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 성경본문 : | 행7:51 |
|---|---|
| 설교자 : | 한완상 형제 |
| 참고 : | 새길교회 2007.4.8주일설교 |
제목: 부활, 그 아름다운 얼굴
본문: 사도행전 7:51, 54-60]
예수 부활사건은 기독교를 독자적 종교로 나아가게 한 놀라운 사건입니다. 부활사건 없이 기독교는 탄생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번지면서 유대 종교에서 기독교가 새롭게 세워질 수가 있었습니다. 작년 세계적인 두 성서신학자들이 예수 부활 문제를 놓고 뜻 깊고도 흥미로운 논쟁을 벌였습니다. 복음주의 관점에 서 있는 N. T. Wright와 역사적 예수에 대한 파격적 논의를 거침없이 펼쳐온 Dominic Crossan 교수 간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의 빈 무덤 문제를 놓고 두 분의 의견이 갈라졌습니다. Wright 주교는 빈 무덤과 예수의 현현 사건이 예수 몸의 부활에 대한 초대 교인들의 신앙을 불러일으킨 충분조건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Crossan 교수는 빈 무덤에 대한 서술을 은유(metaphor)적 표현이라고 하면서, 부활사건의 중요성은 그것이 사실서술이냐 은유서술이냐 하는 표현양식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오늘>,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천 년 전 부활사건의 의미를 나와 역사를 올곧게 변화시키는 그 현재적 힘에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부활절을 맞아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빈 무덤에 관한 것보다 예수 제자들의 질적 변화에 관한 것이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둔했고, 자기 이해에 예민했고, 잘 다투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용감한 예수따르미로 급진전 할 수 있었나?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자기 형의 선교활동을 정신 나간 짓으로 오해했었는데, 어떻게 십자가 처형 후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변신 할 수 있었던가? 예수를 직접 만나보거나 함께 활동 할 수 없었던 유대 크리스천들과 이방 크리스천들이 그 지독한 로마의 핍박 속에서도 어떻게 <예수님은 나의 메시아다>라는 반체제적 성격의 고백을 하면서 용기 있게 순교할 수 있었던가? 로마 체제하에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행위가 국가반역죄로 극형을 받게 되고, 유대 율법 하에서는 신성모독죄가 되어 역시 사형을 받게 된다는 엄연한 당시의 현실을 참고한다면, 초대 교인들의 그 열정과 용기는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오늘 저는 초대교회의 한 평신도의 순교 사건에서 찾아 다시 확인하고 싶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에서 부활의 깊은 의미, 부활의 그 아름다운 얼굴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먼저 스데반을 죽인 자들의 특징이 무엇이었던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의 찬란한 빛을 알기 위해 먼저 어두웠던 그늘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죽였던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시키라고 요구했던 바로 그 사람들 이었습니다. 공의회(Sanhedrin)였습니다. 예수를 거짓 송사하고 폭력으로 체포하여 처형했듯이 그들은 스데반이 신성 모독죄를 저지르고, 反 모세, 反 율법, 反 성전을 주장한다고 송사하고 마침내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예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의 본문은 죽인 자들의 특징을 아주 구체적이면서 매우 은유적으로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박해받았던 스데반이 그들의 특징을 절묘하게 그리고 날카롭게 묘사한 것입니다. <목이 곧은 자>라고 비판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권위주의로 목이 뻣뻣했습니다. 거만할 뿐 아니라, 허례허식에 사로 잡혀 율법의 본질과 그 원래 정신은 망각하고, 율법으로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위를 억압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질책을 연상시킵니다. 율법주의적 행태 또는 근본주의적 행태를 주목하면서 그들을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은유(metaphor)입니다. 이 은유의 깊은 의미는 무엇일까요?
원래 할례는 남자 몸의 일부를 잘라내는 종교의식 행위입니다. 할례는 마음과 귀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할례는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강퍅해지고 차가워지는 마음, 미움과 질투와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을 잘라내는 것을 뜻하지요. 그러니까 사두개파, 바리새파 그리고 제사장들은 오랫동안 육체의 할례를 존중하며 그것을 시행했으나 율법의 참 정신인 공의와 사랑을 외면했지요. 특히 따뜻한 마음, 자궁과 같이 따뜻한 하나님의 마음을 배격했지요. 그들은 귀도 할례를 받지 못했기에 자기가 듣기 좋은 소리에만 귀를 열고, 진리에 이르게 하는 소중한 소리들에 대해서는 귀를 꽉 막고 있었지요. 평신도 스데반의 율법 해석은 정말 탁월하고 훌륭하고 적절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핵심을 찌르는 전복적인 법 해석이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감히 생각할 수 없는 발상을 해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양심을 찌르는 창조적 해석이었습니다.
둘째로, 스데반을 죽인 자들의 모습은 분노하여 이를 가는 섬뜩한 모습이었습니다. 증오에 찬 격분과 용기있는 의분(義憤)은 다릅니다. 의분은 결코 이를 갈지 않습니다. 이를 간다함은 피의 보복을 불러온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따르미들은 어떤 경우에도 이를 갈면서 분노해서는 안 됩니다. 70년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다가 군법회의에서 사형구형을 받고 재판장에게 “영광이올시다”라고 의연하게 대꾸했던 김병곤 씨의 저항은 이를 가는 격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뜨거운 의분의 자기 폭발이었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귀를 막고 큰소리를 지르며 집단 폭행에 돌입했습니다. 그것은 집단 린치행위였습니다. 폭력은 원래부터 악귀의 전공이지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끊임없이 많은 유대인들을 보내어 집단 학살시킨 히틀러의 얼굴이 바로 그들의 얼굴이었습니다. 우리 할머니들이 아리따운 젊은 시절 일본제국 군대에 끌려가 강간당하고 성노예로 고통 당했습니다. 군위안부 막사 앞에 길게 한 줄로 서서 서로 키득대는 일본 군인들은 바로 스데반을 죽인 자들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집단린치 그것은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악마의 특기입니다.
그렇다면, 죽임을 당한 스데반 평신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그 아름다운 모습에 주목하고, 그것이 바로 부활신망의 아름다운 자태임을 새삼 확인해야 합니다.
먼저 하늘을 우러러 보는 그의 감동적인 모습에 주목합시다. 성령이 충만해진 그는 돌로 맞기 직전, 그 위기일발의 순간에 고개를 땅으로 떨구지 않고 오히려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민족시인 동주(東柱)님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시구가 떠오릅니다. 그도 일제 강점으로 빼앗긴 조국 땅의 하늘을 쳐다보며 이 시를 읊었을 것입니다. 하기야 맹자(孟子)의 세 가지 기쁨 가운데 두 번째 것이 바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는 기쁨(仰不愧於天)이라고 했지요. 허나 스데반의 하늘 우러러 봄은 특별합니다. 그가 처참히 맞아 죽기 전 쳐다본 하늘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도대체 그는 하늘 우러러 무엇을 보았을까요? 떠도는 구름조각이었을까요? 아니면 바람 같은 허깨비를 보았을까요? 그의 얼굴은 그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이미 천사의 얼굴이었습니다(6:15). 그는 이미 부활 승천하셨던 예수님을 가슴으로 느꼈고 영의 눈으로 그를 보았습니다. 이미 그는 예수 부활을 공개적으로 선포했고 예수의 주님 되심을 당당히 고백했기에 그 기쁨을 마음속 깊숙이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슬아슬하게 긴박한 순간 그는 두려움과 절망으로 고개를 땅으로 떨어뜨리지 않고 오히려 믿음과 소망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바로 그곳에 부활의 그리스도가 계심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의 모습이 매우 흥미롭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4세기 경에 확정된 사도신경에 기록된 예수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사도신경에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읊조릴 때마다 앉아 계신 예수님의 모습 곧 영광과 권세의 위엄을 지닌 예수님의 모습을 상기합니다. 그런데 위기일발의 순간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며 확인한 예수님은 뜻밖에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서 계셨을까요? 성서본문은 두 번씩이나 예수께서 서 계시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예수님은 스데반을 향해 서 계셨습니다. 왜? 그리고 그 뜻은 무엇일까? 특히 부활 승천하시어 <지금>, <여기에>에 계시지 않는 예수께서 왜 사형 형장 같은 현실에서 아직도 숨쉬고 있는 스데반을 향해 서 계셨을까요?
예수를 옥좌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도록 만든 힘은 바로 스데반에 대한 예수의 뜨거운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위기나 곤경에 빠지게 될 때 보통 인간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저의 첫째 딸이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 첫 운동회가 열렸을 때 저는 학부모로서 학교 운동장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젊은 엄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잡담을 하다가 자기 자식이 50m 달리기 출발선에 서게 되니까 갑자기 조용해지더군요. ‘땅’하는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와 함께 엄마들의 엉덩이는 모두 의자에서 떨어지면서 양팔을 번쩍 올려 응원했습니다. 저도 딸이 뛸 때 마음이 조마조마 했습니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아하, 자식 사랑이 이 정도의 긴장 속에서도 벌떡 일어서게 하는구나라고 자식 사랑의 힘을 그때 새삼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올림픽 경기 최종 결승에 올라간 선수가 자기 자식일 때 온 가족들이 TV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봅니다. 그런데 자식이 금메달을 따는 순간 가족들은 모두 미친 듯 환호성을 지르며 방바닥을 힘차게 차고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것 또한 사랑의 힘 아닙니까? 연고전에서 두 학교 학생들이 자기 팀이 승리할 때의 그 함성은 애교심에서 나오는 것 아닙니까?
자식사랑, 학교사랑, 나라사랑이 이토록 벌떡 일어나게 하는 힘으로 작동한다면, 한없이 부족한 우리 인간들을 그토록 사랑하셨고 또 지금도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어떻게 위기일발, 그것도 억울하게, 너무나 억울하게 고통 당하고 죽임 당하는 사람을 보고, 교리의 예수처럼 하나님 우편에 가만히 앉아 계실 수만 있겠습니까! 사랑은 앉아 있기를 거부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려운 처지에 빠져 하늘을 우러러 부활의 주님을 기릴 때 사랑의 주님께서는 교리의 옥좌를 박차고 벌떡 일어서시는 분이시지요. 이것은 영적이기에 실제적인 응원의 힘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뜻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시간과 영원을 이어주는 생명의 다리라는 진리입니다. 예수 부활은 내재(內在)와 초월(超越) 사이를 이어주고, 역사와 영원 사이를 소통시켜 줍니다. 단순한 정보의 소통이 아니라, 뜨거운 사랑의 교감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의 그리스도는 갈릴리 예수처럼 따뜻한 사랑의 가슴으로 언제 어디서나 억울한 고통이 있는 곳에 달려가십니다.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이 반쯤 맞아 죽은 나그네에게 다가가듯 부활의 그리스도는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위해 보좌에서 벌떡 일어서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초월은 내재에서, 내재는 초월에서 서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그리스도 곧 초월자는 역사 현장에서 당신의 자녀와 동고(同苦)하시려고 오늘도 서계심을 확인하는 감동이 바로 부활절의 감동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절은 그 절절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의 현실에서 뜨겁게 느끼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부활하셨기에 갈릴리의 예수의 사랑이 더욱 뜨거워진다는 진리를 깨닫는 시간입니다. 이같은 진리를 초대교인들은 온몸과 온마음으로 체험했기에 그렇게 담대해질 수 있었고 그렇게 평화롭게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그 아름다운 얼굴이요, 실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같은 부활신앙을 가지고 우리의 역사현실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더욱 헌신할 때 부활의 그 감동은 더욱 커지고 더욱 뜨거워집니다.
이제 정말 감동적인 또 다른 스데반의 모습을 확인해 봅시다. 거칠게, 잔인하게 날아오는 돌들을 맞으며 죽는 순간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사도행전 7:59-60)
자기를 비정하게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는 그 마음, 그 아름다운 마음, 그것이 부활의 아름다운 힘입니다. 이 힘이 초대교회와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로 높이 올려놓은 힘입니다. 그런데 과연 초대교회의 이같은 동력과 열정, 그 부활의 능력이 지금도 기독교 안에 살아 있습니까? 아니 예수따르미로 자처하는 우리가 평신도 스데반의 그 부활신앙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습니까? 저는 고백합니다. 저는 그 아름다움에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음을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용서하고 싶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오늘 부활절을 맞아 저의 부족함과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새삼 보게 되면서 스데반의 천사 같은 아름다운 그 모습을 끝없이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부활의 그 감동,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마저 용서하고 껴안는 그 아름다운 부활의 열린 감동이 저희들을 압도하게 하소서. 사랑이시기에 지금도 서계시며 저희들을 용서하시고 품어주시는 부활의 당신을 체험하게 하소서. 부활의 힘이 저의 삶 속에서 폭발하게 하시어 사나 죽으나 천사의 얼굴로 남을 사랑하고 평화를 만들면서 살게 하소서. 오늘도 서계신 사랑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본문: 사도행전 7:51, 54-60]
예수 부활사건은 기독교를 독자적 종교로 나아가게 한 놀라운 사건입니다. 부활사건 없이 기독교는 탄생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번지면서 유대 종교에서 기독교가 새롭게 세워질 수가 있었습니다. 작년 세계적인 두 성서신학자들이 예수 부활 문제를 놓고 뜻 깊고도 흥미로운 논쟁을 벌였습니다. 복음주의 관점에 서 있는 N. T. Wright와 역사적 예수에 대한 파격적 논의를 거침없이 펼쳐온 Dominic Crossan 교수 간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의 빈 무덤 문제를 놓고 두 분의 의견이 갈라졌습니다. Wright 주교는 빈 무덤과 예수의 현현 사건이 예수 몸의 부활에 대한 초대 교인들의 신앙을 불러일으킨 충분조건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Crossan 교수는 빈 무덤에 대한 서술을 은유(metaphor)적 표현이라고 하면서, 부활사건의 중요성은 그것이 사실서술이냐 은유서술이냐 하는 표현양식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오늘>,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천 년 전 부활사건의 의미를 나와 역사를 올곧게 변화시키는 그 현재적 힘에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부활절을 맞아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빈 무덤에 관한 것보다 예수 제자들의 질적 변화에 관한 것이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둔했고, 자기 이해에 예민했고, 잘 다투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용감한 예수따르미로 급진전 할 수 있었나?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자기 형의 선교활동을 정신 나간 짓으로 오해했었는데, 어떻게 십자가 처형 후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변신 할 수 있었던가? 예수를 직접 만나보거나 함께 활동 할 수 없었던 유대 크리스천들과 이방 크리스천들이 그 지독한 로마의 핍박 속에서도 어떻게 <예수님은 나의 메시아다>라는 반체제적 성격의 고백을 하면서 용기 있게 순교할 수 있었던가? 로마 체제하에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행위가 국가반역죄로 극형을 받게 되고, 유대 율법 하에서는 신성모독죄가 되어 역시 사형을 받게 된다는 엄연한 당시의 현실을 참고한다면, 초대 교인들의 그 열정과 용기는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오늘 저는 초대교회의 한 평신도의 순교 사건에서 찾아 다시 확인하고 싶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에서 부활의 깊은 의미, 부활의 그 아름다운 얼굴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먼저 스데반을 죽인 자들의 특징이 무엇이었던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의 찬란한 빛을 알기 위해 먼저 어두웠던 그늘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죽였던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시키라고 요구했던 바로 그 사람들 이었습니다. 공의회(Sanhedrin)였습니다. 예수를 거짓 송사하고 폭력으로 체포하여 처형했듯이 그들은 스데반이 신성 모독죄를 저지르고, 反 모세, 反 율법, 反 성전을 주장한다고 송사하고 마침내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예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의 본문은 죽인 자들의 특징을 아주 구체적이면서 매우 은유적으로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박해받았던 스데반이 그들의 특징을 절묘하게 그리고 날카롭게 묘사한 것입니다. <목이 곧은 자>라고 비판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권위주의로 목이 뻣뻣했습니다. 거만할 뿐 아니라, 허례허식에 사로 잡혀 율법의 본질과 그 원래 정신은 망각하고, 율법으로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위를 억압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질책을 연상시킵니다. 율법주의적 행태 또는 근본주의적 행태를 주목하면서 그들을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은유(metaphor)입니다. 이 은유의 깊은 의미는 무엇일까요?
원래 할례는 남자 몸의 일부를 잘라내는 종교의식 행위입니다. 할례는 마음과 귀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할례는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강퍅해지고 차가워지는 마음, 미움과 질투와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을 잘라내는 것을 뜻하지요. 그러니까 사두개파, 바리새파 그리고 제사장들은 오랫동안 육체의 할례를 존중하며 그것을 시행했으나 율법의 참 정신인 공의와 사랑을 외면했지요. 특히 따뜻한 마음, 자궁과 같이 따뜻한 하나님의 마음을 배격했지요. 그들은 귀도 할례를 받지 못했기에 자기가 듣기 좋은 소리에만 귀를 열고, 진리에 이르게 하는 소중한 소리들에 대해서는 귀를 꽉 막고 있었지요. 평신도 스데반의 율법 해석은 정말 탁월하고 훌륭하고 적절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핵심을 찌르는 전복적인 법 해석이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감히 생각할 수 없는 발상을 해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양심을 찌르는 창조적 해석이었습니다.
둘째로, 스데반을 죽인 자들의 모습은 분노하여 이를 가는 섬뜩한 모습이었습니다. 증오에 찬 격분과 용기있는 의분(義憤)은 다릅니다. 의분은 결코 이를 갈지 않습니다. 이를 간다함은 피의 보복을 불러온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따르미들은 어떤 경우에도 이를 갈면서 분노해서는 안 됩니다. 70년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다가 군법회의에서 사형구형을 받고 재판장에게 “영광이올시다”라고 의연하게 대꾸했던 김병곤 씨의 저항은 이를 가는 격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뜨거운 의분의 자기 폭발이었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귀를 막고 큰소리를 지르며 집단 폭행에 돌입했습니다. 그것은 집단 린치행위였습니다. 폭력은 원래부터 악귀의 전공이지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끊임없이 많은 유대인들을 보내어 집단 학살시킨 히틀러의 얼굴이 바로 그들의 얼굴이었습니다. 우리 할머니들이 아리따운 젊은 시절 일본제국 군대에 끌려가 강간당하고 성노예로 고통 당했습니다. 군위안부 막사 앞에 길게 한 줄로 서서 서로 키득대는 일본 군인들은 바로 스데반을 죽인 자들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집단린치 그것은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악마의 특기입니다.
그렇다면, 죽임을 당한 스데반 평신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그 아름다운 모습에 주목하고, 그것이 바로 부활신망의 아름다운 자태임을 새삼 확인해야 합니다.
먼저 하늘을 우러러 보는 그의 감동적인 모습에 주목합시다. 성령이 충만해진 그는 돌로 맞기 직전, 그 위기일발의 순간에 고개를 땅으로 떨구지 않고 오히려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민족시인 동주(東柱)님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시구가 떠오릅니다. 그도 일제 강점으로 빼앗긴 조국 땅의 하늘을 쳐다보며 이 시를 읊었을 것입니다. 하기야 맹자(孟子)의 세 가지 기쁨 가운데 두 번째 것이 바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는 기쁨(仰不愧於天)이라고 했지요. 허나 스데반의 하늘 우러러 봄은 특별합니다. 그가 처참히 맞아 죽기 전 쳐다본 하늘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도대체 그는 하늘 우러러 무엇을 보았을까요? 떠도는 구름조각이었을까요? 아니면 바람 같은 허깨비를 보았을까요? 그의 얼굴은 그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이미 천사의 얼굴이었습니다(6:15). 그는 이미 부활 승천하셨던 예수님을 가슴으로 느꼈고 영의 눈으로 그를 보았습니다. 이미 그는 예수 부활을 공개적으로 선포했고 예수의 주님 되심을 당당히 고백했기에 그 기쁨을 마음속 깊숙이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슬아슬하게 긴박한 순간 그는 두려움과 절망으로 고개를 땅으로 떨어뜨리지 않고 오히려 믿음과 소망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바로 그곳에 부활의 그리스도가 계심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의 모습이 매우 흥미롭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4세기 경에 확정된 사도신경에 기록된 예수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사도신경에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읊조릴 때마다 앉아 계신 예수님의 모습 곧 영광과 권세의 위엄을 지닌 예수님의 모습을 상기합니다. 그런데 위기일발의 순간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며 확인한 예수님은 뜻밖에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서 계셨을까요? 성서본문은 두 번씩이나 예수께서 서 계시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예수님은 스데반을 향해 서 계셨습니다. 왜? 그리고 그 뜻은 무엇일까? 특히 부활 승천하시어 <지금>, <여기에>에 계시지 않는 예수께서 왜 사형 형장 같은 현실에서 아직도 숨쉬고 있는 스데반을 향해 서 계셨을까요?
예수를 옥좌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도록 만든 힘은 바로 스데반에 대한 예수의 뜨거운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위기나 곤경에 빠지게 될 때 보통 인간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저의 첫째 딸이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 첫 운동회가 열렸을 때 저는 학부모로서 학교 운동장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젊은 엄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잡담을 하다가 자기 자식이 50m 달리기 출발선에 서게 되니까 갑자기 조용해지더군요. ‘땅’하는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와 함께 엄마들의 엉덩이는 모두 의자에서 떨어지면서 양팔을 번쩍 올려 응원했습니다. 저도 딸이 뛸 때 마음이 조마조마 했습니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아하, 자식 사랑이 이 정도의 긴장 속에서도 벌떡 일어서게 하는구나라고 자식 사랑의 힘을 그때 새삼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올림픽 경기 최종 결승에 올라간 선수가 자기 자식일 때 온 가족들이 TV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봅니다. 그런데 자식이 금메달을 따는 순간 가족들은 모두 미친 듯 환호성을 지르며 방바닥을 힘차게 차고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것 또한 사랑의 힘 아닙니까? 연고전에서 두 학교 학생들이 자기 팀이 승리할 때의 그 함성은 애교심에서 나오는 것 아닙니까?
자식사랑, 학교사랑, 나라사랑이 이토록 벌떡 일어나게 하는 힘으로 작동한다면, 한없이 부족한 우리 인간들을 그토록 사랑하셨고 또 지금도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어떻게 위기일발, 그것도 억울하게, 너무나 억울하게 고통 당하고 죽임 당하는 사람을 보고, 교리의 예수처럼 하나님 우편에 가만히 앉아 계실 수만 있겠습니까! 사랑은 앉아 있기를 거부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려운 처지에 빠져 하늘을 우러러 부활의 주님을 기릴 때 사랑의 주님께서는 교리의 옥좌를 박차고 벌떡 일어서시는 분이시지요. 이것은 영적이기에 실제적인 응원의 힘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뜻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시간과 영원을 이어주는 생명의 다리라는 진리입니다. 예수 부활은 내재(內在)와 초월(超越) 사이를 이어주고, 역사와 영원 사이를 소통시켜 줍니다. 단순한 정보의 소통이 아니라, 뜨거운 사랑의 교감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의 그리스도는 갈릴리 예수처럼 따뜻한 사랑의 가슴으로 언제 어디서나 억울한 고통이 있는 곳에 달려가십니다.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이 반쯤 맞아 죽은 나그네에게 다가가듯 부활의 그리스도는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위해 보좌에서 벌떡 일어서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초월은 내재에서, 내재는 초월에서 서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그리스도 곧 초월자는 역사 현장에서 당신의 자녀와 동고(同苦)하시려고 오늘도 서계심을 확인하는 감동이 바로 부활절의 감동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절은 그 절절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의 현실에서 뜨겁게 느끼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부활하셨기에 갈릴리의 예수의 사랑이 더욱 뜨거워진다는 진리를 깨닫는 시간입니다. 이같은 진리를 초대교인들은 온몸과 온마음으로 체험했기에 그렇게 담대해질 수 있었고 그렇게 평화롭게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그 아름다운 얼굴이요, 실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같은 부활신앙을 가지고 우리의 역사현실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더욱 헌신할 때 부활의 그 감동은 더욱 커지고 더욱 뜨거워집니다.
이제 정말 감동적인 또 다른 스데반의 모습을 확인해 봅시다. 거칠게, 잔인하게 날아오는 돌들을 맞으며 죽는 순간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사도행전 7:59-60)
자기를 비정하게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는 그 마음, 그 아름다운 마음, 그것이 부활의 아름다운 힘입니다. 이 힘이 초대교회와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로 높이 올려놓은 힘입니다. 그런데 과연 초대교회의 이같은 동력과 열정, 그 부활의 능력이 지금도 기독교 안에 살아 있습니까? 아니 예수따르미로 자처하는 우리가 평신도 스데반의 그 부활신앙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습니까? 저는 고백합니다. 저는 그 아름다움에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음을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용서하고 싶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오늘 부활절을 맞아 저의 부족함과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새삼 보게 되면서 스데반의 천사 같은 아름다운 그 모습을 끝없이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부활의 그 감동,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마저 용서하고 껴안는 그 아름다운 부활의 열린 감동이 저희들을 압도하게 하소서. 사랑이시기에 지금도 서계시며 저희들을 용서하시고 품어주시는 부활의 당신을 체험하게 하소서. 부활의 힘이 저의 삶 속에서 폭발하게 하시어 사나 죽으나 천사의 얼굴로 남을 사랑하고 평화를 만들면서 살게 하소서. 오늘도 서계신 사랑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