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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과 회복

로마서 권진관............... 조회 수 1695 추천 수 0 2008.02.26 23: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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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8:35-39 
설교자 : 권진관 형제 
참고 :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연말이 되니 쓸쓸해집니다. 낙엽은 진지 오래이고, 바람은 매우 차갑고, 거리에는 종종걸음으로 제 갈길을 가는 행인들이 보입니다. 이번 주에 저는 돌아가신 선생님들과 친구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변선환박사님, 최근에 돌아가신 안병무박사님, 그리고 어제 6주기 행사를 가진 제 친구 김병곤이 생각났습니다. 변박사님은 후배들에게 따뜻한 말씀을 잘 해주셨던 분이며, 안박사님의 미소와 설교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되는데 그의 말씀은 언제나 저에게 뜨거움을 가져다주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죽음 저편에 있어서 다시 만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인생의 중요한 특징을 단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단절로 말미암아 불행하고 불안합니다. 제 친구 김병곤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와 단절되었습니다. 안박사님이나 변박사님도 그리고 훨씬 이전에 돌아가신 서남동 선생님도 모두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단절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자식들은 자라나면서 점점 우리 곁을 떠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또 다시 단절을 경험합니다. 7살난 저의 막내아이는 저와 거의 하나의 일체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도 저의 큰아이처럼 독립심이 생기게 될 것이고 그러면 저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커서는 결혼도 할 것입니다. 단절, 헤어짐은 우리 삶 속에 언제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단절을 경험할 때마다 허무에 빠지게 됩니다. 단절은 모든 허무와 불행, 불안의 원인인 것 같습니다.
요즈음 이 단절의 경험을 우리 남자들이 더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직장에서 명예은퇴, 조기퇴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직장과의 단절은 곧 사회생활 모든 면에서의 단절로 이어집니다. 요즘 명예은퇴자들의 애환의 이야기가 많이 들려옵니다. 특히 50대의 아버지들이 갖는 어려움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어떤 40대 실업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명절에 부모님께 인사하러 가기가 무섭다고 했습니다. 정종 한병 살 형편이 못되고, 대중교통 이용 비용이 걱정이 되어서, 명절이 오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고 했습니다. 친구들이 차 한잔 하자거나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면 바빠서 못한다며 도망간다고 합니다. 직장에서의 단절, 사회 속에서의 단절, 이것은 가족간의 단절로 나타납니다.
지난 주에 저는 잘 안하던 일을 했습니다. 오랜만에 독서를 한다며,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은 박호재의 단편소설 이라는 것을 읽었습니다. 내용을 보면 우진이라는 젊은, 장가든 아들이 있고 그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 아버지가 이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그 아버지는 15살 되던 때 그의 부모인 즉 우진이의 할아버지와 헤어졌습니다. 6·25되기 이전에 만주에 있는 조상의 땅에 농사를 짓기 위해서 그 할아버지는 떠났는데 곧 다시 만날 수 있게 되리라고 예사롭지 않은 이별을 한 것이 38선이 그어지고 6·25가 터지면서 갑자기 이산가족이 되었습니다. 부모를 만난다는 일념으로 우진의 아버지는 군에 입대하여 압록강까지 북진하였지만 다시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안 얘기인데, 그 할아버지도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널 때 같이 남하하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든 아들을 만나기 위해서 그 할아버지는 중공군에 얹혀서, 또 우진의 아버지는 국군에 얹혀서 38선을 넘었지만 결국 상봉하지 못하고 반세기를 보냈던 것입니다. 우진의 아버지는 군에 몸담고 있다가 특무상사로 예편한 후 복덕방을 하면서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술 한잔 입에 안대고, 담배 한 갑 안 피우고 정말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가족을 이끌었습니다.
이 아버지를 보면 저나 또 여러분들과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과장된 것 같지만, 사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정말 요즘은 殺身成仁하는 마음으로 가족을 위해 삽니다. 이런 면에서 요즘 남자들은 모두 안된 것 같습니다. 호탕하고 대범한 것이 없어졌지요. 간 큰 남자 시리즈가 나올만합니다.
이 우진의 아버지에게는 하나의 병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자기 가족의 뿌리에 대한 그리움, 그 뿌리로부터 이탈되었다는 절박한 단절감이 그의 마음의 병이었습니다. 연변의 조선족 마을에 살고 있던 조카가 방문하고 돌아가고 나서부터 이 병은 더욱더 심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적 분단으로 인한 구체적인 개인적 마음의 병이었습니다. 하루는 안마시던 술을 마셨고, 그 술 때문에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그가 입원해 있는 중에 북에서 우진 아버지의 연로하신 어머니는 돌아가셨다는 편지가 조카로부터 날아옵니다. 이 아버지가 병석에서 읽었던 여호와의 증인이 준 라는 전도지에 아버지가 삐뜰삐뜰 밑줄을 그은 말이 있었습니다. "천국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만들어진다. 그날이 오면 모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산 사람들과 행복하게 만날 것이다." 산 사람들을 위한 정말 기쁜 말씀, 복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천국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천국은 단절의 극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산자와 죽은자의 만남, 죽음의 장벽을 뛰어넘는 해후, 한을 품고 죽은 자의 소생과 그 한의 눈물이 씻김을 받는 곳, 이것이 천국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국의 얘기이지 지금의 우리 얘기는 아닙니다.
천국이 오지 않은 상태의 우리 시대는 "단절의 시대"입니다. 단절로부터 오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들을 마취시킵니다. 그 마취는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혹은 정욕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이러한 것들을 미친 듯이 추구합니까? 그것은 단절로부터 오는 불안 때문입니다. 진리로부터의 단절이나 관계로부터의 단절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그 불안을 잊기 위해서 사람들은 권력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은 단절된 세상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일 것입니다. 자신의 단절된 모습을 권력으로 일시적으로나마 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권력의 소유도 문제의 답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신학적인 글을 쓰다가 저의 부족함을 깊이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단절을 메꿀 수 있는 글이 되어야 하는데 역량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그 고민은 진리로부터의 단절감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이 글의 내용이 정말로 단절된 우리들을 다시 하나로 만드는데 공헌하는 것이냐, 그리고 내가 준비하고 있는 설교가 정말로 찢어지고, 분열되고, 단절된 우리들의 마음의 상처와 관계를 치유하고, 싸매 주며, 온전한 하나됨으로 회복시켜 주는 것인가를 늘 반성하면서 부족함을 느낍니다. 나는 단순히 언어의 나열만 하는 것이 아닌가? 성령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기회를 나는 분별없이 헛되이 사용하고 허공만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를 하나로 묶는 진리와 영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단절감은 우리에게 허무감을 갖게 하며 불안하게 합니다.
변선환 박사님에 대해 기억해봅니다. 그 분은 누가 뭐라고 해도 단절로부터 해방 받고자 했던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이 하루는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리가 무어야? 그 진리라는 것이 나에게 폭포수처럼 흠뻑 쏟아 부어졌으면 한이 없겠어." 그 분은 우리를 하나로 회복시켜주는 그 진리를 추구하셨던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단절로부터 해방되어 원래의 모습을 찾고, 진리인 뿌리와 접합하여 그 뿌리와 하나가 될 것을 추구하셨습니다. 그 분은 그 뿌리를 죽을 때까지 추구했던 분입니다. 그 분을 심판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한국의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웃지 못할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분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진리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모든 행동, 생각, 특히 신학이라고 하는 학문은 관계의 회복과 단절의 극복에 공헌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우리를 하나의 온전함 속으로 돌아가게 하는 그 힘에 복종하고 그것에 귀의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험난한 인생과 역사와 삶 속에서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주고, 우리를 이어주는 뿌리는 없는 것입니까? 이것이 우리들의 질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 속에는 단절이 극복되고 관계가 회복되는 일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이야기이겠습니까? 아니면, 본질적인 이야기이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대답 드리기 전에 먼저 우리가 잘 아는 성서의 이야기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대답의 암시가 나올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가로 챈 것에서부터 형제간의 단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야곱이 도망쳤고, 둘 사이에는 깊은 골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성서에는 이 두 형제의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야곱은 앞장서서 걸어가다가 일곱번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형에게로 나갔다. 에서 마주 뛰어와서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울음을 터뜨렸다."(창세기 33:3-4). 그리고 10절에 야곱이 에서에게 감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이 저를 이렇듯이 사랑으로 맞아주시니 형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마치 하나님을 뵙는 것 같습니다." 야곱과의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있는 형 에서의 얼굴은 인간 에서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 같다는 야곱의 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사실, 이러한 관계의 회복을 우리들은 온 몸으로 기다리고 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은 원래 하나였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였으므로 벌거벗었어도 남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벌거벗음은 곧 나의 벌거벗음이었기 때문에 창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낙원에서 쫓겨난 이 두 사람은 부끄러운 부분을 가렸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서로는 분리되었습니다. 그후에 인간의 죄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의 운명과 역사는 이렇게 분리를 원리로 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원래 하나였던 우리들이 국토의 분단에 의해서 찢겨지고, 시간의 지나감에 의해서 찢겨지고, 서로 떨어지는 거리에 의해서 찢겨지고, 또 우리들의 욕심에 의해서 찢겨지고, 전쟁과 싸움에 의해서 찢겨져왔던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인생의 비극적인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천국에 대한 희망은 관계의 회복, 단절의 극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우리의 역사와 삶과는 다른 것입니다. 천국이 그러한 약속을 해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국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시대의 단절을 극복할 말씀은 없는 것입니까?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그 대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의 운명이나 역사의 궁극적인 원리가 결코 단절이나 허무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우리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단절시킬 힘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야말로 우리들의 존재와 역사와 운명의 진정한 기초라는 것입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단절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러한 삶이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줍니다. 비록 보이는 삶이 단절의 삶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의 기초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의 원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탯줄에서부터 어머니와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자연과 독립되어 살게되었습니다. 또 우리는 원래 하나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머니 자연(Mother Nature)과 우리 이웃들과 하나의 사랑의 관계 속에 있어야 했음을 이 말씀은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어느 누구도, 어떤 권세도, 어떤 존재자도, 어떠한 박해나 굶주림이나, 역경이나, 어떠한 고난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그리고 현재의 것도 미래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의 존재의 뿌리로부터 떼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뿌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강조점을 두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사랑에 더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내용 없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종교적 지도자의 이름만을 내세우는 율법주의, 교조주의를 바울은 경계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존재의 근거가 된다는 보다 보편적인 말씀으로 이러한 위험을 피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존재의 근거, 우리의 운명의 궁극적인 근거는 그리스도의 신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이 신적인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존재의 근거는 신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단절시키지 않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간에 의해서, 장소에 의해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에 의해서, 또 죽음에 의해서 비록 단절된 삶을 살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들의 존재의 궁극적인 원리인 사랑으로부터 우리들을 완전히 떼어놓을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존재와 운명의 궁극적인 근거가 우리를 분열시키고 서로 떼어놓는 단절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사랑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삶의 희망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절의 사회와 단절이 일어나고 있는 인생의 삶 속에서 좌절을 딛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어디 있든지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우리는 단절의 극복과 하나됨의 회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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