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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습 이대로(50.1: 49.9의 삶)

로마서 최현섭 형제............... 조회 수 1901 추천 수 0 2008.06.30 10: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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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7:21-25 
설교자 : 최현섭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지난 5월 정기 운영위원회에서였습니다. 예배부장이신 정대현 형제께서 내부 말씀 증거자를 확대하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말씀의 증거는 설교가 아니라, 말씀 체험의 나눔이며, 말씀을 통한 성도의 교제가 예배라는 이유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위원들도 이 취지에 공감하였고, 일 주일에 한번만 보는 예배이기 때문에, 말씀 증거자 선정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으며, 사전 훈련을 하여 효과를 배가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저도 기성 교회에 나갈 때, 신앙의 고백이나 체험의 나눔이 없는 설교는 단순한 말의 잔치요, 공허한 선언에 그쳐, 예배의 참 의미를 그르치고 만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적극 찬성하였습니다. 회의의 말미에 정대현 형제께서 이러한 시도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운영위원을 비롯한 전교인들이 적극적인 동참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을 때도, 평신도 교회는 모든 교인이 목사나 전도사가 되는 동시에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집사나 사찰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당연한 말씀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그 찬성이 바로 나에게로 돌아 올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아무리 열린 교회라 하더라도, 아직 출석한지 만 3년도 안된 나에게까지 말씀 증거 차례가 오겠느냐고 안심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대현 형제께서 조용하고 힘이 있는 그 특유한 음성으로 "아무래도 맡아주셔야겠습니다."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당황스럽기도 하였지만, 이렇게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말씀 증거자까지 마구 열어놓는 것을 보니, 새길 교회도 그 동안 말 못할만한 상처와 고민이 상당히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도 하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결국 '총론 찬성, 각론 반대, 또는 의미는 동의, 동참은 사절'이라는, 내가 평소에 문제로 지적하던 기현상을 만드는 장본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기간도 많이 남아 있는데 준비하면 되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에 그만 승낙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10월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초조해지고 불안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남의 말을 매정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사정을 훤히 알고는 빠져나가지 못하여, 시간을 쪼개고 몸을 아끼지 않으며, 서울로 춘천으로 뛰어 다니곤 하는 제 성격과 행태가 여기까지 오게 하였구나 생각하니 제 자신이 밉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성격과 행태 때문에, 그동안 저는 친구와 가족으로부터, 자기가 없으면 일이 안된다는 착각을 버려라, 돈도 생기지 않고, 꾀 약은 사람들은 피해 다니는 것만 뒤쫓아 다닌다, 그렇게 밤낮 없이 바쁘게 다니는데 몸이 성할 리가 있겠느냐, 가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떠한 어려움이 있는지 알지도 못한다는 등과 같은 지적을 수없이 받아 왔댔습니다. 새길 교회에 나올 때도 절대 나서지 않고 조용히 지내겠다는 다짐도 했건만, 이렇게 말씀 증거라는 버거운 일까지 맡게 되었으니, 아무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지난 주였습니다. 몇몇 자매형제께서, 말씀 준비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이겠다, 편안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솔직하게 신앙을 털어놓으면 된다는 위로와 충고도 해주시기도 하고, "새길 교회에 오셔서 고속 출세하는 것 같아요! 나오신지도 얼마 안되었는데 설교도 하시고 말이에요."라는 농담도 해주시더군요. 그때부터 저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렇게 열려 있고 넓고 넓은 마음을 지닌 자매 형제들인데 무슨 걱정이냐, 정대현 형제의 말처럼, 말씀을 나눈다는 마음으로 임하자, 어차피 새길 교회의 내 노라 하는 말씀 증거자들처럼 고도의 신학적 고증이나 감동적인 신앙 원리를 말하지 못할텐데, 내가 받은 은혜를 하나 소개한다고 생각하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더구나, 여기 저기 소위 출세하였다는 사람도 알고 보면 별거 아니지 않느냐,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 거창한 소리만 지껄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람들은 감탄도 하고 존경도 하지 않더냐, 이왕 출세하는 것이라는데 소리나 크게 질러 놓고 보자, 어느 목사님이 말했듯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면 은혜가 된다고 했잖던가...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더군요.(말씀 증거자로 부탁받아 고민을 하는 분이 있으면 참고를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가 형제 자매 여러분과 함께 나눌 은혜라면 은혜요, 깨달음이라면 깨달음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때 저는 매우 큰 충격과 함께 삶과 죽음, 그리고 질병과 치유의 기적, 그리고 죄와 용서라는 한 인간으로서, 나아가 신앙인으로서 한번쯤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에 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제가 다니는 강원대학교의 선배 교수 한 분께서 췌장암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수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에 집에서 요양중이라는 소식을 접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가 회복하기 어려운 질병에 걸렸던 경험이 있으신 분이면 공감하시겠지만, 저는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든든하게 여겼던 버팀목이 무너져 버린 듯한 커다란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그 분은 저를 무슨 정의 사도요, 천재적인 정책가나 소개도 하시고, 문제가 있으면 앞장서 막아주는 등 참으로 저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참으로 허망한 인생길, 언제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불행과 죽음에 대한 공포감 등으로 인하여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리고 나니, 또 다른 당혹감과 현실적인 걱정이 엄습해왔습니다. 그 분과의 관계로 본다면 문안을 가기는 가야하는데, 가서 무슨 말을 하며, 어떠한 태도를 보여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지가 30년이나 되고, 교회에서는 안수집사라는 직분도 가진 사람으로서, '주님의 치유 기적을 믿으라', '여생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바치겠다고 매달려 기도를 하여 기적적으로 치유된 사람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거나, 직접 기도를 하여 치유의 은사를 기원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때의 제 신앙으로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제 곧 하늘 나라에 가게 되었으니, 마음 편하게 먹고 여생을 마칠 준비를 하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하니 참으로 막막하였습니다. 무엇인가 위로가 되지도 못하고, 구체적인 힘이 되지 못하면서 병문안을 가는 것이, 너무나 민망스러웠고, 제가 가졌다는 신앙이란 것이 너무나 보잘 것 없다는 자괴감이 앞을 가려, 도저히 병문안을 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차일 피일 미루게 되었고, 결국에는 그분께서 보고 싶다고 하더라는 말을 전해 듣게 되었고, 궁여지책으로 여기 저기 수소문하여 암에 좋다는 상황 버섯이라는 것을 구해 가지고 문안을 갔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기적의 치유 은사를 이야기하였고, 어렵게 어렵게 상황버섯을 구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완치해 주실 것 같다는 말도 하였고,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도 하였습니다. 확신도 없고 정리되지도 않은 말과 기도를 드리고 만 셈이지요. 그분께는 얼마나 위로와 희망을 안겨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저로서는 참으로 부끄럽고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그 공허한 믿음과 절름발이 신앙에 대한 용서를 빌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서에서 분당으로 통하는 넗은 길 한쪽에 차를 세우고 말입니다. 그리고, 제 믿음을 보지 마시고 주의 사랑으로 그분의 병마를 거두어 달라는 기도도 간절히 드렸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분은 그 후 6개월도 안되어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하였지만, 참으로 허망하였으며, 나도 이제 죽음이라는 것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무엇인가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자, 죽음이 곁에 오더라도 두려워 말고 의연하게 맞이하자는 다짐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 분의 투병 과정에서 제가 받은 은혜와 깨달음은 매우 귀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자매 형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했던 은혜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제 그것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그러니까, 그 분께서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이라 기억됩니다. 그분을 위하여 기도를 해주시던 목사님과 곁에서 밤낮으로 간호를하시던 사모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분께서는 곁에서 아무리 종용을 하여도,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기도는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인즉, 병이 나기 전에는 온갖 죄를 다 짓다가, 죽을 병에 걸리고 나서야 잘못했다고 빌고, 살려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은 염치가 없는 믿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할 수 있을 때는 잘 하지도 않고, 막 판에 몰리니까 할 수 없이 빌고, 살려주면 잘하겠다고 기도하는 것은 양심상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살려주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작정이지만, 살려주시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면서 조용히 묵상 기도만 하고 지낸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였습니다.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까지 철저하게 자기를 성찰하는 모습에 감탄을 한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지키려 하는 모습이 너무나 애처롭게까지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 분과 같이 그냥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시겠습니까? 그분의 죄가 어느 정도이었기에 그랬다고 여겨지십니까? 죄가 많은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신앙에 대하여 칭찬을 하실까요? 아니면 오만 방자하다고 하실까요?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제가 곁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그 분은 참으로 순수한 분이었습니다. 줄담배를 피워서 주변 사람을 괴롭게 한다든가, 밤 늦게까지 일하다가 새벽에야 잠이 드는 습관 때문에, 학장 재직 시에 학교 행정이 다소 지연되는 것을 빼고는, 결점도 그리 많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하여도 독선과 위선에 빠져 있다고 판단되면 가차없이 직격탄을 날리기 때문에, 당사자로부터 원한을 사거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있었지만,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았고, 사치하지도 않았으며, 허례허식도 멀리하는 분이었습니다. 암이라는 진단을 받기 전부터, 열심히는 아니지만 교회에는 나가셨기 때문에, 저를 만나면 기복신앙에 빠진 교회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고, 신앙적 양심을 지켜가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성찰과 회개, 그리고 제 뼈를 깍는 절제가 필요하다는 말씀도 자주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은 나날이 무너지고 또 무너지고 한다는 고백도 하였고, 그같은 모자람 때문에 교회에 나가기가 두렵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등 순수함 그 자체이었습니다.(이같은 깔끔한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지금 그분이 살아 계셨으면, 분명히 저보다 한발 앞서 새길 교회에 다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그러한 분이 죄를 많이 지어서 병을 고쳐달라고 매달리기를 주저하고, 살려달라는 기도가 염치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 얼굴을 들고 살 사람이 어디 있으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제 자신도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온갖 다짐을 다해 보지만, 한 발짝도 가지 못하여, 시기, 질투, 근심, 걱정에 금방 빠져 버리는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내, 죄를 지은 사람은 교회에 나올 수도 없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해도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러한 사고 방식은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하는 것이며,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을 완전한 존재인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는 불경죄에 해당하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 근거로 오늘의 본문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교리의 완성자요, 선교의 아버지인 바울 선생조차도 자신의 마음속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으며, 그것들이 부단히 갈등을 하고 있는 이중적 존재임을 깨닫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한탄한 말씀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그분의 신앙은 잘못된 것이었으며, 하나님 보시기에 오만방자한 모습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분의 자존심이란, 인간 관계에서는 귀한 것이 분명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먼지만도 못한 것이며,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살려달라고 기도를 하지 못하는 것은 불신앙 자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병이 악화되어, 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해 있는 그분의 손을 붙잡고, 인간의 자존심은 하나님께는 오만일 수 있다, 벌거벗듯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고 간곡히 말씀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께서는 마음 단단히 먹고 바라보지 않으면 비명을 지를 정도로 흉악하게 변해버린 자신의 얼굴을 보라는 듯 번쩍 들어 보여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숨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태인데 무슨 희망을 가지란 말이냐는 뜻이 아닐까 하여,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말았습니다만, 저는 지금도 그 같은 살던 못살던 엎디어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인 동시에 죄악의 늪에서 헤어나기 어려운 존재라는 것을 그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죄를 지었다고 하여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은 잘못이며, 하나님 앞에서 다짐한 것을 지키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기도를 드릴 수 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는 응답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저는 가끔 친구들이 '너 같은 놈이 무슨 교회냐?'고 비아냥을 하면, 언제나 '너희들은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되지만, 나는 일주일에 한번씩이라도 교회에 나가 회개를 하지 않으면 죄가 무거워서 살 수가 없다.'고 대답을 하곤 한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도 저는 집사가 아니라, 잡사이며, 장로 임직을 받은 후에는 장로가 아니라 잡로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부족하고 부족한 제가 거기에 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주제를 '내 모습 이대로' 라고 한 것은, 바로 이같이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상처 투성이면 상처 투성인 채로, 주앞에 나와, 있는 그대로 받아달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참 신앙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참으로 뻔뻔한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탕자의 비유처럼, 하나님께서는 찾아왔다는 것 자체로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내 모습 이대로 받아달라는 용서와 회개의 기도를 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씻기워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설교의 부제로, '50.1 대 49.9의 삶'이라고 단 것도 비슷한 논리에 따른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선과 악을 모두 행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볼 때, 선행이 50.1 정도이고, 악행이 49.9 정도만 되어도 족하다는 뜻으로 그렇게 표현해 본 것입니다. 100대 0과 같이 완전한 선행을 할 수만 있으면 오죽 좋겠습니까만, 그것은 하나님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욕심을 버려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0 대 100이나 2,30 대 7,80 정도로 악행이 훨씬 많은 사람도 큰 소리치고 사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런데, 비록 7,80 대 2,30 정도로 선행이 훨씬 많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50.1 대 49.9 정도만이라도 선행이 조금, 아주 조금 더 많은 사람이 기 죽어 산다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0 대 100인 사람도 용서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선행이 조금 더 많은 그러한 사람들은 더 더욱 귀히 여기실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만한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 나의 주장입니다. 사회적으로 볼 때에도, 그런 사람이 기를 펴고 살 수 있고, 나아가 사회의 중심 축이 될 수 있기만 하다면, 사회는 건강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는 가끔 자기 성찰이나 회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칫 자신의 잘못이나 죄를 속속들이 찾아내기 때문에, 기를 죽이고 자신을 혐오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내 모습 이대로 받아달라는 믿음과 50.1 대 49.9의 삶이라도 유지하기 위하여 부단히 자기를 관리하고 방향 잡아가려는 소박한 의지를 바탕으로 하는 자기 성찰과 회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그것은 희망과 상호 존중과 정의의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원동력이요, 견인차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래 전에 받았던 저의 이 은혜에 대하여, 우리 교회에서 공부를 하는 '예수는 누구인가'를 쓴 크로산 박사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은혜가 자매 형제 여러분의 삶과 신앙에 힘과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바램이 주안에서 이룩되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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