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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의 회심

사도행전 최용우............... 조회 수 1845 추천 수 0 2008.02.26 23: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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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0:9-16 
설교자 : 권진관 형제 
참고 :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우리는 새로운 경험을 두려워합니다. 새로운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불안하게 합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경험은 한편으로는 우리를 매혹시키기도 하지만 막상 그 경험으로 뛰어들려고 하면 매우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나간 방식에 매달려 봅니다. 그래야 우리는 새로운 것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전의 방식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감행할 때 느끼는 위기감과 위협으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도피처가 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은 이전의 구태의연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종교는 불교라고 합니다.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동감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 다음은 가톨릭이라고 합니다. 개신교는 이제 줄고 있습니다. 개신교는 너무나 말씀 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종교로 전락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집에서 케이블 TV만 보고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공동체는 필요 없고, 말씀은 TV를 통해서, 혹은 라디오를 통해서 들으면 되니까요. 교회에 나와봐야 신비스러운 체험, 거룩한 체험을 하지 못하니 나오지 않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축복 받는다고 열심히 나왔지만, 이제는 물질적으로 많은 축복을 받아버렸기 때문에 그것도 그리 시원치 않아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개신교회는 이전의 모습과 방법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의 위기를 우리 새길교회는 깊이 천착해 보고 그 원인을 알아내고 그 대처 방안을 처방해 내야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먹는다"는 상징 말씀을 통해서 하나의 교훈을 얻으려고 합니다. "먹는다"고 할 때 우선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만찬입니다. 교회는 함께 떡을 떼는 곳입니다. 함께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곳입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은 하늘과 같은 것이어서 매우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나누는 식탁은 주의 성만찬과 흡사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음식물을 많이 버려서 문제라고 합니다. 음식을 대하는 자체가 매우 물질적이 되었습니다. 음식을 대하는 자세가 영적일 수록 기독교의 신앙과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음식을 감사히 먹고 절대로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조상으로부터 배워왔는데 이러한 우리 조상의 가르침은 우리가 먹는 음식과 사용하는 모든 물건의 귀중함을 강조해서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속에는 "받아먹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기도 드리고 있는 데 갑자기 환상이 보였습니다. 보니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와 같은 그릇이 네 귀퉁이에 끈이 달려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손에는 온갖 네발 달린 짐승과 땅을 기어다니는 짐승과 하늘의 새들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들린 음성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야, 어서 잡아먹어라." 영어 성경에는 "Kill and Eat"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죽여서 먹으라는 것입니다. 매우 섬뜩한 말씀이지만, 그러나 그 속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입니다만 이점에 대해서는 지금은 숨기고 조금 나중에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먹는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 준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이 전하고 있는 예수의 말씀입니다.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요한복음 6:53-54). 사람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을 말할 때 파푸아 뉴기니의 한 변호사의 말이 생각납니다. 지난 주간에 인도에서 열린 YMCA 아시아 연맹이 주최한 대회에서 만난 그는 자기나라 사람들은 100년 전만 해도 사람을 잡아먹었다고 합니다. 인근 섬에서 온 흑인 선교사를 잡아서 그의 살을 삶아서 먹고 구워도 먹었다고 합니다. 그 선교사가 신었던 가죽 신발도 먹는 것인 줄 알고 몇 번 삶아서 먹으려고 했지만 실패했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동학 사상에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말입니다. 해월 최시형은 이것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하늘로서 하늘을 먹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이치에 서로 맞지 않는 것 같으나, 모든 물건이 하늘을 표현하는 것이니 物을 식함은 곧 하늘을 식하는 줄로 알아야 한다." 이 말씀 속에는 物에 대한 존중이 있습니다. 해월에게는 모든 사물, 식물, 동물은 한결같이 하늘이었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예수의 살과 피로 기념하고 있는 떡과 포도주는 진정한 하늘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공동체의 성례전적인 나눔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은 커다란 경종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요한복음 6장의 말씀과 사도행전 10장의 말씀을 연결하여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먹어라"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절대로 안됩니다. 주님, 저는 일찍이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번도 입에 대어 본 적이 없습니다"고 대답합니다. 하늘에서 이런 말씀이 내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 이와 같은 말이 세번 오고 간 뒤에 그 그릇은 갑자기 원래 있던 곳, 즉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땅으로 꺼진 것이 아니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은 바로 하늘에 속한 것, 거룩한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더러운 것을 "없애버려라"는 뜻인지 아니면,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만약에 "죽이라"는 말에 강조를 둔다면 이러한 이방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버리고 멀리하라는 의미일 것이고, 먹으라는 데에 강조를 둔다면 그것을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오늘 텍스트에 나오는 고넬리요 같은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멀리하라는 것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새로운 깨달음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같은 10장 34절에 "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하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만약에 베드로의 첫번째 회심이 그가 예수를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사건을 통해서 일어났다고 한다면, 두번째의 회심은 오늘 읽은 텍스트의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번째의 회심을 통해서 그가 교회의 반석이 됨을 인정받게 되었지만, 두번째의 회심을 통하여 그는 교회를 이방세계로 확장하는 놀라운 역사를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두번째의 회심 속에서 베드로 택했던 강조 점은 "먹어라"였습니다. 만약 네가 나의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생명을 얻을 수 없듯이, 이것들을 먹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천식천과 같은 뜻입니다. 곧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먹는 대상을 하늘로,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속된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거룩한 것입니다. 죽여서 없애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소중히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제거해야 할 것이 아니라, 보존하고 그것의 가치를 인정하여 축복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버리고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에게 더없이 소중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베드로는 이방인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가 선포한 메시지는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어서 어떠한 민족도, 어떠한 사람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메시지였습니다. 10장 30절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해 주셨는데 그것은 만인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시켜 선포하신 평화의 복음입니다." 이러한 "평화의 복음"은 지극히 보편적인 메시지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는 평화의 복음을 선포한 분으로서 종말에 가서 모든 사람들을 평화를 위해 일했는가로 심판하신다는 메시지를 베드로는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보편적인 메시지로 이방세계 속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방세계란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제2의 회심이란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커다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 더 고립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담을 쌓고 있습니다. 교회는 점점 더 무력해져가고 있고, 급기야 그렇게도 급속하게 발전하던 우리 개신교는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거꾸로 쇠퇴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책방에 가보십시요. 기독교 관련 책들, 신학책들은 구석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많이 읽히고 있는 best seller, steady seller들은 대부분 기독교 관련 책들이 아닙니다. 오늘날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책들은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이교적이고 이방적인 것들입니다. 불교, 유교, 도교, 동학 등 타종교 관련의 서적들이며 심지어 토정비결, 풍수지리에 관련된 서적 등 우리 문화와 종교에 관련된 서적들이 많이 팔리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국민들이 자신의 영적인 정체성을 찾는 일에 갈급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그 동안 자신들이 안주하고 있던 자신만의 아성을 무너뜨려야 할 때가 왔습니다. 베드로가 새로운 회심의 경험을 통하여 자신을 이방인들에게 활짝 열었듯이 우리 개신교도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방문화의 이방인들에게 자신을 연 베드로가 전한 복음은 그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리는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복음을 들은 이방인들의 삶 속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왜 오늘날 일반 사상가들의 책이나 다른 종교의 서적들은 그렇게 많이 읽히지만 기독교 관련 서적들은 먼지만 뽀얗게 쌓여 있는가를 반성해야 합니다. 왜 개신교회의 교인수가 줄어들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 우리의 동료 기독교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불교도로 개종하거나, 아니면 무신론자로 되는가를 우리는 심각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왜 하비 콕스의 나 라인홀드 니버의 와 같이 일반인에게 널리 애독되어지는 글들을 우리 개신교회와 개신교 신학계에서는 쓰지 못하고 있는가를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우리의 과거의 방식에 매몰되어 자기 자신을 변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익숙해진 과거로부터 탈피하여 우리는 제2의 회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민족적인 우월주의 때문에 이방인들을 더럽다고만 생각할 때 그는 이방인들로부터 고립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들을 설득해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이방인들이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과 문화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들을 인정하고 평가할 수 있는 자세만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먹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먹는다는 것은 축복한다는 것이요, 기념한다는 것이요, 그것들을 높이 평가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도대체 우리 주위에 있는 이방인들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듣고 싶어하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먼저 중요하게 인정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정 속에는 적어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적인 정서, 문화, 정신, 종교, 가치관, 도덕이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오히려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들의 복음은 이방인 세계에서 먹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제가 인도에서 열린 아시아 YMCA의 회의에 참석하면서 느낀 것입니다만, 우리 기독교는 자신을 먼저 알기 전에 남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종교의 진정성을 파악하려면 다른 종교의 진정성을 먼저 이해해야 하고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서 나 자신을 파고 들어가기 보다 타자를 이해하게 될 때 나 자신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교는 먼저 이방문화와 종교를 인정하고, 그것에 나 자신을 열 때에 자신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너무 우리 중심에서 우리 자신을 이해했습니다. 우리 자신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타자의 관점에서 비판해 보지 못했습니다.
한국 개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개신교회는 오직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다른 것들을 무시하거나 핍박했습니다. 타자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의 종교를 비판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는 개신교에 대한 소위 이방인들의 무관심과 개신교의 고립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인들 중에는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이들은 다른 영적인 자원을 찾는 것입니다. 왜 우리 주위에 있는 이방인들은 더 이상 개신교회에서 영적인 물을 마시지 않게 되었는가, 왜 그들은 다른 영적인 자원을 찾아다니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 개신교회를 비롯한 기독교는 베드로가 경험한 제2의 영적인 회심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들 주위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영적인 자원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우리는 이방인들의 것들을 새롭게 평가하고 그것을 인정해 주어야 하고, 그것들을 통하여 나 자신을 다시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개신교회는 60년대 70년대 경제가 어려울 때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메시지로 이방인들에게 성공적으로 전도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 사람들이 잘 살게 되었습니다. 이미 받을 복을 다 받아버린 것입니다. 이전의 메시지로는 이제 이방인들을 설득해 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선 이방인들의 문화, 영성, 가치, 삶 등 모든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의 것들을 깨끗하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베드로의 메시지는 이방인들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방인들의 관심에서 새롭게 메시지를 전달할 때, 그 메시지는 이방인들을 위한 메시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민족적인 우월성, 교회의 우월성, 자신의 것의 우월성만을 고수하려고 했다면, 그러한 우월성은 편협한 것이었으며, 실제로 우월한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교만하고 악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새길교회는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자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 이방인들이 우리 교회에 발을 들이기를 꺼려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의 것의 우월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 우리 교회는 노인들, 특히 여성 노인들이 오시기를 꺼려하는 지, 왜 우리 교회는 소위 말하는 민중들이 얼씬거리지도 못하는지,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 교만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방인들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서 우리는 이방인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기념해주고, 인정하고, 축복해주고 그들의 관점에서 다시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을 들여다보아 지금까지 우리가 못 보았던 우리 안에 있는 허위, 교만, 자만심을 떨쳐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교만이 사라져야 이방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복음의 놀라운 진리, 진정한 진리를 발견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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