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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나누는 삶

로마서 박충구 목사............... 조회 수 1646 추천 수 0 2008.06.17 07: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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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12:16-18 
설교자 : 박충구 목사 
참고 :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해마다 6월이 오면, 우리는 분단된 민족과 나라를 생각하게 됩니다. 일제로부터 강점이 되었던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된 후 분단된 나라의 현실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도록 강요받고 있는 우리 민족은 어찌 생각하면 참으로 기이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에도 유고의 코소보 사태가 더 확전되지 않고 해결되는 것 같아 다소 마음이 놓이는 듯 싶었는데, 난데없이 서해 연평도 부근에서 남과 북의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 남쪽의 병사들이 9명 부상당하고 북쪽의 병사들은 약 30면 정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배후를 예측할 수는 있어도 왜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저는 다만 한가지 사실을 자꾸 마음속에 되 뇌이게 됩니다. 우리에게 남북간의 "평화는 가깝지 않구나." 라는 슬프고도 좌절감이 드는 감정입니다.
특히 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병사들을 찾아 위문하는 국방장관이 누워있는 병사의 얼굴을 두 손으로 얼싸안고 "네가 영웅이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렇지 맞아. 저 병사는 영웅이야." 라고 말할 수 없는 시각의 차이를 또한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어서 신문에 대서 특필되는 기사들은 한결같이 남쪽의 군사력의 우위와 전시를 방불케 하는 대치상황을 전하기에 바빴습니다. 어느 신문도 평화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나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물음들 앞에서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우리는 또 한번 우리의 조국 한 반도 안에서 전쟁이라도 불사할 수 있는 것인가. 전쟁의 비극과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북한 어뢰정에 탐승하고 있었던 앳된 병사들의 부모형제들이 사랑하는 자식, 형제를 잃고 우는 고통스런 탄식소리들을 우리는 정말 들을 귀가 없는 것인가. 북녘의 사람들에 대한 인간애적인 생각과 배려를 하는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정죄 당하는 것이 아닐까. 근 50년간 반복해온 증오와 대립의 논리를 극복할만한 평화의 능력을 가지기에는 아직도 요원한가.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을 나와 높은 경쟁을 뚫고 신문사에 들어간 우리 나라의 엘리트 기자들이 한결같이 이구동성으로 호전적인 기사를 쓰는 것은 웬일일까. 정말 이러한 사건을 정치적으로만 읽어야 하는 것인가. 혹시 이런 여론이 우리 사회를 벼랑 끝으로 밀고 가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평화의 부재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민족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러한 정황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평화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그리스도인의 평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복을 빌어주십시오.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 주십시오. 서로 한마음이 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천한 사람들과 사귀십시오. 그리고 잘난 체 하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공동번역, 롬 12, 14-17)

여러분들은 할 수 있는 대로 평화를 나누며 살고 계십니까? 어떤 분은 교회에 오는 자동차 안에서 교회 문 앞까지 오는 동안 서로 다투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휴전했다가 다시 차를 타면 다툼을 시작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코미디언들이 서로 우스운 이야기를 경쟁적으로 하는 프로그램에서 어느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식당에서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큰 소리를 치면서 화를 내던 사람이 음식이 나오니까 얼른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더니 다시 눈을 뜨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더라는 것입니다. 정말 코미디 같은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 대다수가 그 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너무나 생각 없이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됩니다. 결국 "무엇이 나로 하여금 기독교인으로 살게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나는 기독교인을 기독교인답게 만드는 중요한 하나의 원리는 "평화를 나누며 사는 것"이라고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평화를 나누며 사는 것이 무엇인가는 각자가 나름대로 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묻고, 찾고, 생각해야 할 과제가 될 것입니다. 이 시간에 나는 몇 가지 점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이 문제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제일 먼저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나는 평화를 얻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스스로 답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옆에 혹시 남편이나 아내가 있다면 한번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대는 평화를 지니고 있는가?" 라고. 오늘날 많은 이들이 평화보다는 근심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평화보다는 근심과 염려를 나누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라는 신학자는 {Courage to Be}라는 책에서 인간이 불안과 근심을 느끼는 깊은 원인을 비존재의 위협 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비존재의 위협은 인간에게 세 가지 방향에서 염려를 몰고 온다고 했습니다. 첫째가 죽음과 상실에 대한 염려이며, 둘째는 무의미의 심연에서 오는 불안이고, 그리고 셋째는 죄책감으로부터 오는 자책과 정죄 받을 것에 대한 불안입니다. 그저 평범한 삶을 사는 우리는 이러한 철학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 우리 스스로를 분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틸리히의 이러한 이해는 우리에게 깊은 통찰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불안이 찾아오면 우리는 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하여 상실보다는 획득의 원리를 추종하고, 무의미보다는 행복을 추구하며, 죄책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스스로를 완전하게 만들어 보려고 애를 쓰는 데 있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이 불안을 들추어내면, 분노하고, 소리를 지르고, 폭력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강한 사람이 되려고 하고, 밀어 부치려고 하고, 힘 자랑을 하면서 자신의 우월함과 우세함을 입증하려고 합니다. 어줍잖은 영웅이 되려고 하는 것이지요.
많이 가지고, 힘이 세고 우수하며, 다른 이보다 우월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면 그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면, 너무나 번거로운 피곤을 느낍니다. 자기 말을 하느라고 모든 이들이 소리를 지르기 때문에 아수라장같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고 말하려고만 하는 이들을 지켜보면 그들은 스스로 잘나고 우월하며 똑똑한 사람,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치의 양보도 없이 몸부림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화에서도 우리는 평화를 나누지 못하는 것이지요. 거리에서도 우리는 자동차 운전을 하면서 빵빵거리며 양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타면서도 서로 인사를 나누지 않습니다. 아주 사소한 삶의 관계에서조차 평화를 나누는 삶에 익숙하지 않은 것입니다. 강한 사람으로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먼저 인사를 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인간 본성을 어둡게 보았던 토마스 홉즈가 자연의 상태를 "만인이 만인을 적으로 여기는 상태"라고 말했던 경우가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조차 만인을 적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용맹스러운 현대인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기독교인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비존재의 위협을 이긴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갈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치 않아도 되는 데 온통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니까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기독교인의 독특한 삶을 살지 못하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평화의 향기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께서 주신 평화를 내가 간직하고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우리는 늘 던지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주신 평화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옆에 계신 분들에게 한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주신 평화는 무엇인가요?" 여러분은 그리스도로부터 어떤 평화를 얻으셨습니까? 나는 예수로부터 평화를 얻은 이들은 한결같이 "자기 것을 버림으로 얻는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4장 33절에 보니까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집착과 탐욕과 교만과 시샘을 통해 무엇을 얻음으로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가 가르쳐 주신 평화는 강한 자가 되는 평화가 아니라 약한 자와 함께 하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의 승리의 축배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겸손함을 나누는 평화입니다. 여러분들이 혹 아무리 큰 교회에 나가셔도, 아무리 기도원을 자주 오고가도, 여러분들이 값비싼 옷을 걸쳐들고 다녀야 마음이 편안한 사람들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는 그런 평화를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분은 거짓 평화를 깨뜨리는 분이십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 27)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없이 평화를 누리려 한다면 그것은 거짓 그리스도인의 평화일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없이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고, 예수 없이 길을 갈 수 없는 사람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30년대 부흥사로 살아갔던 이용도 목사는 그 당시 한국 교회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현대의 교회는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매 현대 목사는 괴이한 예수를 전한다. 참 예수가 오시면 피살될 수밖에 없다. 참 예수는 저희가 죽여버리고 말았구나. . . . . 저희의 요구하는 대로의 예수는 육(肉)의 예수, 영광(榮光)의 예수, 부(富)의 예수, 고(高)의 예수였고 참 예수의 예수는 영(靈)의 예수, 천(賤)의 예수, 빈(貧)의 예수, 겸(卑)의 예수였다. 예수를 요구하느냐?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찾으라. 사람의 예수―너희가 만들어 세운 예수 말고!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라, 너를 갖다가 예수에게 맞게 할 것이었느니라." (변종호, {용도신학} 21)
새길 교회는 바른 예수를 바로 믿는 운동을 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부유함으로 영광을 누림으로, 고귀하여 얻는 평화는 우리를 끝없는 투쟁과 경쟁을 통하여 남을 억누르고 지배하므로 얻는 나만의 평화입니다. 그것은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비우고, 낮아짐으로써, 비천한 자리에 처하여 남을 섬김으로써 얻는 평화는 결코 나만의 평화가 아니라 함께 나누는 평화입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치신 평화는 나만의 평화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함께 나누는 평화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평화를 나누려면 끊임없이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평화를 나누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평화를 진정으로 희구하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는 평화보다는 보복의 법을 가르칩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이러한 가르침을 인생관으로 받아들였던 이들은 언제나 승리만을 기다렸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승리하는 삶을 살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아니하고 꾸어 줄지언정 꾸이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자신의 자식들을 축복했습니다. 그러나 그 법을 따라 살았던 이스라엘은 그 법만을 가지고 자신의 민족을 살려내지 못했습니다. 20세기 역사 속에서 600만 명 이상이나 되는 유태인들이 학살당한 역사는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을 보존하기 위한 히틀러의 망상에 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유태인과 아리안 인들간의 인종차별적인 경쟁이 암암리에 작용한 것이지요. 아말렉 사람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라던 히브리 민족의 후손들이 오히려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이 우수할 때 주장했던 그 논리가 뒤집어진 것이지요.
예수는 이 보복의 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성서에 보면 어느 날 간음한 여인을 잡아 앞세우고 예수 앞으로 달려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모세의 보복의 법을 따라 예수에게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우리의 모세 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요 8, 5) 이들은 모세의 법에 근거하여 사람을 죽이려고 손에 손마다 돌을 들고 달려온 이들이었습니다. 간혹 기독교의 역사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을 죽이기도 했던 불행한 역사가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도 그의 생애 동안 58명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처형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람을 죽이는 법을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분은 십자가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분은 사랑의 법을, 용서의 법을, 죽음보다는 생명의 길을 가르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닙니까?
미움의 길보다는 평화를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과제입니다. 교만한 삶의 자세를 바꾸어 좀더 겸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목소리도 이제는 조금 낮추고, 말하기보다는 침묵하고, 주장하기보다는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를 희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길이 나야 합니다. 평화를 나누는 삶에로의 길이 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품성이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평화를 향한 성향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적인 평화란 개념도 아니고 판단도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삶의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를 나누는 삶은 습관입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하실 프란시스 성자의 기도문을 읽고 오늘의 말씀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 미움이 있을 때에는 사랑을 심게 하시고, 상처가 있는 곳에는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는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는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는 빛을, 그리고 슬픔이 있는 곳에는 즐거움을 심게 하소서. 주여 내가 위로 받기를 구하기보다는 위로하게 하시고, 이해 받기를 원하기보다는 이해하게 하소서, 그리고 또한 사랑 받기를 구하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왜냐하면 우리가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우리가 용서를 받기 때문이며, 우리가 죽음으로써 영생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기도를 통하여 자신들의 품성을 변화시켜 평화를 나누는 품성들을 가진 이들이 되었다면 우리의 사회가 이렇게 아수라장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같은 민족끼리 힘 자랑하며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이 비극적인 역사가 이리도 반세기가 다 지나도록 계속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늦었지만 평화를 나누는 삶을 향하여 우리 기독교인들이 발걸음을 재촉하여 한 발자국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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