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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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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소재열 목사 |
참고 : | 의정부평안교회 http://www.uppch.org |
처음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은 문제가 하두 가지가 아닙니다. 또한 궁금한 점도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했다가도 어느날 또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끝나지 않습니다. 또한 성령님이라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분도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세 분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느냐고 질문하면 세 분의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의 유일한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참으로 헷갈립니다.
그래서 이해가 가도록 쉽게 설명하는 것이 아버지가 있었는데 집에서는 아빠요, 교회에서는 목사님이요, 학교에 가면 교수님이듯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마치 이와 같다고 합니다. 한 분은 한 분이신데 그 하시는 일의 성격 따라 다른 세 양태로 나타나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 설명은 이미 교리사에서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라 해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사도행전을 통하여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무엇 때문에 강림하셨는지를 살펴보십시오.
1. 성령은 약속대로 이미 오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복음을 위하여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해 주신 일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에게 임하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오순절 성령 강림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오셨습니다. 둘째,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승천의 복음을 증거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죄인입니다. 죄인에게 오는 죄의 대가는 하나님으로부터 형벌과 저주입니다. 그 형벌과 저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려면 성령께서 역사해 주셔야 합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게 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증거 하게 합니다.
사도행전의 핵심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전편인 누가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합니다. 이같은 구원의 사건은 우리들의 참여 없이 하나님의 단독적 사건이기에 객관적 구원의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런 객관적 구원의 사건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역사하도록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을 제자들과 그의 택한 백성 개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계시자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계시하신다고 본다면 계시자로서의 성령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하나님과 그 본질과 능력 면에서 동등하십니다. 이런 계시자로서의 성령께서 무엇을 계시해 주고 있느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계시를 사도행전을 통하여 기록하고 신약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성령께서는 성경을 제쳐놓고(무용지물로 만들고) 별도로 우리들에게 특별계시를 주시므로 역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어진 특별계시인 성경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의 체험이 결코 성경을 앞서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줌과 동시에 체험이 절대적이지 못함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고 체험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결론적으로 오순절 성령강림은 이미 약속된 성령님이신데 그 성령님이 오신 사건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증거 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약속된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2. 오순절의 성령강림과 방언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제 1장에서 약속하신 성령이 2장에서 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 같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약속된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며 사람 위에 임하더니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들은 첫째,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 와야 되는 실제적인 경험들인가, 둘째, 아니면 특수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에게만 임하는 것인가, 셋째, 아니면 이런 경험들은 특별한 어떤 목적 때문에 나타난 반응들로서 그 목적이 무엇이냐 라는 문제가 늘 제기되어 왔습니다.
오순절에 약속하신 성령이 오셨을 때 그 표시가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기에 방언을 강조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주장한 사람들을 오순절파라고 합니다. 뜨거운 열심과 어떤 체험들과 은사들을 강조한 사람들이 바로 오순절파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오순절파는 순복음에도 있고 장로교에도 있고 천주교에도 있고 감리교, 성결교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성령을 받으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현상과 더불어 방언이 꼭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꼭 성령이 임하시면 이런 현상이 필수적으로 나타나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 라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오순절파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기에는 좀 아쉬운 점이 많다. 방언은 앞으로 성령께서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에 대한 증거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방언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에게 시키시려고 하는 어떤 일 때문에 나타난 현상들일 뿐입니다. 따라서 방언을 해야만 성령이 오셨다는 것에 대한 증거라고 말한 것은 성경의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셔서 방언을 하게 하신 것은 성령이 임하면 방언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셔서 방언을 주신 것은 앞으로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방언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 방언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지를 살펴 봅시다.
창세기에 보면 바벨탑 이후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의 언어’가 혼잡 되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11:7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라고 했습니다. 바벨탑 이후 언어가 갈라졌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세상의 모든 언어는 사투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영어를 배우지 못하면 할 줄 모릅니다. 미국 사람도 우리 나라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른 사투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그 때에 예루살렘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2:5)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이제 무엇인가를 이루시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각처에 가서 살다가도 명절 때가 되면 순례차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 명절 때 제사에 참여해야 그들에게 구원이 임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구원관에 볼 것 같으면 예루살렘에 얼마나 가깝게 살고 있느냐에 따라 구원이 결정됩니다. 유대인들이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그 중에는 유대의 말을 잃어버린 자들도 있을 것이고 또한 유대인들이 아닌 다양한 외국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2:9-11).
그런 자들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하여 임시방편으로 제자들에게 외국말인 방언을 하도록 하여 그 순례객들에게 예수를 증거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양한 외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오순절에 방언으로 예수의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다양한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나라 말로 제자들이 외치고 있는 말을 듣게 되었으니 얼마나 이상하고 놀랐겠습니까? 그렇다고 제자들이 원래 외국어를 잘 할 줄 아는 사람 같으면 몰라도 그동안 전혀 외국어를 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로 방언이라고 하는 언어를 통해 복음을 증거하자 다양한 나라에서 온 이방 나그네들은 자신들의 나라 말로 알아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기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2:6-8)
계속해서 11절 하반절부터 보시면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11-13)고 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방언이 있었던 것은 성령께서 그 방언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이미 사도행전 1:8에 대한 약속의 성취입니다. 이런 사건은 계시적 사건입니다. 방언이라고 하는 외국말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때문에 복음이 제한을 받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방언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이제 방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 말씀을 읽는 가운데 성령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로 하여금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받고 증거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가 우리들의 생명이시요, 모든 문제의 해답이십니다. 방언 타령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방언이 아니면 복음을 접하지 못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데 앞장서는 것이야말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3. 성령께서 불의 혀같이 임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어떤 형체를 지니는 것은 앞으로 성령께서 하실 일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때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불의 혀같은 분이시다”라고 한다든지 성령은 “비둘기 같은 분이시다”라는 말은 사실 틀린 말입니다.
성령은 원래 형체가 없는 분이십니다. 영이십니다. 비둘기 같은 분으로 오셨다는 것은 성령이 비둘기와 같은 분이시다 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화평을 위해 오셨음을 상징해 주는 그림 언어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하나님과 화목시키고 화평케 하시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비둘기는 거룩이 상징입니다. 성령님은 거룩한 분이십니다. 하나님 쪽에서 제공한 좋은 사랑의 선물을 가지고 오신 분이십니다.
창세기 8장에 보면 노아가 비둘기를 사람들 보다 앞서 보내어 좋은 소식을 가져오기를 기대합니다. 예수님께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명을 지니고 예수님께서 비둘기 같이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불과 같이 오셨다는 것은 불과 같은 심판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불의 혀같이 오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이제 끝났다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더러 긴장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심판하시기 위해서 말세에 불에 혀같은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불같이 오셔서 방언을 하는데 그 방언의 심판의 기준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방언 타령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의정부평안교회 http://www.uppch.org/
그런데 여기에서도 끝나지 않습니다. 또한 성령님이라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분도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세 분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느냐고 질문하면 세 분의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의 유일한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참으로 헷갈립니다.
그래서 이해가 가도록 쉽게 설명하는 것이 아버지가 있었는데 집에서는 아빠요, 교회에서는 목사님이요, 학교에 가면 교수님이듯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마치 이와 같다고 합니다. 한 분은 한 분이신데 그 하시는 일의 성격 따라 다른 세 양태로 나타나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 설명은 이미 교리사에서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라 해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사도행전을 통하여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무엇 때문에 강림하셨는지를 살펴보십시오.
1. 성령은 약속대로 이미 오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복음을 위하여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해 주신 일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에게 임하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오순절 성령 강림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오셨습니다. 둘째,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승천의 복음을 증거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죄인입니다. 죄인에게 오는 죄의 대가는 하나님으로부터 형벌과 저주입니다. 그 형벌과 저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려면 성령께서 역사해 주셔야 합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게 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증거 하게 합니다.
사도행전의 핵심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전편인 누가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합니다. 이같은 구원의 사건은 우리들의 참여 없이 하나님의 단독적 사건이기에 객관적 구원의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런 객관적 구원의 사건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역사하도록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을 제자들과 그의 택한 백성 개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계시자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계시하신다고 본다면 계시자로서의 성령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하나님과 그 본질과 능력 면에서 동등하십니다. 이런 계시자로서의 성령께서 무엇을 계시해 주고 있느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계시를 사도행전을 통하여 기록하고 신약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성령께서는 성경을 제쳐놓고(무용지물로 만들고) 별도로 우리들에게 특별계시를 주시므로 역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어진 특별계시인 성경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의 체험이 결코 성경을 앞서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줌과 동시에 체험이 절대적이지 못함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고 체험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결론적으로 오순절 성령강림은 이미 약속된 성령님이신데 그 성령님이 오신 사건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증거 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약속된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2. 오순절의 성령강림과 방언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제 1장에서 약속하신 성령이 2장에서 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 같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약속된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며 사람 위에 임하더니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들은 첫째,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 와야 되는 실제적인 경험들인가, 둘째, 아니면 특수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에게만 임하는 것인가, 셋째, 아니면 이런 경험들은 특별한 어떤 목적 때문에 나타난 반응들로서 그 목적이 무엇이냐 라는 문제가 늘 제기되어 왔습니다.
오순절에 약속하신 성령이 오셨을 때 그 표시가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기에 방언을 강조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주장한 사람들을 오순절파라고 합니다. 뜨거운 열심과 어떤 체험들과 은사들을 강조한 사람들이 바로 오순절파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오순절파는 순복음에도 있고 장로교에도 있고 천주교에도 있고 감리교, 성결교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성령을 받으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현상과 더불어 방언이 꼭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꼭 성령이 임하시면 이런 현상이 필수적으로 나타나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 라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오순절파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기에는 좀 아쉬운 점이 많다. 방언은 앞으로 성령께서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에 대한 증거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방언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에게 시키시려고 하는 어떤 일 때문에 나타난 현상들일 뿐입니다. 따라서 방언을 해야만 성령이 오셨다는 것에 대한 증거라고 말한 것은 성경의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셔서 방언을 하게 하신 것은 성령이 임하면 방언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셔서 방언을 주신 것은 앞으로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방언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 방언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지를 살펴 봅시다.
창세기에 보면 바벨탑 이후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의 언어’가 혼잡 되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11:7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라고 했습니다. 바벨탑 이후 언어가 갈라졌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세상의 모든 언어는 사투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영어를 배우지 못하면 할 줄 모릅니다. 미국 사람도 우리 나라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른 사투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그 때에 예루살렘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2:5)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이제 무엇인가를 이루시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각처에 가서 살다가도 명절 때가 되면 순례차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 명절 때 제사에 참여해야 그들에게 구원이 임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구원관에 볼 것 같으면 예루살렘에 얼마나 가깝게 살고 있느냐에 따라 구원이 결정됩니다. 유대인들이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그 중에는 유대의 말을 잃어버린 자들도 있을 것이고 또한 유대인들이 아닌 다양한 외국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2:9-11).
그런 자들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하여 임시방편으로 제자들에게 외국말인 방언을 하도록 하여 그 순례객들에게 예수를 증거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양한 외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오순절에 방언으로 예수의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다양한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나라 말로 제자들이 외치고 있는 말을 듣게 되었으니 얼마나 이상하고 놀랐겠습니까? 그렇다고 제자들이 원래 외국어를 잘 할 줄 아는 사람 같으면 몰라도 그동안 전혀 외국어를 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로 방언이라고 하는 언어를 통해 복음을 증거하자 다양한 나라에서 온 이방 나그네들은 자신들의 나라 말로 알아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기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2:6-8)
계속해서 11절 하반절부터 보시면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11-13)고 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방언이 있었던 것은 성령께서 그 방언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이미 사도행전 1:8에 대한 약속의 성취입니다. 이런 사건은 계시적 사건입니다. 방언이라고 하는 외국말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때문에 복음이 제한을 받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방언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이제 방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 말씀을 읽는 가운데 성령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로 하여금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받고 증거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가 우리들의 생명이시요, 모든 문제의 해답이십니다. 방언 타령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방언이 아니면 복음을 접하지 못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데 앞장서는 것이야말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3. 성령께서 불의 혀같이 임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어떤 형체를 지니는 것은 앞으로 성령께서 하실 일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때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불의 혀같은 분이시다”라고 한다든지 성령은 “비둘기 같은 분이시다”라는 말은 사실 틀린 말입니다.
성령은 원래 형체가 없는 분이십니다. 영이십니다. 비둘기 같은 분으로 오셨다는 것은 성령이 비둘기와 같은 분이시다 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화평을 위해 오셨음을 상징해 주는 그림 언어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하나님과 화목시키고 화평케 하시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비둘기는 거룩이 상징입니다. 성령님은 거룩한 분이십니다. 하나님 쪽에서 제공한 좋은 사랑의 선물을 가지고 오신 분이십니다.
창세기 8장에 보면 노아가 비둘기를 사람들 보다 앞서 보내어 좋은 소식을 가져오기를 기대합니다. 예수님께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명을 지니고 예수님께서 비둘기 같이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불과 같이 오셨다는 것은 불과 같은 심판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불의 혀같이 오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이제 끝났다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더러 긴장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심판하시기 위해서 말세에 불에 혀같은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불같이 오셔서 방언을 하는데 그 방언의 심판의 기준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방언 타령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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