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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영성

로마서 최만자............... 조회 수 2098 추천 수 0 2007.12.13 13:4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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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12:1-2 
설교자 : 최만자 자매 
참고 :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1. 영성문제의 제기
지난 1월 21-22일 동안 우리교회가 가졌던 퇴수회에서 몇 분이 우리교회가 영성적 측면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었고 대체로 그것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함께 '영성'에 대하여 생각을 나눌 기회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그래서 오늘 말씀을 그 내용으로 준비하였습니다.
영성적 측면이 부족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나의 생각으로는 보다 개인 신앙의 내면적·감성적 차원에 대한 교회의 배려가 부족하다는 지적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 감성적·내면적 차원의 신앙표현을 교회 일반에서는 방언과 같은 성령의 은사체험이나 기도의 응답에 대한 감격,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가지는 은혜의 체험과 같은 것을 통하여 성장되고 풍부해지는 것으로 봅니다. 한국 기독교계에는 영성훈련 프로그램이나 부흥회 성격의 집회가 늘어났으며 영성신학까지 대두할 정도로 '영성'에 대한 관심이 1970년대부터 시작하여 80년대를 지나면서 계속 고조되어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과연 '영성'은 무엇이며 한국교회 일반에 퍼져 있는 그러한 개인 수련적이며 신비적인 영성훈련의 내용들이 기독교의 본질적인 영성인가를 질문하고 또 영성에 대한 관심이 왜 고조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하면서 올바른 영성 이해와 그를 통한 영성 생활을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2. 영성이란?
'영성'은 참으로 규정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실재하고 증명되지 않으면서도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이나 하나님을 규정하여 설명하기 어렵듯이 영성도 그러합니다. 바람이 부는 것을 모르지만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알듯이 영성도 그 현상적인 모습으로 인하여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인간 내면의 변화를 통하여 나타나는 생활의 변화가 그 현상일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합니다. 흙으로부터 곧 자연 물질로부터 만들어졌지만 하나님의 입김을 불어넣어 생명이 된 존재로서 영과 육과 혼이(기독교의 인간에 대한 이런 이해는 교부 이레네우스로부터 확정적으로 설명되었다)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통전적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영성은 이 통전적 인간의 내면적·감성적 차원과 관계되는 것이라고 우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라 함은 자유와 사랑의 본질을 가지고 자기 삶의 궁극적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며 초월적 차원을 향하고 사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이러한 초월 지향적 본질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자신의 삶 전체를 자신의 내면에서 정리하고 의미화하는 과정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 정리하고 의미화하는 과정은 인간의 근원이며 우주의 근원인 하나님과 이웃의 관계 속에서 이루게 되는데, 이 때 하나님과 이웃간의 관계를 형성하는 능력 - 그것을 영성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성에 대한 학자들의 여러 가지 설명을 요약적으로 정리하여 보면, 첫째, 영성은 영과 육과 혼이 통합된 사람이 자기존재의 초월적 차원을 갖기 위해 가지는 내면 능력이고, 둘째, 그 내면의 능력은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고 생성되며 동시에 이웃과의 관계에서 또한 생성되고 성장되는 것이며, 셋째, 이 내면 능력의 지속은 기도와 명상의 생활을 필수적으로 요청한다는 것, 다시 말해 이 내면 능력은 기도와 명상의 생활을 통해서 지속되고 성장하며 발전한다는 것, 그리고 넷째, 영성 곧 하나님과 이웃관계의 내면 능력이 있으면 기쁨이 충만할 수 있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성은 경건, 금욕주의, 신비적 체험과 동의어로 이해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영성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와 더불어 우리가 보다 중요하게 생각할 점은 영성은 개인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한 하나님과의 만남과 또 이웃과 역사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초월적 노력의 양면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Urbau T. Homles는 영성은 인간의 관계성 형성의 능력이라고 하면서 단순히 신비적인 내면적 경험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체험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 이해의 역사에서 볼 때 영성이 갖는 내면적·감성적 특성은 개인의 신비적 차원에서의 하나님과 만남을 갖는 수직적 관계에서 생기는 영적 능력에 치중되어 이해되어 온 경향이 큽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수직적 관계 이해는 자칫 영성의 온전성을 왜곡시키는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과 동시에 이웃과 자연 그리고 전 피조물과 함께 관계를 맺으며 살도록 창조되었고 그 모든 만남 속에서 영성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성의 윤리적 실천의 차원이 그 신비적 차원만큼이나 중요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수직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영성 - 곧 그 관계 능력을 가지려고 할 때 오히려 이기적이며 출세지향적이고, 물질주의적이며 승리주의적인 신비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현재 상황은 바로 이러한 영성 이해에 치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지난해 6월 27∼7월 8일 사이에 연세대학교 신과대학과 연합신학대학원 공동주최로 '목회자의 영성과 한국교회 갱신'이라는 주제 아래 열린 세미나에서는 현재 한국교회의 영성 운동이 부흥회적 성격을 가지고 개인 수련에 치중하고 있는데, 이러한 운동이 개인 생활의 변화 없이 일시적 만족감을 주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고 이를 영성 훈련이라고 포장하고 있다는 비판적 지적을 하였습니다. 잘못된 영성 훈련은 오히려 또 다른 영적 병폐를 나타낼 수 있다고 우려하면서 개인 수련 중심에서 변혁적인 영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3. 기독교 중세 영성 운동의 교훈
이제 우리는 어떠한 영성을 가져야 할 것입니까?
기독교 영성 운동의 대표적인 모습은 중세 수도원 운동과 신비주의로부터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도원과 신비주의 활동에서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형성 곧 수직적 차원에 치중한 영성 훈련이 중심이 되었을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중세의 이러한 영성 운동들은 비록 하나님과의 신비적 합일의 경험을 중심으로 하였다고 해도 그 영성의 실제적 내용은 당시의 부패한 종교권에 대한 저항운동이었던 것입니다. 중세의 교회가 교황권 체제 아래 종교가 권력화되고 신도들의 생활이 도그마화하였으며, 율법주의적이 되고 교조화되어서 인간성이 왜곡, 상실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종교로 인하여 도리어 사람이 억압받고 자유를 상실하고 종교에 지배당하게 되는 가운데서 참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영적 자유가 억압당하고 있었습니다. 교권은 탐욕과 권력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상황 가운데서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영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일어났고,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수도사나 또 중세말기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같은 신비주의자를 꼽을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미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일반적인 생활방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가난한 삶의 존재방식을 선택하였고 가난과 자신을 일체화하여 물질과 소유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는 만인평등을 근본적으로 성취하기 위하여 작은 형제회를 조직하고 공동체생활을 운영하면서 삶의 단순화를 이루어 나갔고, 모든 권력과 탐욕으로부터 자유하여 교황 앞에서도 당당하였던 것입니다.
에카르트는 교황청으로부터 28개 항목의 죄명을 받는데 그 가운데 15개 항목이 이단으로 지목될 정도로 당시의 종교적 틀을 넘어서려는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 1:14절을 근거로 청빈한 영혼이 신의 출생 장소가 된다고 말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이해를 전혀 새롭게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소유욕에 사로잡힌 의지, 지식 등이 인간을 부패하게 만든다고 보았고, 청빈과 단절에서 관계의 자유와 넓이의 여유를 제공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선을 받아들이고 악에 저항하는 것이 영혼의 불꽃이며, 거기에 하나님이 활동한다고 하였고, 이러한 태도를 위하여 하나님께 끝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모두 그 세대의 지배적 가치와 정신을 새롭게 하는 영성을 추구한 영성 운동가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시 영성을 이해하게 되는데, 영성은 왜곡된 사회와 역사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려는 정신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기도하고 명상하며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갖고 동시에 이웃과 역사를 향하는 삶이 영성적인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은 지극히 윤리실천적으로 이해하여야 하며, 윤리실천과 일체가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마지막 부분에서 성령의 열매를 윤리적 덕목들로 열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깊은 영성의 체험은 아마도 성령을 받는 상태라고 볼 때 바울이 성령 받음은 곧 윤리적 실천이라고 표현한 이 말씀은 의미가 깊다고 볼 수 있습니다.

4. 우리시대의 영성
그렇다면 우리시대의 영성 곧 내면의 능력으로 가져야 하는 윤리적 실천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우리는 왜 이 시대에 영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가에 대하여 먼저 생각함으로써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영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것은 현대의 영성에 문제가 있음을 암시하며, 따라서 새로운 영성의 추구는 잘못된 영성의 문제가 있는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예배에서 이 시대의 문제를 극복할 영성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기독교가 오히려 세속가치에 편승되어 있어서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제시해 주고 있지 못하며 그래서 영적 갈급이 있다고 합니다. 영성 운동은 이러한 시대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주고 잘못된 세대와의 단절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가치와 윤리를 제시하는 것으로 전개되어야 합니다. 먼저 오늘 우리시대의 문제를 영성적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다음의 몇 가지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합리주의 이성주의의 경직성과 독재성인데, 이는 modernism이 가지는 병폐적 요소들을 의미합니다. 획일적이며 동시에 이분법적 사고는 기득권을 더 옹호하는 도구로 사용되며 주변적 구성원들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소유지향적 삶의 방향입니다. 산업사회와 기술사회가 초래한 이 소유지향의 삶의 태도는 물질만능의 가치관을 만들어 내었고 인간을 끊임없이 기술과 물질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셋째로는 결과주의, 업적주의적 사고입니다. 일의 과정은 그 중요성이 상실되고 결과와 업적이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경쟁의 극대화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인간적 관계들을 만듭니다. 넷째는 위계적이며 권위주의적 사고의 문제로서 이는 힘의 논리로 세상을 지배하고 약한 편의 권익이 보장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사고의 결과는 전쟁과 가난, 생태계의 위기, 인간성의 황폐화, 경쟁, 폭력의 극대화 그리고 결국은 생명경시의 현상들을 드러내게 됩니다. 오늘날 전 지구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기상의 이변도 바로 이러한 사고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의 본질적 뿌리는 인간의 탐욕에 있으며 사회제도적 모순은 가부장적 구조와 자본주의 경제원리의 부작용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영성은 어떤 것인가요?
이 시대에 개인의 마음의 만족으로만 영성을 생각하는 것은 시대적 과제를 외면할 뿐만 아니라 왜곡된 영성적 현상을 초래할 수도 있겠습니다. 개인적인 견해로 몇 가지 영성의 방향을 제시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자발적 가난의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불편한 가난이나 궁핍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실 물질적 가난이 인간을 얼마나 열등하고 비굴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자발적 가난, 자유로운 가난은 소유로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사고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소유한 만큼 그 존재성이 확보되는 것이 오늘날 물질주의적 소유지향적 가치에 의한 지배적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고를 넘어서서 소유 아닌 존재 자체로 인간 됨을 가질 수 있는 자유로움과 당당함을 가질 수 있는 영성, 그것이 자발적 가난의 영성입니다. 즉 소유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영성을 가질 때 우리는 삶을 단순화시킬 수 있으며 나눔의 실천을 할 능력이 생깁니다. 소유지향성을 벗어나면 공동체적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공동체나 현대의 수도사들의 공동체 등에서 그러한 실지 예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예민한 감수성의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예민한 감수성은 사랑과 정의가 통합되는 곳입니다. 철저한 정의감과 철저한 사랑이 발생될 수 있는 내면은 바로 예민한 감수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속성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 하나님이 애굽의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고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의 구원사건을 맡기는데, 수사비평학적 성서주석에 의하면 이 때 하나님의 자궁진통이 일어났다는 언어의 표현은 바로 그의 자비가 끓어 오른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민한 감수성은 우리의 내면에 바로 이 하나님이 자비와 긍휼의 속성이 발현되는 것입니다. 이는 윤동주님의 시에서도 발견되는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고 또한 작은 잎새의 떨림에도 아픔을 느낀다고 하는 그 예민성이 일제에 저항할 수 있었던 힘이었습니다. 예민한 감수성은 가장 여린 것이 가장 강할 수 있는 곳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시인이 되는 세상이 되면 산업사회를 넘어서 공생의 사회로 나갈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인이 가지는 예민한 감수성이 우리 시대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만물의 신음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의 예민한 감수성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관료적 힘이 지배하고 도그마에 포로가 된 세상에서 영감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 본래적 삶과 그 동인들을 깊이 성찰하는 인간이라야 비로소 오늘날 세계의 환경위기, 체제위기, 가치위기에 민감한 정신상태를 발전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휴식하는 상태가 여유입니다. 소유의 한계를 정하고, 복잡에서 단순하여 지고,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상태 - 영의 상태를 말합니다. 초조와 불안은 우리가 더 많이 가지려고 할 때 생겨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안식일의 의미를 새롭게 그리고 심각하게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Erich Fromm은 안식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려고 하는 상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Echart는 이런 여유의 영혼에서 하나님이 탄생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빨리빨리, 철저하게, 완벽하게, 그리고 최고로 무엇이든 만들어 내려는 것이 결과주의 업적주의 사고에 사로잡힌 영혼입니다. 중국의 노장사상의 무위자연이란 말은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고 자연적이며 순리적인 진리에 합하려는 당시 중국에서의 새로운 영성의 추구였고 오늘 우리도 그 여유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넷째, 생명지향적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정의와 평화가 수립되는 샬롬의 성취를 이 말은 의미하고 있습니다. 발전이 더디더라도, 설정한 목표에 다다르지 못하더라도, 생명이 사는 것이냐 아니냐에 따라 모든 우선 순위를 가지는 것을 뜻합니다. 산업도 판매실적만을 생각하여 상품을 만들 것이 아니라 생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의 문제를 먼저 생각하고 상품을 만들며, 과학기술 또한 이러한 생명 우선적인 방향에서 발전되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행위가 생명·평화의 정행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성서본문 말씀은 바울이 당시 유대의 율법주의와 구별되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이면서 동시에 영성이라 할 수 있는 덕목들을 성령의 열매로 제시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성은 윤리실천적 차원을 가지며 어떤 의미에서 윤리 그 자체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교권주의, 타락한 유대종교는 물론이고 권력의 우상화와 탐욕이 지배하는 그리스-로마 문명권의 삶도 그리스도인들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가 자발적 가난, 예민한 감수성, 여유, 그리고 생명지향적 영성을 이 시대의 성령의 열매로 받아들여 그러한 삶을 실천할 때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vision을 제시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깊은 명상과 기도의 시간을 가져 하나님과 만남을 가지며, 자기절제의 규율(discipline)을 스스로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밀한 큰 기쁨을 주실 것이고 우리의 영혼이 되살아 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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