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 성경본문 : | 행4:36-37 |
|---|---|
| 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 참고 : | http://john316.or.kr |
제목:격려하는 삶의 축복
본문:사도행전 4장 36-37절
설교:이한규 목사 20061001
< 서로를 격려해주십시오 >
진 되링 쓴 ‘훌륭한 격려자가 되는 비결’이란 책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그녀가 대학에 다닐 때 학생 수가 줄고, 재정도 힘든 상황에서 학교가 크게 침체해 있었습니다. 그때 한 신참 교수가 학생들에게 강의 때마다 부탁했습니다. “여러분!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그때부터 ‘바나바 위원회’란 단체가 생겼습니다. 그 위원회에서는 초대교회를 풍요롭게 만들었던 탁월한 격려자 바나바처럼 교수님을 보이지 않게 기도해주고 격려해 주는 일을 했습니다. 또한 교수님에게 익명으로 사탕을 전달하고, 카드를 보내는 등의 작은 일로 교수님을 감동시키는 일도 했습니다. 결국 그 위원회의 활동으로 학교의 분위기가 밝고 긍정적으로 바뀌어갔고, 그렇게 교수님을 격려하면서 오히려 멤버들이 더 격려를 받았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드디어 그녀의 위원회 활동이 끝났습니다. 그녀는 졸업장을 받고 연단을 돌아 나오면서 자신이 격려해드렸던 교수님께 윙크하고 싶었지만 끝까지 꾹 참았습니다. 그동안 자신의 활동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바나바 위원회의 활동으로 공동체가 아름답게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뒤 그녀는 사회에 나가서도 바나바 위원회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모두 바나바 위원회의 위원들이 되어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고 용기를 주며 살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격려하고, 성도들도 목회자를 격려해야 합니다. 목회자에게도 성도들의 격려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저는 가끔 마음이 울적하면 성도들에게 전화심방도 하고 직접 찾아갈 때도 있습니다. 성도들을 위로할 목적도 있지만 어떤 때는 그냥 성도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고, 그냥 성도들의 얼굴이 보고 싶습니다. 성도들을 격려하다 보면 저 자신이 더 격려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성도들의 목소리만 들어도 힘이 납니다. 그처럼 성도들의 목소리만 들어도 힘이 나는데 격려의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힘이 나겠습니까?
가끔 새벽에 말씀인도가 시원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 자신이 마음이 불편합니다. 하나님께 죄송하고 성도들에게 미안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자책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비록 적은 인원이 나와도 새벽 발걸음이 은혜가 넘치는 발걸음이 되길 원하는데 오늘은 새벽 심령들에게 큰 힘을 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조금 덜 자고 더 기도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용서해주소서!”
그런데 어떤 때는 분명히 말씀을 죽 쒔는데도 은혜 받았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말씀 마치고 “오늘을 죽 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씀에 죽 쑬 때는 미안하니까 성도들을 위한 기도라도 더욱 간절히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를 마치고 잠깐 로비로 나오는데 한 권사님이 다가와 눈물을 뚝뚝 흘리시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오늘 말씀에 너무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 권사님의 눈물과 그 한마디의 말에 그날 새벽에 설교를 죽 쑤고 오히려 거꾸로 제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때 그 눈물과 그 한마디의 말이 저에게 얼마나 격려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처럼 목회자에게도 성도들의 격려가 중합니다. 또한 담임목사뿐만 아니라 사모와 전도사님들도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분들은 담임목사보다 더 격려가 더 필요한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음지에서 수고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조용히 생색내지 않으면서 힘써 서로를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우리 중에 격려가 필요 없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들마다 다 자기 마음에 있는 소리들이 있습니다. 가끔 모든 일을 멈추고 모든 소리를 차단한 후에 깊은 묵상 가운데 들어가서 자기 마음에 있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어떤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어떤 소리일까요? 바로 “나는 사랑받고 싶다!”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갈급한 소리를 들어주는 격려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들은 그 영혼이 얼마나 건강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영적 건강은 축복의 전주곡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축복된 삶을 원하면 열심히 내 가족과 교우를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격려가 없으면 진정한 축복도 없습니다. 위대한 사람에게 있는 것은 ‘격려 받는 삶’이고, 더 위대한 사람에게 있는 것은 ‘격려하는 삶’입니다.
< 참된 격려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
오늘 본문을 보면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격려자인 바나바가 나옵니다. 참된 격려자란 어떤 사람일까요? 성경에 나오는 바나바의 삶을 통해서 참된 격려자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
사도행전 11장 24절 말씀을 보면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교회가 부흥하자 그는 길리기아 다소에 은거해 있던 바울을 공동 목회자로 불러들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 26-27절을 보면 그 당시 대부분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개종을 의심했지만 바나바는 바울을 믿어주고, 옹호해 주고, 받아들여주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5장 37절 말씀을 보면 바나바는 2차 선교여행을 떠나면서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38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1차 선교여행 때 밤빌리아에서 도중에 돌아가 버린 마가를 데리고 가면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처럼 의지가 약한 청년을 데리고 가면 팀워크가 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문제로 그들은 심하게 다투어 피차 갈라서서 되었습니다. 누구 주장이 옳을까요? 둘 다 옳습니다.
그렇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도 바나바처럼 남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주고,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어야 합니다. 결국 그런 바나바의 역할로 마가는 나중에 훌륭한 주의 종이 됩니다. 만약에 그때 바나바가 마가를 받아주지 않았다면 오늘날 마가복음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나중에는 바울도 디모데후서 4장 11절 말씀에서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라고 하며 마가를 인정해줍니다.
사람이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면 의견 다툼이 생길 수도 있고 싸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서로 받아주는 마음만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싸운 후에 원수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의견은 틀릴 수 있어도 “사람이 틀렸다!”고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볼 때 다르다고 봐야지 틀리다고 봐서는 안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와 다른 사람을 만드셨을까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면 차이는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차이를 주신 것은 대립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보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 거룩한 바탕과 가치관이 확고하면 성격 차이가 있고 의견이 다른 것이 오히려 상생과 축복의 기틀이 됩니다.
우리는 나와 반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도 용납해야 합니다. 다른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더 좋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격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그 성격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주고, 끊임없이 격려해보십시오. 그러면 그 성격이 가장 아름답게 선용되어 나중에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큰 유익이 줄 것입니다.
2. 용기를 주는 말을 잘해주는 사람
사도행전 11장 23절을 보면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 교인들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라고 권면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나바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불어넣어 주는 말을 잘했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따뜻한 말을 많이 해주고, 특히 가족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많이 해주어야 합니다. 그 말 한 마디가 배우자와 자녀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모릅니다.
왜 사람들이 외로움을 느낍니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말 한 마디를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외로우면 돈이 많아도 행복이 없고, 성공해도 행복이 없습니다. 살면서 최선을 다해 재화를 창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따뜻한 말 한 마디 해주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합니다. 함부로 말하고, 짜증을 잘 내고, 무거운 표정을 하는 것 등은 가족을 폭행하는 것입니다. 요새 황혼기의 남자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좀더 돈을 많이 벌지 못한 것’이 아니라 ‘좀더 가족에게 잘해주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따뜻한 말 한 마디로 가족들과 교우들을 격려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한마디의 말이 겨울을 훈훈하게 지나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위로를 말을 많이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위로의 말을 많이 해줄 생각을 해야 합니다.
또한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도 상대방에게 큰 격려를 줍니다. 어떤 분은 모든 의견을 독점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남의 말을 빨리 끊고 자기 말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격려자가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격려자가 되려면 남의 말을 잘 들어줄 줄 알아야 합니다. 경청은 조용한 사랑입니다. 그렇게 사랑의 경청을 하면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모릅니다.
이제 항상 지적하고 충고하는 말보다는 격려하는 말을 많이 하십시오. 옛날에 신학교 강의를 할 때 학생들의 리포트를 보면 지적하고 교정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래도 지적은 최소로 줄이고 격려는 최대로 늘리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의 수업에 임하는 태도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처럼 격려는 한 번 더 하고, 지적은 한 번 덜 하며, 들을 때는 한 템포 빨리 듣고, 말할 때는 한 템포 늦게 말할 때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더욱 좋은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3. 수고 후 영광을 바라지 않는 사람
사도행전 11장 2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제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안디옥 교회의 담임목회자로 파송된 바나바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자 안디옥 교회에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능력 있는 목회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소에 은거해 있던 사도 바울을 협력 목사로 초빙했습니다. 결국 그의 기대대로 안디옥으로 온 바울은 능력을 발휘하면서 그 영향력이 커졌지만 바나바는 바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대해서 어떤 위협이나 질투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나바와 사울에 관한 기록이 처음에는 바나바와 사울(행 11:30; 행 12:25; 행 13:1,2; 행 13:7)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1차 전도여행 후반기부터 변화가 일어나 그 용어가 바울과 바나바로 바뀌었습니다(행 13:43). 그처럼 바울이 리더십을 확보하면서 바나바는 조용히 뒤로 물러섰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격려의 문제에서 실패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격려는 남을 잘 높이는 것도 격려지만 자기를 잘 감추는 것도 격려입니다. 진정한 격려자는 뒤로 물러서는 것을 잘합니다. 얼마 전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교회세습’이라고 응답한 사람들이 제일 많았다고 합니다. 왜 교회에 세습이 벌어집니까? 뒤로 물러설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망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뒤로 물러설 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고에 대한 인정이나 영광을 받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의 가능성을 믿고 그를 후원해서 교회에 꼭 필요한 위대한 인물로 길러낸 후에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바울을 자기보다 앞세웠습니다. 그처럼 시기와 질투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격려자가 될 수 있습니다.
런던의 유명한 설교가인 마이어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캠벨 몰간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면서 마이어를 따르던 사람들이 몰간의 설교를 들으러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마이어는 몰간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다고 사람들 앞에서 높여주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경쟁은 없었고 다만 격려와 종의 마음만 있었습니다. 교회에는 이런 격려자들이 많아야 합니다.
4. 과감히 사랑의 대가를 치르는 사람
본문 3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당시 초대교회는 놀랍게 부흥했습니다. 그렇게 부흥하면서 선교와 구제를 위해서 많은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구브로 출신의 의로운 부자였던 요셉은 교회에 재정이 필요한 줄 알고 자기 농장을 팔아 헌금했습니다. 결국 요셉은 헌신으로 교회의 재정적 어려움이 해결되면서 사람들은 그를 바나바, 즉 격려자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나바처럼 말로만 격려하지 말고 실질적으로 우리가 가진 것을 바침으로 격려해야 합니다. 그처럼 좋은 일과 선교와 구제를 위해 쓴 돈은 결코 잃어버린 돈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 혼자만을 위해 쓰려고 꼭꼭 간직한 돈이 바로 잃어버린 돈입니다.
시편 37편 25-26절 말씀에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신이 복을 받는 도다.” 주는 것은 우리의 신앙과 사랑을 나타내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자라게 해주고, 결국 자신과 자손이 복 받는 지름길입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희생할 줄 알아야 사랑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좋은 일에는 머뭇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날,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연인이 칸트에게 찾아와 말했습니다. “칸트! 우리가 서로 사랑하니까 이제 결혼해요.” 그러자 칸트는 “조금 생각해보고 대답해주겠다!”고 말한 후에 대학 도서관에 가서 결혼했을 때의 장점과 단점을 다 찾아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어떤 날은 결혼하면 좋을 것 같고, 어떤 날은 결혼하면 고생할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오랜 고민 끝에 그가 결정했습니다. 결혼하면 단점보다는 장점이 조금 더 많을 것 같아서 결혼을 결단하고 연인의 집을 찾아가 부친에게 말했습니다. “아버님! 따님을 주십시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니까 결혼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때 그 부친이 말했습니다. “여보게! 내 딸은 이미 결혼했어. 벌써 아이를 둘이나 두었네.” 칸트가 너무 고민을 하니까 여자가 기다리다 못해 다른 사람과 결혼한 것입니다.
좋은 일을 위해 과감히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사랑을 얻지 못합니다. 사랑은 관념이 아니고 희생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하면 희생도 기쁨이 되고, 희생할 때 진정한 사랑을 얻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보다 더 많이 선교해야 합니다. 그래서 조금 덜 먹고, 덜 누리더라도 선교사님의 필요에 응답해야 합니다.
저는 1987년 선교사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떠날 때는 화려한 비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신학교 공부 중에 현실을 깨닫고 저의 달란트를 생각하면서 저는 전방 선교사의 길을 포기하고 후방선교사가 되겠다고 진로를 수정했습니다. 저는 그때 진로를 수정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것에 대해 항상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제가 가진 것을 선교사님들과 최대한 나누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 소속 한인선교사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들리는 중간 기지처럼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들이 오면 항상 빈손으로 가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후방에서 편하게 지내면서 그런 정성도 다하지 않는다면 잘못입니다. 때로 재정적으로 어려워도 선교는 계속해야 합니다. 저도 가끔 재정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처하지만 선교를 위해 드리는 일만은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번에 전세 기간이 만료되고 주인이 전세금을 올려서 이틀 전에 이사 갈 집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때 세입자들의 애환이 다시 한번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한참 집을 알아보고 자존심도 상하고 울적한 마음으로 교회에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선교 후원사역을 시작했던 지난 6년의 사역을 죽 돌아보았습니다.
따져보니까 그 동안 선교를 위해 드렸던 물질을 저축했다면 세입자 생활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교한다면서 나 자신은 이렇게 이사 다니는 것이 과연 가장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냐는 생각도 문득 들었습니다. 점점 커가는 아이들에게도 아직도 한 방에서 이층침대를 쓰게 하는 것이 아빠로서 미안합니다. 이미 첫째 딸 은혜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침대가 닿을 정도입니다. 자주 이사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아내에게 미안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속으로 전세 희망자가 나타나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전세금을 다시 내리면 이사 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제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올린 가격에라도 들어올 사람이 생겼으니까 이사 날짜를 잡자는 전화였습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담담하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을 거예요”라고 말했지만 괜히 아내에게 미안했습니다.
그처럼 가족들에게는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 선교하면서 얼마나 뿌듯하고 보람과 기쁨이 컸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작은 정성을 드릴 때 선교사님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선교사 나가기로 약속했다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송스러움이 많이 줄고 심령의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선교는 힘든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선교사님들을 우리는 힘써 격려해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격려할 때는 ‘말로 격려하는 것’도 소중하지만 겸손하고 은밀하게 생색내지 않고 할 수 있으면 ‘물질로 격려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희생에 있습니다. 내 것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영혼의 자유와 기쁨은 그만큼 비례해서 커지고,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과 자녀와 꿈과 비전도 지켜주실 것입니다.
< 격려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
이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바나바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격려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격려를 받지 못하면 영혼도 서서히 죽게 되고, 공동체도 서서히 죽게 됩니다. 그러나 격려를 받으면 영혼도 살아나게 됩니다. 지금 현재의 모습이 부족해도 열심히 격려해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고등학교 때 한 학년을 2년 동안 다닌 일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낙제했느냐?”고 묻자 그가 스스로를 격려하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올바른 길을 가려고 두 번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자신과 남을 격려할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위기에 처한 영국이 필요로 했던 것은 공부 잘하는 천재가 아니었고 믿음과 인내로 국민들에게 믿음의 격려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격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격려는 또 다른 격려를 만듭니다. 격려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격려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격려 받고 싶으면 먼저 격려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격려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진짜 똑똑한 사람은 결점을 잡아내는 사람이 아니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도 진짜 훌륭한 성도는 결점을 잘 잡아내는 성도가 아니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성도입니다. 결점 잘 잡아내면 교회는 상처투성이가 됩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상처 입히는 곳이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들을 싸매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믿는 자들을 세워주는 곳이 되어야지 꾸짖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더욱 격려하고 상처를 싸매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사람은 말로 설득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격려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어느 날, 어린 딸이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뭐 하세요?” 엄마가 말했습니다. “수지야. 이웃집 아줌마가 딸을 먼저 천국에 보냈잖아? 지금 아무 것도 할 힘이 없을 거야. 그래서 그분에게 드릴 음식을 준비하고 있어. 너도 아줌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봐.”
잠시 후, 수지는 이웃집 벨을 눌렀습니다. 이웃집 아줌마가 눈이 충혈 된 상태로 나와 말했습니다. “수지구나? 어떻게 왔니?” 수지가 말했습니다. “아줌마, 우리 엄마가 아줌마가 마음에 상처를 입었는데 그 상처가 아물도록 좋은 일을 하래요. 그래서 이것 가져왔어요. 상처에 붙이세요.” 그리고 수지가 일회용 반창고를 내밀었습니다. 그때 이웃집 아줌마는 수지를 품에 안고 한참 울다 말했습니다. “수지야! 고맙다! 이것 붙이면 내 상처는 곧 낫게 될 거야.” 그 일로 이웃집 아줌마가 큰 힘과 위로를 얻었다고 합니다.
충만한 사람입니까?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돌봐주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지금 힘들어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지금 세상은 비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문제점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격려하는 삶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해서 가정과 교회와 세상은 조금씩 아름답게 변화될 것입니다. 이제 바나바와 같은 성령 충만한 격려자들이 되어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축복의 초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ttp://www.john316.or.kr
본문:사도행전 4장 36-37절
설교:이한규 목사 20061001
< 서로를 격려해주십시오 >
진 되링 쓴 ‘훌륭한 격려자가 되는 비결’이란 책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그녀가 대학에 다닐 때 학생 수가 줄고, 재정도 힘든 상황에서 학교가 크게 침체해 있었습니다. 그때 한 신참 교수가 학생들에게 강의 때마다 부탁했습니다. “여러분!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그때부터 ‘바나바 위원회’란 단체가 생겼습니다. 그 위원회에서는 초대교회를 풍요롭게 만들었던 탁월한 격려자 바나바처럼 교수님을 보이지 않게 기도해주고 격려해 주는 일을 했습니다. 또한 교수님에게 익명으로 사탕을 전달하고, 카드를 보내는 등의 작은 일로 교수님을 감동시키는 일도 했습니다. 결국 그 위원회의 활동으로 학교의 분위기가 밝고 긍정적으로 바뀌어갔고, 그렇게 교수님을 격려하면서 오히려 멤버들이 더 격려를 받았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드디어 그녀의 위원회 활동이 끝났습니다. 그녀는 졸업장을 받고 연단을 돌아 나오면서 자신이 격려해드렸던 교수님께 윙크하고 싶었지만 끝까지 꾹 참았습니다. 그동안 자신의 활동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바나바 위원회의 활동으로 공동체가 아름답게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뒤 그녀는 사회에 나가서도 바나바 위원회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모두 바나바 위원회의 위원들이 되어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고 용기를 주며 살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격려하고, 성도들도 목회자를 격려해야 합니다. 목회자에게도 성도들의 격려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저는 가끔 마음이 울적하면 성도들에게 전화심방도 하고 직접 찾아갈 때도 있습니다. 성도들을 위로할 목적도 있지만 어떤 때는 그냥 성도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고, 그냥 성도들의 얼굴이 보고 싶습니다. 성도들을 격려하다 보면 저 자신이 더 격려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성도들의 목소리만 들어도 힘이 납니다. 그처럼 성도들의 목소리만 들어도 힘이 나는데 격려의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힘이 나겠습니까?
가끔 새벽에 말씀인도가 시원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 자신이 마음이 불편합니다. 하나님께 죄송하고 성도들에게 미안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자책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비록 적은 인원이 나와도 새벽 발걸음이 은혜가 넘치는 발걸음이 되길 원하는데 오늘은 새벽 심령들에게 큰 힘을 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조금 덜 자고 더 기도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용서해주소서!”
그런데 어떤 때는 분명히 말씀을 죽 쒔는데도 은혜 받았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말씀 마치고 “오늘을 죽 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씀에 죽 쑬 때는 미안하니까 성도들을 위한 기도라도 더욱 간절히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를 마치고 잠깐 로비로 나오는데 한 권사님이 다가와 눈물을 뚝뚝 흘리시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오늘 말씀에 너무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 권사님의 눈물과 그 한마디의 말에 그날 새벽에 설교를 죽 쑤고 오히려 거꾸로 제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때 그 눈물과 그 한마디의 말이 저에게 얼마나 격려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처럼 목회자에게도 성도들의 격려가 중합니다. 또한 담임목사뿐만 아니라 사모와 전도사님들도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분들은 담임목사보다 더 격려가 더 필요한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음지에서 수고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조용히 생색내지 않으면서 힘써 서로를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우리 중에 격려가 필요 없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들마다 다 자기 마음에 있는 소리들이 있습니다. 가끔 모든 일을 멈추고 모든 소리를 차단한 후에 깊은 묵상 가운데 들어가서 자기 마음에 있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어떤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어떤 소리일까요? 바로 “나는 사랑받고 싶다!”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갈급한 소리를 들어주는 격려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들은 그 영혼이 얼마나 건강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영적 건강은 축복의 전주곡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축복된 삶을 원하면 열심히 내 가족과 교우를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격려가 없으면 진정한 축복도 없습니다. 위대한 사람에게 있는 것은 ‘격려 받는 삶’이고, 더 위대한 사람에게 있는 것은 ‘격려하는 삶’입니다.
< 참된 격려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
오늘 본문을 보면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격려자인 바나바가 나옵니다. 참된 격려자란 어떤 사람일까요? 성경에 나오는 바나바의 삶을 통해서 참된 격려자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
사도행전 11장 24절 말씀을 보면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교회가 부흥하자 그는 길리기아 다소에 은거해 있던 바울을 공동 목회자로 불러들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 26-27절을 보면 그 당시 대부분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개종을 의심했지만 바나바는 바울을 믿어주고, 옹호해 주고, 받아들여주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5장 37절 말씀을 보면 바나바는 2차 선교여행을 떠나면서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38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1차 선교여행 때 밤빌리아에서 도중에 돌아가 버린 마가를 데리고 가면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처럼 의지가 약한 청년을 데리고 가면 팀워크가 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문제로 그들은 심하게 다투어 피차 갈라서서 되었습니다. 누구 주장이 옳을까요? 둘 다 옳습니다.
그렇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도 바나바처럼 남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주고,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어야 합니다. 결국 그런 바나바의 역할로 마가는 나중에 훌륭한 주의 종이 됩니다. 만약에 그때 바나바가 마가를 받아주지 않았다면 오늘날 마가복음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나중에는 바울도 디모데후서 4장 11절 말씀에서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라고 하며 마가를 인정해줍니다.
사람이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면 의견 다툼이 생길 수도 있고 싸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서로 받아주는 마음만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싸운 후에 원수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의견은 틀릴 수 있어도 “사람이 틀렸다!”고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볼 때 다르다고 봐야지 틀리다고 봐서는 안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와 다른 사람을 만드셨을까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면 차이는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차이를 주신 것은 대립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보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 거룩한 바탕과 가치관이 확고하면 성격 차이가 있고 의견이 다른 것이 오히려 상생과 축복의 기틀이 됩니다.
우리는 나와 반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도 용납해야 합니다. 다른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더 좋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격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그 성격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주고, 끊임없이 격려해보십시오. 그러면 그 성격이 가장 아름답게 선용되어 나중에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큰 유익이 줄 것입니다.
2. 용기를 주는 말을 잘해주는 사람
사도행전 11장 23절을 보면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 교인들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라고 권면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나바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불어넣어 주는 말을 잘했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따뜻한 말을 많이 해주고, 특히 가족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많이 해주어야 합니다. 그 말 한 마디가 배우자와 자녀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모릅니다.
왜 사람들이 외로움을 느낍니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말 한 마디를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외로우면 돈이 많아도 행복이 없고, 성공해도 행복이 없습니다. 살면서 최선을 다해 재화를 창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따뜻한 말 한 마디 해주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합니다. 함부로 말하고, 짜증을 잘 내고, 무거운 표정을 하는 것 등은 가족을 폭행하는 것입니다. 요새 황혼기의 남자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좀더 돈을 많이 벌지 못한 것’이 아니라 ‘좀더 가족에게 잘해주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따뜻한 말 한 마디로 가족들과 교우들을 격려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한마디의 말이 겨울을 훈훈하게 지나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위로를 말을 많이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위로의 말을 많이 해줄 생각을 해야 합니다.
또한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도 상대방에게 큰 격려를 줍니다. 어떤 분은 모든 의견을 독점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남의 말을 빨리 끊고 자기 말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격려자가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격려자가 되려면 남의 말을 잘 들어줄 줄 알아야 합니다. 경청은 조용한 사랑입니다. 그렇게 사랑의 경청을 하면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모릅니다.
이제 항상 지적하고 충고하는 말보다는 격려하는 말을 많이 하십시오. 옛날에 신학교 강의를 할 때 학생들의 리포트를 보면 지적하고 교정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래도 지적은 최소로 줄이고 격려는 최대로 늘리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의 수업에 임하는 태도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처럼 격려는 한 번 더 하고, 지적은 한 번 덜 하며, 들을 때는 한 템포 빨리 듣고, 말할 때는 한 템포 늦게 말할 때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더욱 좋은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3. 수고 후 영광을 바라지 않는 사람
사도행전 11장 2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제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안디옥 교회의 담임목회자로 파송된 바나바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자 안디옥 교회에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능력 있는 목회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소에 은거해 있던 사도 바울을 협력 목사로 초빙했습니다. 결국 그의 기대대로 안디옥으로 온 바울은 능력을 발휘하면서 그 영향력이 커졌지만 바나바는 바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대해서 어떤 위협이나 질투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나바와 사울에 관한 기록이 처음에는 바나바와 사울(행 11:30; 행 12:25; 행 13:1,2; 행 13:7)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1차 전도여행 후반기부터 변화가 일어나 그 용어가 바울과 바나바로 바뀌었습니다(행 13:43). 그처럼 바울이 리더십을 확보하면서 바나바는 조용히 뒤로 물러섰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격려의 문제에서 실패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격려는 남을 잘 높이는 것도 격려지만 자기를 잘 감추는 것도 격려입니다. 진정한 격려자는 뒤로 물러서는 것을 잘합니다. 얼마 전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교회세습’이라고 응답한 사람들이 제일 많았다고 합니다. 왜 교회에 세습이 벌어집니까? 뒤로 물러설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망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뒤로 물러설 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고에 대한 인정이나 영광을 받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의 가능성을 믿고 그를 후원해서 교회에 꼭 필요한 위대한 인물로 길러낸 후에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바울을 자기보다 앞세웠습니다. 그처럼 시기와 질투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격려자가 될 수 있습니다.
런던의 유명한 설교가인 마이어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캠벨 몰간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면서 마이어를 따르던 사람들이 몰간의 설교를 들으러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마이어는 몰간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다고 사람들 앞에서 높여주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경쟁은 없었고 다만 격려와 종의 마음만 있었습니다. 교회에는 이런 격려자들이 많아야 합니다.
4. 과감히 사랑의 대가를 치르는 사람
본문 3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당시 초대교회는 놀랍게 부흥했습니다. 그렇게 부흥하면서 선교와 구제를 위해서 많은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구브로 출신의 의로운 부자였던 요셉은 교회에 재정이 필요한 줄 알고 자기 농장을 팔아 헌금했습니다. 결국 요셉은 헌신으로 교회의 재정적 어려움이 해결되면서 사람들은 그를 바나바, 즉 격려자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나바처럼 말로만 격려하지 말고 실질적으로 우리가 가진 것을 바침으로 격려해야 합니다. 그처럼 좋은 일과 선교와 구제를 위해 쓴 돈은 결코 잃어버린 돈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 혼자만을 위해 쓰려고 꼭꼭 간직한 돈이 바로 잃어버린 돈입니다.
시편 37편 25-26절 말씀에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신이 복을 받는 도다.” 주는 것은 우리의 신앙과 사랑을 나타내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자라게 해주고, 결국 자신과 자손이 복 받는 지름길입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희생할 줄 알아야 사랑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좋은 일에는 머뭇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날,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연인이 칸트에게 찾아와 말했습니다. “칸트! 우리가 서로 사랑하니까 이제 결혼해요.” 그러자 칸트는 “조금 생각해보고 대답해주겠다!”고 말한 후에 대학 도서관에 가서 결혼했을 때의 장점과 단점을 다 찾아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어떤 날은 결혼하면 좋을 것 같고, 어떤 날은 결혼하면 고생할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오랜 고민 끝에 그가 결정했습니다. 결혼하면 단점보다는 장점이 조금 더 많을 것 같아서 결혼을 결단하고 연인의 집을 찾아가 부친에게 말했습니다. “아버님! 따님을 주십시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니까 결혼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때 그 부친이 말했습니다. “여보게! 내 딸은 이미 결혼했어. 벌써 아이를 둘이나 두었네.” 칸트가 너무 고민을 하니까 여자가 기다리다 못해 다른 사람과 결혼한 것입니다.
좋은 일을 위해 과감히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사랑을 얻지 못합니다. 사랑은 관념이 아니고 희생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하면 희생도 기쁨이 되고, 희생할 때 진정한 사랑을 얻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보다 더 많이 선교해야 합니다. 그래서 조금 덜 먹고, 덜 누리더라도 선교사님의 필요에 응답해야 합니다.
저는 1987년 선교사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떠날 때는 화려한 비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신학교 공부 중에 현실을 깨닫고 저의 달란트를 생각하면서 저는 전방 선교사의 길을 포기하고 후방선교사가 되겠다고 진로를 수정했습니다. 저는 그때 진로를 수정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것에 대해 항상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제가 가진 것을 선교사님들과 최대한 나누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 소속 한인선교사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들리는 중간 기지처럼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들이 오면 항상 빈손으로 가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후방에서 편하게 지내면서 그런 정성도 다하지 않는다면 잘못입니다. 때로 재정적으로 어려워도 선교는 계속해야 합니다. 저도 가끔 재정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처하지만 선교를 위해 드리는 일만은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번에 전세 기간이 만료되고 주인이 전세금을 올려서 이틀 전에 이사 갈 집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때 세입자들의 애환이 다시 한번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한참 집을 알아보고 자존심도 상하고 울적한 마음으로 교회에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선교 후원사역을 시작했던 지난 6년의 사역을 죽 돌아보았습니다.
따져보니까 그 동안 선교를 위해 드렸던 물질을 저축했다면 세입자 생활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교한다면서 나 자신은 이렇게 이사 다니는 것이 과연 가장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냐는 생각도 문득 들었습니다. 점점 커가는 아이들에게도 아직도 한 방에서 이층침대를 쓰게 하는 것이 아빠로서 미안합니다. 이미 첫째 딸 은혜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침대가 닿을 정도입니다. 자주 이사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아내에게 미안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속으로 전세 희망자가 나타나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전세금을 다시 내리면 이사 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제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올린 가격에라도 들어올 사람이 생겼으니까 이사 날짜를 잡자는 전화였습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담담하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을 거예요”라고 말했지만 괜히 아내에게 미안했습니다.
그처럼 가족들에게는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 선교하면서 얼마나 뿌듯하고 보람과 기쁨이 컸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작은 정성을 드릴 때 선교사님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선교사 나가기로 약속했다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송스러움이 많이 줄고 심령의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선교는 힘든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선교사님들을 우리는 힘써 격려해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격려할 때는 ‘말로 격려하는 것’도 소중하지만 겸손하고 은밀하게 생색내지 않고 할 수 있으면 ‘물질로 격려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희생에 있습니다. 내 것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영혼의 자유와 기쁨은 그만큼 비례해서 커지고,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과 자녀와 꿈과 비전도 지켜주실 것입니다.
< 격려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
이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바나바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격려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격려를 받지 못하면 영혼도 서서히 죽게 되고, 공동체도 서서히 죽게 됩니다. 그러나 격려를 받으면 영혼도 살아나게 됩니다. 지금 현재의 모습이 부족해도 열심히 격려해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고등학교 때 한 학년을 2년 동안 다닌 일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낙제했느냐?”고 묻자 그가 스스로를 격려하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올바른 길을 가려고 두 번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자신과 남을 격려할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위기에 처한 영국이 필요로 했던 것은 공부 잘하는 천재가 아니었고 믿음과 인내로 국민들에게 믿음의 격려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격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격려는 또 다른 격려를 만듭니다. 격려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격려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격려 받고 싶으면 먼저 격려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격려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진짜 똑똑한 사람은 결점을 잡아내는 사람이 아니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도 진짜 훌륭한 성도는 결점을 잘 잡아내는 성도가 아니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성도입니다. 결점 잘 잡아내면 교회는 상처투성이가 됩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상처 입히는 곳이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들을 싸매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믿는 자들을 세워주는 곳이 되어야지 꾸짖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더욱 격려하고 상처를 싸매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사람은 말로 설득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격려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어느 날, 어린 딸이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뭐 하세요?” 엄마가 말했습니다. “수지야. 이웃집 아줌마가 딸을 먼저 천국에 보냈잖아? 지금 아무 것도 할 힘이 없을 거야. 그래서 그분에게 드릴 음식을 준비하고 있어. 너도 아줌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봐.”
잠시 후, 수지는 이웃집 벨을 눌렀습니다. 이웃집 아줌마가 눈이 충혈 된 상태로 나와 말했습니다. “수지구나? 어떻게 왔니?” 수지가 말했습니다. “아줌마, 우리 엄마가 아줌마가 마음에 상처를 입었는데 그 상처가 아물도록 좋은 일을 하래요. 그래서 이것 가져왔어요. 상처에 붙이세요.” 그리고 수지가 일회용 반창고를 내밀었습니다. 그때 이웃집 아줌마는 수지를 품에 안고 한참 울다 말했습니다. “수지야! 고맙다! 이것 붙이면 내 상처는 곧 낫게 될 거야.” 그 일로 이웃집 아줌마가 큰 힘과 위로를 얻었다고 합니다.
충만한 사람입니까?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돌봐주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지금 힘들어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지금 세상은 비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문제점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격려하는 삶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해서 가정과 교회와 세상은 조금씩 아름답게 변화될 것입니다. 이제 바나바와 같은 성령 충만한 격려자들이 되어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축복의 초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ttp://www.john316.or.kr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