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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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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롬8:5-7 |
|---|---|
| 설교자 : | 인재웅 형제 |
| 참고 : |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
오늘 새길교회에 와서 여러 성도님들과 함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도록 기회를 허락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본문에는 육체를 쫓는 사람과 영을 쫓는 사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쫓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영을 쫓는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육체를 쫓는 사람은 사망에 이르고, 영을 쫓는 사람은 생명과 평안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육체 혹은 육신은 인간의 본성을 말합니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인간은 3개의 영역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즉 이성에 의해 지배를 받는 자아(ego)와 초자아(super ego) 그리고 감성의 지배를 받는 원초적 본능(id)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큰 원인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자유의지는 상황에 따라 감성편을 따르기도 하고 이성의 명령에 복종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또는 보람되고 고상하게 만들 수 있는 반면에 스스로를 학대도 하고 무절제하게 날뛰다가 심지어는 자살도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조종하는 것이 정상적이지만 때로는 제 3자에 의해 조종을 당하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됩니다. 특히 신흥종교의 교주는 자기를 따르는 신도들을 제 마음대로 조종하는 예를 심심찮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육신의 욕심에 따라 사는 경우입니다. 노태우씨 그리고 전두환씨 두 전직 대통령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들은 분명히 이성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육사에 입학해서 훌륭한 군인이 되고자 교육을 받았고 고급장교로서 본연의 군무에 종사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박정희 군사독재가 군인의 총성에 의해서 종지부를 찍고 민주화로 접어드는 역사의 갈림길에 공연히 뛰어든 인간들입니다. 분명히 육신의 욕심을 앞세운 신군부 세력들은 군무를 일탈해서 정치로 개입한 어정쩡한 사람들입니다. 민주주의를 속시원하게 실현할 수 있는 역사의 계기를 여지없이 차단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집권한 전두환씨와 노태우씨는 결국 국민 앞에 눈물을 보이는 부끄러운 대통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통령이었다는 것이 못내 부끄럽고 한탄스럽다"라고 노태우씨는 텔레비전 앞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국민들의 용서를 바랬습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만큼의 검은 돈을 거두어 제 배를 채우는 염치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거기다가 부정부패는 물론, 군사쿠데타의 원흉으로 가장 악랄하고 불쌍한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두 전직 대통령은 분명히 프로이드가 말하는 원초적 본능의 지배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자아도 조절 못하고 본능의 세계에서 헤엄치며 산 사람들입니다. 인간으로 보기에는 좀 모자라는 동물적 감성의 지배에 매달려 산 사람들입니다. 비록 이들은 교도소와 경찰병원에 감호되어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한 인격으로서는 벌써 죽은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육체를 따라 산 결과로 이미 죽음을 살아생전에 경험하고 있는 두 전직 대통령들입니다.
그래서 자아를 의식하는 것, 제 분수를 아는 것, 그리고 제 기능을 제대로 이행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자아가 스스로를 일탈할 때 인간은 미치고 맙니다. 미친 사람은 제 정신이 나간 사람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아를 상실한 세대(世代)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스스로의 몫을 남에게 떠맡기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충실한 인격이나 권위마저도 때로는 정당의 총재에게, 직장의 우두머리에게, 종단의 대표에게 고스란히 내 맡기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 기계처럼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세태를 봅니다. 상식에 비추어 보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선거를 앞 둔 요즈음 번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인간의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결과인 듯 합니다. 이제까지 쌓아 온 인격이나 경력 등이 이성의 지배를 벗어나서 감성의 조종을 당하기 때문인 듯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은 상식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사고의 경향과 생활의 패턴을 갖기 마련입니다. 동물은 잘 길들여져 있지 않는 한 예측하기 곤란한 행동들을 하기 마련입니다. 만일 인간들 역시 본능의 지배를 받게 되면 원초적 충동에 따라 예측하기 힘든 일들을 서슴없이 하게 될 것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불확실성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욕심에 따라 살다가 죽는 인간이 되고 말 것 같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삶을 사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살면 생명과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인간의 본성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따라 살게 되면 생명과 평안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어의 charisma에서 온 charism인데 본 뜻은 은혜(grace)입니다. 그래서 은혜로 말미암아 은사가 주어진 경우를 로마서 12장 6절부터 8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면하는 자면 권면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charisma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가능하다고 봅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칸트의 경우 순수이성을 가장 대표적인 품성으로 내세우고 지고의 선을 추구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가 현재와 연관되어 지금 여기에 존재하듯 미래 역시 벌써 와 있다는 판단으로 인간의 순수 이성에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성은 과거에 그랬듯이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 하지만, 과연 자아나 초자아에 따라서만 조종될 수 있을는지는 모른다는 궁금증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인간다움이란 곧 이성과 도덕성을 함께 지닐 때를 두고 말합니다. 요즈음 우리는 이성을 잃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아니 도덕성은 더더구나 찾아보기 힘든 현실입니다. 그래서 인간다운 인간을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만물의 영장으로 불리는 인간들에게 영성이 없어져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영성을 지니고 있다면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모두에게 주어진 charisma를 본래의 charisma대로 사용하게 된다면 사회는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charisma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너무나 당당하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charisma가 끼여들 틈도 찾지 못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영이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분수에 따라 골고루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생명과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게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들을 위하여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마치 김지하 시인이 오적이라는 시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던 도둑이 연상됩니다. 김지하는 오적을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군장성, 그리고 장관들로 요약하고 이들을 여지없이 비판하였습니다. 도둑들은 결국 민중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무고한 사람을 가두거나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우리들은 몸소 체험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들이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이신 예수입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서 대신 속죄해 주셨으며, 죽은 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와 같은 사실을 믿게 만들고, 생명과 평안을 얻게 만듭니다.
그런데 예수를 구주로 받아드리는 주체는 나입니다. 나는 그를 받아드릴 수도 있고, 또 거부할 수도 있는 이성이 있습니다. 만약 이성의 판단이 감성 쪽을 택하게 될 경우는 인간의 본성에 따라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쪽으로 기우러지기 때문에 온갖 좋지 못한 본능의 노예로 전락되고 맙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냥 쉽사리 포기하고는 운명의 장난이라고 결론짓고 맙니다. 그러나 운명이라는 단어로 모든 것을 결론 지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만약 내가 책임이 있는 나라면 좀 더 분명한 판단과 책임 있는 결단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속담에 는 말이 있습니다. Input이 잘못되면 Output은 엉뚱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심을까요? 육체를 따라 육신의 일을 심으면 결국 죽음밖에 얻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을 쫓아 살게되면 생명을 얻게되고 평안으로 이어지는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제가 신학을 공부할 때 경험한 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가 들어간 class에 AIDS 환자가 함께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AIDS환자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자기 자신에 관해서 털어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원만하게 가정생활과 교회생활, 그리고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을 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인간의 본성에 쫓겨서 결국 AIDS라는 무서운 병에 걸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가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살을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는 제 스스로가 인간의 본성을 쫓아 살았던 과거를 후회하게 되었고 순순히 자업자득이라는 체념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 분은 인간의 본성을 뛰어넘는 영성을 얻고자 기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서 새로운 영성을 스스로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분은 하루하루 보통사람 보다 훨씬 빠르게 죽어 가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분과 교실에서 만나게 되면 어떤 신비한 경험을 얻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분으로부터 받는 인상이나, 태도나, 행동 모두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평안을 안겨주는 기분을 느끼게 만듭니다.
물론 AIDS 환자인 이 분은 인간의 본성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죽음이 앞당겨 온 처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꼭 같은 이 한사람에게서 또 영성이 배어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멀쩡하면서도 영성이 없는 우리들에게 생명의 고귀함과 애착과 또 평안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지금쯤 그 분은 벌써 세상을 뜨고 말았을 것입니다. 육체의 본성에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분이 AIDS에 걸리고 난 후 살았던 마지막 삶은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이 평화로웠고 동료 학우들에게 너그러운 평안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사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가정과 사회와 온 누리에 꽉 차게 되었으면 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오늘 본문에는 육체를 쫓는 사람과 영을 쫓는 사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쫓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영을 쫓는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육체를 쫓는 사람은 사망에 이르고, 영을 쫓는 사람은 생명과 평안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육체 혹은 육신은 인간의 본성을 말합니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인간은 3개의 영역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즉 이성에 의해 지배를 받는 자아(ego)와 초자아(super ego) 그리고 감성의 지배를 받는 원초적 본능(id)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큰 원인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자유의지는 상황에 따라 감성편을 따르기도 하고 이성의 명령에 복종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또는 보람되고 고상하게 만들 수 있는 반면에 스스로를 학대도 하고 무절제하게 날뛰다가 심지어는 자살도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조종하는 것이 정상적이지만 때로는 제 3자에 의해 조종을 당하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됩니다. 특히 신흥종교의 교주는 자기를 따르는 신도들을 제 마음대로 조종하는 예를 심심찮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육신의 욕심에 따라 사는 경우입니다. 노태우씨 그리고 전두환씨 두 전직 대통령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들은 분명히 이성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육사에 입학해서 훌륭한 군인이 되고자 교육을 받았고 고급장교로서 본연의 군무에 종사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박정희 군사독재가 군인의 총성에 의해서 종지부를 찍고 민주화로 접어드는 역사의 갈림길에 공연히 뛰어든 인간들입니다. 분명히 육신의 욕심을 앞세운 신군부 세력들은 군무를 일탈해서 정치로 개입한 어정쩡한 사람들입니다. 민주주의를 속시원하게 실현할 수 있는 역사의 계기를 여지없이 차단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집권한 전두환씨와 노태우씨는 결국 국민 앞에 눈물을 보이는 부끄러운 대통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통령이었다는 것이 못내 부끄럽고 한탄스럽다"라고 노태우씨는 텔레비전 앞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국민들의 용서를 바랬습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만큼의 검은 돈을 거두어 제 배를 채우는 염치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거기다가 부정부패는 물론, 군사쿠데타의 원흉으로 가장 악랄하고 불쌍한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두 전직 대통령은 분명히 프로이드가 말하는 원초적 본능의 지배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자아도 조절 못하고 본능의 세계에서 헤엄치며 산 사람들입니다. 인간으로 보기에는 좀 모자라는 동물적 감성의 지배에 매달려 산 사람들입니다. 비록 이들은 교도소와 경찰병원에 감호되어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한 인격으로서는 벌써 죽은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육체를 따라 산 결과로 이미 죽음을 살아생전에 경험하고 있는 두 전직 대통령들입니다.
그래서 자아를 의식하는 것, 제 분수를 아는 것, 그리고 제 기능을 제대로 이행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자아가 스스로를 일탈할 때 인간은 미치고 맙니다. 미친 사람은 제 정신이 나간 사람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아를 상실한 세대(世代)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스스로의 몫을 남에게 떠맡기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충실한 인격이나 권위마저도 때로는 정당의 총재에게, 직장의 우두머리에게, 종단의 대표에게 고스란히 내 맡기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 기계처럼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세태를 봅니다. 상식에 비추어 보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선거를 앞 둔 요즈음 번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인간의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결과인 듯 합니다. 이제까지 쌓아 온 인격이나 경력 등이 이성의 지배를 벗어나서 감성의 조종을 당하기 때문인 듯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은 상식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사고의 경향과 생활의 패턴을 갖기 마련입니다. 동물은 잘 길들여져 있지 않는 한 예측하기 곤란한 행동들을 하기 마련입니다. 만일 인간들 역시 본능의 지배를 받게 되면 원초적 충동에 따라 예측하기 힘든 일들을 서슴없이 하게 될 것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불확실성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욕심에 따라 살다가 죽는 인간이 되고 말 것 같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삶을 사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살면 생명과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인간의 본성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따라 살게 되면 생명과 평안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어의 charisma에서 온 charism인데 본 뜻은 은혜(grace)입니다. 그래서 은혜로 말미암아 은사가 주어진 경우를 로마서 12장 6절부터 8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면하는 자면 권면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charisma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가능하다고 봅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칸트의 경우 순수이성을 가장 대표적인 품성으로 내세우고 지고의 선을 추구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가 현재와 연관되어 지금 여기에 존재하듯 미래 역시 벌써 와 있다는 판단으로 인간의 순수 이성에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성은 과거에 그랬듯이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 하지만, 과연 자아나 초자아에 따라서만 조종될 수 있을는지는 모른다는 궁금증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인간다움이란 곧 이성과 도덕성을 함께 지닐 때를 두고 말합니다. 요즈음 우리는 이성을 잃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아니 도덕성은 더더구나 찾아보기 힘든 현실입니다. 그래서 인간다운 인간을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만물의 영장으로 불리는 인간들에게 영성이 없어져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영성을 지니고 있다면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모두에게 주어진 charisma를 본래의 charisma대로 사용하게 된다면 사회는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charisma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너무나 당당하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charisma가 끼여들 틈도 찾지 못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영이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분수에 따라 골고루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생명과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게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들을 위하여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마치 김지하 시인이 오적이라는 시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던 도둑이 연상됩니다. 김지하는 오적을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군장성, 그리고 장관들로 요약하고 이들을 여지없이 비판하였습니다. 도둑들은 결국 민중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무고한 사람을 가두거나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우리들은 몸소 체험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들이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이신 예수입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서 대신 속죄해 주셨으며, 죽은 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와 같은 사실을 믿게 만들고, 생명과 평안을 얻게 만듭니다.
그런데 예수를 구주로 받아드리는 주체는 나입니다. 나는 그를 받아드릴 수도 있고, 또 거부할 수도 있는 이성이 있습니다. 만약 이성의 판단이 감성 쪽을 택하게 될 경우는 인간의 본성에 따라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쪽으로 기우러지기 때문에 온갖 좋지 못한 본능의 노예로 전락되고 맙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냥 쉽사리 포기하고는 운명의 장난이라고 결론짓고 맙니다. 그러나 운명이라는 단어로 모든 것을 결론 지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만약 내가 책임이 있는 나라면 좀 더 분명한 판단과 책임 있는 결단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속담에 는 말이 있습니다. Input이 잘못되면 Output은 엉뚱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심을까요? 육체를 따라 육신의 일을 심으면 결국 죽음밖에 얻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을 쫓아 살게되면 생명을 얻게되고 평안으로 이어지는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제가 신학을 공부할 때 경험한 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가 들어간 class에 AIDS 환자가 함께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AIDS환자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자기 자신에 관해서 털어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원만하게 가정생활과 교회생활, 그리고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을 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인간의 본성에 쫓겨서 결국 AIDS라는 무서운 병에 걸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가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살을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는 제 스스로가 인간의 본성을 쫓아 살았던 과거를 후회하게 되었고 순순히 자업자득이라는 체념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 분은 인간의 본성을 뛰어넘는 영성을 얻고자 기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서 새로운 영성을 스스로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분은 하루하루 보통사람 보다 훨씬 빠르게 죽어 가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분과 교실에서 만나게 되면 어떤 신비한 경험을 얻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분으로부터 받는 인상이나, 태도나, 행동 모두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평안을 안겨주는 기분을 느끼게 만듭니다.
물론 AIDS 환자인 이 분은 인간의 본성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죽음이 앞당겨 온 처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꼭 같은 이 한사람에게서 또 영성이 배어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멀쩡하면서도 영성이 없는 우리들에게 생명의 고귀함과 애착과 또 평안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지금쯤 그 분은 벌써 세상을 뜨고 말았을 것입니다. 육체의 본성에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분이 AIDS에 걸리고 난 후 살았던 마지막 삶은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이 평화로웠고 동료 학우들에게 너그러운 평안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사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가정과 사회와 온 누리에 꽉 차게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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