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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 공동체

고린도전 길희성............... 조회 수 1966 추천 수 0 2007.12.07 00: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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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전12:4-13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사람은 모두 타고난 소질과 재능이 다르며 하는 역할이 다르고 차지하는 사회적 지위가 다릅니다. 사회란 이러한 지위와 역할들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누구나 다 같은 일을 하는 사회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노동의 분화가 너무 심화되면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경향이 있으나 분업 없는 사회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현대와 같이 복잡한 사회생활은 더욱 그렇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질과 능력의 차이 및 역할의 차이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낳고, 이러한 불평등을 유지하고 영속화시키기 위하여 착취와 억압을 낳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치고 이러한 불평등과 억압이 없는 사회는 없을 것입니다. 사회주의가 불평등을 제거하려고 엄청난 사회실험을 감행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소질과 능력의 차이, 역할의 분담과 노력의 대가에 대한 차별화는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차별화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의 인권이 존중되고 억압과 착취가 없는 사회를 만드느냐에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안 되고 오직 성령의 초월적 역사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 오늘 읽은 사도 바울의 말씀이 증언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적인 사회공동체가 곧 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상적인 사회, 각자가 지닌 능력과 역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상적 질서의 억압적 구조와는 다른 모형을 제시하는 대조사회입니다. 교회는 곧 하나님나라의 가시적 징표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 의하면 첫째, "은혜의 선물은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여기서 중요한 말은 '은혜의 선물'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소질과 재능이 모두 은혜의 선물, 곧 카리스마라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카리스마라고 하면 어떤 특정한 사람(케네디, 히틀러, 카라얀 등)만이 소유하고 있는 특별한 매혹적인 힘이라고 생각하나, 이것은 성서의 본래적 사상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이 왜곡되고 대중화된 것입니다. 성서적 증언에 의하면 인간은 모두 각자의 고유한 재능,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인식하고 자각하지 못할 뿐입니다. 즉 우리가 가진 재능이나 소질이 성령에 의해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라는 자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깊이 자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은혜의 선물에는 분명히 차이와 다양성이 존재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다 같은 카리스마를 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에게 무슨 카리스마가 있나 하고 의심할 때도 있고, 왜 나는 요모양 요꼴인가 하고 가끔 자기 자신의 카리스마에 대하여 불평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 치고 그런 생각을 안 해본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지혜와 겸손이 필요합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우리가 지닌 차별적인 능력과 기능이 교만이나 열등감으로 이끌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닌 능력은 어디까지나 성령에 의해 주어진 것, 은총의 선물이기에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받은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준 성령은 하나임을 동시에 의식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들간의 차이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성령공동체로서 하나의 뿌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재능들이 같은 뿌리에서 온 것임을 알 때 개인들 사이의 차이는 상대화되고 소외보다는 연대감, 차이보다는 동질성이 부각될 것입니다. 마치 한 가족이 재산을 공유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카리스마 공동체의 통일성을 바울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근거해서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지만, 같은 주님을 섬깁니다." 여기서는 섬긴다라는 말, diakonia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우리들에게 성령으로 주어진 은총의 선물은 섬기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경쟁하고 지배하고 착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섬김의 대상이 중요합니다. 섬기는 것이 자신의 안락이나 명예, 권력, 돈, 자신의 가족이나 자기가 속한 직장, 정당 혹은 자기가 추종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섬길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 사회의 모습으로서, 경쟁과 갈등, 분열과 대립의 세계를 산출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섬김의 대상이 분명히 '주님'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닌 재능이 각기 다르기는 해도 같은 성령에 의해 같은 주님을 섬기는 같은 목적을 향해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주님을 섬기는데 나와 너의 공로를 따지거나, 자랑이나 교만, 열등감이나 시기가 어디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하기를,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닌 다양한 능력은 성령의 선물이요, 그 목적은 주님을 섬기는 일이며, 그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의 성과도 내가 이루는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교만이 들어 설 자리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들이 지닌 다양한 능력과 재능이 한 성령에 의해 한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주어진 다양한 은사로서, 이 섬김의 일을 성취시키는 것도 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7절에서는 분명히 못박아 말하기를,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시는 것은 공동의 이익을 얻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각자가 자신의 이익이나 영광을 추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위해 차이와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공동체 전체를 위한 재능들이라는 것입니다. 12장 후반에 나오는 몸과 지체의 비유를 통해 바울은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몸의 각 지체들이 기능이 다르지만 하나같이 다 귀하고 하나같이 한 몸을 위해 봉사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 각자는 공동체의 선을 이루기 위하여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쟁의 원리에 서 있는 일반 사회와는 다른 카리스마 공동체로서의 교회공동체의 특징입니다. 대립과 경쟁보다는 단결과 화합, 억압과 착취보다는 봉사와 희생이 있는 진정한 공동체의 이상입니다. 이것이 교회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하나님나라의 징표가 되게끔 하는 것이며, 우리가 지상에서 이러한 모습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름다운 공동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각자 받은 특수한 은혜의 선물 외에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이 공통으로 받은 은혜의 선물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공통적인 카리스마가 밑받침되어야 비로소 그리스도에 속한, 그리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그리스도의 한 몸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보편적인 은혜의 선물을 로마서 6장 22-23절에서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와 죽음을 안고 살던 존재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영생의 약속과 확신을 하나님의 선물, 즉 카리스마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는 한 몸 공동체의 기반이며, 이 엄청난 은혜의 선물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주어진 재주와 능력을 다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역사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러저러한 특수한 선물을 주시기 전에 우리 전 존재를 바꾸어 놓아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누리게 하고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게 하시는 존재입니다. 죄와 죽음의 역사, 어둠의 역사가 아니라, 빛과 생명의 역사를 창조해 나가게 하는 힘이 성령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하는 모든 일, 그리고 우리가 지닌 모든 재주가 죄와 죽음의 역사의 도구가 되며, 이기적 욕망을 채우고 자기 영광, 자기 허영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전락되고 마는 법입니다. 성령은 참된 생명을 창조하는 힘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살리는 부활과 생명의 힘입니다. 우리는 이 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된 것입니다(로마 8: 9-11). 그리하여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사는 것, 곧 내 안의 생명의 영인 그리스도의 영이 살고 있다는 고백을 바울과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갈라디아 2: 20).

카리스마 공동체인 교회는 이러한 공동의 신앙고백 위에서 각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은사를 동원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들어내고 섬기는 공동체, 생명의 역사를 창출해 가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요 그리스도인의 사명이자 존재 이유입니다. 이 생명의 역사가 완성되는 날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역사의 종말입니다. 교회는 이 종말적 실재를 믿음 가운데서 앞당기며 선취하는 종말론적 공동체입니다. 불가시적 하나님나라의 가시적 징표로서 교회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현존해야 합니다. 물질주의가 팽배해 있는 현대사회에서 이렇게 생명의 역사를 창출하면서 그리스도를 섬기며 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칫하면 돈과 향락을 목적으로 하여 섬기며 살기가 쉽습니다. 일을 하면 보수가 따르기 마련이나 보수를 받기 위해서 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태도가 아님을 항시 명심하여 수단과 목적이 바뀌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헛되고 거짓된 삶을 청산하고 참 생명을 얻었다는 신앙적 자각을 늘 새롭게 해야 합니다.

생명의 역사를 창출하는 성령은 교회만이, 그리스도인들만이 독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된 생명의 역사는 모든 생명이 다시 태어나고 만물이 새롭게 되는 새로운 창조의 날, 그 날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교회는 단지 이 새로운 역사의 선봉장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정의와 평화, 사랑에 근거한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앞당겨 사건화 시키는 존재가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사회와 문화의 각 방면에서 하나님나라의 생명의 역사를 창출하는 모든 세력들과 연대하여 일해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성령은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셨을 뿐 아니라 생명의 역사를 창출할 수 있는 각가지 특수한 카리스마, 즉 은총의 선물도 각자에게 주었습니다. 우리 교회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작은 교회지만 다양한 재능과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가꾸어 나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카리스마를 자각하고 각자 모두 참여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방관적 자세나 의심을 버리고 함께 카리스마의 공동체를 키워 나가십시다. 카리스마를 전혀 안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깨닫고 발견하는 믿음의 눈이 없을 뿐입니다. 크던 작던 받은 그대로의 은총의 선물을 주님을 섬기는 일에 바치십시다.

바울은 오늘의 말씀 속에서 주로 교회공동체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비단 교회생활만의 원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생활까지도 같은 자세로 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마찬가지의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에서는 자신의 능력이 성령의 은사임을 잊고, 그리스도를 섬기기보다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다가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와서 좋은 얘기 듣고는 반성하고 돈 조금 내고 위안을 삼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자기의 재능과 재산, 시간과 정력의 십의 일은 교회에 바치고 십의 구는 자기 마음대로 써도 좋다는 것이 신앙생활은 아닙니다. 자기생활은 사치스럽게 하면서 교회에서 지나치게 근검절약을 주장하고 엄격한 것을 요구하거나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교회생활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사회생활을 그리스도인답게 잘 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의 약속 위에 서서 기쁨과 감사로써 주어진 능력 전체를 자신의 유익, 자기 혈육만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물과 만인의 생명을 창조하는 하나님나라의 역사에 투입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된 삶, 보람 있고 행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카리스마 공동체는 그리스도인들이 보는 사회 전체의 이상적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각자가 자기가 받은 은혜의 선물에 따라 섬기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올바른 사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우선 자신의 능력과 재주, 자신의 직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의 선물임을 자각 못 합니다. 과거 전통사회에서는 대체로 자기가 하는 일이 천직, vocation, calling, 이라는 의식이 있었으나,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퍼지면서 천직의 사상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사람의 능력은 개발하기에 달렸다는 생각은 신앙적으로도 옳은 생각이 아니고, 사실도 아닌 허구입니다. 실제로 사람에게는 타고난 능력과 소질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려우며, 일생을 통하여 할 수 있는 직업이나 일의 선택은 아무리 유동성이 많은 현대사회라 해도 사실상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으로서, 공연히 마음만 들뜨게 하여 자기의 일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항시 불평불만에 차서 남의 일이나 넘보게 만드는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잘못된 평등주의를 낳습니다. 자기의 처지와 분수, 가능성과 한계를 깨달아 알고 겸손히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오히려 신앙적 태도가 아닐까요? 한국 개신교는 신앙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구잡이식 허황한 자신감을 심어주는 데 한 몫을 단단히 했습니다. 희생과 고난의 복음이 아니라 성공과 출세의 복음을 팔면서 성장해 왔으며, 하면 된다는 식의 박정희 시대로부터의 시대정신에 묘하게 부합하여 내실은 없이 겉만 번지르르한 외형적 성장에 치중해 온 것이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한국교회의 성수대교와 같은 붕괴가 없으리라 아무도 장담 못 합니다. 요즈음,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사고의 연속을 보면서 매우 참담하고 허탈한 기분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열심히 쌓아 올린 삶의 기반이 밑바닥부터 허물어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사회 전체가 성수대교와 더불어 무너져버린 것과 같은 허탈감을 감추기 어렵습니다. 생각해 보면, 오늘 우리의 위기상황의 배후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직업의식, 소명의식의 결핍과 잘못된 평등주의의 팽배가 한 몫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하나님이 은혜로서 맡겨준 선물이라는 감사와 소명의식은 없고, 마지못해 일하다가 돈만 더 주면 언제든 하든 일을 때려치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습니다. 마음이 딴 데 가 있는데 맡은 바 일을 철저히 할 리가 없습니다. 대충 해두고 기회만 오면 다른 데로 뜨면 된다는 생각이 확산되어 있습니다. 사명감이란 찾아보기 어렵고 생각하는 것은 돈뿐인데 무슨 일인들 제대로 되겠습니까? 공동체 의식은 온데 간데 없고 저마다 자기권리, 부처마다 자기 끗발만을 행사하려 드니, 나라꼴이 제대로 될 리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하는 일에 불만을 갖고 있으니 우리 사회에서 친절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우리 사회의 불친절은 무엇보다도 자기 하는 일에서 만족이나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물론 그 이유는 간단치 않습니다. 적은 보수, 돈 없고 못 배운 사람에 대한 멸시와 천대 등 비인간적 대우, 그리고 사회 기강의 해체와 무질서에도 그 원인이 있습니다. 무명의 군인이 갑자기 대통령이 되어 정치를 하고, 땅 투기로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졸부들이 행세하고, 출세 지향적인 언론인들도 기회만 오면 천직과 같이 여기던 일을 언제 그랬냐는 듯 팽개치고 정치에 뛰어드는 풍토 속에서 차분히 자기 일을 소같이 하려는 사람은 무능력한 사람,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의 사태가 말해주는 것은, 사회에는 기적이란 있을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입니다. 혁명을 수백 번 해도, 제도와 법을 수없이 뜯어고치고 개혁해도, 그 국민들의 정신적 상태 이상의 결과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를 이제야 우리는 비로소 뼈아프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회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기 전에 각자가 허황한 생각을 버리고 자기의 분수와 본분을 깨닫고 자기의 카리스마를 자각하여 감사와 겸손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천직으로 알고 해 나가는 길 외에 달리 병든 사회를 치유할 방도가 없다는 극히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다시 배워야 합니다. 제도 개혁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에게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의식의 혁명, 삶의 자세의 일대 전환이라는 결론에 불가피하게 도달합니다. 다리가 위험하다는 보고를 누차 받고서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공무원이 누구를 탓하고 무슨 핑계를 댈 수 있겠습니까?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을 다시 한번 묵상해 볼 때, 이 말씀은 교회든 사회든 그 구성원들은 자기의 능력과 일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곧 자신의 카리스마로 자각하고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그리고 일을 성취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임을 알고 겸손히 자기의 일을 해 나가는 카리스마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교회, 그러한 사회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튼튼한 반석 위에 놓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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