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고전12:14-25 |
---|---|
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http://je333.com |
서울대 학생생활연구소 조사에 의하면 서울대 학생들의 상담중에 가장 많은 상담 내용이 열등감의 문제라고 합니다. 탁월한 학생들이지만 더 우수한 학생들과 비교하다가 만성적인 열등감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는 습관은 불행하게 사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비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결과 열등감이 생겨나게 됩니다. 열등감의 큰 문제는 자신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맙니다. 반대로 비교함으로 생겨나는 또 다른 후유증은 우월의식입니다.
21절에는 눈이 손더러 쓸데없다고 무시하고 머리가 발더러 쓸데없다고 구박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우월감의 표현입니다. 우월감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신을 과장되게끔 인식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정직한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결코 자신의 약점을 시인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비교의식의 부작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우리 자신에 대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독특한 걸작품이라는 창조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창조의식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에게 주신 고유한 은사를 따라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렛 미첼 여사가 유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완성하고 있을 때, 하루는 누군가가 책을 한권 보내 왔는데, 그 당시 스테반 빈센트라는 사람이 남북 전쟁을 노래로 하여 쓴 "존 브라운의 시신"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은 미첼 여사는 그 작품의 훌륭함에 비하여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이 너무도 보잘 것 없다는 생각에 빠져, 쓰다만 자신의 원고를 옷장 안에 6개월 동안 쳐박아 두고 시름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여사는 다음과 같은 충고를 듣고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드디어 완성하게 된 것입니다.
"저런, 이것은 당신 자신을 남과 비교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지 마세요. 성공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잠재력을 얼마나 발휘하느냐에 따라 진실로 측량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 위에서 노력하시고 나머지는 잊어버리도록 하세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놀라운 잠재력을 가름하기 전에, 남이 갖고 있는 능력만을 먼저 보고 그 때문에 쉽게 실망하며 자신을 학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위를 보면 자녀들이 학교에서 공부를 조금 못하거나, 여러 가지 활동에서 부족함을 보이면 누구누구는 잘하는데 너는 못하니 하는 식으로 꾸지람을 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일들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고무하기보다는 위축하게 하거나 용기를 잃게 하기 쉽습니다.
남으로부터 타산지석의 교훈뿐만 아니라 좋은 장점을 본받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남과 자신을 비교만 하는 것은 자신의 성공요인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재능을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은 분명 자기 자신이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성공은 참으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의 열심, 열심...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특별히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회당장 야이로의 죽었던 딸을 살리실 때에 예수님의 이적을 보았고 산상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신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시는 모습도 목격했습니다. 그는 12제자 중에서도 요한과 야고보와 더불어 더 드러나 보입니다. 참말 그는 예수님을 좇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고(포기) 열심으로 주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최후의 성찬에서 모두가 자신을 버릴 것을 예언하시자 완강이 부인합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은근히 자신과 다른 제자들을 비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모든 것을 버리고 충성했던 베드로, 그는 어쩌면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인정받고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요?
또 베드로는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이며 동료인 요한을 보았을 때 슬며시 그와 자신을 비교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나 베드로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복음을 전파하다가 십자가에 팔을 벌리고 못박혀 순교할 것이 분명하지만,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인 요한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주여 이 사람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로 냉정합니다. 요한이 어찌되든 그것이 너 베드로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너 베드로는 그런 일에 신경쓰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딱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우리도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잘 완수해야겠다고 열심을 다하여 뛰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주위를 돌아보며 베드로와 같이 엉뚱한 질문을 한 경험이 없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선한 일을 계획할 때 혹은 직분을 맡을 때,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는 더 낫다고, 더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다른 교인들 보다 더 권위를 가져야하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실 때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주를 사랑합니다."하고 비교하거나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깨어진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타인과의 비교에서 우월감을 느끼거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주님은 당신의 가치를 타인과의 비교에서 찾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주님께서 구속하신 주의 자녀입니다. 기억합시다. 우리의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만 홀로 외롭고 고달프게 숨이 차도록 힘든 고생을 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없었습니까?
주위를 둘러보며 비교의식에 쌓여 힘들어 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역시 다른 사람은 어떠하든지 상관하지 말고 사명의 사람인 너는 나를 따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느껴지는 순간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맡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한 사도 바울의 비장한 신앙고백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결박을 당하고 환란을 겪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지시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갈 것을 결심하면서 한 비장한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고백대로 살았기에 그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딤후4:7)고 흐뭇한 평가를 자신에게 내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쓸데없이 앞뒤좌우 바라보고 비교하느라 힘을 낭비하지 말고 우리 각자에게 주신 고유한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주께서 부르실 때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갈6:4-5)
어느 부부가 오랜만에 데이트를 했습니다. 저녁도 같이 먹고 영화도 보고 즐거운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부인 친구 얘기가 나왔습니다.
"내 친구는 복도 많아, 지난번 아파트를 사더니 또 60평짜리를 샀다네? 그리고 신랑이 얼마나 잘해주는지... 당신은 그 신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그 후 신랑은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설날에 처가댁에 인사를 갔습니다. 식사를 하고 덕담을 나눈 후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집안 얘기를 하다가 네 집안, 내 집안, 비교하며 깎아내리기를 하였다. 이런 것들이 빌미가 되어 결국은 이혼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비교하지 마십시오.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을 비교 하지 마십시오.
내 부모와 남의 부모를 비교 하지 마십시오.
내 아내와 남의 아내를 비교 하지 마십시오.
내 남편과 남의 남편을 비교 하지 마십시오.
내 집안과 남의 집안을 비교 하지 마십시오.
내 직업과 남의 직업을 비교 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하나밖에 없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존재입니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남과의 비교는 발전용에만 사용합시다.
나무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칡덩굴을 거두려고 붙들었는데 그게 하필 그늘에서 자고 있던 호랑이 꼬리였습니다. 잠자는 호랑이를 건드린 거죠. 깜짝 놀라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호랑이가 나무를 흔들었습니다. 나무꾼은 놀라서 그만 손을 놓았고 나무에서 추락했습니다.그런데 하필이면 떨어진 장소가 호랑이 등이었습니다. 이번엔 호랑이가 놀라 몸을 흔들었고 나무꾼은 호랑이 등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한 호랑이가 나무꾼을 떨어뜨리려고 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무꾼은 살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 호랑이 등을 더 꽉 껴안았습니다.
마침 한 농부가 무더운 한여름 날씨에 밭에서 일하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불평을 합니다. “나는 평생 땀흘려 일해도 사는 게 이 꼴인데 어떤 놈은 팔자가 좋아서 빈둥빈둥 놀아도 호랑이 등만 타고 다니니 어디 살겠는가?”하고 팔자타령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호랑이 등을 붙들고 있는 나무꾼이 농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우리가 남들을 보면 다 행복해 보이고,만족한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나를 이웃과 비교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이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냈는데 나중에 와서 한 시간씩만 일한 자나 먼저 온 자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주매 먼저 온 자가 집주인을 원망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처음 약속한 대로 한 데나리온을 받았지만, 그들은 나중 온 사람과 비교할 때 불평이 생긴 것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40년동안 감사를 몰랐습니다. 그것은 지금 광야의 삶과 먹을 것이 조금 더 넉넉했던 애굽의 삶을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광야의 삶이 노예로서 누리는 애굽의 배부름과 어찌 비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불평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있습니다.그것은 우리가 가진 귀중한 자산은 모르고 남이 가진 것의 외형만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큰집에 사는 사람은 행복해 보입니다. “저렇게 큰집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집이 커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집이 작아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라를 지나 신광야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양식이 부족하자 모세와 아론을 향해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애굽기 16:2∼3)
그들의 불평은 홍해 앞에 설 때도, 고기가 먹고 싶다고 투정할 때도 계속됐습니다. 결국 이 불평과 원망의 무리는 시체가 되어 광야에 뉘어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빼앗기고 맙니다.
비교하면 모두가 불행해지지만 서로의 장점을 발견하면 우리는 늘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에 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기도: 공의로우신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비교하지 말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복을 따라 늘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잊고 교만한 내가 되지 않게 하소서. 때때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남들과 비교하며 불평하는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인도하셔서 순종함으로 얻는 평강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태릉고등학교 교사)
오늘 본문에도 비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결과 열등감이 생겨나게 됩니다. 열등감의 큰 문제는 자신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맙니다. 반대로 비교함으로 생겨나는 또 다른 후유증은 우월의식입니다.
21절에는 눈이 손더러 쓸데없다고 무시하고 머리가 발더러 쓸데없다고 구박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우월감의 표현입니다. 우월감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신을 과장되게끔 인식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정직한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결코 자신의 약점을 시인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비교의식의 부작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우리 자신에 대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독특한 걸작품이라는 창조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창조의식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에게 주신 고유한 은사를 따라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렛 미첼 여사가 유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완성하고 있을 때, 하루는 누군가가 책을 한권 보내 왔는데, 그 당시 스테반 빈센트라는 사람이 남북 전쟁을 노래로 하여 쓴 "존 브라운의 시신"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은 미첼 여사는 그 작품의 훌륭함에 비하여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이 너무도 보잘 것 없다는 생각에 빠져, 쓰다만 자신의 원고를 옷장 안에 6개월 동안 쳐박아 두고 시름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여사는 다음과 같은 충고를 듣고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드디어 완성하게 된 것입니다.
"저런, 이것은 당신 자신을 남과 비교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지 마세요. 성공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잠재력을 얼마나 발휘하느냐에 따라 진실로 측량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 위에서 노력하시고 나머지는 잊어버리도록 하세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놀라운 잠재력을 가름하기 전에, 남이 갖고 있는 능력만을 먼저 보고 그 때문에 쉽게 실망하며 자신을 학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위를 보면 자녀들이 학교에서 공부를 조금 못하거나, 여러 가지 활동에서 부족함을 보이면 누구누구는 잘하는데 너는 못하니 하는 식으로 꾸지람을 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일들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고무하기보다는 위축하게 하거나 용기를 잃게 하기 쉽습니다.
남으로부터 타산지석의 교훈뿐만 아니라 좋은 장점을 본받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남과 자신을 비교만 하는 것은 자신의 성공요인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재능을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은 분명 자기 자신이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성공은 참으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의 열심, 열심...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특별히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회당장 야이로의 죽었던 딸을 살리실 때에 예수님의 이적을 보았고 산상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신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시는 모습도 목격했습니다. 그는 12제자 중에서도 요한과 야고보와 더불어 더 드러나 보입니다. 참말 그는 예수님을 좇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고(포기) 열심으로 주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최후의 성찬에서 모두가 자신을 버릴 것을 예언하시자 완강이 부인합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은근히 자신과 다른 제자들을 비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모든 것을 버리고 충성했던 베드로, 그는 어쩌면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인정받고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요?
또 베드로는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이며 동료인 요한을 보았을 때 슬며시 그와 자신을 비교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나 베드로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복음을 전파하다가 십자가에 팔을 벌리고 못박혀 순교할 것이 분명하지만,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인 요한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주여 이 사람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로 냉정합니다. 요한이 어찌되든 그것이 너 베드로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너 베드로는 그런 일에 신경쓰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딱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우리도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잘 완수해야겠다고 열심을 다하여 뛰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주위를 돌아보며 베드로와 같이 엉뚱한 질문을 한 경험이 없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선한 일을 계획할 때 혹은 직분을 맡을 때,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는 더 낫다고, 더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다른 교인들 보다 더 권위를 가져야하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실 때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주를 사랑합니다."하고 비교하거나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깨어진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타인과의 비교에서 우월감을 느끼거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주님은 당신의 가치를 타인과의 비교에서 찾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주님께서 구속하신 주의 자녀입니다. 기억합시다. 우리의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만 홀로 외롭고 고달프게 숨이 차도록 힘든 고생을 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없었습니까?
주위를 둘러보며 비교의식에 쌓여 힘들어 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역시 다른 사람은 어떠하든지 상관하지 말고 사명의 사람인 너는 나를 따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느껴지는 순간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맡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한 사도 바울의 비장한 신앙고백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결박을 당하고 환란을 겪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지시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갈 것을 결심하면서 한 비장한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고백대로 살았기에 그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딤후4:7)고 흐뭇한 평가를 자신에게 내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쓸데없이 앞뒤좌우 바라보고 비교하느라 힘을 낭비하지 말고 우리 각자에게 주신 고유한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주께서 부르실 때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갈6:4-5)
어느 부부가 오랜만에 데이트를 했습니다. 저녁도 같이 먹고 영화도 보고 즐거운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부인 친구 얘기가 나왔습니다.
"내 친구는 복도 많아, 지난번 아파트를 사더니 또 60평짜리를 샀다네? 그리고 신랑이 얼마나 잘해주는지... 당신은 그 신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그 후 신랑은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설날에 처가댁에 인사를 갔습니다. 식사를 하고 덕담을 나눈 후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집안 얘기를 하다가 네 집안, 내 집안, 비교하며 깎아내리기를 하였다. 이런 것들이 빌미가 되어 결국은 이혼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비교하지 마십시오.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을 비교 하지 마십시오.
내 부모와 남의 부모를 비교 하지 마십시오.
내 아내와 남의 아내를 비교 하지 마십시오.
내 남편과 남의 남편을 비교 하지 마십시오.
내 집안과 남의 집안을 비교 하지 마십시오.
내 직업과 남의 직업을 비교 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하나밖에 없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존재입니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남과의 비교는 발전용에만 사용합시다.
나무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칡덩굴을 거두려고 붙들었는데 그게 하필 그늘에서 자고 있던 호랑이 꼬리였습니다. 잠자는 호랑이를 건드린 거죠. 깜짝 놀라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호랑이가 나무를 흔들었습니다. 나무꾼은 놀라서 그만 손을 놓았고 나무에서 추락했습니다.그런데 하필이면 떨어진 장소가 호랑이 등이었습니다. 이번엔 호랑이가 놀라 몸을 흔들었고 나무꾼은 호랑이 등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한 호랑이가 나무꾼을 떨어뜨리려고 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무꾼은 살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 호랑이 등을 더 꽉 껴안았습니다.
마침 한 농부가 무더운 한여름 날씨에 밭에서 일하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불평을 합니다. “나는 평생 땀흘려 일해도 사는 게 이 꼴인데 어떤 놈은 팔자가 좋아서 빈둥빈둥 놀아도 호랑이 등만 타고 다니니 어디 살겠는가?”하고 팔자타령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호랑이 등을 붙들고 있는 나무꾼이 농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우리가 남들을 보면 다 행복해 보이고,만족한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나를 이웃과 비교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이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냈는데 나중에 와서 한 시간씩만 일한 자나 먼저 온 자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주매 먼저 온 자가 집주인을 원망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처음 약속한 대로 한 데나리온을 받았지만, 그들은 나중 온 사람과 비교할 때 불평이 생긴 것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40년동안 감사를 몰랐습니다. 그것은 지금 광야의 삶과 먹을 것이 조금 더 넉넉했던 애굽의 삶을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광야의 삶이 노예로서 누리는 애굽의 배부름과 어찌 비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불평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있습니다.그것은 우리가 가진 귀중한 자산은 모르고 남이 가진 것의 외형만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큰집에 사는 사람은 행복해 보입니다. “저렇게 큰집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집이 커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집이 작아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라를 지나 신광야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양식이 부족하자 모세와 아론을 향해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애굽기 16:2∼3)
그들의 불평은 홍해 앞에 설 때도, 고기가 먹고 싶다고 투정할 때도 계속됐습니다. 결국 이 불평과 원망의 무리는 시체가 되어 광야에 뉘어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빼앗기고 맙니다.
비교하면 모두가 불행해지지만 서로의 장점을 발견하면 우리는 늘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에 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기도: 공의로우신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비교하지 말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복을 따라 늘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잊고 교만한 내가 되지 않게 하소서. 때때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남들과 비교하며 불평하는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인도하셔서 순종함으로 얻는 평강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태릉고등학교 교사)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