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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방에서

로마서 이경숙............... 조회 수 2464 추천 수 0 2004.01.06 23: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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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11:1-5 
설교자 : 이경숙 교수 
참고 :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오랜만에 새길교회에서 다시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동안 저는 교수생활 22년 만에 지난해 처음으로 연구년을 얻어 미국과 독일에서 가르칠 기회도 가져보고 연구도 하며 모처럼 귀한 경험을 하고 돌아 왔습니다. 미국 대학에서 생활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느끼고 배운 바가 많았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다인종 사회이기 때문에 예배가 아주 다양한 양식으로 드려지고 있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나이가 40세 이상이라는, 말하자면 늙은 학생들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아마도 신학은 나이가 들어서 하는 학문이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11 사태이후에 20대가 신학을 하는 비율이 높아졌다는 대학 당국자의 말이 있었지만  연구 후속세대를 키우기 위해서는 젊고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와 주기를 기다리는 분위기였습니다. 독일에서도 미국에서도 신학대학 강의실에는 한국학생이 교실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교수들은 한국 신학생들이 많은 것에 부러워하면서 또 의아해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연구년 동안 저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었던 분야는 기독교와 유대교와의 관계였습니다. 9·11 사태이후 이슬람과 기독교, 이슬람과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와 유대교간의 대화가 활발하게 진행이 되고 있었고 또 세 종교가 함께 모이는 큰 심포지움 같은 행사도 많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세 종교 모두에 연결되어 있는 구약성서가 전공이기 때문에 이런 행사에 부지런히 참석했습니다. 한번은 국제여성대회에 갔다가 팔레스타인에서 온 여성과 한 방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통성명도 하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제가 구약성서를 전공하고 있다니까 그 여자가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한창을 쳐다보더니 자기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면서 아주 언짢은  표정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노골적으로 아시아 여자가 신학을 하는 것도 이상한데 그래도 신약을 전공한다면 혹시 모르지만 어떻게 구약성서를 전공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그 여자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참 기분이 착잡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기독교의 경전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별로 듣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아주 잔인하고 전쟁을 즐겨 하는 유대민족의 경전을 왜 한국여자가 전공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성서에 관해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독특한 성격과 문화가 구약성서를 오해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기독교는 유대교 없이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이슬람에서도 아브라함과 예수를 숭배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성서와의 직접, 간접의 관련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대인들의 역사, 문화, 종교 등을 소개하고 전시해 놓은 박물관을 다녀오곤 했습니다. 뉴욕에 있는 유대인 박물관에서 인상 깊게 느낀 바도 많았고, 특히 독일 베를린에서는 독일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유대인들의 삶을 고대, 중세,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정리해 놓은 박물관에 갔다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늘 제목으로 드린 “침묵의 방”도 베를린 박물관에 있는 방에 제가 나름대로 이름을 붙여 본 것입니다. 개관한지 얼마 되지 않은 이 박물관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 멸망한 뒤 세계로 흩어진 과정을 소개하고 지역별로 가령 남미로 간 유대인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교육은 어떻게 하였으며, 여성들의 삶은 어떠하였고, 종교의식은 어떻게 거행되고 있었으며 또 거기에서 살았던 훌륭한 인물은 누가 있었는지, 그 인물의 삶과 공헌은 무엇인지, 이 모든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잘 전시해 놓고 있었습니다.

  침묵의 방의 정확한 독일어 명칭은 생각이 나지 않는데 “비움의 방” 이라고도 말 할 수 있는, 정말 아무 것도 없는 방이었습니다. 과히 크지도 않은 좁고 긴 높은 구석방이었는데 아무 것도 없어서 아마 마음을 비우고 혼자 생각하라는 것이구나 하면서 눈을 아래로 내려보는 순간 우리 발아래 수많은 기와 같기도 하고 유골 같기도 한 회색빛 조각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차대전에 학살된 유대인들의 얼굴들입니다. 특히 예쁘고 웃고 있는 어린아이들, 젊은이들, 노인들의 각양각색의 표정의 얼굴들이 우리를 향해 울고 웃는 표정을 짓고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6백만 명의 얼굴이 우리를 향해 묻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들이 학살한 것이 바로 우리였다고, 그런데 왜 우리를 학살하였느냐고 말이지요. 저는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들이 유대인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억울한 영혼 같기도 하고 또 우리의 조상들 같기도 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서있기도 힘이 들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그 방을 설치한 예술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로 하여금 그런 잔인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역사의 현장을 딛고 서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우리의 악에 대한 무언의 협조나 망각을 일순간에 회상시키는 그런 방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서있는 자리를 알려주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면서 내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었을까, 왜 기독교는 그렇게 계속해서 유대인들을 학대하고 증오했을까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독일 사람들이 잔인하게 유대인들을 6백만 명이나 죽이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상업에 능해서 돈을 뺏으려고 그랬다, 아니다. 유대인들이 평균 독일인보다 부자는 결코 아니었다, 단지 백인 우월주의의 표현이었다. 아리안 족속이라는 가상적 우수민족을 설정해 놓고 우생학적 이론을 조작해서 백성들을 호도했다. 아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라는 종교적인 이유로 그랬다. 즉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유대인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등등. 유럽에서 수난절에는 유대인들은 길에도 다니지 못하고, 길에 나갔다가는 기독교인들에게 길에서 맞아 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여러 설명이 있지만 제 생각에는 기독교인들이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견디지 못하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리에서 온 것이라고 밖에 설명이 잘 안됩니다.

  여기서 기독교와 유대교의 대립이나 관계에 대해서 길 게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예수는 유대인이었고 이 세상에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는 의도를 가진 적은 없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또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사랑이나 구원은 구약성서의 내용과 일치하고 또 모든 율법의 내용이 이웃사랑으로 요약된다고 보는 것도 유대 힐렐 학파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예수의 정신과 예언정신 그리고 율법정신은 서로 대치되거나 상반되지 않습니다.  다만 율법을 문자 그대로 보았느냐 아니면 그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의지와 뜻을 보았느냐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유대교 안에도 예수의 사상과 아주 비슷한 사고를 가진 학파들이 있었고 유대교도 매우 다양한 양태가 있었는데 유대인들을 모두 똑같은 율법주의자들로 몰아서 죽인 기독교의 박해는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기독교 신학자들 사이에서 나오는 회개와 죄에 대한 반성도 이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이 기독교인들을 자극하였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스스로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우월감에 빠져 있지 않은가요? 선택사상에 대한 해석도 새롭게 시도되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기독교신앙인으로서 가장 민망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오만과 교만입니다. 나만 옳고 바르고, 다른 종교, 다른 의견, 다른 문화는 열등하다며 정죄하고 학살하고 처치해 버리려는 특권이 기독교에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우월성과 기독교의 특성이 함께 가는 것으로 되어있으니까요. 제가 침묵의 방에서 충격을 받은 것도 사실 유대인들을 학살한 독일민족의 과오를 우리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언제나 누군가를 속죄양으로 삼아 나는, 우리는 깨끗하고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심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다치고 슬프게 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는가? 아마도 침묵의 방을 만든 작가는 우리에게 그런 점을 생각해 보도록 한 것이 아닐까요?

  다수의 물결에 휩쓸려 정직한 신앙인이 되기를 포가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언제나 반성과 회개와 대안의 길을 모색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 독일 및 유럽에서는 반유대주의에 대한 반성이 이어지면서 동시에 이차 세계대전 중에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발굴해서 발간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여태까지는 독일의 죄책고백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허용이 안 되는 분위기였는데 이제는 사실을 밝히자는 의도에서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일이지요. 이런 일을 시작하는데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들도 다 보셨을 것이라고 믿는『피아니스트』라는 책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처음 영화를 못보고 책을 읽게 되었는데 나중에 영화를 보니까 책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거기 나오는 폴랜드 방송국에서 일하던 피아니스트 스필만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살의 위기에 처했다가 결국 독일 장교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이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를 살려준 독일 장교는 카돌릭 신자로서 초등학교 선생이다가 전쟁에 끌려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쟁에 대해 갈등하고 고민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유대인들을 살려주었는데 자신은 결국 소련군에 의해 독일 장교였다는 이유로 처형당해 죽고 맙니다. 그가 죽은 후에 그에 가족에게 그의 일기가 전해졌고 그 일기 속에 폴랜드 방송국에 근무하는 스필만의 이름이 들어있어 그에게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스필만에게도 연락해서 결국은 스필만이 그 가족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가 이 책의 부록 비슷하게 첨가되어 있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이 독일 장교는 아주 독실한 카돌릭 신자로서 기독교의 이름으로 유대인을 학살하는 것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에 깊이 고민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필만과 헤어질 때 스필만이 고맙다고 하자 자신에게 고맙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고마워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스필만이 자신이 이제 살아 남을 지 모르겠다고 하자 “당신이 이런 어려운 시대를 5년이나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켜주신 것이 틀림없으니 앞으로도 꼭 지켜 주실 것”이라고 격려합니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신앙을 가졌던 이 장교가 단지 독일인이었다는 이유로 소련군에게 잡혀서 처형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칼합니다. 더욱이 재미있는 사실은 스필만이 이 장교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썼을 때 이 독일 장교를 독일 장교라고 못쓰고 오스트리아 장교라고 고쳐서 썼다는 사실입니다. 독일 사람들 중에 훌륭한 참 신앙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썼다가는 배반자라는 누명을 쓰는 분위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지요. 우리 인간들의 사고가 얼마나 획일적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독일 장교이면서도 독일 정책과 유대인 박해에 저항했던 이 독일 장교, 다수의 집단 히스테리에 맞서서 인간성을 잃지 않고 나름대로 저항하는, 그래서 피아니스트 스필만을 살리는 독일 장교의 존재가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가 대다수의 무리 중에 일부가 되어 정신을 못 차리고 휩쓸릴 것인지, 아니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믿고 실천하려고 하는 신앙인이 될 것인지를 조용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소돔이 멸망하였듯이 우리에게도 의인 몇 명이 필요한 시대인지도 모릅니다. 아까 읽어 주신 성서 구절에서도 하나님이 은혜로서 택하신 “남은 자”를 두셨다고 했습니다. 어지럽고 혼란한 시대에 부디 “남은 자”가 되어 이 획일적이고 폭력의 시대를 맑게 하는 의로운 “남은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대림절 주간에 “침묵의 방”에서 나를 비우고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남은 자”가 될 은총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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