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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우러러 희망을 갖자

사도행전 최용우............... 조회 수 1874 추천 수 0 2008.05.16 10:5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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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7:55-56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새해 첫 주를 맞았습니다만 저희들의 가슴은 휑하게 비어 있는 듯 합니다. 작년 말 외환위기와 금융위기가 기업 도산으로 이어지면서 계속 실업 대란으로 악화될 것 같아서 두려움과 불안감을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고난과 절망의 객관적 상황은 앞으로도 더욱 악화될 듯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오늘의 기독교를 가능하게 했던 성령의 힘이 무엇인지를 새삼 알고 싶으며, 그 힘이야말로 절망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참 힘임을 다시 깨닫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처형당하신 직후 제자들은 절망을 가슴깊이 품고 각기 제 고향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처럼, 황혼을 바라보며 절망을 안고 고통스러운 귀향 길에 올랐던 사람들이 갑자기 예루살렘에 모여 새로운 힘을 얻고 새 역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이 바로 그 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새 힘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성령을 불같이 받은 제자들은 막혔던 언어와 문화와 지역의 담을 헐어버리고 서로 소통하게 되었으며 대낮인데도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방언을 하면서 비전과 꿈과 예언을 했습니다. 바로 이 비전과 꿈, 희망과 예언의 힘이 성령이 주시는 힘이었습니다. 이 꿈과 소망의 힘이 절망과 고난의 객관적 상황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지금 바로 이 성령의 능력인 꿈과 희망을 우리들은 절박하게 필요로 합니다.

초대교회는 계속 핍박과 환난에 휩싸였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며 용기 있는 증언을 했습니다. 그는 순교를 당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 곧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할 절망적인 상황에서 결코 고개를 떨어뜨리거나, 어깨를 축 늘어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시무시한 절망의 조건 밑에서 오히려 고개를 쳐들고 어깨를 활짝 펴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가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었던 것은 곧 소망과 꿈을 죽음의 상황에서도 가슴깊이 지녔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초대교회로 하여금 팔레스타인 유대교로부터의 억압과 로마당국으로부터의 핍박을 모두 이겨내게 한 힘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저의 짧은 삶을 되돌아보며, 희망과 꿈의 힘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였던가를 잠시 증언하고자 합니다. 만약 제가 그 꿈을 간직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오늘 한완상이라는 존재는 이렇게 서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민족이 가장 처참한 곤경에 빠졌던 1936년에 태어났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가 우리 강토를 강탈한 뒤 민족의 혼과 글마저 빼앗아가려 했던 때였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이름과 넋까지도 강탈하려 하면서 한반도를 그들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활용하려 했던 때였습니다. 그야말로 우리 민족이 절망의 밑바닥에 있던 때 저는 태어난 셈이지요.

게다가 제가 어머니 태중에서 약 여섯 달쯤 되었을 때 어머님께서는 큰 화상을 입으시어 생명이 경각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어머님과 함께 저 세상으로 갈 뻔했습니다. 이때 어머님께서 시골 교회 전도사님의 권고를 받으시고 만약 생존할 수 있다면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어머님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뱃속 신자가 된 것입니다. 死境에서 신자가 된 셈이지요.

초등학교 3학년 때 해방되었으나 가난과 질병의 고통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때 저에겐 특별한 꿈이 없었습니다. 6.25가 나고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저는 그 배고픔과 고독의 삶 속에서 하나의 꿈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YMCA 학생활동을 하면서 슈바이처 박사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신학자와 의사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고 3이 되니까 대학 진학을 앞두고 불가피하게 장래 평생직업과 연관되는 학과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때 저는 의과대학과 신학대학에 갈 생각도 했었지만, 보다 심각하게 소망했던 것은〈사회의 질병>을 고치는 의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가난, 전쟁, 부정, 부패, 차별 등을 고쳐주는 이른바 〈사회 의사〉곧 social doctor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절박하게 간직했던 소망이요,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춥고 배고팠던 동숭동 대학 시절에 이 같은 거창한 꿈은 도무지 실현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대학 3학년 때 학보병으로 군에 징집되었습니다. 그때 군은 한마디로 부정부패의 온상이었습니다. 허기지고 배고파 견디기 힘든데다 군역 또한 지루하고 따분하고 피곤했습니다. 새벽녘에 일어나 나무도 없는 발가숭이 같은 산을 돌아다니며 땔감을 마련하는 일을 했습니다. 도무지 그 작업에 의미를 줄 수 없었기에 더욱 괴롭고 외로웠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1957년 초겨울 어느 날 아침, 뱃가죽이 등에 바짝 붙어버린 듯 했습니다. 한 시간 동안 땔나무를 마련하기 위해 이 계곡 저 계곡을 헤매었습니다. 중대 연병장에 모이라는 명령에 따라 허기진 배를 안고 계급별로 줄을 섰습니다. 중대장은 며칠 뒤 사단 감사 팀이 오게 되었으므로 계급별로 월급을 암기시키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한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월급이라 사병들은 자기 월급액수를 기억할 턱이 없지요.

"일등병 월급 ○○○"를 차가운 겨울하늘을 향하여 허기진 배로 크게 소리쳐 외쳐대자니 허무하고, 억울하고, 우스꽝스러워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이때 나는 속으로 더욱 다짐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질병을 고치는 일이 사회 의사가 할 일이다. 이럴수록 내 소망을 더 굳게 지녀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부조리의 절망 속에서도 나를 견디게 해준 힘은 그리스도 안에서 social doctor가 되려는 바로 저의 꿈이었습니다. 다짐이었습니다.

그 다음해 정월 말, 영하 26℃의 강추위 속에서 저는 기합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일이 되어 사단교회에 다녀왔다고 기합을 받게 된 것입니다. 혹한의 일선에서 그것도 밤 10시경, 옷이 벗겨진 채(물론 속 팬티는 입었지만) 차가운 겨울별빛 아래서 엎드려 뻗쳐를 500번 해내야 했습니다. 그때도 저는 이를 악물고 견디면서 속에서 타오르는 저의 꿈의 불꽃을 그 거칠고 차가운 겨울밤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반드시 가 되어야겠다고 다시 다짐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사회 의사는 한 시대의와 같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예언자들처럼, 사회질병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사람입니다. 고통스러운 군대 생활을 마친 뒤 복교하여 저는 서울대학교 대학원 과정을 수료하였습니다. 1962년 가을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사회 의사가 되고자 하는 열망과 꿈을 지닌 채 말입니다. 조국 현실과는 너무나 다른 풍요한 미국 상황 속에서 저는 참으로 바보처럼 어리둥절했습니다. 세계화되지 못한〈국산 영어〉가 전혀 통하지 못하는 언어소통의 고통도 느꼈습니다.

헌데 교실 밖에서는 뜨거운 변화열풍이 들이닥쳤습니다. 흑인민권운동, 반전운동, 히피反문화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습니다. 미국 고질병을 고치려는 낭만적 운동처럼 여겨졌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내 속에 꺼지지 않고 있는 내 꿈을 계속 지필 수 있었습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미국 대학교에서 3년간 가르치게 되었을 때 모교 서울대학교에서 불렀습니다. 1970년 8월에 귀국했습니다.

그때 저는 이제야말로 조국에 돌아와 본격적인 사회 의사 역할을 담당하겠다고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문리대 교정에 돌아와서 본 첫 번째 놀라움은 교정 길 바닥에 거칠게 쓴 흰 페인트 글씨였습니다.

저는 사회학 교수로서 제대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도 없었습니다. 휴교사태가 학기마다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사회 의사 노릇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대번에 직감했습니다. 당시 억압적인 정치현실, 인권유린, 노동 3권의 제약, 유신체제 전야의 어지러움, 유신체제 이후의 강압정치, 부정부패의 악화 등의 사회 현실을 외면하고서는 사회 의사 역할을 해낼 수 없었습니다. 정확하고 정직한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행위는 바로 그 벌거벗은 억압정권과 맞부딪치는 일이었습니다.

한번은 동아일보의 요청에 따라, 그때 빈번히 일어났던 난동사병의 문제를 진단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신문사가 제목을 달았습니다. 신문 기사가 나간 다음날 아침 저는 군 당국으로부터 정중한 방문을 받고 엄중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병든 强者의 병든 징후를 진단하는 행위는 괘씸 죄로, 그리고 그들의 질병을 고치는 처방을 제시하는 행위는 불온 죄로 치도곤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기독자교수협의회 동지들은 대체로 저와 같은 꿈과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어서 절망적 억압상황 속에서도 소망의 공동체, 꿈의 공동체를 더 뜨겁게 만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하기야 이 공동체의 간부들이 나중에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되지만 말입니다.

저는 1976년 2월말 서울대학에서 마침내 해직되었습니다. 그때 총장은 저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정치적 추방을 당한 저의 좌절은 엄청났습니다. 서울대학 교수직을 박탈당해 보니까, 그 직장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직장을 빼앗는 것이 가장 잔인한 인권유린임을 실직한 다음날 아침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함석헌 선생의 말씀대로, 하나님 발길에 차여 본격적인 사회 의사로 일하게 된 셈이지요. 이때 재야활동을 하면서 민중사회학과 민중신학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희망의 신학과 사회학이기도 했습니다.

1980년 봄에는 새로운 역사가 다가오는 듯 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이뤄지는 듯 했습니다. 그해 3월 1일. 저는 4년만에 서울대학에 복직되었습니다. 복직의 기쁨은 부활 기쁨의 한 조각처럼 느껴졌습니다. 복직된 뒤에도 당시 계엄부사령관도 만나고 수경사령관도 만나 겁이 없이 한국의 軍이 정치발전에 공헌하도록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계속 사회 의사로서 을 내리고 을 하는 일에 분주했던 셈이지요. 헌데 그것의 대가는 참으로 아프고 무서웠습니다.

1980년 5월 17일 밤 10시 40분. 저는 검은 옷을 입고 권총을 찬 네 사람들에 의해 연행되어 남산 지하실에 감금되었습니다. 이른바 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지하실에 갇혀 광주사태가 일어난 줄도 몰랐는데, 그것을 선동한 김대중씨를 도왔다는 이유로 심문을 당한 것입니다. 정말 절망의 심연에 내동댕이쳐짐을 당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졌는데,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지옥같은 심문을 당했습니다. 이때 있었던 얘기 하나를 하겠습니다.

제 옆방에 L목사님이 갇혔는데 그가 두들겨 맞는 둔탁한 소리를 자주 들었습니다. 내 방의 문이 조금 열렸을 때 그 목사님이 변소에 갔다오는 모습을 언뜻 보니까 얼굴이 완전히 시체의 얼굴 같았습니다. 그 밝고 환했던 L목사의 평소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시커멓게 어둡고, 휴지처럼 구겨진 참담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가슴에 V자를 그려 그에게 용기를 주려 했으나 그는 저를 보지도 못했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그때 저에게는 소망을 매순간 지펴주는 성서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 성서를 L목사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내 소망과 기쁨을 그와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 방에 가끔 들르는 L목사의 심문관 한 사람에게 간청했습니다.
"김선생도 기독교 신자인줄 아는데 이 성서를 L목사님께 전해 줄 수 있습니까? 부탁드립니다."
"한박사, L목사 같은 정치목사에겐 성서가 필요 없어요. 혼자나 몰래 읽으시지요."
"아니 김선생도 평신도인데 성직자에게 그렇게 말해도 됩니까? 이 성서 꼭 전해 주세요."
그는 한참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맘대로 못합니다. 팀장에게 말해 보세요."
마침 팀장 S씨가 들렀을 때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그는 악명 높은 심문관이었는데 마침 동향사람이어서 인간적으로 호소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이렇게 비꼬며 말했습니다.
"한박사가 고향을 다 찾을 때가 있소. 한박사는 항상 인류나 민족 같은 고상한 것을 찾는, 팔이 밖으로 굽는 사람 아니오."
"고향사람 좋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발 부탁합니다."라고 다시 간청했습니다.
그는 나를 한참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휑하니 내 방을 나갔습니다. 그 다음날 김씨가 다시 찾아왔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선생, 팀장 S씨가 성서 주는 것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정말이오?"
"물어보세요. 주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팀장은 비꼬았으나 주지 말라던가 주라던가 딱 잘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김씨는 내 말을 줘도 좋다는 뜻으로 판단한 듯 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러면 성서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상 주려고 하니까 나는 성서를 선뜻 내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나 라는 불안감이 들이닥쳤습니다. 망설이다가 문뜩 나는 성서를 반으로 찢기로 작정했습니다. 엄격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저로서는 상상도 못할 짓을 하기로 한 것이지요. L목사는 성직자니까 예수님을 드리고 (4복음서) 나는 평신도니까 사도행전과 사도들의 편지를 갖기로 했습니다. 내 희망의 힘을 나누기로 한 것입니다. 성서를 찢을 때 그 파열음이 나에겐 상쾌한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반쪽의 성서를 받게된 L목사 방에서 찬송과 기도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며칠이 지나 열린 문틈으로 그가 변소에 갔다 오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이미 시체의 그 검은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밝아지기 시작한 산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내가 가슴에 V자를 그리면 그는 곧 화답을 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얼굴은 평소의 밝고 맑은 얼굴로 부활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찡하게 느꼈습니다.
"아! 부활이란 이런 것이구나."

나는 부활의 한 편린을 벅차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를 변화시킨 것은, 그를 부활시킨 것은 성서가 주는 희망의 힘이었습니다.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더 중요한 깨달음은, 내 희망이 반으로 줄어든 것이 아니라 두 배, 세 배로 늘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활기찬 얼굴이 나의 희망을 더욱 북돋아 주었습니다.
'희망은 나눌수록 더 강해지는 법'
성서를 찢음으로 얻었던 교훈입니다.

그해 7월 중순에 우리는 드디어 서대문 교도소 독방으로 이감하는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지하실의 그 지긋지긋한 지옥 심문에서 벗어나 감옥 독방에 홀로 있을 수 있는 를 만끽하게 된 것이지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독방에 있는 자유를 주심을 감사했습니다.

서대문에 있었던 일 가운데 희망의 가치를 다시 깨닫게 해 준 일이 있었습니다. 교도관 중에 20대 후반의 잘 생긴 K씨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직업이 부끄럽고 미래가 없는 직업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죄수인 나를 오히려 부러워했습니다. 비록 지금 옥에 갇혀 있으나 나에겐 희망이 있고 교도관인 자신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갑자기 내 감방 문을 따고 들어왔습니다.
"한교수님,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큰 사고가 터진 줄 알았습니다.
"왜 그래요?"
"잠깐 일어나서 저 건물 입구에 누가 오는지 좀 봐 주세요. 내가 한교수님 자리에 잠시 앉아 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행복해 질 것 같아요. 나하고 바꿔봐요."

그러더니만 내 자리에 앉아 내 흉내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객관적인 조건을 따지고 보면, 그는 자유인이요 나를 감시하는 자입니다. 저는 수인(囚人)이요 감시 받는 不自由人입니다. 헌데 자유인이 부자유인을 왜 부러워했겠습니까? 그것은 제가 갖고 있다고 그가 믿었던 희망과 꿈 때문입니다. 그는 20대요, 저는 40대였습니다. 그는 나보다 더 젊고 더 오래 살 수 있는 건장한 청년인데도 그는 스스로 희망이 없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저보고 "한교수님에게는 밝은 미래가 있잖아요."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때 다시 희망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희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살아있는 진리를 증거 한다는 점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군사정권이 내 육체를 0.7평의 감방에 가둬 둘 수는 있었어도 저의 희망과 믿음은 결코 가둬둘 수 없었습니다. 감방 창살 밖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저 새처럼 저는 희망을 타고 훨훨 자유롭게 나는 듯 하였습니다.

나는 그해 11월에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습니다. 작고하신 민중신학자 서남동 교수와 함께 석방되었습니다. 1년 뒤 미국에 있는 신앙동지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저는 미국의 모교 에모리(Emory) 대학교의 초빙교수로 기적적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허나 이것은 외롭고 괴로운, 그러나 희망으로 보람이 있었던 3년간의 미국 생활의 시작이었을 뿐입니다. 뜻하지 않게 이 기간동안 나는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오래 전 고등학교 때 어머님의 소원이 이뤄지는 것 같았습니다.
1984년 2월 24일. 저는 2차 정치해금대상자에 들어갔고, 그해 8월 15일 마침내 복권되었으며, 9월 초 그리던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귀국해보니 6월 19일 돌아가신 아버님의 꿈이 놀랍게 이뤄졌음을 확인하고 나는 뜨거운 눈물을 삼켰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해 2월 24일 제가 정치 해금되는 날 미국에서 외롭고 괴롭게 망명 생활하는 아들을 생각하며 붓글씨를 남겼습니다. 그해 8월 15일 해방 일에는 제가 복권되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버님은 6월 19일에 소천 하셨으나 아들의 복권이 해방의 날에 이뤄질 소망을 가슴에 간직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의 소망과 꿈이 저를 견디게 했을 뿐 아니라, 저를 위한 다른 분들의 소망도 저를 강하게 지켜준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그 소망은 바로 당신의 사랑이요 믿음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저는 희망과 꿈을 지니고 삽니다. 비록 그간 교수, 수인, 부총리, 위원장, 총장 등 여러 가지 다른 직분을 겪었으나 기능은 매한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사회 의사가 되는 소망을 이룩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소망을 이룩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여러 다른 직을 때마다 다르게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절망같이 느껴지는 戊寅年을 맞아 우리 믿는 형제자매들은 초대교회의 그 희망과 능력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나라도 살게 됩니다.
이 희망은 성령이 우리에게 주는 값진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새길공동체는 매 주일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고난과 절망 속에서도 우리에게 언제나 새로운 희망과 능력을 주시는 성령을 믿으며,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실현을 위해 우리의 삶을 바칩니다."
정말 어깨가 축 처지게 되고, 고개가 저절로 떨어지게 되는 이 실업대란의 국난상황에서 우리는 스데반이 그랬듯이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어깨를 활짝 펴고 하늘을 높이 우러러 소망과 꿈을 가집시다. 성령에 힘입어 하늘을 우러러 볼 때 우리는 우리를 응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격려하시기 위해 일어서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쳐다봅시다.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소망이심을 다시 확신합시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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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 요한복음 나를 보내신 것같이 요20:19-23  이재철 목사  2009-02-02 1489
462 요한복음 너희를 보내노라 요20:19-23  이재철 목사  2009-02-02 1683
461 요한복음 평강이 있을찌어다 요20:19-23  이재철 목사  2009-02-02 3988
460 요한복음 주께서 말씀하셨다 요20:1-18  이재철 목사  2009-01-13 1671
459 요한복음 내가 주를 보았다 요20:1-118  이재철 목사  2009-01-1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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