한 것, 즉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참되게 살려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아쉽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마치 우리가 하나님께 무슨 큰 도움이나 혜택을 베푸는 듯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와는 정반대를 말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은총의 하나님이라고 바울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한다면, 다만 이렇게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하는 자발적인 응답으로서의 봉사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어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제사나 제물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사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말하기를, "너 사람아, 무엇이 선한 일인지를 주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내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 8).
3) 하나님은 온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내신 분이며 그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찾으면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는" 분이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그리스 사상가의 말을 인용해서 하나님을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형상대로 만드신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분으로 마치 자식이 자기의 뿌리인 부모를 그리워하고 그 품에서 살듯, 우리 인간도 하나님을 찾고 그 품에서 살도록 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혁명적인 신관입니다. 하나님을 아전인수격으로 하나의 종족신, 민족신, 부족신, 자기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이야말로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이 투영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며, 인간은 하나님을 찾고 그와 더불어 살도록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이 아테네 사람들도 비록 하나님을 잘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을 찾아 제사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잘못된 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신전에서 신상 앞에 제사를 드려야 하는 하나님, 제물을 요구하는 하나님, 그리고 뇌물처럼 바친 제물에 응답하여 우리의 행위와 삶이야 어떻든 무조건 복을 내려 주는 존재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와 같은 무슨 특별한 종교적 행위로만 섬기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인간답게 삶으로서 진정으로 섬길 수 있다는 것이 구약의 예언자들의 말씀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한 혈통으로부터 내신 하나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분, 인간이 찾아야 할 우리 존재의 근원이며 뿌리, 그리고 그에게 생명 줄을 대고 살아야 하는 분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자녀답게 하나님을 섬겨야지, 유치하게 우리 손으로 만들어낸 어떤 물건이나 신상이나 그림 같은 것을 대상으로 하여 거기다 절하고 빌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베풀어주신 분이며, 그 안에서 이미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분입니다. 나 자신보다도 나에게 더 가까운 분으로 나의 생명의 근원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정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는 분이시며, 그가 정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주로 세웠으며,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이것을 확신하게 해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날 때부터 하나님을 찾아 알도록 되어 있고,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섬기도록 되어 있는 존재이나, 죄 가운데서 참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며 그야말로 '배로 하나님을 삼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바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 18-25.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에 대하여 책임지는 존재입니다: 로마 2: 6-11. 어느 족속이냐, 어느 이념을 추종하느냐,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공의롭고 인자를 행하면서 살았느냐가 심판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판의 주,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길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신관은 확실하고 분명했습니다. 바울이 믿는 하나님은 결코 암중모색해야 하는 신이 아니며, 인간에게 질곡을 씌우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참다운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인간을 강요하거나 협박하는 신이 아니며, 인종차별이나 종족학살을 명하는 하나님도 아니며, 독가스를 제조하도록 명하거나 집단자살로 몰고 가는 하나님도 아닙니다. 어느 건물이나 장소에 얽매인 존재도 아니며 어느 특정한 인간집단의 수호신도 아니며, 뇌물을 바쳐 축복을 얻어낼 수 있는 신이 아니며, 우리 인간적 희망사항의 투영도 아닙니다. '알지 못하는 신'이 아니라 모세와 에언자들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확실히 알려진 하나님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우리 인생을 내시며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주신 생명의 주님, 아버지가 되시는 은총의 주님이시며, 그 안에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는 아주 가까이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역사의 종말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 공의로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그와 함께 공의를 행하면서 사는 일이지 요란스러운 피의 제사도 아니며 웅장한 예배의식도 아니며 화려한 건물도 아닙니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강요하거나 우리를 옥죄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온갖 염려와 근심, 이기심으로부터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바울사도처럼 이러한 해방의 하나님, 은총의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모시고 그의 뜻에 따라 살면서, 오늘도 하나님을 찾되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는 뭇 생명들에게 이 하나님을 올바로 증거 하면서 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을 섬기는 것도 위험하고 신앙도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우리 인간이 신앙 없이 못 사는 존재라면 바른 신앙, 바른 신을 섬겨야 합니다. 인생을 파괴하고 파멸로 이끄는 신앙이 아니라 인생을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신앙, 인생을 구속하고 질식시키는 신앙이 아니라 인생을 자유롭게 하고 참다운 행복을 가져다주는 신앙 말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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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 욥기 꺾이는, 그래서 보다 아름다운 삶 욥8:11-12  박창원 목사  2007-12-18 2051
373 예레미야 돌아오기를 거절하느냐? 렘8:5-6  양명수 목사  2007-12-18 1924
372 누가복음 감사와 믿음 눅17:11-19  서중석 목사  2007-12-18 2771
371 마태복음 무너지지 않는 집 마7:24-29  길희성 형제  2007-12-18 2193
370 마태복음 예수사건②:여우와 새보다 더 고독하셨던 예수님 마8:18-20  한완상 형제  2007-12-18 1961
369 마태복음 기독자의 자유 마4:1-11  우정원 목사  2007-12-18 2214
368 호세아 하늘, 땅. 짐승, 사람 호2:21-23  민영진 목사  2007-12-18 2342
367 창세기 하갈의 하나님, 그리고 사라의 하나님 창16:7-16  최만자 자매  2007-12-18 2797
366 요한복음 생명의 빵 요6:57-59  권진관 형제  2007-12-18 2024
» 사도행전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행17:16-34  길희성 형제  2007-12-17 2135
364 레위기 하나님의 땅과 사람의 자유 레25:10  이풍 형제  2007-12-17 1860
363 히브리서 저는 다리와 곧은 길 히12:13  김병종 교수  2007-12-17 2091
362 요한복음 예수사건① : 물동이를 버린 사마리아 여인 요4:7-30  한완상 형제  2007-12-17 4038
361 창세기 광복 50주년과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신앙 창1:16-18  최만자 자매  2007-12-17 2015
360 로마서 그리스도인의 기쁨 롬8:9-11  길희성 형제  2007-12-17 2300
359 누가복음 고난의 역사와 구원의 기쁨 눅2:14-23  이재정 신부  2007-12-17 2123
358 고린도후 상대적 불행과 절대적 행복 고후2:8-11  한완상 형제  2007-12-17 2827
357 마태복음 믿고 구하라 마21:22  강종수 목사  2007-12-16 2150
356 요한복음 위기와 기회 요2:1-11  한태완 목사  2007-12-15 2557
355 누가복음 종의 의무 눅17:7-10  이현주 목사  2007-12-13 2314
354 로마서 죽음의 몸 롬7:7-25  길희성 형제  2007-12-13 2006
353 누가복음 화해적 코이노니아를 위한 하나 더 눅15:1-2  김흡영 목사  2007-12-13 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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