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롬1:16-17 |
|---|---|
| 설교자 : | 길희성 형제 |
| 참고 : |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
믿음으로 사는 삶
롬1:16-17
1517년 10월 31일은 교회사에 있어서, 아니 전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일대 대지진이 일어난 날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큰 천재지변이 일어났기 때문도 아니고, 불란서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 같은 큰 정치적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의 한 수도승이자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독일 동북부 지방의 빗텐버르그 대학에서 성서를 가르치던 한 무명의 학자가, 당시 로마 교황청이 베드로 사원을 짓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에 항의하는 95개조로 된 글을 빗텐버르그 성의 교회 문에 부침으로써 엄청난 파장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당시 발달된 인쇄술로 인해 이 글은 날게 돋친 듯 전 유럽으로 전파되었으며, 인간의 양심과 자유를 억누르고 있던 로마의 교권은 다시 회복되지 못할 치명적 상처를 입고 교회는 분열되었으며, 서양세계는 중세를 마감하고 혁명과 해방과 자유의 역사가 펼쳐지는 근세로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다른 아무 것도 안중에 없었으며 오직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영혼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만을 안고 치열하게 고민하던 한 젊은 수도승의 손에 의해 전 유럽의 역사, 그리고 전 세계의 역사가 바뀌게 되는 기막힌 순간이었습니다.
말틴 루터의 단 하나의 관심은 하나님과 인간의 올바른 관계는 무엇이냐,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엇을 원하는 존재이며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이었습니다. 오랜 영혼의 방황과 치열한 싸움 끝에 그에게 흔들릴 수 없는 영혼의 평화를 가져다 준 것이 바로 로마서 1장 17절의 "의로운 자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 혹은 번역에 따라서는 "믿음으로 의로운 자는 살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본래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으로서, 바빌로니아에 의해 당하는 자기 민족의 고통을 보면서 고민하는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로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박국의 호소(1:13)에, 그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2: 2-4)을 보면 영어 번역은 사뭇 다르지만 "보아라, 영혼이 올곧지 못한 자는 망할 것이나, 의로운 자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니, 그 사이에 의로운 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의 구원의 때를 기다리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을 가지고서 복음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주일이자 지난 일년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감사주일로 지키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1장 16-17절 두 절에는 로마서 전체의 사상, 아니 그리스도교의 핵심 사상이 다 들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먼저, 당시 세계의 중심지 로마 전도여행을 간절히 원하면서 보내는 이 편지에서, 별로 잘 알려지지도 않은 시골 전도사 바울, 그것도 12 제자 축에 들지도 않았던 그였지만, 그는 당당하게 자기를 소개하면서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예수의 역사, 예수사건의 이야기를 가리킵니다. 그의 가르침과 삶, 그의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가 곧 바울이 말하는 복음입니다. 로마 사람들이여, 당신네들이 비록 세계 문명의 중심지에 산다고 하지만 이 팔레스타인 한 구석배기 나사렛의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는 반드시 듣고 제대로 이해해야만 하며, 나는 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고 성별된 하나님의 사도이며 예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로마 1:1). 그러면 이 복음, 이 예수 이야기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구원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의 말씀과 행적, 그의 십자가와 부활사건 속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가 드러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이란 우선 무엇보다도 앞으로 올 미래의 종말적 실재, 곧 앞으로 실현될 새로운 세계인 하나님나라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예수사건인 복음은 아직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고 있는 이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보장해 주는, 우리를 그리러 이끌어 주는 하나님의 능력 혹은 힘(dunamis)이 가시적으로 나타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그것을 자랑하고 선포하고 전파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이며 어디에 나타나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나라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 즉 예수사건에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힘을 복음 이외의 다른 어떤 가치에서 먼저 찾아서는 안 됩니다. 기적, 치병, 특별한 은사, 세상적 출세나 축복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찾는 일이 허다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예수사건 자체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많은 이적을 행하시고 귀신을 내쫓고 병자들을 고치셨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구원, 즉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선포하고 증거 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 곧 예수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사건이며 우리로 하여금 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결정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은 이미 예수사건과 더불어 시작된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의 확신과 감사와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사건을 누구나 다 인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눈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유대사람 그리고 헬라사람(곧 이방인)에 이르기까지 믿는 사람 누구에게나 구원을"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5절에 보면: '믿고 복종하게 하려고' 라는 말이 나옵니다. 믿음이란 예수사건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인정하고 거기에 자신의 삶을 맡기는 순종의 행위, 즉 감사로써 복음에 아멘 하면서 자신의 어떤 것도 주장하거나 내세우지 않고 자신을 내맡기는 행위입니다. 믿음이란 신뢰와 순종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힘과 지혜, 사랑과 은혜에 자신의 삶을 의탁하고 자신의 삶의 근거요 기반으로 삼은 행위가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이 예수사건의 이야기를 상고하며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하며,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유대 사람에게 먼저입니까? 예수사건이 하나님의 구원과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교의 종교사를 배경으로 하여, 즉 구약적 맥락에서 발생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사건은 단지 유대인만을 위하여 일어난 사건이 아니며, 바울은 이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 스스로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로 자처하며 온갖 고초를 겪은 사람입니다. 예수사건은 전 인류를 사랑하고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나타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맡기는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안겨 주는 하나님의 힘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울은 다른 말로 표현하여 '하나님의 의'라고 하며, 이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에게는 구원이란 의로움 없이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담겨진 율법을 충실히 지킴으로서, 아니면 양심에 따라 부끄러움 없이 사는 자만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의로움이며, 바울은 예수를 알기 전에는 바로 이러한 의로움을 얻고자, 다시 말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고자 무진 애를 쓰다가 도저히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절망에 빠지게 된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고자 하면 할 수록 더 죄악을 범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에 바울은 절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그는 예수를 만나서 지금까지 자기가 이해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깨닫게 되고는 율법에 의해 얻어지는 의로움, 자신의 도덕적 노력에 의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노력이 전적으로 부질없는 짓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조금의 실수도 용납 안 하는 엄한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아니며, 우리들에게 모범생이 되기를 강요하는 존재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며 참회하는 자를 용서하시며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분임을 예수를 통해 그는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과도 같은 은총으로서의 의로움입니다. 로마서 3장 21절에서는 이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율법과는 별도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며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의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의, 자신의 의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제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이러한 하나님의 의로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단 한 가지는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고자 하는 되지도 않을 노력을 하면서 교만에 빠지고 남을 업신여기는 것보다는 겸손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를 받아들이면서 은총의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던지는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의가 복음, 즉 예수사건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믿었으며, 이것이 곧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의라는 개념은 구약성서에서 대체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로움을 뜻하는 말로서 하나님의 속성 내지 성품을 가리키는 말이며, 다른 하나는 보다 적극적으로 정의와 의로움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하나님의 활동을 가리킵니다. 이 후자의 의미는 예언자들과 시편에 자주 나타나는데(이사야 42:1-4, 51:5, 시 24:5, 31:1 등), 바울도 이러한 뜻을 계승하여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으로서 억울한 자, 약한 자를 도와서 그들의 억울함을 들어주시고 정의를 세워주시며 그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시는 분,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돌보아 주시는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의로움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자비와 구원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곧 하나님의 구원이요 은총입니다. 이러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바로 예수의 복음에 결정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말하기를, 이러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인간이 취할 유일한 태도는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뿐이라고 합니다.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는 의로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믿음을 통해서 믿음에 이르도록 나타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믿음을 통해서 믿음에 이르도록'(영역: through faith for faith)이라는 말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지며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결론짓기를,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하박국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산다'는 말은 생명을 얻는다라는 말, 곧 구원을 얻는다라는 말이며, 의로운 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는 오직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뜻을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내려면 아예 영어 성서에서처럼 "믿음을 통해 의로운 자는 살 것이다"(He who through faith is righteous shall live)라고 번역해도 무방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의를 받아들이는 믿음을 통해서 의로워진 사람은 살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똑같은 말을 갈라디아서 3장에서도 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는 개념과 율법으로 의롭다는 개념, 그리고 믿음으로 사는 것과 율법으로 사는 것을 대비하면서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을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 여겼다는 창세기의 말씀(창15: 6)을 바울은 인용하면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야말로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그와 같이 축복을 받을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 라는 약속(창세기 12: 3)은 오래 전부터 이방인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들이 되어 구원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이며 아브라함을 통해 복음의 진리를 미리 보여 주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이 복음은 그리스도에 와서 성취되었다고 바울은 논증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며, 믿음으로 사는 자는 모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하신 축복을 누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 이후, 하박국 선지자 이후, 그리고 예수사건 이후에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구원의 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이 믿음에 의해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의는 자기자 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 받아들인 하나님의 의로움뿐이라는 것이 바울의 증언입니다. 내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자비와 은총으로써 선물로 주신 의 때문에 우리의 살 길, 우리의 구원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 바울의 증언입니다.
그러면 이 간단한 진리의 말씀이 어떻게 한 무명의 수도승 루터로 하여금 전 유럽세계를 뒤흔들어 놓고 중세의 종말을 가져오게 하였는지 의문이 갑니다. 도대체 인간이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말이 무어가 그렇게 대단한 말이기에 중세의 그 엄청난 교권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었단 말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루터가 바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관계에 대한 가장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진리를 재발견, 재확인했기 때문인데 그 근본적인 진리란 곧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이라는 간단한 사실입니다. 남녀노소의 차이, 사회적 귀천의 차이, 성직자와 평신도의 차이 할 것 없이, 그리고 수도원에서 도를 닦는 수도자나 시장에서 장사하는 장사꾼을 막론하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와 공로를 주장하거나 자랑할 수 없는 죄인들로서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선물인 하나님의 의 외에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설 길이 없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세상적 차별, 도덕적 차별, 그리고 심지어 종교적 차별마저도 뛰어 넘은 철저한 평등주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 사이에 발견되는 온갖 종류의 차이란 오십보 백보이며 별것 아니라는 것, 그리고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는 내세울 것 없는 똑같은 죄인들이라는 것이며 우리 모두는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고 여기서부터 우리 삶을 출발하고 영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적 차별을 부정하는 근대적 평등주의가 바로 여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물론 근대적 평등주의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총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이라는 신앙적 평등주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근대적 평등주의는 인간의 권리와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사회적, 정치적 평등주의임에 비하여 신앙적 평등주의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주장을 하거나 특권을 가질 수 없음을 말하는 죄의식과 자기부정에 바탕을 둔 종교적, 도덕적 평등주의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종교적 평등주의를 통해 중세적 질서가 무너졌기 때문에 비로소 근대적, 계몽주의적 평등주의는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며, 하나님의 뜻으로 절대시되었던 중세의 교권과 위계질서, 온갖 차별적 특권주의와 귀족주의사회적, 종교적를 타파하지 않는 한 근대적인 사회 정치적 평등주의는 출발할 수 없었습니다. 교황이든 사제이든 황제나 왕이나 평신도이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다 똑같이 그의 자비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라는 정직하고 단순한 진리가 교황과 사제들의 엄청난 권위를 흔들어 놓았고, 세간과 출세간의 장벽을 허물었으며, 수도승들의 위선을 여지없이 폭로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참회와 겸손이지 자기자랑과 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살길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한없는 용서와 사랑으로 우리를 긍정하시는 하나님의 의와 은총을 받아들이는 믿음이지 끊임없는 자기변명과 정당화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평화를 얻는 길은 아빠 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난 모르겠다고 응석을 부리면서 자기를 내맡기는 어린아이와 같은 무조건적 신뢰이지 통하지도 않을 자기 변명과 자기 정당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온갖 자기 성화의 시도가 아니라는 것을 인간 루터는 오랜 수도원의 수도생활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던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무엇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설 것인가에 대해 바울과 루터에 의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가져 갈 것이 없다는 것,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돈이나 명예, 학식이나 권력은 물론이요, 충실한 교회생활이나 종교생활, 우리들의 선행이나 덕, 신학적 지식이나 금욕주의나 피눈물나는 고행도 다 하나님 앞에서는 소용없고, 교회도 사제도, 성례전이나 그 밖의 어떤 의례도 소용없으며, 우리를 위해 간구해 준다는 성인들과 성모 마리아의 중보기도나 그들이 우리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넘치는 초과공로(supererogation)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방패막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은총의 하나님 앞에 자신을 맡기는 단순한 믿음 외에는 하나님 앞에 설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란 어떤 외적 제도나 의례도 아니며 규율이나 율법도 아니며, 지식이나 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향한 나의 마음의 태도, 내면의 신앙뿐임을 루터는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종교에 있어서 부차적이며 껍데기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흔히 진정한 신앙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는 것입니다. 종교는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직접적 대면관계이며, 이 대면에서 나를 감싸주고 덮어줄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 그리스도 예수뿐이며, 이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는 궁극적으로 오직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양심의 문제, 다른 사람은 얼마든지 속이되 하나님과 나 자신만은 결코 속일 수 없는 양심의 문제로서, 이 양심 앞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믿는 믿음 외에는 끝내 평안을 얻을 길이 없다는 진리를 루터는 바울에게서 발견한 것입니다.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이 확신, 이 평화 하나만을 가지고서 루터는 엄청난 중세의 교권, 그 허구와 횡포 앞에 맞섰던 것입니다. 황제 챨스 5세 앞에 소환되어 자기의 견해를 취소하라는 요구 앞에 선 그가 한 유명한 말, "Here I stand; I can do no other." 에서 우리는 근대적 인간의 자유를 향한 또 하나의 거보를 발견합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앗아갈 수 없는, 그 어떤 권위나 제도나 전통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야말로 루터이래 개신교 전통이 인류역사에 기여한 최대의 공헌일 것입니다. 한 개인이 비록 거대한 제도나 조직, 권위나 전통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무력한 존재이지만, 아무도 그의 신앙 양심의 증언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을 루터는 웅변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겸손한 신앙이 엄청난 전통과 권위에 대항하는 무서운 힘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루터의 정신을 이어받아 정의와 평화를 위해 투쟁하는 지구상의 수많은 인권 운동가들, 양심수들의 출현이 가능했으며 지난 30년간 서슬 퍼런 군사독재 하에서도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목숨을 내걸고 온갖 육체의 고통을 이기면서 확신에 찬 투쟁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천억 비자금을 숨기고도 결정적인 단서가 드러나기 전까지 양심의 가책 하나 없이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일삼는 노씨의 태도는 양심 하나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당해야 했던 사람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모독일 뿐만 아니라, 지금도 쥐꼬리만한 양심 하나 때문에 크고 작은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보통 사람'들의 가슴을 멍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영혼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까? 오직 모든 짐을 자백하고 털어놓는 믿음뿐이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요, 바울과 루터의 결론입니다. 믿음이란 나의 공로, 나의 의로움을 내세우기 전에 하나님의 은총과 그의 의로움에 감사하는 행위이며, 나의 노력과 나의 성취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먼저 인정하고 그것을 삶의 출발점으로 삼는 행위입니다. 나의 의, 나의 옳음, 나의 도덕적 성취로써 나의 인생의 값어치와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부질없는 수고를 포기하고 하나님에 의해 이미 주어진 것즉 그의 말씀, 그의 복음에 나타난 그의 능력과 의로움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나의 삶의 기반으로 삼는 행위입니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한 달 동안이나 여행하는 데 가진 돈이 얼마 없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먹을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여행하다가 여행이 끝날 때쯤 되어서야 자기가 산 티켓 속에 음식값이 이미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어처구니없는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내시면서 인생의 티켓을 발부해 주신 하나님은 그 티켓 안에 이미 우리가 살기에 충분한 모든 것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가장 근본적인 사실을 모르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노심초사하며, 자기 삶의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온갖 꾀를 부리며 수천억의 비자금을 숨겨두었다가 자기 꾀에 자기가 걸려 들어가 패가망신하는 것이 어리석은 우리 인생들입니다. 믿음이야말로 정녕 불필요한 인생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사는 쉬운 멍에요, 가벼운 짐을 지고 사는 비밀인데도 이 쉬운 것이 역설적으로 제일 어렵기도 합니다. 내가 나의 인생의 주인이 되려는 나의 알량한 자존심과 끈질긴 주체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 믿음도 궁극적으로는 내가 만들 수 있는 나의 노력, 또 하나의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인 것입니다. 믿음은 성령의 은사이며, 우리는 이 믿음을 위해 늘 자신을 성찰하면서 성령께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감사주일을 맞아 우리가 제일 감사해야 할 일은 먼저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그의 능력과 사랑을 보여주셨으며, 우리에게 믿음의 은사를 허락하시어 믿음의 비밀과 신비를 알게 하시고, 복음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삶을 살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그리스도인의 최대 축복이요 행복입니다. 오직 은총, 오직 믿음,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한 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영원한 진리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