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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롬14: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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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길희성 형제 |
| 참고 : |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
"고향 길이 고생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해마다 추석이 돌아오면 일제히 고향을 찾아 나서는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고 도시는 공동화됩니다. 올해는 경제 사정도 좋지 않고 무장공비 사건마저 터져서 사회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어둡지만 그래도 고향을 찾는 마음만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고생길이라 해도 고향을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설레는 것이 고향인가 봅니다. 그래서 고생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고 즐거움으로 알고 찾는 모양입니다. 어떤 이는 고속도로에서 한 낮을 보내는 것 자체를 고생이라 생각하면 고생이지만 고향을 향해 가는 길이기에 그 자체도 즐거움이라고 털어놓는 것을 텔레비죤 인터뷰에서 들은 일이 있습니다. 사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에 고향을 둔 사람이 보기에는 갈 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저는 명절 때만 되며 선물꾸러기 챙겨들고 고향을 찾는 사람이 제일 부럽습니다. 고향 길이 아무리 고생길이라 해도, 찾아갈 수 있는 고향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부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고향이 뭐기에 그처럼 고생길을 마다 않고 가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고향은 물론 자기가 태어난 곳이고, 자라난 곳입니다. 어릴 때 친구가 아직 남아 있기도 하며, 자기가 다니던 학교가 있고, 동창과 선후배, 그리고 행복한 사람의 경우는 무엇보다도 부모님이 아직 살고 계시는 곳입니다. 고향에 대한 추억이 다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지만, 세월이 약이라고 나쁜 기억들은 잊어지고 아름다운 기억들만 아련하게 남습니다. 하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찾아갔다가 실망을 하는 수도 많습니다. 옛 친구들과 젊은이들은 모두 서울로 떠나고 노인들만 쓸쓸히 마을을 지키며 앉아 있는 고향은 정녕 우리가 그리는 고향은 아닙니다. 젊은이들이 떠나니 어린아이들이 없어서 예전에 다니던 학교마저 폐교가 되어 건물만 썰렁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노라면 마음은 허전해지고 슬퍼지기까지 할 것입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데, 사람과 건물만 변하겠습니까? 개발이라 뭐라 해서 어릴 때 뛰어 놀던 동산은 온데 간데 없고 물장구치며 물고기 잡던 개울과 강은 오염되어 쳐다보기가 민망스러울 정도가 되었으며, 한가하던 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멋대가리 없는 공장 건물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서서 시골 풍경을 해치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것은 좀 낳은 편이고, 옛 고향의 모습이 아예 완전히 사라져 버려 실제 고향이 없는 거나 다름없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향은 마음의 고향이지 정작 가보면 실망한다고들 말합니다. 고향만 변했습니까? 우리들도 변했지요.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진 도시 사람들이 오랜만에 고향이라고 시골집을 찾아갔다가는 하루가 멀다하고 불편하다 하여 돌아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 고향은 실재하지 않는 허상입니다. 우리가 고향을 자꾸 읊조리는 것은 어찌 보면 젊은이들이 다 떠나고 노인들만 남은 피폐해진 농촌의 현실을 호도하기 위한 것일는지도 모릅니다. 또 옛날 지긋지긋하게 가난했던 농촌의 생활은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지금은 배부른 도시인이 되어 목가적인 전원 풍경만 읊어대는 것 또한 하나의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을 해도 사람들은 고향을 찾습니다. 현실의 고향이 없으면 마음속에라도 그려 놓고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인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향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물들에게는 귀소본능이 있고 회귀본능연어와 같은 물고기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수만리나 떨어져 있는 자기가 태어난 곳, 산란된 곳으로 돌아와서 알을 낳는다고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고향에 묻는 것도 뿌리로 다시 돌아가는 회귀본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고향을 찾는 것은 자기 존재의 근원, 출처, 그 뿌리를 찾는 일이며, 그 뿌리란 결국 따스했던 어머니의 품이며 완벽하게 안전했던 모태 그 자체인 것입니다. 고향 하면 어머니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고향을 찾는 마음이 결국 어렸을 때 나를 먹여주고 키워주신 어머니의 따뜻한 정과 태어나기 전 내가 몸담고 있었던 모태의 행복을 찾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어머니 품을 떠난 우리들이 이 절대적 안전의 세계인 모태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너무 커버려 어린 시절의 순수성을 잃어버렸고 우리의 의식은 꿈꾸는 모태 속의 태아가 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어쩌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태의 절대적 평안을 구하기 시작하지만 결국은 죽을 때까지 얻지 못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말하자면 행복이란 이름 아래 우리 모두는 제 2의 모태를 찾아 그렇게도 방황하건만 그 행복은 끝내 손에 잡히지 않고 오히려 모태의 행복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종교란 어쩌면 이 모태를 찾는, 이 고향을 찾는 우리의 갈구에 대한 응답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얻지 못하는 고향, 타락한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모태의 행복을 약속해주는 것입니다. 일단 태어나자마자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모태의 완벽한 세계를 종교는 약속해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도 우리 인간을 내신 모태 중의 모태이신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며, 그의 품이자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가 말해주듯이, 곧 모태로 다시 돌아가서 인생의 쉴 곳과 평안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에덴의 낙원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며 찾고 있는 우리들에게, 사랑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태어나서 잃어버렸던 낙원을 다시 찾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 모태와도 같은 하나님 나라의 낙원, 그 사랑과 평화를 그토록 그리워하기에 우리 믿음의 형제자매들은 오늘도 마치 실향민들처럼 부둥켜안고 서로를 위로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룬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고향을 찾는 첫째 원인은 우리 육신의 부모가 계신 곳이기 때문이며,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해도 부모님을 모신 산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살아 계신 부모님보다도 돌아가신 부모님의 생각이 더 간절히 나는 때가 추석입니다. 추석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때입니다. 인위적으로 정해 놓은 어버이날보다도 추석은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더 생각나게 합니다. 추석은 자연스럽게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추석은 산 자가 죽은 자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때입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뭐가 그리 바쁜지 죽은 자들을 새카맣게 잊고 살던 우리들이 우리만 살고 있다는 것이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한 번쯤 죽은 이들을 그야말로 기억해 주는 때인지도 모릅니다. 죽은 자들을 잊어버리고 사는 우리들은, 삶이 우리 산 자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삶은 결코 산 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들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고, 산 자들은 머지 않아 죽은 자들의 반열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은 우리들의 과거요 우리들의 미래인 것입니다. 삶이란 살아 남은 자들, 그것도 비겁하고 치사하게 살아 남은 자들만이 큰소리치면서 활보하는 세계는 더더욱 아닙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없는 자들, 세속주의자들에게는 엄밀히 말해서 삶은 산 자들만의 것일 뿐 죽은 이들은 안중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삶은 산 자와 죽은 자들이 함께 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주님이십니다. 추석 명절을 맞아 이것이 오늘 제가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서 바울 선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었다가 다시 사심으로 인해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주님이 되셨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다고 했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주님"이시라는 말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님을 떠나지 않고 주님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생명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죽음도 우리를 죽은 자와 갈라놓지 못하고 영원하신 주님과도 갈라놓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가운데는 아무도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 없고 자기만을 위해 죽는 이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러한 말을 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을 잠시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 신자들 가운데는 고기를 먹지 않거나 술을 마시지 않거나 어떤 특정한 날안식일, 절기가 되는 날, 길일 혹은 그 반대 등을 다른 날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면서 이것을 신앙과 연계시켜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을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라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생각하기에 이런 문제들어떤 것을 먹어도 되는가, 술을 마셔도 되는가, 안식일이나 어떤 특정한 날을 특별하게 여길 것인가 하는은 전혀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을 먹는 일과 마시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이 바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라고 말합니다(17절). 오히려 신앙인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깨끗하고(20절)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은 없다고(14절) 여기기 때문에 어떤 음식을 금기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이요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라는 것입니다. 다만 바울은 이렇게 성숙한 신앙의 자유를 가진 자라도 그렇지 못한 약한 신앙을 가진 자를 비판하거나 그 앞에서 드러내놓고 자기 신앙의 자유를 뽐내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약한 자를 시험에 빠트리고 실족케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해 죽으신" 바로 그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신념을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만 소중히 간직하면서 서로 평화를 도모하고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약한 형제에 대한 배려가 신앙인이 누리는 자유보다도 더 중요하며, 사랑이 자유보다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신앙인들은 이렇게 약한 신앙을 가진 자들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는 한, 얼마든지 자기 신앙 양심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다시 말해 찜찜한 생각이 들지 않는 한,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고기를 먹는다던가 술을 마신다던가, 그 밖에 무엇이든지 형제나 자매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간직하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는 이는 복이 있습니다. 의심을 하면서 먹는 이는 이미 정죄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죄입니다."(21-23절)."
우리는 지난 여름 장성에서 하기 퇴수회를 통해 이 문제를 다룬 일이 있었습니다. 특히 제사 문제를 놓고서였습니다. 그 때 저는 고린도 전서의 말씀을 통해서 저의 의견을 말씀드렸는데 그것은 바로 오늘 로마서의 내용과도 완전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중 하나가 제사에 바쳤던 고기를 시장에서 사먹어도 되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신앙인의 자유를 들어 약한 신앙의 형제를 곤혹스럽게 하지 않는 한 얼마든지 먹어도 된다는 것이었으며, 나는 이것을 제사 그 자체에도 확대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엄밀히 말해 만약 바울이 제사 그 자체를 신앙적으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제사에 바쳤던 고기도 절대로 사먹어서는 안 된다고 얘기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절에 많이 다니면서, 부처님 앞에 많은 절을 했습니다. 아마도 기독교인으로 나만큼 불상에 절을 많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양심의 거리낌없이 했습니다. 진리 앞에 절하는 것이지 우상 앞에 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각자가 자기 신앙에 따라 결정해야 할 일이며, 이해 못하는 사람에게 강요하거나 무슨 자랑이나 되듯이 내세울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번 추석 명절 때, 아마도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드렸고 성묘를 하며 조상님께 절을 올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나눈 지난번의 대화가 도움이 되었기를 빕니다. 제사는 무엇보다도 우리 존재의 영원한 뿌리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생명의 직접적 뿌리인 부모님께 대한 감사이며, 하나님과 부모님께 드리는 예입니다. 결코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만약 우상숭배라고 생각되면 결코 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 "의심을 하면서 먹는 것은 이미 정죄함을 받은 것이며 믿음으로 하지 않은 것은 다 죄이다"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고, 다만 부정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부정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든고기를 먹든, 술을 마시든, 제사를 드리든, 불상 앞에 엎드려 절을 하든모두 주님을 위하는 자세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세로 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어떤 날을 더 존중히 여기는 이도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요, 먹는 이도 주님을 위하여 먹으며, 먹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먹지 않는 이도 주님을 위해 먹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가운데는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이도 없고, 또 자기만을 위하여 죽는 이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리하여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이제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고기를 먹는 일, 술을 마시는 일, 절기를 지키는 일 등 그리스도인들에게 금기의 문제를 논하다가 바울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삶 전체를 주님을 위해 하는 자세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죽는 것까지도 주님 안에서 죽고 주님을 위해 죽을 때, 우리는 살든 죽든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들이라는 근본적인 신앙의 진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은 우리 산 자들만의 희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앞서 죽어간 모든 신앙의 선배들과 조상들의 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성도는 다만 지금 현재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간 모든 생명들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시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여러분의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살아나셔서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나, 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제 차례대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지막이 올 것인데,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지와 권위와 권력을 폐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입니다"(17-25).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헛되게 죽지 않은 것을 압니다.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잠자고 있을 뿐이며, 언젠가는 그리스도처럼 다시 깨어나서 그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증언입니다. 이것이 죽은 자들에 대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품고 있는 희망이요 위로입니다.
죽은 자들을 위로 못하는 사상은 끝내 아무 소용도 없는 사상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사상은 기본적으로 허무주의이며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의심하는 사상입니다. 모든 세속적 사상, 현세주의적 사상은 죽은 자들의 위로, 특히 한 많은 삶을 살다가 억울하게 죽은 자들, 의로운 자들의 죽음을 위로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상을 따르느니 차라리 무당을 믿는 편이 낳을 것입니다. 무당은 죽은 자들과 통교하면서 그들의 한을 풀어주며 죽은 자와 산 자를 화해시키는 사제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역사에서 정의를 위해 투쟁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우리 자신과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해도, 한 번 간 인생이 다시 오지 못하고 이미 죽어간 무수한 생명들에게 아무런 위로와 희망이 없다면 그 모든 노력은 결국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 계시록 21장의 말씀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21: 1-4).
올 추석에 우리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한 것은 무장 공비들의 침투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들로서는 그 사건이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정확한 사실을 알기는 어렵지만, 의심할 수 없이 한 가지 우리 눈으로 분명히 본 사실이 있었습니다. 곧 처참하게 쓰러져 있는 11명의 시체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우리 가운데 그 장면을 보면서 저놈들 잘됐다고 쾌재를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측은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며 속으로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저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저들을 보내고 저들에게 지령을 내리는 자들이 나쁘지요. 저들도 우리와 같이 부모형제가 있는 젊은 생명들이 아닙니까? 단지 때와 장소를 잘 못 만나 태어나서 체제의 희생 양이 된 것뿐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주님을 위해 죽어야할 우리와 꼭 같은 인생인데, 어버이 수령을 위해 살다가 어버이 수령을 위해 꽃다운 청춘을 바친 것입니다. 하기엔 주체 신학자들도 죽은 어버이 수령의 영생을 논한다고 하니, 그를 위해 죽은 자들도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하면서 죽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죽은 자들을 위로 못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사상입니다. 역사를 위해, 조국을 위해, 인류를 위해, 당을 위해, 정의를 위해 죽었다 해도 그 개인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위로도 없는 것입니다. 그는 전체를 위해 희생당하는, 언제든 없애버릴 수 있는 한 부품에 지나지 않는 존재인 것입니다. 잘못된 체제에 잘못 태어나 억울한 죽음을 당한 저 생명들에게 넓으신 주님의 은총이 있기를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또 저들을 사살하기 위해 총부리를 겨누다가 산화한 우리 장병들 또한 무슨 죄가 있어서 수많은 국군 장병들 속에서 하필이면 그들만이 꽃다운 청춘을 바쳐야만 했는지 도무지 그 가족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주여, 나를 지켜 주소서"라고 절박한 기도를 수첩에 남기고 간 그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실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아,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하는 생각 간절합니다. 너무나 괴로운 일들입니다.
추석 명절이 되면 이 세상을 작별하고 먼저 가신 분들이 간절하게 생각납니다. 특히 우리 존재의 뿌리셨던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가슴에 사무치게 그리워집니다. 그리고 나에게 사랑을 베푸셨던 집안 어른들, 먼저 간 친구들, 그리고 따르던 스승들의 생각도 더욱 간절해집니다. 또 모진 삶을 살다가 한 많은 생을 마친 분들, 억울하게 죽어간 뭇 생명들도 기억하게 됩니다. 그분들은 다 어디 계실까,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한줌 흙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 것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추석을 맞아 우리는 삶이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며 산 자들만의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됩니다. 돌아가신 분들, 특히 그리스도안에서 잠드신 분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그 분들이 우리와 같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에 좋아 하셨던 일들을 회상하고, 그들이 즐겨 드시던 맛있는 음식을 정성으로 공양하는 일은 매우 아름다운 풍습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머지 않아 죽은 자들의 반열에 들 것이며, 우리가 저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듯이 다음 세대도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우리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정말 가는 세대는 가버리고 오는 세대는 오면서 우리 모두가 영영 시간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인생의 궁극적 의미와 가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들이 영영 우리 곁을 떠나가 버린 존재들이라면, 그들을 기억해서 무엇하며 제사는 드려서 무엇하겠습니까? 어차피 인생은 산 자들만의 몫이고, 세상은 살아남은 자들만의 세상인데요.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는 일만이 능사일 것이고, 살아 있는 동안 호의호식하면서 편안히 지내는 일만이 인생의 유일한 가치일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전 15:32)라고 외칠 뿐입니다. 소똥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는 우리 속담은 현세주의적 한국인들의 소박한 생각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삶은 죽은 자들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살아도 주님을 위해 주님 안에서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주님 안에서 죽기 때문이며, 주님은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이만큼 사는 것이 저들 덕택이기 때문이라는 상식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잠든 것 뿐입니다. 저들이 잊혀지면 우리도 잊혀질 것이며, 저들의 삶이 허무한 것이라면 우리들의 삶도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들을 잊어도 주님은 저들을 기억하십니다. 주님은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도대체 고향이 뭐기에 그처럼 고생길을 마다 않고 가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고향은 물론 자기가 태어난 곳이고, 자라난 곳입니다. 어릴 때 친구가 아직 남아 있기도 하며, 자기가 다니던 학교가 있고, 동창과 선후배, 그리고 행복한 사람의 경우는 무엇보다도 부모님이 아직 살고 계시는 곳입니다. 고향에 대한 추억이 다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지만, 세월이 약이라고 나쁜 기억들은 잊어지고 아름다운 기억들만 아련하게 남습니다. 하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찾아갔다가 실망을 하는 수도 많습니다. 옛 친구들과 젊은이들은 모두 서울로 떠나고 노인들만 쓸쓸히 마을을 지키며 앉아 있는 고향은 정녕 우리가 그리는 고향은 아닙니다. 젊은이들이 떠나니 어린아이들이 없어서 예전에 다니던 학교마저 폐교가 되어 건물만 썰렁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노라면 마음은 허전해지고 슬퍼지기까지 할 것입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데, 사람과 건물만 변하겠습니까? 개발이라 뭐라 해서 어릴 때 뛰어 놀던 동산은 온데 간데 없고 물장구치며 물고기 잡던 개울과 강은 오염되어 쳐다보기가 민망스러울 정도가 되었으며, 한가하던 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멋대가리 없는 공장 건물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서서 시골 풍경을 해치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것은 좀 낳은 편이고, 옛 고향의 모습이 아예 완전히 사라져 버려 실제 고향이 없는 거나 다름없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향은 마음의 고향이지 정작 가보면 실망한다고들 말합니다. 고향만 변했습니까? 우리들도 변했지요.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진 도시 사람들이 오랜만에 고향이라고 시골집을 찾아갔다가는 하루가 멀다하고 불편하다 하여 돌아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 고향은 실재하지 않는 허상입니다. 우리가 고향을 자꾸 읊조리는 것은 어찌 보면 젊은이들이 다 떠나고 노인들만 남은 피폐해진 농촌의 현실을 호도하기 위한 것일는지도 모릅니다. 또 옛날 지긋지긋하게 가난했던 농촌의 생활은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지금은 배부른 도시인이 되어 목가적인 전원 풍경만 읊어대는 것 또한 하나의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을 해도 사람들은 고향을 찾습니다. 현실의 고향이 없으면 마음속에라도 그려 놓고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인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향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물들에게는 귀소본능이 있고 회귀본능연어와 같은 물고기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수만리나 떨어져 있는 자기가 태어난 곳, 산란된 곳으로 돌아와서 알을 낳는다고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고향에 묻는 것도 뿌리로 다시 돌아가는 회귀본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고향을 찾는 것은 자기 존재의 근원, 출처, 그 뿌리를 찾는 일이며, 그 뿌리란 결국 따스했던 어머니의 품이며 완벽하게 안전했던 모태 그 자체인 것입니다. 고향 하면 어머니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고향을 찾는 마음이 결국 어렸을 때 나를 먹여주고 키워주신 어머니의 따뜻한 정과 태어나기 전 내가 몸담고 있었던 모태의 행복을 찾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어머니 품을 떠난 우리들이 이 절대적 안전의 세계인 모태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너무 커버려 어린 시절의 순수성을 잃어버렸고 우리의 의식은 꿈꾸는 모태 속의 태아가 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어쩌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태의 절대적 평안을 구하기 시작하지만 결국은 죽을 때까지 얻지 못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말하자면 행복이란 이름 아래 우리 모두는 제 2의 모태를 찾아 그렇게도 방황하건만 그 행복은 끝내 손에 잡히지 않고 오히려 모태의 행복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종교란 어쩌면 이 모태를 찾는, 이 고향을 찾는 우리의 갈구에 대한 응답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얻지 못하는 고향, 타락한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모태의 행복을 약속해주는 것입니다. 일단 태어나자마자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모태의 완벽한 세계를 종교는 약속해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도 우리 인간을 내신 모태 중의 모태이신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며, 그의 품이자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가 말해주듯이, 곧 모태로 다시 돌아가서 인생의 쉴 곳과 평안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에덴의 낙원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며 찾고 있는 우리들에게, 사랑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태어나서 잃어버렸던 낙원을 다시 찾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 모태와도 같은 하나님 나라의 낙원, 그 사랑과 평화를 그토록 그리워하기에 우리 믿음의 형제자매들은 오늘도 마치 실향민들처럼 부둥켜안고 서로를 위로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룬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고향을 찾는 첫째 원인은 우리 육신의 부모가 계신 곳이기 때문이며,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해도 부모님을 모신 산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살아 계신 부모님보다도 돌아가신 부모님의 생각이 더 간절히 나는 때가 추석입니다. 추석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때입니다. 인위적으로 정해 놓은 어버이날보다도 추석은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더 생각나게 합니다. 추석은 자연스럽게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추석은 산 자가 죽은 자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때입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뭐가 그리 바쁜지 죽은 자들을 새카맣게 잊고 살던 우리들이 우리만 살고 있다는 것이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한 번쯤 죽은 이들을 그야말로 기억해 주는 때인지도 모릅니다. 죽은 자들을 잊어버리고 사는 우리들은, 삶이 우리 산 자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삶은 결코 산 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들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고, 산 자들은 머지 않아 죽은 자들의 반열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은 우리들의 과거요 우리들의 미래인 것입니다. 삶이란 살아 남은 자들, 그것도 비겁하고 치사하게 살아 남은 자들만이 큰소리치면서 활보하는 세계는 더더욱 아닙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없는 자들, 세속주의자들에게는 엄밀히 말해서 삶은 산 자들만의 것일 뿐 죽은 이들은 안중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삶은 산 자와 죽은 자들이 함께 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주님이십니다. 추석 명절을 맞아 이것이 오늘 제가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서 바울 선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었다가 다시 사심으로 인해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주님이 되셨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다고 했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주님"이시라는 말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님을 떠나지 않고 주님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생명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죽음도 우리를 죽은 자와 갈라놓지 못하고 영원하신 주님과도 갈라놓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가운데는 아무도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 없고 자기만을 위해 죽는 이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러한 말을 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을 잠시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 신자들 가운데는 고기를 먹지 않거나 술을 마시지 않거나 어떤 특정한 날안식일, 절기가 되는 날, 길일 혹은 그 반대 등을 다른 날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면서 이것을 신앙과 연계시켜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을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라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생각하기에 이런 문제들어떤 것을 먹어도 되는가, 술을 마셔도 되는가, 안식일이나 어떤 특정한 날을 특별하게 여길 것인가 하는은 전혀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을 먹는 일과 마시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이 바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라고 말합니다(17절). 오히려 신앙인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깨끗하고(20절)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은 없다고(14절) 여기기 때문에 어떤 음식을 금기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이요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라는 것입니다. 다만 바울은 이렇게 성숙한 신앙의 자유를 가진 자라도 그렇지 못한 약한 신앙을 가진 자를 비판하거나 그 앞에서 드러내놓고 자기 신앙의 자유를 뽐내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약한 자를 시험에 빠트리고 실족케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해 죽으신" 바로 그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신념을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만 소중히 간직하면서 서로 평화를 도모하고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약한 형제에 대한 배려가 신앙인이 누리는 자유보다도 더 중요하며, 사랑이 자유보다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신앙인들은 이렇게 약한 신앙을 가진 자들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는 한, 얼마든지 자기 신앙 양심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다시 말해 찜찜한 생각이 들지 않는 한,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고기를 먹는다던가 술을 마신다던가, 그 밖에 무엇이든지 형제나 자매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간직하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는 이는 복이 있습니다. 의심을 하면서 먹는 이는 이미 정죄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죄입니다."(21-23절)."
우리는 지난 여름 장성에서 하기 퇴수회를 통해 이 문제를 다룬 일이 있었습니다. 특히 제사 문제를 놓고서였습니다. 그 때 저는 고린도 전서의 말씀을 통해서 저의 의견을 말씀드렸는데 그것은 바로 오늘 로마서의 내용과도 완전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중 하나가 제사에 바쳤던 고기를 시장에서 사먹어도 되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신앙인의 자유를 들어 약한 신앙의 형제를 곤혹스럽게 하지 않는 한 얼마든지 먹어도 된다는 것이었으며, 나는 이것을 제사 그 자체에도 확대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엄밀히 말해 만약 바울이 제사 그 자체를 신앙적으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제사에 바쳤던 고기도 절대로 사먹어서는 안 된다고 얘기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절에 많이 다니면서, 부처님 앞에 많은 절을 했습니다. 아마도 기독교인으로 나만큼 불상에 절을 많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양심의 거리낌없이 했습니다. 진리 앞에 절하는 것이지 우상 앞에 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각자가 자기 신앙에 따라 결정해야 할 일이며, 이해 못하는 사람에게 강요하거나 무슨 자랑이나 되듯이 내세울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번 추석 명절 때, 아마도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드렸고 성묘를 하며 조상님께 절을 올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나눈 지난번의 대화가 도움이 되었기를 빕니다. 제사는 무엇보다도 우리 존재의 영원한 뿌리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생명의 직접적 뿌리인 부모님께 대한 감사이며, 하나님과 부모님께 드리는 예입니다. 결코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만약 우상숭배라고 생각되면 결코 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 "의심을 하면서 먹는 것은 이미 정죄함을 받은 것이며 믿음으로 하지 않은 것은 다 죄이다"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고, 다만 부정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부정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든고기를 먹든, 술을 마시든, 제사를 드리든, 불상 앞에 엎드려 절을 하든모두 주님을 위하는 자세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세로 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어떤 날을 더 존중히 여기는 이도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요, 먹는 이도 주님을 위하여 먹으며, 먹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먹지 않는 이도 주님을 위해 먹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가운데는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이도 없고, 또 자기만을 위하여 죽는 이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리하여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이제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고기를 먹는 일, 술을 마시는 일, 절기를 지키는 일 등 그리스도인들에게 금기의 문제를 논하다가 바울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삶 전체를 주님을 위해 하는 자세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죽는 것까지도 주님 안에서 죽고 주님을 위해 죽을 때, 우리는 살든 죽든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들이라는 근본적인 신앙의 진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은 우리 산 자들만의 희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앞서 죽어간 모든 신앙의 선배들과 조상들의 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성도는 다만 지금 현재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간 모든 생명들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시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여러분의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살아나셔서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나, 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제 차례대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지막이 올 것인데,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지와 권위와 권력을 폐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입니다"(17-25).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헛되게 죽지 않은 것을 압니다.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잠자고 있을 뿐이며, 언젠가는 그리스도처럼 다시 깨어나서 그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증언입니다. 이것이 죽은 자들에 대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품고 있는 희망이요 위로입니다.
죽은 자들을 위로 못하는 사상은 끝내 아무 소용도 없는 사상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사상은 기본적으로 허무주의이며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의심하는 사상입니다. 모든 세속적 사상, 현세주의적 사상은 죽은 자들의 위로, 특히 한 많은 삶을 살다가 억울하게 죽은 자들, 의로운 자들의 죽음을 위로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상을 따르느니 차라리 무당을 믿는 편이 낳을 것입니다. 무당은 죽은 자들과 통교하면서 그들의 한을 풀어주며 죽은 자와 산 자를 화해시키는 사제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역사에서 정의를 위해 투쟁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우리 자신과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해도, 한 번 간 인생이 다시 오지 못하고 이미 죽어간 무수한 생명들에게 아무런 위로와 희망이 없다면 그 모든 노력은 결국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 계시록 21장의 말씀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21: 1-4).
올 추석에 우리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한 것은 무장 공비들의 침투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들로서는 그 사건이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정확한 사실을 알기는 어렵지만, 의심할 수 없이 한 가지 우리 눈으로 분명히 본 사실이 있었습니다. 곧 처참하게 쓰러져 있는 11명의 시체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우리 가운데 그 장면을 보면서 저놈들 잘됐다고 쾌재를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측은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며 속으로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저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저들을 보내고 저들에게 지령을 내리는 자들이 나쁘지요. 저들도 우리와 같이 부모형제가 있는 젊은 생명들이 아닙니까? 단지 때와 장소를 잘 못 만나 태어나서 체제의 희생 양이 된 것뿐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주님을 위해 죽어야할 우리와 꼭 같은 인생인데, 어버이 수령을 위해 살다가 어버이 수령을 위해 꽃다운 청춘을 바친 것입니다. 하기엔 주체 신학자들도 죽은 어버이 수령의 영생을 논한다고 하니, 그를 위해 죽은 자들도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하면서 죽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죽은 자들을 위로 못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사상입니다. 역사를 위해, 조국을 위해, 인류를 위해, 당을 위해, 정의를 위해 죽었다 해도 그 개인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위로도 없는 것입니다. 그는 전체를 위해 희생당하는, 언제든 없애버릴 수 있는 한 부품에 지나지 않는 존재인 것입니다. 잘못된 체제에 잘못 태어나 억울한 죽음을 당한 저 생명들에게 넓으신 주님의 은총이 있기를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또 저들을 사살하기 위해 총부리를 겨누다가 산화한 우리 장병들 또한 무슨 죄가 있어서 수많은 국군 장병들 속에서 하필이면 그들만이 꽃다운 청춘을 바쳐야만 했는지 도무지 그 가족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주여, 나를 지켜 주소서"라고 절박한 기도를 수첩에 남기고 간 그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실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아,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하는 생각 간절합니다. 너무나 괴로운 일들입니다.
추석 명절이 되면 이 세상을 작별하고 먼저 가신 분들이 간절하게 생각납니다. 특히 우리 존재의 뿌리셨던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가슴에 사무치게 그리워집니다. 그리고 나에게 사랑을 베푸셨던 집안 어른들, 먼저 간 친구들, 그리고 따르던 스승들의 생각도 더욱 간절해집니다. 또 모진 삶을 살다가 한 많은 생을 마친 분들, 억울하게 죽어간 뭇 생명들도 기억하게 됩니다. 그분들은 다 어디 계실까,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한줌 흙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 것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추석을 맞아 우리는 삶이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며 산 자들만의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됩니다. 돌아가신 분들, 특히 그리스도안에서 잠드신 분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그 분들이 우리와 같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에 좋아 하셨던 일들을 회상하고, 그들이 즐겨 드시던 맛있는 음식을 정성으로 공양하는 일은 매우 아름다운 풍습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머지 않아 죽은 자들의 반열에 들 것이며, 우리가 저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듯이 다음 세대도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우리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정말 가는 세대는 가버리고 오는 세대는 오면서 우리 모두가 영영 시간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인생의 궁극적 의미와 가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들이 영영 우리 곁을 떠나가 버린 존재들이라면, 그들을 기억해서 무엇하며 제사는 드려서 무엇하겠습니까? 어차피 인생은 산 자들만의 몫이고, 세상은 살아남은 자들만의 세상인데요.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는 일만이 능사일 것이고, 살아 있는 동안 호의호식하면서 편안히 지내는 일만이 인생의 유일한 가치일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전 15:32)라고 외칠 뿐입니다. 소똥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는 우리 속담은 현세주의적 한국인들의 소박한 생각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삶은 죽은 자들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살아도 주님을 위해 주님 안에서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주님 안에서 죽기 때문이며, 주님은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이만큼 사는 것이 저들 덕택이기 때문이라는 상식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잠든 것 뿐입니다. 저들이 잊혀지면 우리도 잊혀질 것이며, 저들의 삶이 허무한 것이라면 우리들의 삶도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들을 잊어도 주님은 저들을 기억하십니다. 주님은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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