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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롬15:1-13 |
|---|---|
| 설교자 : | 강종수 목사 |
| 참고 : | 사이버신학교 http://cafe.daum.net/st888 |
2006. 7. 2 주일 오전예배 설교
성경 : 롬15:1-13
제목 : 이웃을 기쁘게
바울은 특별히 이방인을 위한 사명자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에 불신 세계에 대해서 남달리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반영하고자 하는 성도의 정서를 피력하려고 합니다.
본 장 1절에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고 하며, 2절에는 대조어로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고 하면서 자기를 기쁘게가 아닌 이웃을 기쁘게의 삶을 지향하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성숙되어질 성도들의 공동체 의식의 정도는 이웃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마음에 품고 있어서 사랑과 위로와 소망의 사람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1.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기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3『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결국 그리스도 예수를 닮는 종교입니다.
5『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라고 하는 본 받는다는 말은 예수의 '길을 따라서' 라는 뜻입니다.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 문화로 알거나 소위 복 받기 위해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예수 닮는 것이라는 생각을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받은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그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구해주신 은혜입니다.
요일 2:2『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9『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 11:30『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때문에 참 성도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 깊은 체험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고 그 삶의 모본은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을 좇아 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주님의 외적인 거룩한 모습을 연상하거나 단순히 십자가에 돌아가신 현장에 대해서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위해 희생하신 그 삶의 인격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빌 2:4-5『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7『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했습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평가는 기적을 나타내는 믿음의 능력이 척도가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능력은 어떤 경우에 교만하여 거짓 선지자들이 행하는 것으로도 말씀하고 있기습니다(마7:21-, 마24:24).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자의 지성적인 삶의 태도는 이웃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기본 정신이 없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고전 10:33『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인생은 어디로 둘러봐도 불쌍하고 약점이 많습니다. 우리 성도가 이들에게 기쁨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처럼 우리가 그들을 긍휼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권위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하시고 능력에 완전하시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보내시어 대속의 제물이 되게 하셨기에 당신의 의지대로 사시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위해 우리에게 자신의 몸을 주셨습니다.
요 8:29『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2. 성도는 소망 있는 자들이기에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13『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가장 큰 기쁨은 인생으로 태어나서 이제 천국을 향해 살아갈 소망이 있는 존재임을 확인한 것입니다. 세상은 엄격히 말해 소망이 없는 자들입니다.
사단의 절망 가운데 노래하고 좌절하고 사후의 역사를 무시한 가운데 영혼들은 방치된 상태입니다. 세상은 사실 기쁨보다 슬픈 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날마다 서글픈 일과 고통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혹은 믿음이 연약해서 근성적으로 좌절을 잘 하는 인간이기에 신자 안에서도 항상 믿음에 강한 자가 위로하고 하나님의 소망을 소개하고 알게 하고 격려하는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사회가 불의와 어두움으로 쓰러져 가는데 교회는 그들의 희망의 등대이어야 하고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은 이웃에게 참된 길의 안내자로서 만나 복음을 듣거나 권면을 받으면 기쁨이 생기게 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최소한 성도의 입가에 미소가 끊이지 않아야 하고 이웃의 기대치가 되야 하고 사회에 주목받을 삶에 대한 소망이 넘치는 긍정적인 의식을 간직하고 태도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좌절한 삶 가운데 사는 이가 그리스도인을 볼 때 겉으로만 봐도 희망을 걸만큼의 소망에 찬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아니 속으로 분명히 소망에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내세와 현실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믿고 신앙으로 해석해 나가면서 세상을 이겨나가는 멋진 모습을 간직하고 전달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이 열방에게 모두 기뻐할 예언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기쁨을 줘야 합니다
10『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하였으며
12『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때문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했을 때,
행 13:48『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기쁨이 없는 세상에 하나님은 복음을 통하여 이방에게 기쁨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죽음의 신이 지배하기 때문에 참다운 기쁨이 없습니다.
코미디의 우스움처럼 우습다는 것과 기쁨이라는 말은 다릅니다.
우스운 것은 사람의 감정에 단순히 하하 하고 웃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기쁜 이유가 생기고 가슴에서 전 인격을 행복하게 책임지는 철학적인 요소에 속합니다.
삶의 참다운 의미로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은 우습다는 감정 따위의 성질이 아닙니다. 주께서는 공적 3년의 생애 중에 단 한번도 웃으신 적이 없으신 데 요즘 시쳇말로 부정적인 사람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세상을 향하여 주의 심정으로 쳐다보면 웃을 일보다 눈물겹고 불쌍하고 안타까운 일이 많아서 주님을 닮아 속으로는 영원한 삶의 기쁨이 있지만 밖으로 사람들을 향하여서는 아파하는 정신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구 끝 날까지 복음을 통하여 이 기쁜 소식을 통하여 세상을 기쁨 가운데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가까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먼저 상대를 기쁘게 하는 삶의 의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 나오는 사람이 자기 잘되기만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잘못 믿는 것입니다.
공동체라는 지체 의식이 불분명한 사람은 타인을 위해 기도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지체라 하였기에 긍휼함을 입어야 할 상대를 더욱 행복하게 도와주고자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자라 했습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은 선택의 요소가 아닙니다. 기 교훈은 매우 의무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본 장 1절에,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할 때 마땅히 라는 말은 권고(should)의 말이 아니고 해야한 한다(must) 의무형으로 쓰여졌습니다.
옵헤일로(ojfeivlw)라는 말은 채무자처럼 빚진 사람 마냥 아주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우리는 13장에서 이미 사랑의 빚에 대한 말씀을 상고하였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본 장에서 권면하고자 하는 뜻도 우리가 당연히 이웃에게 기쁨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돌판에 새겼던 십계명만이 계명이 아닙니다. 신약에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도가 반드시 지켜야 할 사랑의 본문이 새 계명입니다.
당연한 성도의 정서이며 삶의 태도이고 의지입니다. 지체에 대한 의식의 정도이고 결국 세상을 향한 삶의 양식이기도 합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성도가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억지로 짐 지우는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기쁜 구원과 긍휼과 소망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경 : 롬15:1-13
제목 : 이웃을 기쁘게
바울은 특별히 이방인을 위한 사명자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에 불신 세계에 대해서 남달리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반영하고자 하는 성도의 정서를 피력하려고 합니다.
본 장 1절에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고 하며, 2절에는 대조어로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고 하면서 자기를 기쁘게가 아닌 이웃을 기쁘게의 삶을 지향하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성숙되어질 성도들의 공동체 의식의 정도는 이웃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마음에 품고 있어서 사랑과 위로와 소망의 사람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1.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기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3『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결국 그리스도 예수를 닮는 종교입니다.
5『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라고 하는 본 받는다는 말은 예수의 '길을 따라서' 라는 뜻입니다.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 문화로 알거나 소위 복 받기 위해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예수 닮는 것이라는 생각을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받은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그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구해주신 은혜입니다.
요일 2:2『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9『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 11:30『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때문에 참 성도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 깊은 체험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고 그 삶의 모본은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을 좇아 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주님의 외적인 거룩한 모습을 연상하거나 단순히 십자가에 돌아가신 현장에 대해서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위해 희생하신 그 삶의 인격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빌 2:4-5『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7『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했습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평가는 기적을 나타내는 믿음의 능력이 척도가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능력은 어떤 경우에 교만하여 거짓 선지자들이 행하는 것으로도 말씀하고 있기습니다(마7:21-, 마24:24).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자의 지성적인 삶의 태도는 이웃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기본 정신이 없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고전 10:33『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인생은 어디로 둘러봐도 불쌍하고 약점이 많습니다. 우리 성도가 이들에게 기쁨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처럼 우리가 그들을 긍휼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권위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하시고 능력에 완전하시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보내시어 대속의 제물이 되게 하셨기에 당신의 의지대로 사시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위해 우리에게 자신의 몸을 주셨습니다.
요 8:29『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2. 성도는 소망 있는 자들이기에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13『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가장 큰 기쁨은 인생으로 태어나서 이제 천국을 향해 살아갈 소망이 있는 존재임을 확인한 것입니다. 세상은 엄격히 말해 소망이 없는 자들입니다.
사단의 절망 가운데 노래하고 좌절하고 사후의 역사를 무시한 가운데 영혼들은 방치된 상태입니다. 세상은 사실 기쁨보다 슬픈 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날마다 서글픈 일과 고통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혹은 믿음이 연약해서 근성적으로 좌절을 잘 하는 인간이기에 신자 안에서도 항상 믿음에 강한 자가 위로하고 하나님의 소망을 소개하고 알게 하고 격려하는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사회가 불의와 어두움으로 쓰러져 가는데 교회는 그들의 희망의 등대이어야 하고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은 이웃에게 참된 길의 안내자로서 만나 복음을 듣거나 권면을 받으면 기쁨이 생기게 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최소한 성도의 입가에 미소가 끊이지 않아야 하고 이웃의 기대치가 되야 하고 사회에 주목받을 삶에 대한 소망이 넘치는 긍정적인 의식을 간직하고 태도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좌절한 삶 가운데 사는 이가 그리스도인을 볼 때 겉으로만 봐도 희망을 걸만큼의 소망에 찬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아니 속으로 분명히 소망에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내세와 현실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믿고 신앙으로 해석해 나가면서 세상을 이겨나가는 멋진 모습을 간직하고 전달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이 열방에게 모두 기뻐할 예언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기쁨을 줘야 합니다
10『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하였으며
12『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때문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했을 때,
행 13:48『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기쁨이 없는 세상에 하나님은 복음을 통하여 이방에게 기쁨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죽음의 신이 지배하기 때문에 참다운 기쁨이 없습니다.
코미디의 우스움처럼 우습다는 것과 기쁨이라는 말은 다릅니다.
우스운 것은 사람의 감정에 단순히 하하 하고 웃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기쁜 이유가 생기고 가슴에서 전 인격을 행복하게 책임지는 철학적인 요소에 속합니다.
삶의 참다운 의미로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은 우습다는 감정 따위의 성질이 아닙니다. 주께서는 공적 3년의 생애 중에 단 한번도 웃으신 적이 없으신 데 요즘 시쳇말로 부정적인 사람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세상을 향하여 주의 심정으로 쳐다보면 웃을 일보다 눈물겹고 불쌍하고 안타까운 일이 많아서 주님을 닮아 속으로는 영원한 삶의 기쁨이 있지만 밖으로 사람들을 향하여서는 아파하는 정신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구 끝 날까지 복음을 통하여 이 기쁜 소식을 통하여 세상을 기쁨 가운데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가까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먼저 상대를 기쁘게 하는 삶의 의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 나오는 사람이 자기 잘되기만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잘못 믿는 것입니다.
공동체라는 지체 의식이 불분명한 사람은 타인을 위해 기도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지체라 하였기에 긍휼함을 입어야 할 상대를 더욱 행복하게 도와주고자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자라 했습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은 선택의 요소가 아닙니다. 기 교훈은 매우 의무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본 장 1절에,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할 때 마땅히 라는 말은 권고(should)의 말이 아니고 해야한 한다(must) 의무형으로 쓰여졌습니다.
옵헤일로(ojfeivlw)라는 말은 채무자처럼 빚진 사람 마냥 아주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우리는 13장에서 이미 사랑의 빚에 대한 말씀을 상고하였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본 장에서 권면하고자 하는 뜻도 우리가 당연히 이웃에게 기쁨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돌판에 새겼던 십계명만이 계명이 아닙니다. 신약에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도가 반드시 지켜야 할 사랑의 본문이 새 계명입니다.
당연한 성도의 정서이며 삶의 태도이고 의지입니다. 지체에 대한 의식의 정도이고 결국 세상을 향한 삶의 양식이기도 합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성도가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억지로 짐 지우는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기쁜 구원과 긍휼과 소망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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