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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몸

로마서 길희성............... 조회 수 2006 추천 수 0 2007.12.13 13:5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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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7:7-25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인류학자들은 죄책감과 수치감(guilt and shame)을 구별하면서 어떤 문화는 죄책감을 중시하는가 하면 어떤 문화는 수치감을 중시한다고 말합니다. 대체로 개체성 내지 개인주의가 덜 발달된 문화, 집단주의적 사회, 공동체 의식이 강하고 타율적 윤리가 발달한 곳에서는 수치감이 지배적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타인과의 관계가 중시되고 사회에서 통용되는 어떤 일정한 행동규범, 즉 공동체가 요구하는 어떤 요구나 행동 양식을 어겼을 때 심한 수치감을 느낍니다. 남이 자기에게 대하여 가지고 있는 기대감 같은 것을 어기거나 배신했을 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의 강한 수치감을 느낍니다. 심지어는 체면이 완전히 손상되어 더 이상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기 어렵다고 판단되어 자신의 생명마저 끊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자살로 유명한 일본 사회는 전형적으로 수치감에 근거한 문화라고 지적됩니다. 어떤 절대적인 도덕적 명령을 어겼다는 생각, 자신의 양심을 저버리고 인간성을 배신했다는 데서 오는 괴로움보다는 남의 따가운 눈총, 남의 비난이 더 견디기 어려운 사회, 그리고 공동체에 누를 끼쳤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인 사회는 이러한 수치감의 윤리에 근거한 사회입니다. 이러한 수치감의 윤리는 결국 한 특정한 공동체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만 통하는 윤리가 되기 쉽고, 그 밖으로 벗어나면 윤리도 염치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남을 착취하고 괴롭혀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이상한 윤리가 되기 쉽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패전 50년을 맞은 오늘 과연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읽었는지, 과연 참다운 회개와 반성을 한 나라인지 우리로 하여금 의심케 하는 일이 요즈음 계속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면서 우리를 분노케 하며, 새삼 일본이라는 나라는 결코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경각심을 일깨워 줍니다. 내각의 총리가 골백번 사과하면 - 그것도 항시 애매 모호한 말로 하지만 - 무엇합니까? 진정으로 잘못했다는 마음이 없는데, 말과 마음이 다른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일본인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수치감에 근거한 그들의 윤리는 일본 민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윤리가 못 됩니다. 아마 지금도 일본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도덕적 양심이 아니라 국제적 비난의 여론, 곧 눈치와 체면일 것입니다.

일본 이야기는 그렇다 하고, 우리 한국인은 좀 낫습니까? 결코 그렇게 얘기 못할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너무 일본인과 유사하기에, 그들을 너무도 잘 아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우리 한국사람들은 서양사람들에 비해 죄의식, 죄책감이 약합니다. 역시 우리 문화도 죄책감보다는 남의 눈치를 살피는 수치감의 윤리에 근거한 문화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이 안보는 곳에 온갖 쓰레기를 마구 버리고 폐수를 무단 방류하고도 양심에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닐까요? 최근 자동차 십부제가 시행된 이래 대체로 양호하게, 아니 놀랄 정도로 잘 지켜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지만, 아마 이것도 좀 고약하게 해석하면, 성숙한 윤리의식보다는 남의 따가운 눈총이 두려워서 잘 지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남의 눈총이 조금 흐려진 요즈음 다시 잘 안 지킨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종종 텔레비전에서 검찰이나 경찰에 검거된 범죄자들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도 자기 잘못에 대한 뼈아픈 뉘우침보다는 자기 얼굴, 문자 그대로 자기 체면인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어떻게 해서든 얼굴을 가리려고 잠바를, 모자를, 핸드백을 얼굴에 대거나 얼굴을 푹 수그립니다. 미국 텔레비전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들입니다. 죄를 짓고도 들키지만 않으면 뻔뻔하게, 아무런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 잘못하고도 아무런 죄의식과 책임의식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많은 사회, 이런 사회의 윤리란 결국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양산하는 허구적 윤리입니다. 남의 눈총에 수치감을 느끼는 사람 천명보다는 자신의 조그마한 잘못에도 괴로워하고 남이 모르는 숨겨진 죄악을 가지고 밤새 번민하는 연약한 양심의 소유자 한 명이 있는 사회가 더 희망이 있는 사회일 것입니다. 시인 윤 동주의 표현대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영혼들을 가진 사회, 모두가 박수를 쳐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양심의 용기를 가진 사람 하나라도 있는 사회가 수만의 박수부대를 가진 사회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죄의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회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타인의 눈총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오직 자신의 양심에 들려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데서 옵니다. 진정한 죄의식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 하나님의 말씀과의 대면을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보이는 사람의 눈, 그러나 얼마든지 속일 수 있는 눈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눈, 결코 속일 수 없는 눈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죄책감이 생깁니다. 인간의 상대적 윤리보다는 하나님의 절대 명령 앞에 선 자만이 진정으로 죄가 무엇인지를 인식합니다. 언제나 자신에 이롭게 온갖 궤변으로 합리화하고 왜곡해서 해석할 수 있는 사회적 규범이나 법이 아니라, 아무리 해도 자기를 합리화할 수 없고, 피해 빠져나갈 수 없는 준엄한 하나님의 도덕적 명령과 마주칠 때 나는 갈 데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모두가 도둑놈인 사회, 모두가 속고 속이며 사는 세상에서는 나도 이만하면 그다지 크게 나쁜 놈은 아니라고 얼마든지 자신을 정당화하고 위로하며 살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심지어 지존파라도 할 말은 있는 법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누가 자기는 의롭다고, 떳떳하다고 큰 소리 칠 수 있겠습니까? 오죽하면 예수 자신도, 선한 이는 아무도 없나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 외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만약 단순히 세상적 기준, 사회적 기준에 따라 살고자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면, 굳이 교회에 나올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읽은 말씀 가운데서 지극히 민감한 영혼의 소유자인 사도 바울의 양심의 절규를 접합니다. 이 절규는 2,000년 전 그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 담겨 있지만, 아직도 마치 얼굴을 직접 대하고 살아 있는 그의 음성을 듣는 듯 생생하며, 그리스도교 2,000년의 역사를 통해서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키엘케고르, 칼 바르트 등 수많은 영혼들에게 메아리치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증언이요 고백입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 절기상으로 렌트 기간에 있습니다. 재의 수요일(Ash Wesdnesday)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성 금요일을 지나 부활절 전야까지 40일간 계속되는 이 기간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금식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금식과 금욕, 기도와 참회로 보내는 기간입니다. 자신의 죄를 깊이 성찰하고 뉘우치는 기간이기에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삼고자 합니다.

바울은 본문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을 모르고 율법 아래 처했을 당시의 자신의 영적 비참함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다함은 율법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뜻, 즉 계명을 잘 지킴으로써 의로운 사람이 되어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다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참으로 경건하고 윤리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율법주의라 해서 유태인의 율법에 대한 열성과 충성심을 과소평가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세계 일반의 윤리적 수준은 물론이요, 오늘날의 도덕적 수준으로 보아도 유대교의 율법 생활은 대단히 경건하고 본받을 점이 많은 흠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바울이 경건하게 이 율법과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도덕적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더 자기도 이해할 수 없는 죄악의 힘에 굴복하는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는 죄와 율법의 묘한 역설적 관계로 설명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원래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악에 빠지지 말고 의롭게 살라고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죄는 율법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니 율법을 기화로 삼아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입니다. 차라리 율법을 몰랐을 때는 죄의 심각성도 몰랐고 오히려 천진난만하게 살았는데, 율법을 통해 죄가 무엇인지 알고 나니까 오히려 더 죄 앞에 무력해지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바울은 절망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텐데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하고자 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하기 원치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19-24절). 절망 가운데서 바울은 심지어 나를 주장하는 것이 내가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죄라고, 혹은 자기는 육정에 매인 존재요 죄에 팔린 존재라고 고백합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깃들여 있지 않고 내 속에 악이 붙어 있으며, 내 지체 속에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고 있다고 탄식합니다. 그리고 전에는 율법이 없어서 오히려 내가 살았는데, 이제 율법을 알게되니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고 말합니다. 죄가 계명을 빌미로 하여 나를 속이고 나를 죽였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 율법 아래서는 바울은 도저히 살 길이 없는 비참한 존재임을 철저히 자각하고, "오호라, 나는 비참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에서 건져내랴"고 절망적인 탄식을 발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바울만의 체험이 아닙니다. 선하게 살아보겠다는 모든 사람, 경건하게 종교적으로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부딪치는 쓰라린 경험입니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자신의 죄는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며 자기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노력도 안하고 가만있으면 됩니까? 되기는커녕 더 엉망이 되지요. 마치 새해의 결심과도 같아, 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하면 무엇하나 몇 일 안 가서 허사가 될 것이 뻔한데 이번에는 새해의 결심이고 뭐고 집어치자고 하면 뭐가 달라집니까? 결국 더 엉망이 될 뿐입니다. 이미 우리는 자연스럽게 선하고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살던 에덴의 낙원을 잃어버린 존재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선하려면 악과 싸워야 하며 선하고자 하면 할수록 악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우리를 괴롭힙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에는 죄악의 씨앗이 자리잡고 있으며, 가장 선한 의도의 배후에도 그것을 왜곡시키는 이기적 욕망과 보상심리가 숨어 있기에 우리는 참으로 순수하게 무엇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남의 허물을 보며 흉보고 비판하다가도 자기 자신 안에 자리잡고 있는 불순한 동기와 이기심을 돌아보면 차라리 다른 사람은 모두 나보다 훨씬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절감할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죄인과 의인의 차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차이는 50보 100보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호되게 꾸짖은 것입니다. 겉으로 조금 낫다고 하여 정말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의로운 줄 생각하면 자신의 죄를 늘 부끄러워하면서 떳떳하지 못하게 사는 세리들과 창녀들만 차라리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율법은 인간의 도덕적 자만심, 영적 자만심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습니다. 사회적 관점, 상대적 관점에서는 이만하면 되겠지 하고 자위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하는 짓마다 이기심과 분쟁,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 있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짓은 결국 죽음의 역사만을 창조할 뿐 진정으로 선한 것, 진정으로 순수한 것, 진정으로 생명을 창조하며 더러운 역사를 정화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뼈저리게 우리를 엄습해 옵니다. 결국에는 죽음만이 우리를 기다리며,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인 것입니다. 이런 영적 반성을 전혀 해본 일이 없는 사람은 네가 옳다 내가 옳다 따지고 큰소리치며 살지만, 일단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 본 사람은 오직 그의 은총과 자비만을 기다릴 뿐 아무 말이 없습니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영적 자기 반성, 자기 성찰 없이 행하는 선행이란, 그것이 제아무리 엄청난 자선이라 해도, 제 아무리 정의로운 투쟁이라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속임수에, 허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우리 새길교회도 여러 가지 선교 봉사 사업을 한다고 애를 쓰지만, 이것이 결코 우리의 자랑이 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순전한 자비와 용서 때문이지 우리의 선행, 우리의 공로, 우리의 자랑, 우리의 순수함 때문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모든 독선과 남에 대한 비판도 함부로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결단과 실천을 강조하는 우리 새길교회의 신앙고백이 자칫하면 도덕적 승리주의나 영적 교만으로 들리기 쉽습니다. 자칫하면 우리 안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뿌리뽑기 어려운 죄악의 힘을 간과한 값싼 낙관주의나 천박한 행동주의가 되기 쉽습니다. 교회는 단순한 세속적인 선행단체나 자선단체가 아닙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갈 데 없는 죄인임을 자백하는 자기 성찰과 겸손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우리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miserere nobis)를 읊조리면서 선교와 봉사 등 모든 일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깊고 무서운 것인가를 한번도 뼈저리게 느껴보지 못한 자, 죄의 힘 앞에서 한번도 좌절하고 굴복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세상적인 도덕은 행할 수 있겠지만 결코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행하는 어떤 나쁜 짓(what we do)이기 전에 우리 존재 자체(what we are)입니다. 죄는 우리 존재에 속속히 스며들어 있는 힘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 하나, 내뱉는 말 하나 하나, 생각 하나 하나가 죄로 물들어져 있음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사실, 어떤 때는 사는 것 자체가 죄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원죄라는 개념이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자신과 세상의 거의 운명적인 악함을 말해주는 장점은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가 얼마나 깊은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은총이 얼마나 귀한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바울은 그래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된다"(로마 5:20)고 역설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정말로 은총의 힘을 알려면 그만큼 죄의식에 괴로워 할 줄 아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이란 편하고 좋은 것, 종교도 안 가지는 것보다는 가지면 좋고 편한 것이라는 생각은 오늘 읽은 바울의 고백과 탄식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면 크게 잘못 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율법,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신앙, 종교 이런 것들은 진정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기 때문이며, 그것들은 우리를 꼼짝없이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정말 좋은 것인가? 종교를 가지면 편하고 우리 인생을 즐겁고 기쁘게 해주는가? 칼 바르트는 그의 유명한 로마서 강해에서 오늘 읽은 바울의 말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갈등과 괴로움, 죄와 죽음, 악마와 지옥이 종교의 현실이다. 인간을 죄책감과 운명으로부터 해방시키기는커녕 종교는 인간을 그런 것들의 지배 아래 놓는다. 종교는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종교는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만든다. 종교는 문제를 발견하지도 않고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종교가 하는 일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폭로해 줄뿐이다. 종교는 즐길 일도 못되고 축제를 벌릴 일도 못된다. 종교는 벗길 수 없는 멍에로 지고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에 종교산업이 번창하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종교를 접함으로써 바울과 같은 고뇌와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면, 그리하여 종교가 위로와 평안보다 인간의 양심을 괴롭게 하는 것이라면, 정말 사람들이 구름같이 교회를 찾고 절을 찾을까요? 과연 얼마나 많은 한국 교회의 신자들이 바울과 같이 철저히 죄와 율법에 난파하고 스스로 사형선고를 내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일까요? 우리는 정말 바울과 같이 죄의 깊이를 알고 은총을 입에 올리는 자들일까요? 아니면 죄가 진정으로 무엇인지 모르고 따라서 은총도 무엇인지 모르면서 날뛰는 철부지들인가요?

사실, 우리 새길교회가 자칫하면 독선과 교만에 빠지기도 쉽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늘 부족하다는 생각을 잃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적어도 값싼 은총을 남발하지는 않고 철없는 승리주의에 도취되어 손뼉치며 날뛰지는 않는 교회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신앙생활이 무조건 즐거운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매 주일 우리의 신앙고백을 통해 늘 스스로에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신앙고백이 십자가의 동참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희생과 봉사를 강조하면서 마음에 부담을 많이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부담을 주는 것만큼 실천이 따르지 못하지만 적어도 편한 마음으로 예수 믿도록 놓아두지는 않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여기다가 또 한가지 짐을 추가하고자 합니다. 즉 무엇을 못 했기 때문에 오는 죄의식과 부담감이 아니라 무엇을 함에도 불구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죄의식입니다. 십자가를 충분히 지지 못했다는 미안함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가 하지 못하는 선교와 봉사를 통해 그래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생각 가운데 깃들일 수 있는 독선과 교만의 유혹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선교이든 봉사활동이든, 말씀증거이든 성가대이든, 성경공부이든 주일학교 봉사이든­은 우리는 죄인이라는 깊은 죄의 의식과 고백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봉사와 세상 사람들의 봉사의 차이일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면서 십자가의 상처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이지만, 그것 못지 않게 죄의 쓰라린 상처와 상흔을 싸 않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죄의 좌절, 아픈 기억을 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과 뼈아픈 죄의 고백은 별개의 일이 아닙니다. 왜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셔야 했나? 결국 인간의 죄, 나의 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항상 인간의 죄악, 세상의 험하고 악함, 역사의 한없는 부조리를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인간 고발장입니다. 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해야 합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따라서 먼저 우리들 자신의 죄악을 생각하고, 그 다음 고난의 동참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의 죄의 고백과 십자가를 지려는 결단은 항상 같이 갑니다.

바울의 말씀은 오늘도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좋은 줄 알고 그것만 잘 지키면 되는 줄 알고 덤벼들었다가 큰 코 다치고 그 앞에서 자신의 죄를 더욱 뼈저리게 느끼고 "오호라 나는 비참한 자로다, 누가 나를 죽음의 몸에서 건지랴"고 스스로 파산선고, 죽음의 선고를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교회 다니는 것이 좋은 줄 알고, 기독교라는 울타리 속에 안주하여 어영부영하다 보면 세상에서도 재미보고 내세의 복락도 누리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할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바울이 율법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만큼 진지하다면, 우리도 끝내 죄 앞에서 깊이 좌절하며 고꾸라지는 죽음의 선고를 체험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체험 없이는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진정한 은총의 감사도 부활의 기쁨도 모를 것입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기독교를 모르고 지내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 교회 없이도 착한 일 많이 할 수 있고, 교회 없이도 좋은 사람 많이 사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가 얼마나 깊은지, 자기야말로 죄인의 괴수라는 깨달음, 이것은 역설적으로 기독교 신앙과 교회가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일 것입니다. 죄인은 늘 할 말이 없고, 죄인은 늘 자기 분수를 알아 겸손하여 낮은 곳을 찾을 수밖에 없으며, 죄인에게는 늘 모든 것이 고마울 뿐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더하고, 인간의 가능성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전혀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엎드려 오직 그 은총의 감격으로만 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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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 요한복음 예수사건① : 물동이를 버린 사마리아 여인 요4:7-30  한완상 형제  2007-12-17 4038
361 창세기 광복 50주년과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신앙 창1:16-18  최만자 자매  2007-12-17 2015
360 로마서 그리스도인의 기쁨 롬8:9-11  길희성 형제  2007-12-17 2300
359 누가복음 고난의 역사와 구원의 기쁨 눅2:14-23  이재정 신부  2007-12-17 2123
358 고린도후 상대적 불행과 절대적 행복 고후2:8-11  한완상 형제  2007-12-17 2827
357 마태복음 믿고 구하라 마21:22  강종수 목사  2007-12-16 2150
356 요한복음 위기와 기회 요2:1-11  한태완 목사  2007-12-15 2557
355 누가복음 종의 의무 눅17:7-10  이현주 목사  2007-12-13 2314
» 로마서 죽음의 몸 롬7:7-25  길희성 형제  2007-12-13 2006
353 누가복음 화해적 코이노니아를 위한 하나 더 눅15:1-2  김흡영 목사  2007-12-13 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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