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 모모행전(某某行傳)

사도행전 최용우............... 조회 수 2038 추천 수 0 2008.08.26 11:50:27
.........
성경본문 : 행20:22-24 
설교자 : 홍순택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5.10.30 주일설교 
제목: 나의 달려갈 길: 모모행전(某某行傳)
본문: 사도행전 20:22~24

며칠 전 아프리카 케냐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선교사를 한 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제 아내의 교회 중고등부 시절 선생님이셨습니다. 총회본부에 교육을 받으러 일시 귀국하셨다가 옛 제자들에게 연락을 하셨고, 제 아내와 아내의 절친한 친구가 그 선교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저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기독교선교단체가 운영하는 병원의 원목 일을 보며 행정도 돕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분을 통해 들은 케냐, 특히 나이로비의 정경은 동물의 왕국에서 볼 수 있는 풍경도 아니었고 영화〈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볼 수 있는 목가적인 풍경도 아니었습니다. 서구 문명이 흘러든 곳은 어느 곳이든 예외없이 가난, 엄청난 빈부격차, 전통문화의 파괴로 인한 도덕과 가치관의 상실, 치안부재, 범죄와 질병이 만연하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화로 인해 유럽과 미국의 방송이 쉽게 들어와 돈이 필요하다는 의식을 사람들의 뼈 속 깊이 심어주고 있지만 동시에 중국의 저가 상품들도 어김없이 찾아들어 그나마 생겨나고 있던 산업들을 흔들고 일자리를 빼앗고 있는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나마 소위 ‘문명’의 혜택을 본격적으로 접하지 못한 지방의 부족마을들은 풍족하지는 못해도 의식주가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고 치안도 전통촌락의 규율이 살아있어 오히려 안전하다고 합니다.

그날 만난 선교사님은 나이로비에 산 지 몇 년 되지 못했음에도 벌써 수십 차례 강도를 당했고 인질로 납치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돈이었고, 사역의 특성상 현금을 소지할 수 밖에 없는, 그러면서도 공권력이나 값비싼 사설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을 수 없는-물론 경찰도 지역의 폭력-절도 조직들과 뿌리깊게 얽혀있기에 웬만한 고위직 인사가 아닌 이상 경찰력을 요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외국 선교사들, 특히나 동양권의 선교사들은 강도와 폭력에 일상으로 노출된다고 합니다. 선교사님 집의 모든 창은 철창이 덧씌워져있고 문은 철문으로 되어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일 년에 몇 번은 아예 정기적으로 강도를 당한다고 합니다.

두 자녀가 다니는 유치원까지는 차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데, 보통 사모님이 운전하여 오가는 그 길은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차의 속도를 늦추거나 잠시라도 멈추게 되면 무장강도들의 습격을 받기 십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움푹 패여 위험한 비포장도로를 곡예운전 하듯 열심히 달릴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아이들도 으레 차에만 타면 잠금고리를 누르고 차문에 몸을 기대지 않는 습관이 배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곳 강도들은 총까지 들고 다니긴 해도 반항만하지 않으면 신체적 위해를 가하거나 죽이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신고해봤자 경찰이 자신들을 잡지 않는다는 것, 잡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랍니다. 공권력, 치안력의 부재가 인명살상까지는 막아주는 역설적인 상황, 웃을 수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말라리아와 같은 열대토착병들과 소위 후진국형 질병인 결핵 등에도 걸리기 쉽다고 합니다. 선교사나 가족들도 종종 그 병에 걸려 고생하고 때로는 목숨을 잃게 된다고도 합니다.

이에 더하여 문화적 차이로 인한 충격과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곳에서 전혀 새로운 삶, 전혀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가야 하기에 받는 스트레스는 선교사와 선교사 가족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무게로 다가온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은 소위 문명화되었다는 우리들의 눈에나 야만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선교사님의 아이들은 그런 상황에서 자라 그런지 몰라도 일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안전하고 풍요롭고 놀거리 많은 한국보다는 오히려 안전하지 않고 먹을 것도 풍족하지 않고 좀 과장해서 인터넷 포털싸이트 다음 홈페이지 접속에도 30분이 걸리는 케냐를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 정도쯤 이야기가 진행되었을 때, 제 아내의 반론이 튀어나왔습니다. “선생님이야 사명을 받았고 그런 것까지 감수할 각오로 가셨겠지만 선생님이 선교사이기 때문에 따라가야만 했던 사모님과 아이들한테는 너무한 일이네요.”

그 후로는 선교사님은 선교사 생활을 통해 가족들이 얻을 수 있는 현실의 이득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 자녀들이 다니는 교육기관을 통해 현지어와 영어를 잘 배울 수 있다는 점, 실제 선교사 자녀들의 적지 않은 수가 미국 선교단체와 기독교학교들과의 연계로 미국에서 대학공부를 하게 된다는 점, 성장한 후에는 결국 아버지의 헌신을 자랑스러워하게 될 것이고 어떤 자녀들은 부모의 뒤를 이어 헌신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는 점, 무엇보다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갚아주시리라는 점….

이런 변론과 “그래도 그렇지만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남편의 결정을 따라서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아내의 공격이 몇 차례 오갔습니다. 그러고나자 선교사님은 제 아내에게 오늘의 성서본문을 인용하시며 그래도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기 위해 자신은 그곳 케냐에서 일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튼 그 논쟁은 그렇게 대충 마무리되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님과 헤어진 후 아내는 저에게 가족을 그렇게 고생시키는 선교사들의 선택이 이해되지 않는다며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그런 고백을 한 사도 바울은 가족 부양의 걱정은 없는 사람이었다고, 그래서 가족도 함께 선교지로 간 선교사님께서 그 구절을 인용하시는 것은 그다지 적절치 않아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아까 그 자리에서 얘기 좀 하지!”

사도행전 20장 22~24절은 복음주의적 신앙의 열정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구절입니다. 성서에는 무슨 이유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려했는지 분명히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아무튼 바울은 매우 급히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중이었습니다. 20장 16~17절에 보면 바울은 유월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두르면서 자신이 매우 아끼는 에베소교회에 들르지 않고 인근 밀레도 항구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렀다고 합니다. 에베소 장로들을 만나 한 이야기가 20장 후반부의 내용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께 받은 사명의 길을 다 달려가기 위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헌신했다고 회고합니다. 또한 에베소 교인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절절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작별할 때에 서로 실컷 울었다는 것을 보아 아마도 바울과 에베소 교회 장로들 모두 예루살렘에서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바울의 고백은 마치 마지막 유언처럼 들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결국 예루살렘으로 갔고 그곳에서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왔다는 죄목으로 체포되게 됩니다. 그후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재판을 받으러 로마로 압송당하는 것으로 사도행전은 끝을 맺게 됩니다.

많은 교회들에서 오늘의 성서본문이 자주 언급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말고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자,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전심으로 감당하자고 말입니다. 바울은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간혹 안 그런 교회도 있습니다만- 아주 중요한 역할모델이 됩니다. 선교사나 목회자나 직분을 맡은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바울의 이 고백은 중요한 모범이 됩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받은 사명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돌보지 않으면서 헌신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무모하다, 어리석다고 할 정도로 우직하게 헌신합니다.

헌신과 자기희생은 바로 기독교 신앙의 역동적인 힘의 원천입니다. 세상을 변혁하는 힘이며 인간의 전존재를 휘어잡는 매혹입니다. 이런 헌신의 사람들,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기 위해 투옥과 환난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의 변화와 역사의 진전이 이루어지기도 해왔습니다. 물론 한 편에서는 잘못된 신념과 헌신으로 오히려 반대의 결과가 이루어지기도 해왔습니다. 헌신은 때로 맹목적이며 배타적인 악행도 서슴지 않게 하는 위험을 갖고 있음을 역사는 보여줍니다.

어찌되었든 이같은 철저한 헌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던지는 희생의 정신은 기독교 신앙의 매력이자 힘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어던지고 유랑의 삶을 살며 하나님나라를 외치고 십자가까지도 감수했던 예수, 만성적인 질병을 갖고 있었음에도 감옥에 갇히고 얻어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수천 리를 여행하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돌보았던 바울,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살았던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명에 대한 확신, 자신의 달려갈 길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 그 사람의 가족들까지도 함께 희생하고 고통을 감내할 것을 당연히 요구한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선교사의 아내도 자신이 선교사로 사명을 받았다고 확신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고 다른 곳에서 다른 일에 자신의 달란트와 사명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좀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부장적인 가족문화가 복음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현실은 이런 고충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기도 합니다.

사명에 대한 확신과 자신의 달려갈 길에 대한 전적인 헌신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바울같은 삶의 형편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같은 사명을 받은 것이 아님에도 모두 바울처럼 실천하기를 요청당한다는 것일 겁니다. 한국교회의 상당부분에서 바울과 같이 모든 것을 내어던지는 헌신, 목숨을 내걸고라도 입으로 선포하는 선교의 방식, 해외선교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바람직하고 궁극적인 목표로 제시된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거의 모든 교회가 해외선교를 가장 잘하는 일로 여기며 투자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해외선교사로 헌신합니다. 해외선교사로 헌신하지 못하는 이들은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왠지 모를 부채의식을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이들은 깊은 고민과 구체적인 결단과 실천없는 맹목적이고 감정적인 헌신을 맹세합니다. 심지어는 비윤리적이고 몰상식하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가족과 이웃을 고려하지 않는 배타적인 행동을 감행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같이 완벽한 헌신의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약한 자, 할 수 없는 자들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계속적으로 실천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으로 자기 스스로를 상처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다고 해서 무조건 이 사회의 상식과 가치, 관행, 인간중심주의, 그리고 가족주의를 그대로 인정하기도 어렵습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셨던 자유와 파격의 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인정받고 모든 사람들이 다 너그러이 받아줄만한 세련되고 우아하고 얌전한 그리스도교로 남는 것도 위험한 일일 것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에서 예수가 십자가의 극한 고통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십자가에서 내려와 어느 시골에 숨어들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환상을 꾸는 장면이 나오는 데, 이런 유혹은 또한 예수의 뒤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음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두 가지 생각이 복잡하여 저는 그 자리에서 선교사님께 바울은 부양가족 걱정을 하지 않았다는 그 이야기를 차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교사님의 생각과 행동, 선교방식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분의 열정과 헌신을 존경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찌되었든 그날 밤 제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은 우리 한국교회가 이제는 바울이 달려갔던 길과 선교의 방식에만 몰두한다거나 그것만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인식을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를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삶의 현장에서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도 충분히 그리스도인일 수 있도록 모델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더 많아지고 그런 이야기들도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으며 이야기될 수 있는 교회 현장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 1학년 때 역사관련 교양필수 과목을 들으며 제일 처음 읽었던 책이 바로 Edward Hallet Carr의『역사란 무엇인가』였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현재 보고있는 기록된 역사라는 것은 모든 인류의 모든 시대의 모든 사건과 모든 행적을 다 기록한 것이 아니고 역사가의 사관에 의해 선택되고 편집된 일부임을 일러주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보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같은 가치의 상대화는 기록된 무엇의 가치와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절대화하지 말고 우리 자신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해질 것을 요청하는 것이라 배웠습니다.

성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달려가신 길을 함께했던 사람들, 그 길을 보았던 사람들의 기록 중 일부는 복음서가 되었습니다. 사도들과 바울이 달려갔던 길,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초대교회 공동체가 달려갔던 길에 대한 기록의 일부는 사도행전과 서신서, 계시록으로 성서에 남아 오늘까지 전해집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의 달려간 길에 대한 모든 기록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모든 기록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고 전해 받은 이야기보다 더 넓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예수와 사도들 당시에도 오늘까지 전하지 않는 다른 많은 기록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후 시대에도 기록을 통해 알려지고 있지 않은 다른 많은 신앙인들과 공동체의 삶이 있었을 것입니다. 성서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과 공동체, 그 외에도 예수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 하나님의 나라를 살려는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중 일부는 우리가 외경, 혹은 위경이라고도 부르는 모습으로 남아있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야기들은 경전 취급도 받지 못하고 그저 전설 속의 이야기로 남아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 이야기들은 기록으로 남지도 못하고 어떤 공동체나 개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입에서 입으로, 주변 사람들의 눈을 통해 마음에서 마음으로 새겨져서 전해지다 사라졌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라져버린 이 이야기들은 비록 현재 우리가 ‘정경(正經)’이라 부르는 성서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어떤 누군가의 삶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매우 소중한 역할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도들이 달려갔던 길, 사도들이 말하고 행했던 기록들 일부가 사도행전으로 남아있다면 그 다른 이야기들, 알려지지 않은 어떤 사람들이 달려갔던 길은 누군가의 마음 속에 또 다른 ‘모모(某某)행전’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도 어떤 ‘모모행전’이 들어있을 것입니다. 유영모 선생님이나 함석헌 선생님이 달려간 길이 그 모모행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유명하지는 않을지라도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주변의 이웃들이 달려간 길에 대한 이야기가 또 다른 모모행전으로 우리 가슴에 남아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 새길공동체가 달려가고 있는 길도 또 하나의 모모행전이 되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새길행전이 되지 않을까요. 나아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붙어있는 행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쓰여지고 있을 것이고 우리와 삶을 함께하고 있는 이웃들의 마음 속에 쓰여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 공동체들의 이름이 붙여질 수 있는 ‘모모행전들’이 쓰여지고 있다고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정경의 권수를 늘릴 필요는 없을지 몰라도 나 자신의 행전, 내 이웃들의 행전, 우리 공동체의 행전의 주인공이 되고 있음을 생각하며 새로운 신앙의 이야기, 새로운 하나님의 이야기를 써 나갈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신앙이 더 풍부해지고 더 현실적으로 되어갈 수 있지는 않을까요. 바울이 고린도후서 3장 2절에서 고백하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세계교회가 종교개혁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480여년 전 개혁자들은 라틴어로만 들려지고 보통사람들은 읽어볼 수조차 없었던 성경을 각자의 모국어로 번역하고 널리 퍼트리는 것을 개혁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특권층의 소유물로 축소되어왔던 성서를, 하나님의 이야기를, 신앙의 선조들이 달려간 길에 관한 이야기들을 더 많은 사람들이 듣고 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신앙의 길을 열었습니다.

성경은 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성경은 늘 새롭게 쓰여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계의 모든 교회가 공인하고 정경에 추가되지는 않을지라도 누군가의 마음 속에, 어떤 공동체의 의식 속에 깊이 새겨질 수 있는 새로운 경전이 쓰여져야 하지는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니, 그런 새로운 경전들은 이미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공동체에 의해 쓰여져왔고 전해져왔을 것입니다. 때로는 글로 쓰여 전해졌을 것이고 때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것이며, 때로는 서로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을 통해 전해졌을 것입니다.

어느새 성서의 이야기들은 또 다시 우리 대중의 일상에서 멀어져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신주의로 가득한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에 의해서, 급변하는 문화에 의해서, 문자적으로만 성서를 해석하는 완고함에 의해서, 꽤나 신학적이고 학문적인 지식을 갖고 해석해야만 그 참뜻을 알 수 있다고 보는 생각에 의해서 말입니다.

우리 이웃의 삶 속에서 또 다른 ‘사도행전’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 사건을 통해 드러난다고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동시에 우리 이웃들이 내 삶 속에서, 우리 공동체의 삶 속에서 또 다른 ‘모모행전’을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발자취가 누군가에게, 또 우리 자신에게 진솔한 신앙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의 고백이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제 삶 속에서도 다시 고백될 수 있어지기를, 하지만 모두가 똑같은 내용으로가 아닌, 다양하고 풍성한 구체적 사건들을 담고서 ‘모모행전들’이 쓰여질 수 있기를 빌어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497 로마서 세상 권세 file 롬13:1-7  강종수 목사  2006-06-11 2391
496 로마서 산 제사 file 롬12:1-5  강종수 목사  2006-05-28 3173
495 사도행전 격려하는 삶의 축복 행4:36-37  이한규 목사  2008-12-23 2508
494 사도행전 성령 충만을 받으셨습니까? 행19:1-7  이한규 목사  2008-12-23 2222
493 사도행전 이 선교를 어찌할꼬 행1:6-8  한완상 형제  2008-11-30 1608
492 사도행전 바울의 회심과 증언 행26:9-23  조용기 목사  2008-10-22 2095
491 사도행전 부활, 그 아름다운 얼굴 행7:51  한완상 형제  2008-10-15 1548
490 사도행전 절망 속에 들린 음성 행27:22  김남준 목사  2008-10-01 2046
» 사도행전 나의 달려갈 길: 모모행전(某某行傳) 행20:22-24  홍순택 형제  2008-08-26 2038
488 사도행전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 행9:36-43  최만자 자매  2008-06-25 1945
487 사도행전 제3의 새로운 인생 행16:6-10  조용기 목사  2008-06-20 2363
486 사도행전 시계제로와 하나님의 비밀 행27:9-26  조용기 목사  2008-05-30 2343
485 사도행전 하늘을 우러러 희망을 갖자 행7:55-56  한완상 형제  2008-05-16 1895
484 사도행전 성령의 사귐속에 있는 삶 행2:40-47  채수일 목사  2008-04-21 2168
483 사도행전 경계를 넘나드는 교회 행10:9-16  김상근 목사  2008-04-21 1715
482 사도행전 그리스도를 주시는 하나님 행5:31  김남준 목사  2008-03-10 1827
481 사도행전 제 2의 회심 행10:9-16  권진관 형제  2008-02-26 1883
480 사도행전 아름다운 인생 결산 행20:17-38  김필곤 목사  2008-02-06 3063
479 사도행전 성령강림과 방언을 통해 증거된 그리스도 행2:1-4  소재열 목사  2008-01-21 2971
478 사도행전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행17:16-34  길희성 형제  2007-12-17 2151
477 사도행전 천사이야기 행12:5-10  한태완 목사  2007-11-27 2362
476 사도행전 <제자분석10> 십자가를 위해 칼을 포기한 사람 -시몬 행1:6-14  전병욱 목사  2007-11-22 3017
475 사도행전 성전의 안과 밖 행3:1-10  한완상 형제  2007-11-20 2394
474 사도행전 아레오바고 영성 행17:24-26  김경재 목사  2005-05-28 7991
473 사도행전 관용의 기억 file 행15:1-12  정경일 형제  2004-03-11 2366
472 사도행전 예수 그 이름을 높이자 행4:5-12  한태완 목사  2007-11-10 2505
471 사도행전 참된 교회의 모습 행2:42-47  한태완 목사  2007-11-07 2929
470 사도행전 예수 재림의 가능성 행1:9-11  강종수 목사  2007-09-04 2241
469 사도행전 인생 밑바닥에서 통과해야할 세 가지 훈련 행25:1-12  김필곤 목사  2006-09-13 3654
468 요한복음 믿는자가 되라 요20:24-29  이재철 목사  2009-02-27 2520
467 요한복음 우리가 보았노라 요20:24-29  이재철 목사  2009-02-27 1531
466 요한복음 내 손과 옆구리 요20:24-29  이재철 목사  2009-02-27 1920
465 요한복음 뉘 죄든지 요20:19-23  이재철 목사  2009-02-27 1499
464 요한복음 숨을 내쉬며 요20:19-13  이재철 목사  2009-02-27 2064
463 요한복음 나를 보내신 것같이 요20:19-23  이재철 목사  2009-02-02 1500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150 세종시 보람1길12 호려울마을2단지 201동 1608호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