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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기쁨

로마서 길희성............... 조회 수 2300 추천 수 0 2007.12.17 00: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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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8:9-11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당신은 무슨 재미로 삽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 당혹해 할 것입니다. 그래도 좀 생각해 보면 각자 무슨 인생의 기쁨이 있으니까 살 것입니다. 혹시 사업이 신나게 잘 되는 사람은 돈 버는 재미로, 신혼부부는 사랑의 기쁨으로, 예술가들은 창작의 기쁨으로, 정치가는 권력야망을 실현해 가는 재미로 살 것입니다. 기쁨의 원인이 각각 관심에 따라서 다를 것입니다. 저속한 욕망을 가진 사람은 그런 욕망의 충족에서 만족을 느낄 것이고, 보다 숭고한 뜻을 지닌 사람은 그 뜻이 성취되는 데서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소인배들은 자기의 조그마한 이기적 욕망이 채워지면 즐거워하고, 군자는 나라와 사회와 인류의 앞날을 걱정하며 세상에 도가 이루어질 때 큰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은 불의가 거꾸러지고 의가 실현될 때 큰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혁명가는 세상이 자기가 꿈꾸는 이상형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서 기뻐할 것입니다. 누구나 많든 적든 어떤 기쁨이 있기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기쁨은 불가분적입니다. 바울의 말씀대로, 항상 기뻐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의 기쁨과 일반적으로 세상살이에서 느끼는 기쁨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세상이 변혁되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혁명가들의 기쁨에 가장 가깝습니다. 혁명가들의 기쁨처럼 그리스도인들의 기쁨도 사소한 개인의 욕망이 채워질 때 느끼는 그러한 기쁨보다는 자기는 고생하더라도, 그리고 현재는 심한 고통을 당하더라도 세상이 끝내 잘 될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그러한 의인들의 기쁨, 군자들의 기쁨에 가깝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도 세상이 질적으로 변화되는 혁명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한 하나님 나라의 혁명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하나님 나라의 혁명에서 생의 보람을 느꼈으며 이 혁명사업에 증인이 되고, 동참하고 완성시키는 기쁨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사소한 개인의 욕망의 성취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다시는 억울한 눈물과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는 변화된 세상이 올 것이라는 확신으로부터 오는 큰 기쁨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의 혁명은 역사의 다른 혁명과는 몇 가지 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혁명은 단지 인간의 손에 의해 일어나는 혁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혁명입니다. 혁명의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요란한 정치구호나 사회정책, 권력이나 폭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혁명이 아니라, 소리 없이 보이지 않게 일어나는 조용한 혁명입니다. 셋째, 지금 단지 계획 중에 있는 혁명, 앞으로 일어날 혁명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혁명입니다. 막연한 유토피아적 환상이 아니라 예수와 더불어 이미 확실하게 시작된 혁명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원천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혁명을 계획 중이거나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없습니다. 그들은 항시 심각합니다. 혁명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모든 것을 희생하며 참고 견디며 극도로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혁명가들에게는 웃음이 없습니다.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혁명가들의 삶입니다. 혁명은 고사하고 무슨 운동이라도 벌이려면­학생운동, 각종 시민단체 운동 등­사람들은 웃음을 잃기 쉽습니다. 목적이 이루어지기까지는 투쟁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혁명은 기쁨으로 가득 찬 혁명이었습니다. 이미 새로운 시대, 메시아의 시대가 열렸다는 확신에 근거한 혁명이었기 때문이며, 이미 하나님 나라의 종말적 역사가 의심의 여지없이 시작되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으로 충만한 -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십시오"(빌립보 4: 4). 세례자 요한이 일으킨 운동과 예수의 운동의 차이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다가올 심판을 외치면서 심각하게 금욕적 삶을 살았던 요한과는 달리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하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 속에서 자유롭게 먹고 마시는 축제적 잔치 분위기 속에서 살았습니다. 옛 것은 지나가고 새 시대가 왔다는 확신과 기쁨이 그들에게 이미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렇게도 목말라 하고 그리워하면서 예언했던 새 세상, 새 시대가 이미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 속에서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머지않아 곧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지녔던 이 새 시대에 대한 확신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것은 두 말할 필요 없이 예수의 부활소식, 부활사건에서 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의 원천, 기쁨의 비결은 다름 아닌 부활신앙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전에 그 어느 누구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권위 있는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이미 무언가 새로운 역사가 진행될 것이라는 예감을 가지고 그를 따랐습니다. 그가 행한 권능 있는 이적, 가난한자, 병든자, 옥에 갇힌자,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들을 돌보아 주고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는 그의 행동 속에서 이미 제자들은 하나님 자신의 권능과 사랑을 보았으며 천국의 확실한 징표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흥분이 채 가시기 전에 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주인공은 무참히 로마 권력 앞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곧 도래할 것이라고 외치던 하나님 나라는 오지 않고 예수는 마치 거짓말쟁이, 혹세무민한 자, 미치광이처럼 호언장담한 자로서 십자가의 형장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그가 벌리던 하나님 나라 운동도 다 끝장났고 제자들은 겁을 먹고 뿔뿔이 도망치고 말았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허탈감, 좌절감, 속았다는 생각, 배신감, 아마도 이런 것들이 예수를 따라다니던 사람들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극적으로 반전시키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곧, 부활사건입니다. 마치 다 졌다고 생각했던 야구 게임에서 9회 말 2아웃에 터진 극적인 역전 홈런과 같은 드라마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부활을 의심합니다. 분명히 우리들의 상식을 초월하는 사건이기에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제자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며, 십자가에 무력하게 처형당한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당당히 선포하는 교회가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이 사실은 사태를 극적으로 반전시킨 한 엄청난 사건이 없었더라면 도저히 설명 안 되는 불가사의한 현상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그에 대한 신앙고백이 없었을 것이고, 신앙고백 없이 교회가 존재했을 리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 어려운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고 예수를 증거 하다가 순교까지 한 스테반, 바울, 베드로 같은 자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주 Time지에 "우리는 아직도 기적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특집기사가 났습니다. 이런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많이 했습니다. 어설프고 설익은 신학자들의 별 해괴한 얘기를 다 실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2,000년의 역사를 제자들의 착각이나 환상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현실적이고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9회 말 역전 드라마는 확실히 일어났습니다. 부활 없이는 아무도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았을 것이고, 기독교의 시작과 2,000년의 역사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부활이 없이는 십자가라는 저주스러운 사건이 인류 구원의 기쁜 소식으로 선포되는 것, 처참한 패배가 승리의 메시지로 되는 역전을 도저히 설명 못할 것입니다. 부활이 없이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그 기쁨, 고난 속에서도 끊임없이 솟아나는 그 기쁨과 평화를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우며, 이미 세상을 이겼다는 그들의 확신을 이해 못합니다. 부활과 더불어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외쳤던 예수의 메시지가 허위가 아님을 확신했고 새 시대, 메시아의 시대가 열렸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그들의 기쁨의 원천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신문을 열심히 봅니다. 무엇을 보려고 읽는 것입니까? 무슨 소식이 그렇게도 클클하고 궁금해서입니까? 물론 나 개인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뉴스도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나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뉴스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봅니까? 끔찍한 사고 소식? 우울한 이야기? 전쟁? 폭력? 아닙니다. 결국 이 세상이 좋아지는 이야기나, 이 사회가 조금씩이라도 낳아지는 이야기를 보고 싶어서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새로운 세상의 희망찬 뉴스라도 있는가 하고 봅니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취해진 일련의 개혁에 우리 모두 한 때­한 때라고 표현해야 옳겠지요­흥분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신문 읽기가 즐거웠고 다음은 또 무엇을 건드리나 하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남북문제가 꼬이기 시작하더니 흐지부지되면서 현 정부에는 더 이상 크게 바랄 것이 없다는 실망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하튼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골몰하는 사람보다는 사회가 잘 되는 것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 세계가 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것이 보다 신앙적이며 그리스도인의 기쁨에 가까울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기쁨과 희망을 심어주고 키워줄 만한 소식들이 잘 들리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답답하고 우울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실망하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의 근원을 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비결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대하던 하나님 나라의 혁명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아무도 이 혁명을 무효화할 수 없다는 것, 그 어떤 악의 세력도 예수와 더불어 시작한 새 시대를 닫아버릴 수 없다는 것을 믿는 신앙의 확신입니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를 통해 예수를 따른다는 자들이,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 자처하는 교회가 이 혁명에 제대로 동참하지도 못하고 혁명을 배반하는 일도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예수와 더불어 시작한 이 혁명사업, 특히 그의 부활로써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확신을 더해준 이 혁명 사업은 면면히 이어져 언젠가는 예수의 두 번째 오심과 더불어 종결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부활이 왜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토록 기쁜 소식이었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그것이 무슨 사건이기에, 무슨 의미를 지닌 사건이기에 그토록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까? 부활사건은 전후좌우 아무런 맥락도 없는 진공상태에서 갑자기 우발적으로 일어난 기적이 아닙니다. 부활은 그 기적적 사건성 못지 않게 그 의미성이 중요합니다. 부활은 실의와 좌절, 억압과 착취 속에서 신음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학수고대하던 민중들의 바람 속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의인들, 순교자들이 다시금 생명의 빛을 보아야만 한다는 강력한 희망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때, 즉 종말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즉 부활은 옛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의 맥락 속에서 부활사건은 터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새 역사의 시작으로, 그리고 다가올 하나님 나라, 앞으로 올 영광스러운 세계의 확실한 징표로 이해되었으며, 만물을 새롭게 하는 새로운 창조의 징표였던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새 시대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함께 도래할 것이라는 생각이 보편화되어 있던 시대적 분위기를 전제로 해서만 부활사건의 참 의미는 이해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신 일도 없었을 것이다"(고전 15: 12-16)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당시의 정신적 상황을 반영하는 논법입니다. 지금 우리들로서는 그 반대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예수의 부활이 있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구약 시대 예언자들에게도 이미 있었습니다. 그 가장 분명한 예로서, 우리는 에스겔서 37장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에스겔 선지자는 바빌론에 포로로 접혀가서 아무 희망도 없이 죽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활을 환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ruah)은 생명의 원천, 생기로서 비참하게 죽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살리는 부활의 영이요 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온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는 힘입니다.
이 부활의 영이 곧 오늘의 말씀 가운데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바울의 말씀(8:11) 속에는 부활과 관련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시제가 다 언급되고 있음에 특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으로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다고 과거 사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역사가 끝장나고 생명의 새로운 시대, 종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확실한 징표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첫 열매가 되었다고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표현한 것입니다(고전 15: 20). 모두가 그의 뒤를 따라 부활하도록 예수께서 첫 테이프를 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와 더불어 새로운 역사, 생명의 영의 역사가 전개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과 그의 행위 속에서 사람들이 이미 감지했던 하나님 나라의 새 역사가 이제 그의 부활 속에서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로 변하자 사람들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의 부활은 그의 말씀과 그의 삶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해 줌과 동시에 그가 전했던 하나님 나라의 종말적 실재가 확실히 눈앞에 전개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비전이 아닙니다. 막연한 희망이 아닙니다. 역사적 존재 예수의 말씀, 그의 행동, 그의 십자가, 그의 부활이라는 과거의 구체적 사건에 근거한 신앙입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들에게도 선물로 주어져서 이 영으로 우리의 죽을 몸을 살리실 것이라고 미래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 때문에 죽을 이 몸을 살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다시 사는 몸은 더 이상 죄의 몸, 죄의 도구가 되는 몸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몸, 신령한 몸으로 살아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미래의 부활은 현재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 혹은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그것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질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이 단지 과거 사실의 기억만도 아니고 미래의 희망만도 아닌 현재 우리들 안의 현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은 현재 우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부활의 영, 생명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확인되는 역사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영이 이미 우리 안에서 새 생명을 창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이 불어넣은 생기의 영으로 산 영이 된 것 같이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었다고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즉 부활은 과거의 한 인간 예수에게 일어났던 사건의 기억만도 아니요, 앞으로 올 영광에 대한 희망만도 아닌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 속에 확인되는 현실이라는 점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바울은 선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영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나 같은 얘기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새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영, 부활의 영에 의해 더 이상 육에 따라 살지 않고 영에 따라 사는 존재들입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의 옛 사람은 이미 그와 함께 묻혀버렸고 그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로마 6:3-4).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영, 그리스도를 살리신 부활의 영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영입니다. 우리는 이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바울은 말씀하십니다(로마 8:14-16). 이제 부활은 우리와 2,000년이라는 먼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일어난 과거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 있는 부활의 영으로 체험되는 현재화된 과거이며, 먼 훗날에 주어질 미래가 아니라 현재 우리 안에 활동하는 영으로써 확인되는 현재화된 미래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두 우리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영으로써 다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영, 새 생명의 영으로써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 살아 계시는 주님을 확인하며, 앞으로 올 부활도 확신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미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와 더불어 시작된 영의 역사, 부활의 역사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혁명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아무도 주님의 부활을 부정 못할 것입니다. 반면에 교회에, 신자들의 삶 속에서 이 새로운 생명의 역사, 부활의 역사가 지금 확인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부활과 앞으로 올 부활을 아무리 외쳐도 아무도 믿지 않을뿐더러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공허한 일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영적 혁명, 새 생명의 역사는 바로 그의 영을 지니고 사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현실로 확인되어야 합니다. 그 혁명이 완성될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하여 부단히 현실로서 증거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우리는 이미 만물의 부활, 새로운 창조, 새 시대의 시작을 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의 원천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쁨과 함께 우리도 지금부터는 옛 시대에 속한 삶을 청산하고 이 새 시대의 기운에 동참하는 새로운 존재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중생, 거듭남은 예수의 부활을 전제로 하여 비로소 이해되는 현상입니다. 새 시대가 열렸는데 구 시대의 사람, 옛 사람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만물을 새롭게 하는 부활의 영, 생명의 영이 거센 바람처럼 불기 시작하면서 앙상한 뼈들이 즐비하게 늘어진 죽음의 골짜기에 새 기운이 돌기 시작했으며, 생명의 역사, 사랑의 역사,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창조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눈으로 보는 현실인식이며 역사인식입니다. 거듭남이란 바로 이러한 인식에 근거한 것입니다. 중생(born-again)은 부흥사들의 열변을 통해 야기된 감정적 흥분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개인적 회심, 개인적 결심이나 결단이 아니라, 예수와 더불어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역사 인식에 근거한 결단입니다. 중생이란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시작된 새 역사, 새 시대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서 나의 변화된 삶 속에서 매일 일어나는 기적이어야 하며 나의 안에서 매 순간 확인되는 현실이어야 합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 있어서 바울의 말씀대로 우리의 겉 사람은 부패해 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변화가 있어야 미래의 부활도 보장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삶을 날마다 새롭게 할 수 있는 힘입니다.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시작한 부활의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계속 이어지다가 마지막 날에 모든 이들의 현실로 누구도 부정 못하게 들어 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봄은 새 생명이 움트는 계절입니다. 이 생명의 계절인 봄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살아나신 주님의 부활을 기리는 절기를 지키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여 날마다 우리 안에서 부활의 기적을 확인하며 기쁨으로 살아갑시다. 그러면 죽음의 역사가 완전히 종말을 고하고 만물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지음을 받을 때 우리도 더 이상 썩지 않을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미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기쁨, 현재 날마다 변하고 있는 나의 삶에서 오는 기쁨, 그리고 앞으로 올 부활에 대한 희망찬 기쁨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살아갑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들로부터 이 큰 기쁨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어떠한 시련이나 슬픔, 어떠한 좌절이나 고통, 죽음마저도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을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고전 15: 56-57).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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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사도행전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행17:16-34  길희성 형제  2007-12-17 2135
364 레위기 하나님의 땅과 사람의 자유 레25:10  이풍 형제  2007-12-17 1860
363 히브리서 저는 다리와 곧은 길 히12:13  김병종 교수  2007-12-17 2091
362 요한복음 예수사건① : 물동이를 버린 사마리아 여인 요4:7-30  한완상 형제  2007-12-17 4038
361 창세기 광복 50주년과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신앙 창1:16-18  최만자 자매  2007-12-17 2015
» 로마서 그리스도인의 기쁨 롬8:9-11  길희성 형제  2007-12-17 2300
359 누가복음 고난의 역사와 구원의 기쁨 눅2:14-23  이재정 신부  2007-12-17 2123
358 고린도후 상대적 불행과 절대적 행복 고후2:8-11  한완상 형제  2007-12-17 2827
357 마태복음 믿고 구하라 마21:22  강종수 목사  2007-12-16 2150
356 요한복음 위기와 기회 요2:1-11  한태완 목사  2007-12-15 2557
355 누가복음 종의 의무 눅17:7-10  이현주 목사  2007-12-13 2314
354 로마서 죽음의 몸 롬7:7-25  길희성 형제  2007-12-13 2006
353 누가복음 화해적 코이노니아를 위한 하나 더 눅15:1-2  김흡영 목사  2007-12-13 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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