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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국에 계신 하느님

로마서 신은희 교수............... 조회 수 2688 추천 수 0 2003.08.04 00:28:38
.........
성경본문 : 롬9:1-5 
설교자 : 신은희 교수 
참고 :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전부터 한국에 오면 새길교회에 꼭 오고 싶었는데 오늘은 이렇게 특별히 말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에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말씀선포의 “설교”보다는 제가 미국에서 통일운동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소박한 이야기들을 여러분들과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제 이야기의 제목을 “북조국에 계신 하느님”이라고 붙여 보았습니다. 이 교회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아직 국내에서 북한을 “조국”이라고 부른다면 생소하고 마음이 불편하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의 삶의 현장에서는 남도 조국이고 북도 조국임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북한이 정치적으로 남한과 미국에서는 적대국이지만 많은 해외동포들의 마음속에 북은 “또 하나의 조국”이어왔습니다. 조국을 조국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것이 우리민족의 슬픈 역사였고, 오늘도 우리는 그러한 아픔의 연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제가 처음 북조국을 간다고 했을 때 미국동료들의 반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즉각적으로 그런 “Godless country”에 뭐 하러 가는가 하며 반문하였습니다. “Godless country” 즉 신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많은 백인들에게 비취어진 북조국은 그렇게 신이 존재할 수 없는, 아니 신조차 사랑하기를 거부한 죽음의 땅, 공포의 땅, 악의 땅이었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어떻게 저렇게 쉽게 다른 민족과 국가에 대하여 하느님의 존재여부를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참으로 슬픈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다시 나와 보니 백인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이 더 슬픈 현실입니다. 한국사회가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국민들, 특히 기독교인들은 북을 대화의 “동반자”라기 보다는 “선교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제한된 시간과 공간이었지만 제가 만난 북녘 동포들의 삶 속에서 저는 그들이 선교의 대상이 될 이유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말씀은 북조국에 복음과 기독교 신앙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것은 각 나라의 고유한 문화권속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고 그들의 언어로 또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양에서의 경험을 조금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처음 북조국을 방문했던 날은 “국제 부녀절”이라고 하는 공휴일이었습니다. 우리말로 “여성의 날”과 같은 것입니다. 이 날은 여성들이 쉬는 날이고 남성들이 여성들을 위하여 특별히 봉사하는 날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북은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나라입니다. 사회주의 나라에서는 여성이 남성들과 동등하게 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래서 사회참여도 면에서 본다면 여성차별이 없다고 보여 집니다. 그런데 여성차별화 현상은 집 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저와 함께 동행 하시던 여성참사님이 “같이 일하고 와서 나도 피곤해 죽겠는데 내 남편은 신문만 읽고 앉아 있다”고 투덜대니까 그 말을 듣고 있던 남성참사님은 “나는 안 그래요. 여성동무들이 사회복무를 더 많이 하는 우리 남성들을 너무 볶아친다”며 반격하는 모습들을 재미있게 보면서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비슷한 것을 느꼈습니다. 정치제도와 이념이 달라도 사람들의 삶의 애환은 다 비슷한 것 같습니다.

  북의 부모들도 요즘 어린자녀들이 너무 일찍 이성교제를 하는 것에 걱정이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손을 잡고 가다가 어른들이 쳐다보면 가만히 놨다가 지나가면 다시 손을 꼬옥 잡고 가는 중학생들의 문화는 10년 전 만해도 쉽게 볼 수 없었다고 하면서 시대가 너무 많이 바뀌었다는 말을 많이 하셨습니다. 또한 딸을 가지신 부모님들은 소위 좋은 신랑감을 찾으시느라 갈등하는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북에서의 1등. 신랑감은 학벌이나 재정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나라를 위하여 군복무를 충실히 하고 군 생활에 많은 공헌을 한 남성입니다. 또한 요즘 북은 “선군정치”(Army First Policy)를 실행하고 있는데 이는 군이 모든 것에 앞서 가는 정신으로 공화국의 정치 이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생들도 일찍부터 군복무를 시작하는데 어머니들은 군 생활을 하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밤낮으로 고생하는 아들을 생각하며 안타까워하는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북조국에서의 첫날밤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새벽 5시쯤이었습니다. 아직 캄캄한 시간이었는데 어디서 ‘와~’하는 함성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제가 묵었던 숙소는 인민대광장이 한 눈에 다 들어오는 곳이었는데 어디서 모였는지 젊은 학생들이 그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청년 돌격대의 “강계정신집회”였습니다. 그들은 일요일 이른 새벽부터 모여서 민족의 정통성과 자주권을 주장하였고 자신들의 조국을 어떻게 외세의 침략에서 지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대규모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도 순간 뛰어나가 함께 동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개인주의가 극도에 달한 미국자본주의 생활에 찌든 내게 오히려 필요한 모임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방문은 일정대로 잘 진행되었습니다. 낮에는 화려한 평양의 명소를 다녔고 밤에는 그 화려한 이면에 드리워진 희생과 아픔의 그림자들 또한 보았습니다. 90년대 아주 어려울 때 “고난의 행군”시기를 겪으면서 많은 북의 동포들은 “피죽”이라는 것을 먹었습니다. 나무껍질로 만든 죽같은 것을 몇 모금 마시고 밖에 나가 힘든 노동을 하며 매일 지냈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참사님들은 그 때 먹은 피죽을 지금 다시 먹으라 하면 맨 정신으로는 먹지 못할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북의 많은 동포들은 힘이 곧 정의가 되는 시대에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로 둔갑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사실, 자본의 독점화 현상이 극대화되는 소위 세계화 물결 속에서는 서구 자본주의 정신과 달리하는 사회주의 이상들은 즉각적으로 비도덕적, 반윤리적, 비민주적이라는 철퇴를 맞게 됩니다. 우리는 아주 쉽게 북의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세뇌교육 때문이라는 냉소적인 비판을 일삼지만, 사실 미국과 국내에 사는 우리들이야말로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식민문화속에 철저히 세뇌되고 지배당하며 살아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게 특별히 흥미로웠던 시간은 북의 대학교원들과 학생들과의 대화시간이었습니다. 김일성 종합대학의 경우는 종교학과가 1989년도에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지금은 자체 배출한 교수진들로 종교학 수업이 다채롭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북조국에 종교학과와 교회들이 생기기까지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왔는데 이 사업에 관하여서는 미주동포들의 역할이 컸다고 합니다. 초기에는 서로 알아가고 익숙해지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공방이 오고 갔는데 그 한 예를 들면 아래 대화와 같습니다.

동포: 북녘에 남아있던 기독교 지도자들의 행방을 조사하고 싶습니다.

북: 좋습니다. 그럼 우리도 남에서 실종된 남로당 간부들의 행방을 조사해야겠습니다.

동포: 북한사회에 종교 자유가 있는 증거를 국제사회에 알리려면 평양에 교회를 지어야 합니다.

북: 좋습니다. 우리가 평양에 교회를 지을 터이니 서울에도 남대문 밖의 남로당 건물을 다시 지어야 합니다.

동포: 전쟁 중에 폭격 받지 않은 지방도시와 촌락에는 교회 건물이 그대로 있을 터이니 교회 건물의 용도변경 실태를 조사하게 해주십시오.

북: 좋습니다. 남에서도 1948년 8월 이전에 있던 인민위원회 소유 건물용도 전환 내용 확인을 위한 조사를 하게 해주십시오.

동포: 교회지도자들이 ‘반동’이라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숙청된 후 그들의 행방과 소식과 그 가족들을 확인케 해주십시오.

북: 좋습니다. 그럼 우리도 남쪽에서 실종된 공산주의자들의 행방과 월북자 가족에 대한 조사 할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끝없는 대화와 응전으로 10여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종교학과와 평양신학원과 봉수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북의 종교학과, 철학과라고 하면 그냥 주체사상만 가르치고 배운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판단하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과 국내에서처럼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현대철학과 신학까지 다 연구하고 있고 최신 신학조류라고 할 수 있는 생태신학 (환경미학)의 이해까지도 하고 있었습니다. 학생들과 교원들은 기독교를 아주 흥미롭게 공부하고 있는데 기독교의 전쟁과 침략의 역사와 마녀사냥과 같은 여성학대의 역사는 아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북의 기독교연구는 특별히 조선기독교 역사와 일제 강점 시기에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였던 기독교인들의 사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주체”라고 하는 것은 학생들의 정신세계를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동서양의 세계 철학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하나의 “관점”이라고 보여 졌습니다. 종교나 신앙에 대한 인식도 70, 80년대에 비해 많은 변화가 있어, 종교와 신앙의 긍정적인 면을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북의 신앙관은 “민족”이라는 개념을 떠나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신앙관입니다. 미국은 북을 종교탄압국으로 지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서구식 기독교”를 허용하지 않는 북의 민족주의정신에 대한 정치적 탄압일 수도 있습니다. 지극히 서양 중심적인 사고일 뿐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미국도 종교탄압국에 속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사는 아이오아주에서는 회교도들이 길에서 기도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활 속에서는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하여 기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식입니다. 그러나 회교도들이 공공장소에서 자유롭게 종교의식을 하는 것이 눈에 거슬리니 기도하고 싶으면 반드시 회교사원까지 가서 그 안에서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엄밀히 말해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북이 미국식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종교탄압국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지극히 문화제국적인 발상이고 모순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제가 또 새롭게 배운 한 가지는 북의 문화 속에서는 어떤 외래 종교가 들어와도 일종의 “민족종교”로 승화되는 것이 특징인 것 같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자신의 생애를 마감하면서 『세기와 더불어』라는 자서전을 썼습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의 기독교적인 배경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신앙관을 피력합니다. 그는 결코 기독교 신앙을 배척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다만 신앙은 자신이 속한 문화에서 고백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 있을 때 가장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서구식” 이나 “남한식”이 아니라 “북한식” 복음에 기초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신앙과 민족이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조선 사람은 조선하늘에서 조선 하느님을 믿자”고 말합니다. 조선의 하느님이 따로 있고 미국의 하느님이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고 이 우주 속에 존재하시는 하느님을 “조선식으로” 믿고 싶다는 역설적인 표현일 것입니다. 이는 민족과 신앙이 배타적인 관계성속에서 성립될 수 없다고 보는 그의 기독교 신앙관인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북한은 이렇게 변해야 한다. 저렇게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국내에 통일 세미나와 각종 종교모임에 가게 되면 북한에 대한 논의를 할 때마다 빠지는 않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개혁과 개방”입니다. 우리는 북한의 개혁과 개방을 강조하며 그 필요성을 강도 높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는 과연 북조국만 개혁과 개방의 대상일까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과연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의 의식 속에는 얼마나 북에 대하여 개혁되고 개방된 사고를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도 또 다른 개혁과 개방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보고 싶습니다.  

  막상 북의 동포들은 그 말을 아주 싫어합니다.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그들은 “개방의 문은 이미 안에서 열려져 있는데 문이 밖에서 잠겨져 있다”고 주장합니다. 간부들은 과거 3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며 스스로 감탄해 합니다. 그 한 예로 김일성대학 영문과 학생을 만났는데 북의 학생들의 영어실력이 상당히 좋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국내에서야 연수다 유학이다 한국학생들은 잘 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있지만, 북의 학생들 대다수는 유학한번 다녀온 경험이 없는 다른 배경을 고려해 볼 때 고급영어를 구사하는 것을 보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학생들한테 “여러분은 왜 영어 배우나”하고 물으니, 과거 같았으면 아마도 “조국의 적 미제국주의자의 압살책동을 까부수기 위하여...” 하면서 아주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이제는 세계가 다원화된 사회이기 때문에 서로 공존하기 위하여 다른 문화양식을 배우기 위하여 영어도 배운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런 작은 경험들을 통하여 북의 사회가 밖에서 비춰지는 것같이 닫힌 사회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많은 변화와 개방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문제는 변화하는 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얼마나 변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봉수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오늘의 본문을 묵상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고백이 제 마음 가운데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의 고백을 다시 읽겠습니다.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끊임없이 번민하고 있습니다. 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

  저는 오늘날 통일을 염원하는 많은 신앙인들이 바로 사도바울의 심정과도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그의 강렬한 신앙과 민족은 서로 상반되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둘을 나누려는 시도는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닐 수 있습니다. 바울은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그리스도로부터 혹은 그리스도의 교회로부터 “저주를 받아도” 그 마음속에 한이 없겠다는 대단히 혁명적인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저주를 받아도”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유대전통에서 신에게 바치기 위하여 따로 구별된 신성한 제물을 온전히 태우고 희생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민족을 위하여 그 자신의 몸이 제물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몸이 고스란히 타 죽어가더라도 여한이 없겠다는 열정적인 헌신의 자세를 가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자기 민족을 향한 끊임없는 번민과 깊은 민족애를 가지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런 모습은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통일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각각의 고유문화 속에 온전히 녹아들지 않았을 때 우리는 바로 신앙과 민족을 양자택일하여야 하는 기형적인 신앙을 강요받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복음적일 수 있고 가장 성서적일 수도 있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북의 동포들에게 진정한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고 속죄함을 받아 살아가는 것도 구원이지만 예수의 생명을 그들의 고백적인 삶 가운데서 다시 발견하는 것도 구원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지하게 통일과 평화를 꿈꾸는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을 연구하고 신앙서적을 정독하는 것처럼 북의 문화와 공동체 삶에 대한 깊은 이해도 함께 하여야 할 것입니다. 현재와 같은 복잡한 정치현안들이 어느 정도 극복되면 우리에겐 더 큰 과제가 다가올 것입니다. 그것은 과연 우리가 서로의 다른 점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남과 북이, 북과 남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은 내면의 벽을 허무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이는 상호성이 전제된 대화의 자리에 우리가 서로를 초대하는 일과 함께 이루어 질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조국을 하느님도 없는 병든 땅으로 여기고 그들을 선교의 대상으로만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대화의 동반자로 서로의 구원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로서 동역자로 인식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우리 혈육의 구원을 위하여 교회로부터 추방을 당하여도 그 마음속에 여한을 없을 것 같은 그 간절한 심정으로 북의 동포들을 만나는 시간들이 우리 가운데 더욱 많아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하느님,
저희를 은혜 가운데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하느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고난 속에 있는 북의 동포들을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마음을
성령께서 주셨으니,
또한 그 고난에 참여할 수 있는 신앙의 힘과 용기도
계속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좁은 시야로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제한하지 않게 하시고,
북에서도 지금 이 순간 힘차게 일하시는 하느님을 찬양 드리며,
우리에게 동지가 되시고 해방자 되신
형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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