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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롬12: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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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길희성 형제 |
| 참고 : |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
오늘은 우리 교회가 지난 1년의 살림을 결산하고 새해의 살림을 계획하는 공동의회를 갖는 날이고, 또 우리 교회의 분신이며 선교의 창구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의 총회도 있는 날입니다. 저는 앞으로 1년을 우리 교회와 문화원이 어떤 자세로 살고 활동해야 할지를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새해라고 해야 뭐 새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새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새롭다거나 희망을 안겨다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몇 년 전 21세기와 새 천년을 맞는다고 온 세상이 떠들썩했던 일만 상기해보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들뜬 분위기로는 2000년대가 되면 인류의 무슨 새로운 역사가 전개될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지금 인류가 처한 상황은 훨씬 더 열악한 것 같습니다. 그때는 적어도 전쟁과 테러가 오늘처럼 일상어는 아니었고, 북한의 핵 위기나 사스와 같은 괴질의 공포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따지고 보면, 시간이란 반복되는 것이 아니기에 모든 시간이 순간순간 새로운 것이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모든 시간이 탐욕과 다툼의 인간 역사의 연장일 뿐이기에 어제나 오늘이 다를 것도 없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엮어내는 역사가 변하겠으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달라지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새해가 되었다는 것은 또 한 해가 속절없이 지나가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죽음의 문턱으로 그만큼 더 가까이 갔다는 것을 뜻하니, 하나도 즐거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무의미한 시간의 경과와 실망스러운 역사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새해라는 이름으로 새 출발을 다짐해보는 것은 우리 삶에서 무언가 참으로 새로운 것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단순한 과거의 연장이나 반복이 아니라 역사와 시간을 뛰어넘은 어떤 질적 변화를 갈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구원>이라 부릅니다. 성서적 신앙에서는 그것을 역사 속에서 살면서도 역사의 악순환에 종지부를 찍는 <종말적 구원>이라 부릅니다. 역사는 늘 우리를 실망시키고 시간은 우리를 매 순간 죽음으로 몰고 가지만, 그 가운데서도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만나고 체험하기를 원하며, 시간의 횡포와 역사의 시련에도 무너지지 않는 삶의 토대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구원, 이러한 삶의 토대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았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7)라고 그는 선포합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겉 사람은 시간과 더불어 매 순간 낡아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 새로운 존재. 그것이 바울이 발견한 진정한 인생의 의미이고 희망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바울의 이와 같은 비전과 그리스도 체험을 공유하는 존재들입니다.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오늘의 성경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인류 구원의 역사와 섭리를 설명한 후(1-9장),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된 사람들이 이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말씀(12장부터)의 일부분입니다. 1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세상의 삶의 방식을 좇지 말고 그리스도를 아는 자답게 새로운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산 제물로 바치는 일이며 우리가 드릴 합당한 예배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몸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 존재 자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삶 전제, 우리의 존재 자체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거룩한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그러려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분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봉독한 12장 9절부터는 어떤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인지, 어떤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인지를 우리에게 자세히 일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서 힘과 영광을 추구하던 로마 사회의 가치들을 뒤엎고, 쾌락과 오락을 삶의 즐거움으로 추구하던 로마 사회에 대안적 삶의 모습을 제시했습니다. 초대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대안적 가치와 삶으로 힘과 영광을 추구하던 로마를 안으로부터 무너트리고 변혁하는 기적을 창출한 것입니다. 역사의 변방 팔레스타인 한 구석에서 일어났던 예수 운동이 바울이라는 한 종교적 천재이자 위대한 신학자를 통해 재해석되면서 세계 역사의 중심무대였던 로마를 바꾸어 놓는 위업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초대 예수 운동이 변질되기도 하고 타협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도 면면히 살아서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변화를 이끄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하나님이 원하는 삶,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권면의 말씀은 그야말로 구구절절이 귀한 말씀이라 어느 것을 오늘의 성경말씀으로 잡아야 할지 고민할 정도입니다. 그 가운데서 오늘은 10절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그리스어 원문을 영역을 참조해 다시 번역하면 "형제애(philadelphia)로 서로 지극히 사랑하고 (혹은 서로 헌신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앞 다투어 하라." 그리고 "열성으로 게으르지 말고, 성령으로 뜨거워져 주님을 섬기라." 금년 한 해 우리 교회의 신앙생활을 인도하기에 충분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형제를 섬기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는 삶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힘과 영광을 숭배하고 수많은 사람을 종으로, 노예로 부리면서 번영을 구가하던 로마 사회에 스스로 종과 같이 비천한 자가 되어 형제를 섬기고 주님을 섬기는 완전히 거꾸로 된 대안적 삶을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형제애로 서로 지극히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거짓 없는 사랑으로, 악을 미워하고 선을 굳게 잡으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라, 그리고 또 물질이 궁핍한 자에게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을 잘난 사람들끼리만 하지말고, 교만이나 우월감을 가지고 하지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형제들을 섬기며, 특히 낮고 비천한 형제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형제들에 대한 존경심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16절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간단히 말해, 잘난 체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말씀, 자기 잘난 맛에, 남이 알아주는 맛에 사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적 삶의 모습입니다. 잘난 것 하나만으로도 부족하여 남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인정받고 싶어하고 존경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뿌리깊은 마음에 반하는 말씀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래서는 안 되고, 적어도 교회에서만은, 믿음의 형제들 사이에서만은, 그러지 말라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원수 갚는 일은 스스로 하지말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마디로 말해, 바울 사도의 말씀은 낮은 데로 임하셔서 비천한 사람들과 사귀면서 원수마저 사랑하기를 가르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랑을 본받아 형제자매들을 섬기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는 주님의 말씀 그대로를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주님을 섬기는 삶, 열성으로 게으르지 말고,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주님을 섬기지 교회를 섬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과 교회를 섬기는 것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이 어긋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지만, 신앙적 삶은 엉망인 경우가 있다는 말이며, 사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병폐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이 가리키는 <주님>이라는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섬길 대상은 하늘 보좌에 않아 계시는 영광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비우고 낮은 곳으로 임하신 주님, 힘과 권력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과 십자가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섬긴다'(douleuo)라는 말은 종(doulos)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로서, 문자 그대로 종의 역할, 종노릇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를 비워 종으로 오신 주님을 우리가 또한 종으로 섬긴다는 말입니다.
저는 요즘 '하나님을 섬긴다.', 혹은 '하나님의 종', '주의 종'이라는 말에 강한 거부감을 가집니다. 자칫하면 매우 위험한 말이며 위험한 발상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인간이 무슨 종입니까? 인간은 어디 가고 하나님만 주인 노릇하며 홀로 영광 받으신다는 말입니까? '하나님 홀로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은 자칫하면 인간소외를 조장하기 쉽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홀로 영광 받으시기를 즐기는 독재군주 같은 분입니까? 온 우주의 주님이신 하나님이 도대체 무엇이 아쉬워서 꼭두각시 같은 인간들에게 자기를 숭배하고 종처럼 섬기라고 명하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웃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자기 자신에 있지 않고 오히려 우리들 인간에게 향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내 걱정은 말고 너나 잘 하라, 너희 인간들 제발 싸우지나 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불행하게도, 기독교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주로 힘과 영광, 권위와 독재군주를 연상시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부시 대통령이나 알 카에다도 모두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침공하고 전쟁을 일삼는 그가 평화의 주님, 그리스도를 섬긴다고는 감히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힘있는 강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그 자신도 힘을 숭상하게 됩니다. 이것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섬긴다는 기독교의 나쁜 운명, 악업 혹은 원죄와도 같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어 왔던 기독교가 지배하는 서구 사회가 끊임없이 확장하고 팽창하고 정복하고 지배하고 착취하는 제국주의를 낳은 것은 실로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또, 주의 종이라 불리는 우리나라 목사님들, 성직자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목에 힘주는 모습은 쉽게 보여도 종처럼 섬기는 겸비한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주의 종'이라는 말에는 다른 인간의 주인이 되려는 숨은 욕망이 감추어져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불교는 내가 아는 한 이러한 힘의 숭배를 정당화하거나 강해지려는 힘의 유혹을 확실히 덜 받습니다. 불교의 한결같은 메시지는 "비워라, 버려라, 떠나라, 포기하라, 내버려 두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교신자들도 마음을 비우는 대신, 자신들의 욕구를 부처님께 빌기도 합니다. 그래봤자 기독교하고는 게임이 안 됩니다. 불쌍한 중생의 고통에 한없는 연민을 느끼시는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나 보살들에게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가지고 정성스럽게 비는 여인들의 소원을, 어찌 원수를 무찌르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지전능하신 만군의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종으로서 주님을 섬기는 것은 바로 그 분이 강한 하나님이 아니라 약하고 무력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비하하여 종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분이고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긴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곧 종으로 오신 주님과 같이 종이 되는 일이며,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보여주신 바와 같이 인간을 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인간사랑, 인간을 섬기는 일과 주님을 섬기는 일은 둘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독재 군주와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아빠 하나님이기 때문이며, 힘없는 인간들에게 자기를 섬기라고 강요하는 제왕적 하나님이 아니라 불쌍한 동료 인간들을 외면하지 말고 돌보기를 바라는 자비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뭐가 아쉽고 부족해서 우리 힘없는 인간들을 볼모로 삼아 종과 같이 자기를 섬기라고 요구하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관심은 자기 자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에게 있으며, 그의 자식과도 같은 신음하고 탄식하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정말 독재군주 같은 하나님이라면, 나는 설령 지옥에서 영벌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그런 하나님은 거부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섬긴다는 말은 종노릇한다는 말인데, 우리가 종노릇하고 싶은 하나님은 우리 위에 군림하고 횡포를 부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비우고 종으로 오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 하늘 위에서 군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인간 역사의 비극을 함께 경험하시고 고통 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앞에서 무릎 꿇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상으로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2:10-11).
새해만 되면 우리는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면서 희망에 차 오릅니다. 모두에게 과거의 잘못을 잊고 용서하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 같아 홀가분합니다. 일년이란 시간을 한 단위로 하여 한 기간을 매듭짓고 다시 해로운 한 해를 살자는 우리들의 관행은 좋은 것입니다. 개인은 개인대로 새해의 다짐을 합니다. 한 달이 못 가서 깨어지기 마련이지만, 사회는 사회대로 새로운 계획을 세워 나갑니다. 작심삼일이라 새해의 약속과 기대는 번번이 허사로 돌아가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새해에는 무언가 달라지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 속에서 맞습니다. 희망은 인간의 삶의 본능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근본적 자세의 변화가 없는 데, 새해의 각오나 소망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와 가치의 일대전환이 없는 한 우리의 인생은 결코 새로워지지 않을 것이며, 우리 사회도 결코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가치관의 일대전환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데 가장 큰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희망은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변화는 뼈아픈 자기 부정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개인이든 사회이든, 역사이든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사회가 변화되고 바로 되려면 <섬기는 자세>가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정치인과 공무원이 국민을 섬기며, 기업가와 상인들이 소비자를 섬기며,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섬기며, 목사와 장로들, 성직자들이 신자들을 섬길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제대로 된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이니 문제입니다. 후진국일수록 그 반대입니다. 선진국이 달리 선진국이 아닙니다. 섬기기를 잘하는, 요즘 말로 하면 서비스를 잘하는 나라가 아닙니까?
제가 오늘 덧붙여서 이야기를 할까 말까 망설인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오해 없이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는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새길교회 형제자매들의 이야기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하여 국민들의 호불호가 뚜렷이 갈리고, 우리 교회 내에서도 처음부터 다양한 평가가 있고 정치적 견해도 다양합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가 역대 어느 대통령 보다 겸손한 대통령이라는 사실입니다. 남을 설득하려고 열변을 토하고 그러다가 가끔 말실수를 저지르기는 해도, 그는 결코 목에 힘을 주는 대통령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사람을 만날 때 먼저 고개 숙여 먼저 인사하는 대통령을 본 적이 있습니까? 다른 것은 다 몰라도, 노무현 대통령을 두고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일찌감치 안기부도 포기하고 검찰도 포기하고 언론도 포기한 대통령, 그러기에 처음부터 제왕적 대통령이기를 포기했고 이제는 되고 싶어도 될 수도 없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그의 최대 약점이 되었습니다. 국민들은 이것을 높이 평가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대통령답지 못하다고 우습게 여깁니다.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오늘의 국정 난맥상에 상당한 부분이 물론 그에게 책임이 돌아가지만, 다른 한 편으로 우리 사회의 참다운 리더십, 참다운 권위가 무엇인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우리 새길 형제들의 아름다운 이야기, 자화자찬입니다. 저는 새길교회를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무엇이 가장 좋으냐하고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순수하고 겸손한 형제자매들의 모습 그 자체라고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나, 우리 교회에는 목에 힘을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권위를 부리거나 권력을 행사하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다 못 해,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거나 독선적인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가끔 우리 교회가 무질서하게 보이기도 하고 중심이 없는 것처럼, 좋은 의미에서 권위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오해이기를 바랍니다.
여하튼, 세상적으로 보면, 내세울 것이 있는 분들이 없지 않지만, 적어도 교회에서만은 힘을 다 빼고 자매형제로서 낮은 데 처하려 하고 궂은일에 앞장서는 그 모습들이 너무도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저는 감히 이것을 '새길 정신'이라고 말하고 싶으며,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이러한 정신이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연장되고, 새길교회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교회가, 그리고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서 확장될 때, 바로 우리가 바라는 정의로운 세상,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새해에 헛된 소망을 아무리 빌어봤자 새로운 삶, 새로운 세상은 결코 거저 오지 않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매일 매일 자기를 비우고 겸손해지는 자기부정이 없이는 결코 우리 삶이, 우리 사회가 새로워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새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바라고 기도해야 하는 제목은 이런 저런 우리의 구저분한 소원을 들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그런 것은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올 한 해는 다만 더욱더 나를 비워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기를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형제애로 서로 극진히 사랑하고, 열성으로 게으르지 말고, 성령으로 뜨거워져 주님을 섬기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하는 일일 것입니다.
새해라고 해야 뭐 새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새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새롭다거나 희망을 안겨다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몇 년 전 21세기와 새 천년을 맞는다고 온 세상이 떠들썩했던 일만 상기해보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들뜬 분위기로는 2000년대가 되면 인류의 무슨 새로운 역사가 전개될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지금 인류가 처한 상황은 훨씬 더 열악한 것 같습니다. 그때는 적어도 전쟁과 테러가 오늘처럼 일상어는 아니었고, 북한의 핵 위기나 사스와 같은 괴질의 공포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따지고 보면, 시간이란 반복되는 것이 아니기에 모든 시간이 순간순간 새로운 것이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모든 시간이 탐욕과 다툼의 인간 역사의 연장일 뿐이기에 어제나 오늘이 다를 것도 없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엮어내는 역사가 변하겠으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달라지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새해가 되었다는 것은 또 한 해가 속절없이 지나가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죽음의 문턱으로 그만큼 더 가까이 갔다는 것을 뜻하니, 하나도 즐거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무의미한 시간의 경과와 실망스러운 역사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새해라는 이름으로 새 출발을 다짐해보는 것은 우리 삶에서 무언가 참으로 새로운 것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단순한 과거의 연장이나 반복이 아니라 역사와 시간을 뛰어넘은 어떤 질적 변화를 갈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구원>이라 부릅니다. 성서적 신앙에서는 그것을 역사 속에서 살면서도 역사의 악순환에 종지부를 찍는 <종말적 구원>이라 부릅니다. 역사는 늘 우리를 실망시키고 시간은 우리를 매 순간 죽음으로 몰고 가지만, 그 가운데서도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만나고 체험하기를 원하며, 시간의 횡포와 역사의 시련에도 무너지지 않는 삶의 토대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구원, 이러한 삶의 토대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았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7)라고 그는 선포합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겉 사람은 시간과 더불어 매 순간 낡아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 새로운 존재. 그것이 바울이 발견한 진정한 인생의 의미이고 희망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바울의 이와 같은 비전과 그리스도 체험을 공유하는 존재들입니다.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오늘의 성경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인류 구원의 역사와 섭리를 설명한 후(1-9장),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된 사람들이 이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말씀(12장부터)의 일부분입니다. 1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세상의 삶의 방식을 좇지 말고 그리스도를 아는 자답게 새로운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산 제물로 바치는 일이며 우리가 드릴 합당한 예배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몸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 존재 자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삶 전제, 우리의 존재 자체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거룩한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그러려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분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봉독한 12장 9절부터는 어떤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인지, 어떤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인지를 우리에게 자세히 일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서 힘과 영광을 추구하던 로마 사회의 가치들을 뒤엎고, 쾌락과 오락을 삶의 즐거움으로 추구하던 로마 사회에 대안적 삶의 모습을 제시했습니다. 초대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대안적 가치와 삶으로 힘과 영광을 추구하던 로마를 안으로부터 무너트리고 변혁하는 기적을 창출한 것입니다. 역사의 변방 팔레스타인 한 구석에서 일어났던 예수 운동이 바울이라는 한 종교적 천재이자 위대한 신학자를 통해 재해석되면서 세계 역사의 중심무대였던 로마를 바꾸어 놓는 위업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초대 예수 운동이 변질되기도 하고 타협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도 면면히 살아서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변화를 이끄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하나님이 원하는 삶,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권면의 말씀은 그야말로 구구절절이 귀한 말씀이라 어느 것을 오늘의 성경말씀으로 잡아야 할지 고민할 정도입니다. 그 가운데서 오늘은 10절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그리스어 원문을 영역을 참조해 다시 번역하면 "형제애(philadelphia)로 서로 지극히 사랑하고 (혹은 서로 헌신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앞 다투어 하라." 그리고 "열성으로 게으르지 말고, 성령으로 뜨거워져 주님을 섬기라." 금년 한 해 우리 교회의 신앙생활을 인도하기에 충분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형제를 섬기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는 삶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힘과 영광을 숭배하고 수많은 사람을 종으로, 노예로 부리면서 번영을 구가하던 로마 사회에 스스로 종과 같이 비천한 자가 되어 형제를 섬기고 주님을 섬기는 완전히 거꾸로 된 대안적 삶을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형제애로 서로 지극히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거짓 없는 사랑으로, 악을 미워하고 선을 굳게 잡으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라, 그리고 또 물질이 궁핍한 자에게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을 잘난 사람들끼리만 하지말고, 교만이나 우월감을 가지고 하지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형제들을 섬기며, 특히 낮고 비천한 형제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형제들에 대한 존경심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16절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간단히 말해, 잘난 체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말씀, 자기 잘난 맛에, 남이 알아주는 맛에 사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적 삶의 모습입니다. 잘난 것 하나만으로도 부족하여 남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인정받고 싶어하고 존경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뿌리깊은 마음에 반하는 말씀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래서는 안 되고, 적어도 교회에서만은, 믿음의 형제들 사이에서만은, 그러지 말라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원수 갚는 일은 스스로 하지말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마디로 말해, 바울 사도의 말씀은 낮은 데로 임하셔서 비천한 사람들과 사귀면서 원수마저 사랑하기를 가르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랑을 본받아 형제자매들을 섬기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는 주님의 말씀 그대로를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주님을 섬기는 삶, 열성으로 게으르지 말고,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주님을 섬기지 교회를 섬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과 교회를 섬기는 것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이 어긋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지만, 신앙적 삶은 엉망인 경우가 있다는 말이며, 사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병폐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이 가리키는 <주님>이라는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섬길 대상은 하늘 보좌에 않아 계시는 영광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비우고 낮은 곳으로 임하신 주님, 힘과 권력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과 십자가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섬긴다'(douleuo)라는 말은 종(doulos)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로서, 문자 그대로 종의 역할, 종노릇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를 비워 종으로 오신 주님을 우리가 또한 종으로 섬긴다는 말입니다.
저는 요즘 '하나님을 섬긴다.', 혹은 '하나님의 종', '주의 종'이라는 말에 강한 거부감을 가집니다. 자칫하면 매우 위험한 말이며 위험한 발상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인간이 무슨 종입니까? 인간은 어디 가고 하나님만 주인 노릇하며 홀로 영광 받으신다는 말입니까? '하나님 홀로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은 자칫하면 인간소외를 조장하기 쉽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홀로 영광 받으시기를 즐기는 독재군주 같은 분입니까? 온 우주의 주님이신 하나님이 도대체 무엇이 아쉬워서 꼭두각시 같은 인간들에게 자기를 숭배하고 종처럼 섬기라고 명하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웃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자기 자신에 있지 않고 오히려 우리들 인간에게 향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내 걱정은 말고 너나 잘 하라, 너희 인간들 제발 싸우지나 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불행하게도, 기독교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주로 힘과 영광, 권위와 독재군주를 연상시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부시 대통령이나 알 카에다도 모두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침공하고 전쟁을 일삼는 그가 평화의 주님, 그리스도를 섬긴다고는 감히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힘있는 강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그 자신도 힘을 숭상하게 됩니다. 이것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섬긴다는 기독교의 나쁜 운명, 악업 혹은 원죄와도 같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어 왔던 기독교가 지배하는 서구 사회가 끊임없이 확장하고 팽창하고 정복하고 지배하고 착취하는 제국주의를 낳은 것은 실로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또, 주의 종이라 불리는 우리나라 목사님들, 성직자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목에 힘주는 모습은 쉽게 보여도 종처럼 섬기는 겸비한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주의 종'이라는 말에는 다른 인간의 주인이 되려는 숨은 욕망이 감추어져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불교는 내가 아는 한 이러한 힘의 숭배를 정당화하거나 강해지려는 힘의 유혹을 확실히 덜 받습니다. 불교의 한결같은 메시지는 "비워라, 버려라, 떠나라, 포기하라, 내버려 두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교신자들도 마음을 비우는 대신, 자신들의 욕구를 부처님께 빌기도 합니다. 그래봤자 기독교하고는 게임이 안 됩니다. 불쌍한 중생의 고통에 한없는 연민을 느끼시는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나 보살들에게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가지고 정성스럽게 비는 여인들의 소원을, 어찌 원수를 무찌르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지전능하신 만군의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종으로서 주님을 섬기는 것은 바로 그 분이 강한 하나님이 아니라 약하고 무력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비하하여 종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분이고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긴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곧 종으로 오신 주님과 같이 종이 되는 일이며,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보여주신 바와 같이 인간을 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인간사랑, 인간을 섬기는 일과 주님을 섬기는 일은 둘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독재 군주와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아빠 하나님이기 때문이며, 힘없는 인간들에게 자기를 섬기라고 강요하는 제왕적 하나님이 아니라 불쌍한 동료 인간들을 외면하지 말고 돌보기를 바라는 자비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뭐가 아쉽고 부족해서 우리 힘없는 인간들을 볼모로 삼아 종과 같이 자기를 섬기라고 요구하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관심은 자기 자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에게 있으며, 그의 자식과도 같은 신음하고 탄식하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정말 독재군주 같은 하나님이라면, 나는 설령 지옥에서 영벌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그런 하나님은 거부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섬긴다는 말은 종노릇한다는 말인데, 우리가 종노릇하고 싶은 하나님은 우리 위에 군림하고 횡포를 부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비우고 종으로 오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 하늘 위에서 군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인간 역사의 비극을 함께 경험하시고 고통 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앞에서 무릎 꿇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상으로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2:10-11).
새해만 되면 우리는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면서 희망에 차 오릅니다. 모두에게 과거의 잘못을 잊고 용서하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 같아 홀가분합니다. 일년이란 시간을 한 단위로 하여 한 기간을 매듭짓고 다시 해로운 한 해를 살자는 우리들의 관행은 좋은 것입니다. 개인은 개인대로 새해의 다짐을 합니다. 한 달이 못 가서 깨어지기 마련이지만, 사회는 사회대로 새로운 계획을 세워 나갑니다. 작심삼일이라 새해의 약속과 기대는 번번이 허사로 돌아가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새해에는 무언가 달라지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 속에서 맞습니다. 희망은 인간의 삶의 본능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근본적 자세의 변화가 없는 데, 새해의 각오나 소망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와 가치의 일대전환이 없는 한 우리의 인생은 결코 새로워지지 않을 것이며, 우리 사회도 결코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가치관의 일대전환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데 가장 큰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희망은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변화는 뼈아픈 자기 부정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개인이든 사회이든, 역사이든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사회가 변화되고 바로 되려면 <섬기는 자세>가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정치인과 공무원이 국민을 섬기며, 기업가와 상인들이 소비자를 섬기며,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섬기며, 목사와 장로들, 성직자들이 신자들을 섬길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제대로 된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이니 문제입니다. 후진국일수록 그 반대입니다. 선진국이 달리 선진국이 아닙니다. 섬기기를 잘하는, 요즘 말로 하면 서비스를 잘하는 나라가 아닙니까?
제가 오늘 덧붙여서 이야기를 할까 말까 망설인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오해 없이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는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새길교회 형제자매들의 이야기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하여 국민들의 호불호가 뚜렷이 갈리고, 우리 교회 내에서도 처음부터 다양한 평가가 있고 정치적 견해도 다양합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가 역대 어느 대통령 보다 겸손한 대통령이라는 사실입니다. 남을 설득하려고 열변을 토하고 그러다가 가끔 말실수를 저지르기는 해도, 그는 결코 목에 힘을 주는 대통령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사람을 만날 때 먼저 고개 숙여 먼저 인사하는 대통령을 본 적이 있습니까? 다른 것은 다 몰라도, 노무현 대통령을 두고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일찌감치 안기부도 포기하고 검찰도 포기하고 언론도 포기한 대통령, 그러기에 처음부터 제왕적 대통령이기를 포기했고 이제는 되고 싶어도 될 수도 없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그의 최대 약점이 되었습니다. 국민들은 이것을 높이 평가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대통령답지 못하다고 우습게 여깁니다.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오늘의 국정 난맥상에 상당한 부분이 물론 그에게 책임이 돌아가지만, 다른 한 편으로 우리 사회의 참다운 리더십, 참다운 권위가 무엇인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우리 새길 형제들의 아름다운 이야기, 자화자찬입니다. 저는 새길교회를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무엇이 가장 좋으냐하고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순수하고 겸손한 형제자매들의 모습 그 자체라고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나, 우리 교회에는 목에 힘을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권위를 부리거나 권력을 행사하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다 못 해,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거나 독선적인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가끔 우리 교회가 무질서하게 보이기도 하고 중심이 없는 것처럼, 좋은 의미에서 권위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오해이기를 바랍니다.
여하튼, 세상적으로 보면, 내세울 것이 있는 분들이 없지 않지만, 적어도 교회에서만은 힘을 다 빼고 자매형제로서 낮은 데 처하려 하고 궂은일에 앞장서는 그 모습들이 너무도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저는 감히 이것을 '새길 정신'이라고 말하고 싶으며,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이러한 정신이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연장되고, 새길교회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교회가, 그리고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서 확장될 때, 바로 우리가 바라는 정의로운 세상,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새해에 헛된 소망을 아무리 빌어봤자 새로운 삶, 새로운 세상은 결코 거저 오지 않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매일 매일 자기를 비우고 겸손해지는 자기부정이 없이는 결코 우리 삶이, 우리 사회가 새로워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새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바라고 기도해야 하는 제목은 이런 저런 우리의 구저분한 소원을 들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그런 것은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올 한 해는 다만 더욱더 나를 비워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기를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형제애로 서로 극진히 사랑하고, 열성으로 게으르지 말고, 성령으로 뜨거워져 주님을 섬기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하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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