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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위해 산다는 것

로마서 박충구............... 조회 수 4943 추천 수 0 2004.03.11 14: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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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14:7-8 
설교자 : 박충구 목사 
참고 :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주를 위한 삶과 나를 위한 삶에 대하여 저는 지난 몇 달 동안 고민을 하며 지내왔습니다.  과연 주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신학대학교 교수직을 하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주를 위한 것인가? 목사로서 사는 것이 주를 위한 것인가 나를 위한 것인가?  나이 오십이면 천명을 안다고 했는데, 아직도 이러고 있으니 저는 아직 갈 길이 먼 사람인가 봅니다.

I. 불의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의로움을 사랑하는 길

어느 강남에 있는 교회의 교인이 올린 글을 읽었는데, 담임목사가 목회적 책임을 물어 부목사 네 명과 전도사 여덟 명의 사표를 받고 교인들을 만나지도 말라는 금족령을 내리고,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부목사를 때렸다는 것입니다. 이럴 수가 있느냐는 하소연이었습니다. 아마 이 담임목사님은 교회를 위하여, 주를 위해 그리했다고 주장하실 수도 있겠지요.  그 부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은 새해 벽두 졸지에 직장을 잃고 어디로 가서 목회를 해야 할지 한숨짓고 계실 겁니다.  주를 위해 살려는 사람 가로막지 않는 것도 주를 위하여 사는 것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무지막지한 어느 목사님의 경우만이 아닙니다.

저희 학교 교원 인사위원회가 두 분의 여성 신학자들을 자격미달, 실력미달이라고 재임용하지 않겠다고 결정을 했습니다.  유명한 학자들이 모여 결정하니까 그거 바꾸기 정말 어려운 것 같습니다. 목사요, 박사요, 교수인 사람들이 내린 결정은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참 뒤집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두 여성 신학자들이 16세기에 태어났으면, 아마도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어디 감히 남자들이 대대로 지켜온 신학자의 자리에 여성이 들어와 번거롭게 만들고 활개 치냐는 정서가 이런 일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분들은 한 분의 자리는 공석으로 남기고, 한 분의 자리에는 신학자가 아닌 여성 정치학자로 바꾸셨습니다. 아마 두 여성 교수가 남성들의 눈에는 여성다운 여성이 아닌 것 같이 보여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자신들의 아내와 같이 행동하지 않으니까 문제가 된 것이지요.  다른 이의 아내와 함께 동료로 일한다는 것이 마음에 부담들이 되셨었나 봅니다.  내면적으로는 "부부는 교수로 일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밖으로는 자격미달, 실력미달 이라며 여교수 축출의 명분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도 "그래 맞어" 부부가 한 직장에 있으면 서로 불편해서 안 되는 거야" 하고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성 중심적 가치 판단에 세뇌된 남자나 여자나 너무나 손쉽게 이런 판단을 내립니다. 성차별 의식이란 이렇게 비합리적인 남성중심의 정서를 가지고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함부로 빼앗는 죄를 낳습니다.  

이번 일을 바라보면서 저는 무엇보다도 여성의 존재는 남성적 신학자들의 눈에는 남성의 아성인 신학대학에서 2000년 동안 남성 중심적 가부장적인 세계관에 굳게 세워져 온 기독교 신앙의 구조를 붕괴시키는 악마적인 존재로 간주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은 마치 사탄을 쫒아 내듯이 온갖 계교와 허위진술까지 동원하고 있으니까요. 여성답게 다소곳이 존재하는 여성 교수는 문제가 되지 않는 데, 신학의 가부장성을 비판하는 여성 학자는 골칫덩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여성 교수들에게 신학의 남성중심주의의 문제를 이해한 학생들이 신학적 사고에 있어서 성평등을 이곳 저곳에서 주장하며 남성 학자들을 번거롭게 하거나 당황스럽게 하는 까닭이 아닌가 추측해 볼뿐입니다.  

이 경우 여성들이 주를 위해 사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또한 한편에서는 여성으로서 신학자가 "주를 위해서 사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성 신학자들을 가로막는 것이 주를 위한 것이라고 여기는 분들이 있다면 아마 이 분들은 "남성들만을 위하여 조작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생각을 달리하면, 여성들을 정중하게 신학하는 파트너로 받아들이도록 사고를 열어야 할 필요를 느끼는 분들도 계십니다.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게 신학적 사고를 할 수 있으려면, 이전에 하지 않았던 새로운 신학의 길, 새 길이 열려야 합니다. 이 새 길을 가려면, 남성들 중심으로 살아가던 모든 기득권과 정서, 제도, 권위이해를 버려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수천년 묵은 가부장주의 이무기가 쉽게 우리의 의식과 감정을 놓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성적인 우리",  남성 중심적인 "나"를 버려야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가부장적인 기득권을 남성들끼리 나누어 가지고, 위세를 부리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남성적 가치 안에 놓인 나 혹은 우리"가 바로 보다 깊은 의미에서 주를 위한 삶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번 사건을 바라보면서 하나의 조그만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남자들은 주님을 위해서 살기가 정말 매우 어려운, 불리한 정황에 있다는 것입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모든 기득권을, 권력과 결정권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주는 권위와 위엄을 포기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 다 버리면 자신이 믿던 "남성성"이 모두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를 위해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려면, 일단은 다른 사람이 주를 위해 사는 것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하기 보다, 돕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돕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가로막지는 말자" 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주를 위해 살려고 하는 삶을 훼방하지 않는 일이 바로 주를 위해서 사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위해 사는 사람은 주를 위해 살려는 이들을 돕고, 힘을 내라고 하고, 그리고 줄 수 있으면 좀 내어 주면서 사는 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주를 위해 산다면 평등하게 살겠다고 하는 사람 가로막지는 말아야 합니다. 주안에서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다는 말씀을 따라 하는 여성 신학 운동 그것 막아서는 안됩니다. 여성들이 목사안수 받겠다고 하면 그것 가로막아서는 안됩니다. 여성목사가 특권을 누리는 자리도 아닌데, 주의 종이 되어 살겠다는 사람을 가로막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여성 신학자가 황무지 같은 신학대학에서 이제 겨우 나타나기 시작한 여성 신학자의 소명, 그것 가로막아서는 안됩니다. 남성들이 정말 주를 위해서 살려면, 여성들 가로막지 말아야 합니다.  한 2000년 가로막았으면 많이 했잖습니까?  그런데 더욱 아이러니컬한 일은 가끔 여성들이 여성들의 주를 위한 삶을 가로막는 경우를 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성들이 스스로 가부장적인 가치와 신념에 경도되어 성차별적 편견을 가지고 다른 여성의 능력과 존재를 비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집단이기주의에 빠져서 "저이는 우리 출신이 아니니까"  "저이는 우리편이 아니니까"  "저이는 아무래도 저쪽 편이 될 것 같으니까" 이런 저런 이유로 그나마 소중한 여성 자원을 매장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을 만나면, 저는 이 분들이 믿는 차별을 방임하는 예수는 정말 믿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우리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다"는 오늘의 말씀의 깊은 경지는 이런 기독교인들의 삶에서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희망은 두 딸을 가지고 있는 데, 그들의 이름은 anger와 courage" 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며, 그들의 주를 향한 섬김의 길을 가로막는 힘들, 조직, 제도들에 대한 분노를 가지는 것, 그리고 보다 의로운 인간화된 관계들을 위하여 사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에 이 희망의 두 딸이 살아있지 않은 삶은, 다름 아닌 희망이 없는 삶을 의미합니다. 비극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희망 없이 사는 것을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희망의 다른 모습은 불안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른스트 블로흐는 희망을 "noch nicht Bewusstsein"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직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정서가 희망이기 때문에,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기다리는 불안, 그리고 이미 온 것들을 부정하는 용기가 있어야 희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블로흐는 새로움(das Novum)은 불안을 통해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주께서 십자가에 달린 사건이 아마 제일 큰 불안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패거리 문화, 파당문화가 모두 희망 없는 사람들의 이전투구의 자리가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은 기존의 것에 집착하는 하이에나 같은 집단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만들기 위하여, 길을 터 주기 위해 이전투구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집단화된 이들을 결코 십자가 지려고 패거리싸움 하지 않습니다. 주를 위해 산다는 것은 "나"와 "우리" 조차 버리고, 주를 향해서 새길을 가는 것이며, 이전 투구하는 길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 길은 불의에 분노하면서, 의를 향한 용기를 품는 희망을 가지고 사는 길입니다.  

II. 삶의 아름다움을 찾아 예찬하는 길

오래 전 제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방학도 되고 주말이 되어 빌슈타인이라는 마을로 몇몇 안 되는 교우들과 수련회를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 다음 날, 날씨가 화창하여 그 시골 마을의 조그만 동산을 산책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밭에서 일하던 한 농부가 큰 소리로  "Ich danke Ihnen!  Sie haben das schoenes Wetter mitgebracht!"라고 소리쳤습니다. "당신들이 정말 멋있는 날씨를 가져다주어 고맙다"는 영문모를 감사의 인사를 받았던 것입니다.  외국 나그네인 우리들을 바라보는 그 시골 농부의 시선이 얼마나 따스하고 기분이 좋았던지요.  그런데 독일인들이 다 그런 분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유학생들은 독일 도시에 난 자전거 길에 익숙하지 않아 가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로막을 때가 있었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묵직한 독일어로 "raus! Auslaender!"  <비켜 이 외국인 놈아!> 하고 유유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독일인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경험을 통해서 주를 위해 산다는 것은 조금 과장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과장을 해도 좀 긍정적으로 말이지요. 아름답고 고맙고 감사한 일들을 나의 업적과 나의 소산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나, 아내나, 아이들에게 돌리는 것이지요.  하다못해 좋은 날씨를 만나면, 길가는 외국인이 가져온 것이라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고맙고 감사하는 것이 나의 소산이 아니라, 주어진 것, 감사히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모두 주께서 주신 선물들이니까요.  그러므로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거나, 미워하면서 사는 것은 "주를 위한 삶" 이기보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나를 위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고, 자식들을 바라보고, 그리고 부모를 바라본다면, 그리고 늘 감사함의 정서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매우 인간다움으로 풍요해 질 것입니다.  저는 그 빌슈타인에서 만났던 농부가 정말 멋진 사람이라는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 그 순간을 떠올리면 저절로 미소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쾰른의 슈타트발트 자전거 길에서 저에게 무례하게 소리치고 지나간, 그 굵은 목소리의 독일인은 아직도 저에게 혐오를 느끼게 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로마서 14장을 읽으면, 나의 가볍고 속된 판단으로 인하여 형제자매들을 함부로 대하는 습성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주를 위해 산다면,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이웃들, 형제와 자매들을 함부로 취급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요.  조금 과장하자면, "너 없이는 정말 못살겠어." 이렇게 고백하면서 사는 겁니다. 우리 집에는 연대생 하나 고대생 하나가 있는 데, 집이 멀어서인지 학교 기질이 달라서인지, 연대 다니는 애는 집에 비교적 일찍 들어오는 데, 고대 다니는 작은 아이는 거의 매일 늦습니다.  간혹 새벽 두시쯤 들어오면 속에서 무엇인가 막 나오려는 말을 꾹 참고,  "아들아 고맙다 집에 잘 들어와 줘서" 이렇게 말하고 안아주곤 합니다.  생각해 보면, 건강한 모습으로 새벽에라도 집으로 찾아오는 아들이 정말 고마운 것입니다.

우리가 만드는 많은 불화의 요인은 뭔가 "중요한 사람"이 서로에게 못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이들도 그렇고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인정을 받아야 살맛이 나는 거지요.  아내가 남편에게 더 이상 중요한 사람이 못된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정신적인 방황이 시작됩니다.  아내도 마찬가지고, 남편 역시 마찬가지고,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고, 노인들도 그렇습니다.  소중한 사람으로 대우를 받는 사람은 결코 헛된 것을 찾아 방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사는 것 이것이 주를 위한 삶"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주께서 저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구속하셨다는 의미가 뭔가 마술적인 구원을 이룬 것이라고 믿는 것도 좋으나,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예수가 우리를 소중히 여기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다른 이들을 소중히, 주님께서 사랑하는 생명으로 알고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를 위한 삶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삶, 그것은 생명의 아름다움을 보고,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소중한 사람을 매일 만나면서 더불어 사는 즐거운 삶", 행복한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절망하고 누군가 다른 이를 찾아 나가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이들을 새롭게 보고 느끼는 것이지요.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사는 것, 생명을 즐거워하는 것, 생명을 예수처럼 소중히 여기며 사는 것이 주를 위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씩 과장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면서 차안에서 조금씩 과장해서 사랑을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나는 그대와 함께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고.  이런 고백들이 있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소중해지고,  우리의 건조한 삶에 새로운 의미와 위로와 생기가 돌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를 소중히 여기며 아름답게 살아가므로 주를 위해 살수도 있습니다.  

III.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인정하는 길

저는 며칠 전 여성학자이신 오한숙희 선생 댁에 보름달맞이 하러 갔었습니다.  그 날 저는 아주 중요한 깨달음을 하나 얻었습니다.  오 선생은 딸이 둘이 있는 데, 작은 애가 1급 자폐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딸은 사람과의 관계, 논리적인 관계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에 대하여 오선생이 말하는 것을 들으며, "아하 사람이 살아가는 길들이 이렇게 있는 것이로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언어장애를 가진 아이를 데리고 살아가는 그 분은 제가 보기에는 한없이 문제가 많아 보이고, 그 삶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손님이 있든지 없던지 다 큰 여자아이가 어린애 노릇을 하는 모양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아이의 어머니인 오 선생은 오히려 자기 딸아이가 가진 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언어를 통해서는 깊은 커뮤니케이션을 나누지 않던 아이가, 산에 가기만 하면 산의 소리, 나무들의 소리를 귀기울여 진지하게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를 자랑하고 칭찬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영장에 데리고 가면, 그 아이는 정말 자유를 온 몸으로 느끼면서 물을 즐기며 예술을 하듯이 물 속에서 헤엄을 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이 아이는 나와는 다른 세계를 가지고 사는 아이, 언어를 매개로 하는 것이 아닌 다른 감관의 세계를 가진 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소리와 언어에 익숙하여 사람의 소리에만 반응하기에 익숙한 우리들은 사실 모든 생명들이 내는 소리를 생략해 버리는 잘못된 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진실한 소리조차 외면하고 거부하는 우리들이지요. 그 순간부터 저는 그 아이를 바라보며 불편해 하던 느낌이 제 가슴에서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의 기준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그 아이가 가지고 세상을 보는 눈과 촉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과 더불어 등산을 했던 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앞을 못 보는 장애를 가진 분이 산을 오르는 것이 안쓰럽기만 했는데, 정상에 오르니까 "아 참 이산 정말 멋진 산이로군요!" 하며 경탄을 하더랍니다. 함께 산에 오른 분이 "세상에!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뭔 말씀을 이렇게 하시나!" 하고 속으로 놀랍기도 하고, 궁금해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계만을 전부라고 보는 시각은 장애인이 남다른 촉감들을 가지고 느끼고 경험하는 세계를 보지 못하는 또 하나의 장애를 가진 것일 수 있습니다.  새소리, 미묘한 바람소리, 나뭇가지들의 흔들리는 소리, 풀 소리, 시냇물 소리, 그리고 멀리서 야호 하는 산울림 소리...시냇물 냄새, 나무들의 냄새, 꽃향기, 그리고 나무들이 말하는 소리.... 이런 소리들을 들으며 그 시각 장애인은 산을 오르며 느끼고 정말 멋진 산이라고 경탄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고 산을 오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많은 것을 놓치고 산을 오릅니다.  인생을 사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살기는 살아도 너무나 많은 것을 놓치고 사는 것이지요.

계시록에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하신 말씀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가난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계시록 3: 17절)"라는 말씀이 이런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볼 것을 깊이 보고, 느낄 것을 바로 느끼고, 아름다운 것을 찾아 볼 줄 아는 인생을 사는 것, 거기에는 남다른 감격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못하니까 우리의 삶이 자꾸 메마르고 어두워가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를 위해 사는 것, 그것은 남들을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간주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와는 다른 소중한 삶을 사는 이들로 여기며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인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저마다 가진 장애를 넘어서서, 아주 즐겁고 맛있게 인생을 사는 것, 이것이 주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권리를 남에게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오래 전에는 영어로 handicapped person, 이라고 불렀는데, 얼마 전까지 disabled person 이라고 불렀고, 지금은 differently able person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주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바로 나와 다른 생각, 능력, 관점, 이해를 가진 사람들을 귀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사랑이 있다면 이것이 거기 속하는 사랑이 아닐까요.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는 마음, 이것이 있으면 덜 미워하고, 덜 사람을 밀어내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사랑이라면,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멸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위해 사는 것의 하나는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IV. 상처받을지라도 안락의 유혹을 이기는 길

저는 오늘 말씀을 도로테 죌레의 글로 마치고 싶습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죌레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To be alive is to be vulnerable. To be faithful is to resist the temptation of security." (산다는 것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것,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안락의 유혹에 저항하는 것). 이 죌레의 말에서 저는  "산다는 것은 아프기도 하고, 상처도 받고, 배반도 당하면서, 그리고 간혹 쫒겨도 나면서, 감옥에도 끌려가기도 하면서 사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입지만, 상처를 입는다고 벽을 쌓고, 담을 치고 요새를 만들어서 상처를 입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라는 선언을 듣습니다.  나만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이기적인 나를 위한 삶에 저항하는 것, 이것이 아마 도로테 죌레가 우리에게 "주를 위한 삶"이라고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희망의 두 딸을 가슴에 품고 늙어가야 아름답습니다.  낡은 옛 모습에 집착하여 안주하려는 나를 향하여 분노하고, 새로운 나를 향해 개방하고 용기를 가지는 것, 이렇게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바로 이 시대에 주를 위해서 사는 하나의 비결입니다.  새길 교회 모든 식구들, 여러분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사는 보람 있는 하루하루를 이루어 가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기도

자비하신 주님, 우리 모두에게 주를 위해 살려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의로운 분노가 평생 타오르게 하셔서 생명을 미워하고 가로막는 모든 힘에 저항하게 하시고, 우리 안에 정의를 향한 깊은 인식을 주셔서 모든 생명들을 향하여 진정한 정의를 행하며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비록 이 믿음의 길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상처를 입을지라도, 욕망과 유혹의 세계에 안주하려는 불신앙을 넘어서서, 보다 영원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우리 모두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구주이시며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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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 로마서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 롬12:2  한태완 목사  2007-11-07 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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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4 로마서 영 적 해방 롬8:1-2  강종수 목사  2007-06-24 1684
503 로마서 하나님의 영에 속한 사람 롬8:9-14  강종수 목사  2007-04-29 2650
502 로마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라 롬1:16-17  강종수 목사  2007-04-22 2574
501 로마서 해방 file 롬7:23-8:2  강종수 목사  2006-08-27 1785
500 로마서 문안과 경계 file 롬16:16-20  강종수 목사  2006-07-09 2402
499 로마서 이웃을 기쁘게 file [1] 롬15:1-13  강종수 목사  2006-07-02 2285
498 로마서 믿음의 차이를 인정하라 롬14:1-10  강종수 목사  2006-06-25 2513
497 로마서 세상 권세 file 롬13:1-7  강종수 목사  2006-06-11 2370
496 로마서 산 제사 file 롬12:1-5  강종수 목사  2006-05-28 3145
495 사도행전 격려하는 삶의 축복 행4:36-37  이한규 목사  2008-12-23 2395
494 사도행전 성령 충만을 받으셨습니까? 행19:1-7  이한규 목사  2008-12-23 2165
493 사도행전 이 선교를 어찌할꼬 행1:6-8  한완상 형제  2008-11-30 1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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