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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

사도행전 최용우............... 조회 수 1945 추천 수 0 2008.06.25 10:4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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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9:36-43 
설교자 : 최만자 자매 
참고 :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고급 옷 로비 의혹 사건에 대한 청문회에 이어 조폐공사 파업유도 의혹 사건에 대한 청문회가 이어졌습니다. 진위를 가려야 할 일이 이렇게도 연속적으로 발생하면서도 정작 진실은 밝혀내지도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한 사건의 진상규명을 경찰도 검찰도 국회도 해내지 못한다면 그런 나라는 결코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라고 한 신문 사설이 지적하였듯이, 이제 우리는 '부패 공화국' '거짓말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청문회는 진실의 규명은커녕 의혹을 오히려 확대 재생산하고 국민적 불신을 더 심화시키는 도구일 뿐이라는 그 자체에의 혐오감이 생기도록 하고 있으며, 청문회에 임하는 정치권의 당리당략에 얽매인 태도, 준비가 부족한 불성실함과 미숙한 진행 태도는 역시 텔레토비와 비슷한 수준임을 증명한 것 이상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런데 이 옷 로비 의혹 사건은 그러한 청문회 불신 문제보다 더 심각하게 여성문제와 예수 믿는 사람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고, 또 그것을 드러내어 주었습니다. '여자가 옷을 잘못 입으면 남자가 옷을 벗는다'라는 말이 요즈음 나돌고 있는데, 이는 이 사건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던 옛 속담을 '암탉이 울면 알을 낳는다'라는 현대적 해석으로 재 언어화하면서 우리 사회에 건강한 페미니즘을 확대시켜 남녀 평등하고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온 페미니즘의 공로를 물거품으로 만들려는무리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하는 기회가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분별력 없는 신참 고관 부인들이 커피숍이니 대통령 비서실장 공관이니 무슨 의상실들이니 하면서 들락거려 천 만원 짜리 코트를 사 입고 무슨 쇼를 관람하는 등 '바보들의 행진'을 해대고서는, 결국 만민이 보는 앞에서 자신들이 천박하며, 거짓말쟁이이며, 권력의 남용자이고, 허영 덩어리임을 천하만민에게 공개하는 잔치를 스스로 벌인 꼴이 된 것이 바로 이 사건입니다. 떼 몰이를 하면서 고급쇼핑을 하다가 '로비와 뇌물' 의혹으로까지 간 이 사건에서 우리는 아직도 우리사회의 내면에 보이지 않게 깔려 있는 권세에 대한 '권위-아첨'의 통속적 질서의식과, 권력과 뇌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반 개혁적 의식 등이 너무나 깊고 자연스럽게 사회 질서와 우리 자신 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물론 이 사건에서 여성들을 변호하거나 옹호할 생각이 추호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관점에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사회에 뿌리깊은 남성 중심의 사고로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이중적 잣대를 적용하는 문제입니다. 심문자들은 남성들을 심문할 때와 여성들을 심문할 때의 태도 및 심문 내용을 다르게 가지는데, 곧 그것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 권력사회가 가진 여성 비하적 태도의 작용입니다. 여성들에 대한 심문에서는 하나같이 남성 질문자들은 정치 연설가가 되고 도덕적 교훈가가 되어, 청문회 본래의 성격에 맞지도 않는 장황한 전언들을 풀면서 여성들을 훈계조로 대하고 얕보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청문회에 나온 남성과 여성에게 뚜렷하게 이중적 태도로 질문의 접근을 달리 하면서 여성을 얕보는 태도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남성 우월주의가 청문회에 나온 여성들의 약점을 호기로 잡아 남성의 권위를 확고히 하려는 질 낮은 저의를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 한가지 남성 심문자들의 잘못된 태도는 오늘 우리 사회의 부패와 타락의 요인이 모두 이 여자들에게 있다는 식의 부패 책임전가성의 발언과 태도로서, 그러한 태도는 심각하게 재고되어야 할 사항입니다. 오늘 우리 경제를 위기로 몰아왔고 정치와 도덕의 부패현실을 초래한 그 수많은 재계, 정계, 관료계에서 권력을 누리던 남성들은 모두 면죄부를 주고 뒤로 숨겨 놓고서, 이 여자들에게 그 모든 부정적 결과들의 책임을 짐 지우는 것은 권력의 또 다른 마녀 사냥적 폭력행위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남성적 잣대에 의한 여성 매도와 가부장적 권력 유지를 위한 사건 이용을 예리한 시각으로 분별해 내어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옷 로비 사건 이야기에서 제가 보다 중심적으로 여러분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은 문제는 이 사건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위에 언급한 정치 인사들보다 훨씬 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사람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저만의 지나친 자괴감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세간에 옷 이야기가 이렇게 많이 회자된 적도 없겠는데 고급 옷, 밍크 코트, 호피무늬 코트 등등의 옷 이름들이 나열되고 상상하기도 어렵게 몇 천 만원이 한 벌 옷값이라고 하는 말들이 신문 지면과 T.V 화면을 채웠으며, 그에 못지 않게 많이 등장한 단어가 무슨 교회, 권사, 장로 부인, 무슨 선교센터, 어디어디 기도원, 그리고 하나님과 성경 등등 기독교의 본질과 그 제도화된 현장의 핵심을 드러내는 용어들로서 이 용어들도 함께 지면과 화면에 난무하였습니다. 모두 각자 자기는 하나님과 성경 앞에서 맹세코 진실을 말한다고 하니, '하나님도 햇갈리시겠다'는 표현은 대부분의 언론 매체가 다룬 표현이었습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여성들이 모두 예수를 열심히 믿는 신앙인들이고 사건 전모에 등장하는 장면 중에는 심지어 기도원에 기도하러 갈 정도의 신앙을 가진 자로 나타났는데, 기도원에 기도하러 가는 그 깊은 신앙의 자리에 그토록 비싼 고급 코트를 입고 갔다고 하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며 도대체 그들이 하는 기도는 무슨 기도이며 그들이 가진 신앙은 무슨 신앙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거짓말하기에 궁색해서 코트를 입지는 않았고 걸쳤다고 말하기까지 하겠나 싶어서, 예수를 열심히 믿는다고 하는, 그래서 기도원에까지 다니는 그 여성이 불쌍하게까지 여겨졌습니다.

이 옷 로비 의혹 사건을 여자 망신, 기독교 망신시킨 사건이라고 합니다. 나는 이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한 번 한숨쉬고 예수 믿는 것이 참 창피하다고 수근거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은 몇몇 부유한 공직자 부인들의 철없는 여자 망신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 사건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참 교회인가 하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까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 사회에서 예수를 잘 믿는 것과 도덕적 행위 혹은 정의로운 행위의 이분화 현상을 보인 것은 오래된 일입니다. 5-6공화국 동안 이름난 큰 교회에서 예수를 잘 믿는 장로 검사가 양심수들 인권운동가들을 수없이 고발하고 수감생활을 하게 한 일들을 우리는 절대로 잊을 수 없습니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로 그 장로 검사가 다니는 교회가 장로 선출을 하는데 너무나 타락되고 부패한 선거운동이 벌어져서 결국 그 선거 결과를 무효로 하고 다시 선출하기로 했으며, 목사님이 울면서 자기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삶의 행위, 그리고 사회적 도덕적 의식이 철저하게 이분화된 한국교회의 현실을 우리가 보아야 하고 이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옷 로비 의혹 사건에서도 예수 믿는 것이 내가 거짓말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고, 권력을 이용하고 그것을 나에게 유리하게 사용하는 것과도 상관이 없고, 또 IMF라는 국가적 위기와 그 안에서 실직하고 끼니를 굶고 가정이 파괴되고 청소년들이 방황하는 일들과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것이 오히려 내 남편이 장관이 되게 해 주고, 내가 장관부인이 되게 축복해 주고, 나의 딸이 시집가는데 억대의 고급 옷을 입게 해 주고, 같은 축복을 받은 여자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고 하루해를 즐겁게 보낼 수 있게 해 주고, 내 남편의 권력이 대단함을 보일 수 있게 해 준 그런 고마운 일들과 상관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신앙태도가 한국교회에 거의 지배적인 것 같다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이번 사건에 연관되어 그 이름이 오르내리는 교회들은 공교롭게도 공통적으로 대체로 보수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으며, 외국 선교(저는 그들이 선교라는 용어를 쓰는 것도 못마땅하지만)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교회를 대형화하고 온유와 인내와 화평 등을 예수 믿는 자의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하며 지나치게 개인변화의 신앙을 강조하고, 따라서 탈 역사적, 탈 사회적 태도를 결과적으로 갖게 하는 신앙 유형을 가지고 있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실존적으로 고통의 현실이며, 내 힘과 의지로 풀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들의 연속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이 사실이기에 저는 우리가 절대적 존재의 힘에 의지하려 하고, 또 나의 개인적 삶의 진행이 그 분의 손 안에 있다는 개인 경험적 신앙을 결코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차원, 곧 나 개인의 생사 화복과 관련된 경험만이 신앙의 영역에 들어와 있고 가깝게는 이웃과의 관계, 더 나아가 사회적, 역사적 관계들로 성숙되어 나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말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개인적 경험 중심의 신앙이 근본주의적이며 교리주의적 신앙으로 굳어져서 경직되고 또 거기에 신비적 기복적 형태가 덧붙여지면, 그것은 결국 예수와는 결별되는 다른 신앙이 되고 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한국 교회는 지금 위에서 지적한 그런 형태의 신앙 태도가 지배적으로 많은 상황이며 교회들이 지속적으로 그러한 신앙을 설교하고 교육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제 강의에 들어오는 한 여학생이 이 사건에 간접 관련된 한 교회의 청년회에 열심히 다니는데, 그 교회가 얼마동안의 선교훈련을 대학생들에게 시켜서 인도로 선교여행을 하고 그곳에서 인도인들에게 일주일 동안 전도하고 돌아오는 프로그램을 하여 그 학생도 참여하여서 인도를 다녀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가 잘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별로 잘 되지 못하고 좀 노력하다가 돌아 왔다고 합니다. '이런 무모한 프로그램이 어떻게 신학을 알고 목회를 아는 목사와 교회에서 가능할 일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기막힌 것은, 그 교회에 청년들이 구름처럼 몰려간다는 사실입니다. 그 교회에 다니는 교인은 자기네 교회가 오늘의 청년들에게 의미를 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고 저에게 말하였는데 저는 그 교회에 청년들이 몰린다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떨린다고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의식, 사회의식이 결여된 청년들이 그렇게 많이 양산된다고 하는 일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 기독교는 그 전래 초기에 나라를 개화시키는 사회 개혁적 변혁의 힘으로 작용했고 수많은 젊은 지성들이 그 일에 헌신하였으며, 1980년대까지 소위 에큐메니칼 운동의 영향력으로 기독 청년들이 이 나라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통한 사회 변혁적 세력의 역할을 하여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이 극도로 약화되었고 NCC를 비롯한 성인 에큐메니칼 운동도 정체성을 잃고 자기 방향을 잡지 못한 연고로 결국 개인 중심적 신앙의 운동체들이 번성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너무 오랜 동안 투쟁, 갈등, 운동, 최루탄, 투옥, 고문 등등으로 시달리고 지쳐서 이제는 개인의 안정과 평안을 추구하게 된 현실도 작용하였겠지만, 한국 교회가 오늘 이대로 지속되어 개혁되지 않는다면 한국의 기독교는 예수와는 상관없는 다른 종교가 될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횡행하고 있는 수많은 사이비 종교가 저지르는 성폭행이나 사기행각들, 그리고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이성은 완전히 마비시키고 비인간화시키는 마술들이 바로 탈 사회적 신앙 유형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영성운동이라는 것도 심각하게 그리고 날카롭게 객관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제가 아는 한 신학대학 교수는 자기학교 학생들의 영성수련회에 갔다가 그의 표현으로 '자기가 뒤집어질 뻔 하였다'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아이들이 저렇게 훈련되어 오는데, 내가 저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그동안 무엇을 가르쳤으며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국교회가 개혁되지 않으면 정말 미래가 없다는 비관론을 제게 역설하였습니다.

이제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의 태도와 행동에 대해서 성서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것을 오늘의 현상과 비교해 보려고 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그들 중에는 예수의 기적을 바라보고 따라다닌 자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예수의 자기 존재 인정과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선포함을 듣고 그를 따르고 섬긴 자들로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는 이제 예수는 승천하시고 땅 위에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을 받고 시작된 교회에서 예수를 믿는 이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초대 원시기독교의 예수 믿는 자들의 모습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저들이 나눔의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을 믿는 자의 일차적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믿는 자들의 삶을 보기 전에 먼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대한 것부터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선 그 황홀하고 신비한 경험을 갖게 한 성령강림 사건은 성령을 받는 것이 신비한 경험을 하는 것이라는데 강조를 둔 것이 아닙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현상은 방언을 말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실제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삶의 태도는 방언하기를 힘쓴 것이 아니라 온전한 공동체적 삶을 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의 불의 갈라짐 같은 현상과 황홀경에 쏟아내는 방언 현상은 교회가 초자연적 역사에 의하여 출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묘사하는 데 있는 것이지, 성령 받는 것이 방언하고 신비한 행태의 경험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 이례적 사건은 구약 성서에서 메시아의 심판이 있기 전 이스라엘에게 부어주는 성령의 역사가 있을 것이라고 한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따라서 바로 예수가 그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언하려는 데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방언은 당시에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았기에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던 유대인들을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하여 예수가 메시아임을 알리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곧 교회의 세계 선교화를 상징합니다.
이 성령 강림 사건은 곧바로 성도들의 생활로 연결됩니다. 성령을 받아 교회가 시작되고 성령 받은 이들이 하는 교회 생활, 곧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공동체적 나눔의 생활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함께 음식을 먹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마다 빵을 떼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행전 2:42 - 47)

이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과 신앙형태를 이 본문을 근거로 배우는 교회, 교제하는 교회, 기도하는 교회, 존경받는 교회, 나누는 교회 등등으로 정리하여 정의합니다만, 무엇보다도 초대교회의 모습은 공동 생활을 통한 나눔의 삶에 있다 하겠습니다. 이들은 나누는 삶을 그리스도인 각자의 책임으로 인식하였습니다(44-45절). 다른 이들이 적게 가졌는데 자기만 많이 가지고 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 초대교회 구성원들을 유대교 내에서 결속된 일단의 사람들로 보는데,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 내적인 결속을 강하게 가지는, 이른바 '공산주의의 실험'이라는 말로 불려지는 삶의 방식을 택해서 사는 모습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이는 엄격한 의미의 공산주의는 아니고(사유권을 박탈하지 않음 - 5:4), 이웃에 대한 억누를수 없는 사랑 때문에 부동산을 가진 자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 소유를 팔아 그 판 값을 사도들에게 내어놓았습니다. 이를 공동기부금으로 하여 공동체 안의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었습니다(행 2:45, 4:34-35). 이러한 행위는 그리스도인의 교제의 한 인상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깊은 친교감에 근거를 둔 소유의 자발적 나눔이었던 것입니다. 개인 소유재산이 필요할 때 공익사업에 기부하는 그런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자를 물질적으로 도와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것은 영구한 원칙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받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의 모습은 신비한 방언하기나 개인의 윤택한 삶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공동체적이며 이웃과 온전하게 나누는 삶을 살고 이웃과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 오순절 성령사건의 현상의 결과는 신비한 방언하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경제 평등 공동체의 삶을 하는 것이 바로 성령 받은 징표가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의 소유를 내어놓아 공동체의 가난한 자들과 나누는 삶을 하는 것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고 성령 받은 이들의 삶의 모습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영성을 추구하며 성령 받았다고 하며 신비한 경험들을 줄줄이 대어내는 것은 사도행전의 초대 원시교회의 이해와는 엄청나게 다르게 해석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공산적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적 삶을 중요하게 여긴 초대 교회에서 성도들의 삶에는 선행이나 자선을 하는 행위들이 많이 나타났으며 또 교회는 이를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즉 나누는 생활을 하는 것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초대교회에서는 계속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의 모습에는 선행과 자선을 베푸는 모습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교회도 구제사업에 주력하기 위하여 일곱 집사를 택하는 등 나눔을 위한 활동이 중심이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살펴봅시다. 여기에는 초대교회의 한 여성 신도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본문의 주된 관심은 베드로의 능력을 드러내고 그의 기적 사건을 통한 기독교 선교의 확장을 증거하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역을 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여기 등장하는 한 여성의 모습을 통하여 초대교회의 여성들의 자리와 그들의 신앙태도, 예수를 믿는 자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여성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다비타이고 희랍어로는 도르가인데 그 의미는 '사슴'(가젤 영양)이라고 합니다. 욥바라고 하는 항구 도시에 살고 있은 이 여인 도르가는 아마도 예수를 잘 믿는 훌륭한 신앙인이었다고 보입니다 - 그를 여제자라고 호칭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그는 부유한 여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지역사회에서 이 여인의 비중과 영향력은 그가 병들어 죽음으로서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그의 죽음을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였고, 그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생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이 죽은 후에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 주민(제자)들이 근처에 와 있는 베드로를 초청하여 베드로의 기도의 능력으로 도르가를 살렸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왔을 때 특히 그곳의 과부들이 울면서 도르가가 살아있을 때 자기들에게 행한 사랑과 선행, 곧 도르가가 그들에게 만들어 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여주었다는 기록이(39절) 있는데 그 모습이 오늘의 옷 로비 사건과 너무도 대조를 이루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서에 나오는 부유한 상류층의 도르가는 예수를 믿고 일심으로 선행과 구제를 위하여 직접 옷을 만들어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도르가가 얼마나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깊었으며, 그의 믿음의 행위는 자선과 선행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사실을 주목하게 됩니다. 도르가가 특히 과부들에게 많은 옷을 나누었던 것은 바로 그 사회에서 지극히 가난하고 힘없는 여인들을 도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약한 자들에게 더욱 깊은 애정을 가졌던 그의 모습을 상상하게 합니다. 초대교회 예수를 진실하게 믿은 자의 모습과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자들의 모습과는 전혀 공통점도 유사점도 없어 보입니다.
사도행전이 누가 문서에 속하는데 이 누가 문서는 하류계층과 천한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언급들로 예수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것, 그들을 축복하고 옹호하는 비유(눅 12:13-21, 16:19-31), 돈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바리사이인을 비난하고(16:13),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며(16:13). 베드로는 가난하며(사도 3:6), 그의 기적 능력은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며(사도 8:18-24), 고낼료는 그의 자선 때문에 칭찬받고 있습니다(사도 10:2). 누가 공동체에 부자들이 많았다고 보는데 경우에 따라 자기소유를 처분하는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누가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 중심은 가난한 자를 위한 공동체의 사회적 관심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누가는 인간의 생명이 소유의 풍족함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수차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믿는 자들의 모습을 새삼 살펴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그 당시와 멀리 나와 있는 그리스도인들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공동체적인 삶은커녕 개인 탐욕을 위해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이 모두 이용되고, 거짓말하는 것과 신앙윤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그리스도인 아닌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있습니다.

품위있는 선행자 도르가의 모습과 청문회에 나온 고급 옷 걸친 그 여인들을 비교하면서, 한국교회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이 너무도 깊게 들었습니다. 옷 로비 의혹사건은 우리에게 한국교회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라는 성령의 경고장과도 같이 느껴집니다. 부패와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믿는 자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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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3 사도행전 경계를 넘나드는 교회 행10:9-16  김상근 목사  2008-04-21 1715
482 사도행전 그리스도를 주시는 하나님 행5:31  김남준 목사  2008-03-10 1827
481 사도행전 제 2의 회심 행10:9-16  권진관 형제  2008-02-26 1883
480 사도행전 아름다운 인생 결산 행20:17-38  김필곤 목사  2008-02-06 3063
479 사도행전 성령강림과 방언을 통해 증거된 그리스도 행2:1-4  소재열 목사  2008-01-21 2971
478 사도행전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행17:16-34  길희성 형제  2007-12-17 2151
477 사도행전 천사이야기 행12:5-10  한태완 목사  2007-11-27 2362
476 사도행전 <제자분석10> 십자가를 위해 칼을 포기한 사람 -시몬 행1:6-14  전병욱 목사  2007-11-22 3017
475 사도행전 성전의 안과 밖 행3:1-10  한완상 형제  2007-11-20 2394
474 사도행전 아레오바고 영성 행17:24-26  김경재 목사  2005-05-28 7991
473 사도행전 관용의 기억 file 행15:1-12  정경일 형제  2004-03-11 2366
472 사도행전 예수 그 이름을 높이자 행4:5-12  한태완 목사  2007-11-10 2505
471 사도행전 참된 교회의 모습 행2:42-47  한태완 목사  2007-11-07 2929
470 사도행전 예수 재림의 가능성 행1:9-11  강종수 목사  2007-09-04 2241
469 사도행전 인생 밑바닥에서 통과해야할 세 가지 훈련 행25:1-12  김필곤 목사  2006-09-13 3654
468 요한복음 믿는자가 되라 요20:24-29  이재철 목사  2009-02-27 2520
467 요한복음 우리가 보았노라 요20:24-29  이재철 목사  2009-02-27 1531
466 요한복음 내 손과 옆구리 요20:24-29  이재철 목사  2009-02-27 1920
465 요한복음 뉘 죄든지 요20:19-23  이재철 목사  2009-02-27 1499
464 요한복음 숨을 내쉬며 요20:19-13  이재철 목사  2009-02-27 2064
463 요한복음 나를 보내신 것같이 요20:19-23  이재철 목사  2009-02-0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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