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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길, 예수의 길

로마서 김재성 목사............... 조회 수 3783 추천 수 0 2003.08.22 22: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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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14:1-6 
설교자 : 김재성 목사 
참고 :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예수가 길이다

이 본문은, 수난을 앞두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한 고별 설교의 첫 부분이다. 예수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은 그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기 위함이라고 하면서,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고 한다. 그때 도마가,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하고 묻는다. 그러자 예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고 대답한다.

흔히들 이것은 도마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자연스런 대답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는, 도마가 묻는 말에 대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마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바로잡아 주고 있다. 예수는 자신이 당할 수난의 의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도마는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이르는 어떤 통로, 즉 구원에 이르는 무슨 비밀 통로를 알려주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예수 자신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구원은 어떤 것을 수단이나 매개로 해서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삶에서 이미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빌립이 예수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9절).

도마나 빌립은 그렇게 오랫동안 예수와 함께 있었으면서도 예수와 함께하는 것이 곧 구원의 현실인 줄 모르고, 뭔가 더 신비롭고 특별한 신앙의 체험을 구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들은 예수를 통해서 천국에 이르고 싶어 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뵙고 싶어 했다. 그것은 어쩌면 예수를 구원에 이르는 통로 내지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어떤 목표에 이르기 위한 통로나 수단일 수 없다. 예수께서 "내가 길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고 했을 때, 여기서 길은 길과 목표가 나누어지지 않는 의미에서 길이다.

춘천 가는 길과 춘천은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춘천 가는 길은 춘천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통로일 뿐이다. 하지만 삶에서는 그렇게 통로와 목표가 구분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삶을 목표로 하루하루를 잘 살았다면 그는 살아 있는 순간순간도 훌륭한 것이고 죽은 다음에 그의 삶 전체를 평가할 때도 훌륭한 사람인 것이다. 그에게서 훌륭한 하루하루의 삶과 전체의 목표 내지 결과로서 훌륭한 삶은 구별될 수가 없다.

예수에게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자신과 함께 한 삶에서 이미 사람들은 구원을 맛보았다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구원은 죽은 다음에 이르게 되는 어떤 결과가 아니다. 이미 예수의 삶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그의 수난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났다. 수난당하기까지 그들을 사랑한 예수의 삶에서 이미 구원은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 자신이 길이다. 그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요 동시에 목표다.

길을 두고 길을 찾는 도마와 빌립에게서, "내가 곧 길이다"고 하는 예수의 말은 파격적인 폭탄선언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번역은 "나는 길이다"라고 하기보다는 "내가 길이다"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로마의 길에서 엑소더스

"내가 길이다"는 말씀은 도마의 질문에 대답하는 의미뿐만 아니라, 이미 당시에 유행하던 길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는 의미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고 가르쳤다(마 7:13-14). 여기서 예수는, 넓은 문과 좁은 문뿐 아니라, 거기에 이르는 널찍한 길과 비좁은 길을 대조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바, 이 세상 사람들이 몰려가는 널찍한 길과 대조가 되는, 생명으로 이끄는 비좁은 길과 같은 것일 것이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로마에 대해 고발하는 성격이 강하다. 예수를 체포한 장본인도 공관복음에서는 나오지 않는 로마 군인들이다(18:3). 그렇다면 수난을 앞두고 예수가 자신을 길이라고 했을 때 그것과 대조되는 것은 아마도 그를 체포하려고 하는 로마 사람들의 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로마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의 군사도로로 유명했다. 그 길은 약소민족을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한 통로였다. 그것은 식민지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들이는 혈관이었다.

영국에 가니 도시의 이름이 -chester나 -cester로 끝나는 것이 많았다. 맨체스터(Manchester), 레스터(Leicester), 우스터(Worcester), 글라스터(Gloucester), 윈체스터(Winchester) 등이다. 이런 이름은 본래 로마의 병영 주둔지였던 곳이라고 한다. 로마의 길은 정복하기 어렵다는 섬나라 영국에까지 길을 내고 주둔지를 만들고, 그 흔적이 오늘에까지 남아 있으니 로마가 얼마나 길을 잘 냈는지 알 만하다. 오스트리아에서 이탈리아로 접어들 때 기나긴 고속도로가 있는데 그것은 무솔리니가 놓은 것이라고 했다. 독재자들은 대개 길을 잘 놓는다. 우리나라 고속도로도 그런 역사를 갖고 있다. 그들은 대개 전쟁을 하기 위해서 쭉쭉 뻗은 곧은 길을 놓았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할 때도 그랬다. 그들은 맨 먼저 우리나라 전국에 철도를 깔고 그 길로 우리나라 민중의 고혈을 빨아들였고, 만주로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한 길로 삼았다.

로마뿐 아니라 로마에게 온갖 충성을 다하는 헤롯정권과 로마총독에게 붙어 있는 대제사장, 그리고 로마를 거스르는 일은 일체하지 않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겉모습은 달라도 속으로는 모두 다 이 로마의 길을 가는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수난을 당하기에 앞서서, '내가 길이다'고 선포하는 예수의 말씀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이제 예수가 떠난 후에 남게 되는 제자들에게,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정복하고 고혈을 빨아들이는 로마가 그들의 길이 아니라, 약한 자를 영접하고 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바로 이 예수가 그들의 길(he hodos)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 즉 로마의 길과는 다른 길이다. 교회(ekklesia)라는 말 자체가 어디에서 밖으로(ek) 부름받은(kle) 공동체라는 뜻이다. 출애굽은 영어로 엑소더스(exodus: 탈출)라고 하는데, 이는 '밖으로'(eks)라는 전치사와 길(hodos)이라는 명사가 결합된 것이다. 즉 애굽의 고기 가마에 연연하면서 거기서 그럭저럭 종살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그들에겐 일상적 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끄시는 길을 따라 간 것이 바로 출애굽이다. 그 길에는 광야의 목마름과 굶주림도 있었지만, 그래도 바로 그 길이 구원의 길이었다. 애굽의 길, 바로(Pharaoh)의 길에서 벗어나 광야의 길로 간 것이 출애굽이요, 로마의 길을 벗어나 예수의 길로 간 것이 바로 교회이다. 예수께서 "내가 길이다"고 선포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들 로마의 길로만 매진하고 있을 때, 그의 제자들에게 거기에서 출애굽하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는 목표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분주하게 이 세상의 길들을 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목표로 세운 부, 지위, 성공 따위를 성취하는 것을 그들의 길로 삼고 있다. 이런 행진에서 크리스천이라고 예외가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길을 간다. 그에게서 예수는 어쩌면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한 통로나 수단인지도 모른다.

우리 동네의 한 사설학원에서 낸 잡지에서, 우리 동네에 있는 크고 유명한 교회의 담임목사가 기고한 글을 읽게 되었다. 아마도 학원에 다니는 청소년들에게 예수를 믿으면 큰 인물이 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우리 교계에는 김장환 목사님이 계십니다.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들어가서 심부름하던 소년을 어떤 군인, 그것도 장교가 아닌 사병이 미국으로 데려가서 본인은 장가도 안가고 그를 뒷받침해서 세계 6천만 침례교 총회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김장환 목사님은 영국 수상을 만나든지 미국 대통령을 만나든지 캐나다 수상을 만나든지 만나고 싶으면 다 만날 수 있습니다. 한 분이 6천만 명을 움직입니다. 그것도 5년 동안 거대한 조직을 움직이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한국에 있었으면 어떻게 그런 지도자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나라 훌륭한 지도자들은 대부분 미국사람들이 길러주었습니다. 유명한 백낙준 박사님, 이승만 대통령이 그러했으며, 한경직 목사님, 김옥길 박사님, 김활란 박사님도 미국에 가서 교육을 받고 훌륭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나도 참 이런 설교를 많이 들었다. 어쩌면 교회에서 자주 듣는 대표적인 설교일지도 모른다. 말로는 교회 다닌다 예수 믿는다 하면서, 실제로 그들이 갖고 있는 꿈은 미국에 대한 환상이다. 아이들은 미국서 만든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꿈을 키우고 미국의 팝음악 듣고 허리우드에서 만든 영화를 보면서 울고 웃는다. 다들 미국에 가지 못해 안달이다. 말로는 예수 믿는다 하면서 그들에게 길은 미국의 길이다. 그것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와 같은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길이다. 결국은 모두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다. 그것이 미국이 주도하고 미국이 제시하는 길이다. 그 길로 오지 않는 자는 불량국가로 낙인찍어서 고립시켜 굶게 만들고, 거기에 반항하면 전쟁도 불사한다.

난 아까 그 목사님이 열거한 사람들이 모두 훌륭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고 열심히 사는 가운데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면 옳다. 그러나, 그들을 빗대어서, 그러니까 누구처럼 대통령이 되려면, 총장이 되려면, 총회장이 되려면 미국에 가야 한다든가, 미국 사람들이 믿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이다. 그것은 목표가 그런 지위에 오르는 것이고 그것을 위한 수단 내지 방편으로 예수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가 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구하는 부나 지위를 얻지 못했을 때 좌절감을 느낀다.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가 그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하는 목표를 성취했을 때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그건 시원하게 펼쳐진 길이 아니라,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수천수만의 돌계단 가운데 한 단을 올라선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행진에서 출애굽하기 전까지 그에게 진정한 평화는 없다. 예수의 길로 발걸음을 돌리기 전까지 그에게 진정한 행복은 없다.

세상의 길을 가기 위해 예수를 수단이나 방편으로 삼는 자는 진정한 신자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다"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초대를 하신다. 크리스천은 예수에게 은혜받고 그저 이 길 가는 것이 복인 줄 알고 꿋꿋하게 한 길을 가는 사람이다.

행복은 이 길의 끝에도 있겠지만, 이미 이 길로 들어선 것 자체가 행복이요 구원이다. <쉰들러 리스트>나 <제이콥의 거짓말> 같은 영화에서 보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어느 날 갑자기 기차에 집단으로 태워진다. 그 기차가 또 다른 일터로 가는지 아니면 화형장으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기에 그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그러다가 어떤 표지판을 보고서, 그들이 화형장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님을 알았을 때, 그들은, 그 어둡고 추운 기차 속에 짐짝처럼 구겨져 있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다. 이미 생명의 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은 이미 예수의 길로 접어든 것 자체가 행복이다. 지금 여기서 기도하는 것이 행복이요, 예배하는 것이 행복이다. 그리스도를 따라 작은 것 하나 하나 실천하며 사는 것이 곧 구원받은 삶이다.

이 길은, 약한 자를 낙오시키고 강한 자끼리 뭉쳐서 잘 사는 길이 아니라, 약한 자를 일으켜 세워 역사의 주인으로 삼는 길이다. 생명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환경을 무자비하게 훼손하는 길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보존하고 환경을 살기 좋게 가꾸는 길이다. 약소국을 자기 비위에 거슬린다 하여 무자비하게 폭격하고 강제로 굴복시키는 길이 아니라, 그들이 굶주릴 때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여 화해하고 통일을 이루는 길이다.

예수께서 이 좋은 길을 여시기 위해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내가 곧 길이다"고 선포하시며 우리를 초대하신다. 이 길을 가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다. 어디가 길인지 몰라 방황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우리에게 "내가 곧 길이다"하고 말해주는 분이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크리스천은 구도자(求道者)가 아니다. 길을 구할 필요가 없다. 길을 이제 열려고 새로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다. 이미 예수께서 내신 길을 우리는 가기만 하면 된다.

사랑하는 새길교회 형제자매 여러분, 16년 전에 새길교회를 시작한 뜻은 교회가 많은 이 곳에 교회 하나를 더 세우자는 의미가 아니었다. 교회는 많아도 다들 세상 사람들의 길로 가고 예수의 길로 가는 사람은 적었기에, 적은 무리이지만 예수의 길로 가자고 모인 것이다. 새길교회가 외친 '새 길'은 바로 예수의 길이다. 우리에게 새 길을 열어주시고 우리를 위해 몸소 새 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평생토록 생명의 행진을 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축원한다.

끝으로, 요한복음 14장 9절,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이 구절에 대해, 이현주 목사님이 묵상하고 쓴 시가 있는데, 이 시로 설교를 마치고자 한다.

구름을 본 자
하늘 먼저 보았거늘.

씨알 하나에
푸른 숲 장차 우거졌거늘.

아들을 보면서
어찌 그 아비를 못보았다, 하는가?

그림자여.
그림자여.

오늘 밤 개울에 몸을 적신 자
밝은 날 벌써 강(江)을 건넜도다.

길 되신 주님, 구름을 본 사람은 하늘을 먼저 본 사람입니다.
아들을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본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주님의 길을 따라 걷는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귀한 말씀으로 이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한 걸음 한 걸음,
예수를 따라가는 하루 하루의 삶에서
진정한 행복과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하옵소서.
세상 사람들은 이런 저런 행복을 말해도,
우리는 오직 "내가 곧 길이다"고 선포하시는 주님 따라 사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알게 하옵소서.
세상 사람들이 다들 넓은 길, 로마의 길, 팍스 아메리카나의 길로 갈 때,
우리는 좁은 길, 예수의 길로 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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