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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고전9: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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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완상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
벌써 열 한해가 흘렀습니다. 암울했던 1987년 3월 초, 봄의 꽃을 시샘하는 추위가 정치적 한파와 함께 우리를 움츠리게 하던 그해 3월 첫 주일에 새길공동체가 태어났습니다. 6월 항쟁과 6.29선언이라는 시민 승리가 우리를 흥분케 하기 전에 벌어졌던 살벌한 군사통치 분위기 속에서 새길공동체는 봉사와 선교의 닻을 올렸습니다. 양적 확산에 아직도 정신을 쏟으면서 계속 확장일로를 달렸던 한국교회의 모습과는 달리 예언자적 증언과 선교적 공감을 소중한 모범으로 믿으면서 새길공동체는 출범했습니다. 엊그제만 같습니다.
이제 군사정권은 물러간 것 같습니다. 비록 그 유제는 아직 우리 현실 속에서 버티고 있지만 말입니다. 이제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도 중지된 것 같습니다. 나라는 경제 난국 속에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지난 11년간 한국 사회 형편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열한해 전 새길공동체를 출범시킨 그 뜻과 그 결단은 아직도 소중하며, 앞으로 더욱 소중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까지 그 뜻과 결단은 더욱 정갈하게 빛날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사회, 한국교회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생각하면서 우리 스스로를 또 다시 되돌아보며 열 한해 전의 그 결의를 새롭게 다듬기 위해서 우리는 증언교회와 공감교회의 모습과 특징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중심적 확장과 파송적 열정에 불타는 전도 지향적 교회와 아주 대비되는 자기 비움의 증언교회를 더욱 새롭게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대부분의 한국교회들은 교회의 주요 역할이 전도, 파견, 확장 등을 강조하는 십자군식 전도와 선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군 전도식 확장을 강조하는 교회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자의 우수성을 확신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미개한 존재라고 생각해서 어떻게 하든지 미개한 존재를 구원받은 우수한 존재, 곧 개명한 존재로 전환시키려고 합니다. 게다가 구원의 방주로서 개명한 조직체인 교회는 그 자체가 신성한 위계질서를 가졌다고 믿습니다. 교회조직과 운영을 신성시하는 만큼, 그것은 속된 밖의 세상에서 닫혀진 채로 존속하기 쉽습니다. 바로 이 같은 교회조직을 기록한 지성소 같은 것으로 믿기에, 하나님을 그곳에 꼭 가두어두려고 합니다. 교회 밖에서 일하시는 하나님보다 거룩 거룩한 곳에 항상 머물러 있기를 더 좋아하시는 하나님을 더 크게 부각시킵니다. 그러기에 이 같은 전도교회는 대단한 열성을 지니고 구원받지 못한 미개한 인간들을 개조시켜 구원의 방주인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에 경쟁적으로 앞서가려 합니다. 국내와 선교사 파견에 큰 힘을 쏟아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채울수록 더 채워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잡혀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는 그토록 열성으로 교화시켜놓은 이방인을 때때로 크게 실망시키기도 합니다. 아니 그들을 지옥의 자식으로 추락시키기도 합니다(마태 23:15). 예수님께서 바로 이 같은 전도열정을 크게 꾸짖기도 했습니다. 대체로 한국교회, 특히 양적 팽창을 최고의 자랑으로 여기는 교회일수록 전 교인을 이와 같은 십자군적 전도에 열성적으로 참여시킵니다. 제가 미국에서 유학했던 1960년대 초, 미국 남부 메이킨시에 있는 큰 백인 교회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아프리카에서 온 유학생 몇 명이 교회 밖에서 서성거렸습니다.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교회에서 전액 장학금을 주어 미국에 유학 왔으며 오늘까지 이 교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녔지요, 그런데 갑자기 인종문제로 저희들이 교회에 들어가는 것을 장로님들이 막았습니다. 기가 찹니다. 자기들이 장학금을 주어 불러놓고서, 이제는 흑인이니까 교회에서 예배도 볼 수 없다고 쫓아내니. . ." 이 같은 백인 교회는 저 멀리 아프리카로부터 유학생을 전도하여 장학금까지 주면서 교회 안으로 끌어들였다가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면서 그들을 쫓아낸 것입니다. 이것이 위선적 십자군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이 유학생들 마음속에 반미(反美)의 증오가 싹트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 (1997년 11월호)은 어느 개신교의 '무례한' 전도를 소개한 글을 실었습니다. 예의와 상식을 무시하면서 무리하게 이웃을 괴롭히는 의 전도 행위를 꼬집는 글이었습니다. 철이 엄마는 평소에 아주 착실하고 건강하고 예쁜 사십대의 부인입니다. 그런데 전도할 때는 갑자기 그 착실함과 예의바름이 사라지고 예의와 상식을 저버린 채 무례한 행동을 서슴없이 행한다고 했습니다. 이웃의 사(私)생활의 고요를 버릇없이 깨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구원받지 않으면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고 거침없이 위협하기도 합니다. 철이 엄마는 이웃에게 퍽 친절합니다. 헌데 그 친절함도 이제는 전도를 위한 로 인식되어 그녀가 친절할수록 그것은 역겹고 위선적인 몸짓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극성스러워집니다. 이 같은 이웃의 를 그녀는 의로운 핍박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이럴수록 무례한 전도는 더 강해지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철이 엄마는 자기자신을 겸손히 되돌아보면서 남의 입장에서 남의 형편을 살필 수 있는 철든 어른의 예의바른 행위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 십자군식 밀어붙이기 전도에 그녀는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서는 과연 이와 같은 전도행위를 올바른 복음 전략으로 가르치고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정말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어떤 복음 전략을 가르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증언과 공감의 교회의 한 모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사도 바울의 놀라운 선교와 전도의 융통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그는 정말 엄청난 자기 초월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대체로 성숙한 인간일수록 자기성찰과 자기초월에는 성실합니다. 이것은 곧 자기중심주의의 포기를 뜻합니다. 자기입장을 떠나야 합니다. 자기 입장을 견고하게 고수할수록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유치한 자기집착은 동물보다 못한 짓입니다. 자기를 떠나야 비로소 자기의 모습을 보다 정확하고 공평하게 볼 수 있어 자기성찰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자기성찰은 곧 남의 입장에 서서 보려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남의 입장에 서서 보아야 자기 모습도 보다 정확히 보면서 자기를 반성하는 동시에 남의 입장에서 남의 딱한 사정, 남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바로 이와 같은 행위는 남과 더불어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수준 높고 교양 있는 사람이란 바로 이와 같은 공감자를 뜻합니다. 참된 개종은 이처럼 함께 아파하는 행위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법이지요. 바람직한 전도행위도 이같이 자기 초월과 남의 입장서기를 거치면서 예의바르게 이루어지는 공감행위(empathy-sympathy)지요. 이것이 바로 선교적 공감(共感)입니다. Empathy와 Sympathy를 통한 이웃과의 깊은 교감이 이루어지면서 복음에 함께 참여하게 됩니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직업과 직분이 더욱 다양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만큼 남의 입장에 선다는 것이, 남처럼 된다는 것이 그렇게 쉽거나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살았던 시대는 우리 시대보다 더 단순한 농경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직분과 직업이 단순하기는 하나 그들간의 칸막이가 워낙 두터워서 그것을 제거한다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 이를테면, 자유인과 종 사이의 벽,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벽,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의 벽, 그리고 남자와 여자 사이의 벽은 너무 높고 두터워서 도무지 허물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이와 같은 장벽을 허물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그리스도 예수께 인도해 오기 위해서였습니다. 복음을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해 그는 과감히 이 계급의 벽, 인종의 벽, 성차별의 벽, 정치 경제적 벽을 허물기로 했습니다. 이와 같은 과감한 행동을 하기 위해 그는 먼저 자기의 입장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장벽 허물기의 시작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비록 나는 자유인이며 아무에게도 매여있지 않지만,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 나는 스스로 나 자신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은 그 소중한 자유인의 그 자유로움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종이 되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래야 종과 같은 많은 사람들을 복음에 초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행위는 결코 자기중심적이고 무례한 의 철없는 돌진행위가 아닙니다. 숭고한 자기 초극을 통한 과 을 이룩하려는 자랑스러운 성숙한 전도행위입니다.
뿐만 입니까?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을 대할 때는 유대인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철저한 유대율법주의자의 삶을 다메색 도상에서 이미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유대인을 그리스도 예수의 자유와 은총으로 초대하기 위해 짐짓 유대율법 준수자처럼 행동했습니다. 실제로 디모데와 디도를 할례 시켰습니다. 우리는 그의 이 같은 행위를 위선적인 것으로 매도할 수 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가 철저하게 버렸던 위선적 율법주의 삶을 다시 되찾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위선적 삶의 족쇄에서 유대인을 해방시키기 위해 유대인의 입장에서 그 유대인과 깊은 대화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을 멸시하거나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그들과 깊은 교감을 하는 중에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복음을 수용하게 하려는 자기초극적 결단입니다.
유대인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이방인들과는 어떠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아테네 선교에서 온갖 우상을 믿는 헬라인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했습니다. 그는 십자군적 열정을 가지고 그 헬라인들을 향해 일방적으로 마구 공격하지 않았습니다(행전 19:37). 이방인들을 복음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는 스스로 유대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고전 9:21). 그렇다고 그가 하나님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율법에서 결코 자유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율법에 매어 있으면서도,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의 역할마스크를 쓰고 이방인처럼 그들과 대화하고 사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과 사회가 만든 온갖 직분과 역할의 마스크를 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남의 역할의 마스크를 쓴다 함은 곧 그의 인격과 삶 속으로 들어가 그와 얘기하고 사귄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잠시라도 버려야 합니다. 위대한 연기자는 자기에게 맡겨진 배역을 철저히 이해하고 그 속으로 들어가서 그 배역의 성격과 인격을 재연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자기 원래의 성격은 잠시 버려야 합니다. 복음의 증거도 바로 이 같은 배역연기를 요구합니다. 배역 연기는 곧 자기 초극을 요구합니다. 자기 초극을 못해내는 사람은 훌륭한 연기자가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의 전도 전략은 곧 일류 배우전략과 같습니다. 바울은 관객을 감동시켜 변화시키는 출중한 연기자였습니다. 단순히 남을 흉내내는 연기자가 아니라 관객을 보다 높은 수준의 존재로 격상시켜주는 변혁의 연기자였습니다.
종을 만나면 종처럼 연기하고,
유대인을 만나면 유대인처럼 행동하고,
이방인을 만나면 이방인처럼 연기하여 마침내
이 모든 이들을 복음잔치의 주인으로 초청합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일은 사도 바울이 약한 자에게 스스로 약한 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몸이 연약한 자에게는 그의 건강을 나눠줌으로 그를 건강하게 만들어 구원잔치에 초청했습니다. 마음(영)이 약해서 우왕좌왕하는 이에게는 자기의 영 또는 기(氣)를 나누어주었습니다. 자기의 기가 넘쳐도 그는 기고만장의 교만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기가 빠져나간 약한 상태를 자랑했습니다(고후 12:9∼12, 로마 15:1∼2). 마치 예수님의 힘과 기가 항상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어 믿음을 갖고 있기만 하면 그것을 빼어갈 수 있듯이 말입니다. 열두해 동안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을 만져 예수의 기로 그녀의 병을 낫게 하듯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남을 위해 자기를 비우면서 스스로 약한 존재가 되는 것을 오히려 자랑했습니다.
복음을 알리는 행위는 기고만장의 십자군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남을 무시하는 무례한 행위도 아닙니다. 남의 기를 꺾는 행위는 더더욱 아닙니다. 남을 협박하는 행위는 정말 아닙니다. 오히려 남의 힘과 기를 세워주고, 남의 소망과 꿈을 이뤄주는 자기 비움의 행위입니다. 이것이 바로 증언과 공감의 행위입니다. 이것이 바로 산상교훈에서 말하는 영이 가난한 자가 받는 축복입니다. 영이 가난하다 함은 기가 빠진 겸손한 공감자를 뜻합니다. 남을 위해 기가 꺾여버린 자가 하늘 나라의 주인이 됩니다. 영이 바로 기(氣)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우리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자기의 힘과 기를 모두 꺾어 우리에게 그 기를 내어주신 거룩한 행위가 바로 십자가 아닙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주 연약한 자로 처형되었지만, 그 분이 그 십자가를 군기처럼 휘날리면서 미개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미개지역에 마구 쳐들어간 적은 전혀 없습니다. 마치 서양 제국주의자들이 미개한 아프리카대륙에 문명의 빛을 던져준다는 미명 하에 돌진했듯이 말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군 전도와 예수의 십자가에 달리심은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아니, 정 반대의 일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듯 합니다. 오늘 교회첨탑에 예외 없이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까닭은 교회로 하여금 십자군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치 주님께서 피와 살을 모두 내어놓았듯이, 교회가 가진 모든 것을 구원을 바라는 모든 인간들을 위해 반드시 내어놓으라는 명령입니다.
새길교회는 십자군전도의 교회는 아닙니다. 의 교회가 아닙니다. 새길공동체는 열린 교회요, 증언과 공감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와 일차로 공감해야 합니까? 누구의 배역을 먼저 맡아 해야 합니까? 우선 새길교회는 지극히 적은 자들을 위한 교회이어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지극히 적은 자의 교회(church of the least)는 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들의 입장에 서려는 공동체는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새길교회는 지식인들의 교회라 할 수 있기에 부족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초극을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지식인들의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둘째로 새길공동체는 꼴찌(the last)를 위한 교회, 꼴찌와 공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뜻은 참 희망의 육화(肉化)되는, 구체화되는 공동체를 뜻합니다. 그러기에 새길공동체는 이 세상에서 꼴찌나 나중된 자들 곧 변두리 인생들이 희망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공동체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기야 새길공동체에는 나 스스로를 포함해서 나중된 자가 되기에는 너무 먼저 된 자들이 많습니다. 그럴수록 우리 스스로의 실존적 한계를 극복하려고 몸부림치는 애씀이 우리 공동체에서 육화되어야 합니다. 예배의식과 사귐 속에서 그러한 몸부림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열한살을 먹게 되었습니다. 지난 이 기간에 우리는 너무 부족했습니다. 자유인의 그 활달한 기상도 부족했고, 종으로서의 그 겸손함도 부족했습니다. 율법에서 자유롭다고 하나 그 자유도 때때로 방종처럼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열린 공동체를 자랑했으나, 보다 철저히 자신을 여는 일에 게을렀으며, 지극히 적은자와 나중된 자들에 대한 관심은 컸으나 그들이 주인 되는 일은 아직도 요원합니다.
우리가 철이 엄마를 닮아서는 안되겠지만, 그녀의 부지런함에 대해서까지 비판할 수 있을는지요. 우리는 이 시점에서 형을 교묘하게 속여 장자상속권을 탈취한 뒤 오로지 양적 확장과 물량적 성공의 길을 치달았던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 한 뒤 새사람으로 거듭났던 사건을 회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은 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새 존재가 되었을 때 허리를 다쳐서 절뚝여야만 했습니다. 허지만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야곱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자기가 속인 형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여기면서 새로 거듭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얍복강가에서의 사건 이전에 잘 나가던 야곱의 그 날쌘 달림의 모습보다 얍복강가에서의 사건 이후에 야곱의 그 측은한 절뚝거리는 모습이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절뚝거리면서 더욱 열심히 그는 새 삶을 걸어갔습니다. 이 열심이 우리의 열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새길공동체는 처음부터 날쌔게 달려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또 절뚝거린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공동체로 살아온 것이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새로운 길 아닌, 샛길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분명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시험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앞세우고 세속을 무시하면서 돌진하는 교회는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사도 바울처럼 온갖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는 자기 비움을 통한 복음 잔치 초대의 교회도 아닙니다. 자기 비움을 통해서 자기 속은 더욱 남들로 꽉 채워져야 합니다. 채우기만 하려는 것은 탐욕이지만 채우지도 못한 체 비우기만 하려는 것도 위선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우기 위해서라도 채우는 열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그 숭고한 선교적 융통성, 그것도 복음이라는 원칙 위에 확고하게 서 있는 그 엄청난 선교의 융통성을 배우고 육화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증언교회와 공감교회의 사명입니다.
공감의 십자가는 있어야 하나, 오만한 십자군의 십자군기는 필요 없습니다. 자기 비움의 십자가는 있어야 하나, 남을 무시하는 십자군기는 없어져야 합니다. 자기 氣를 꺾고 남의 氣를 살려주는 십자가의 사람은 필요하나, 철이 엄마의 철없는 전도의 십자가는 이제 꺾여져야 합니다. 사랑과 믿음과 소망의 십자가가 새길공동체 위에 높이 세워지면서, 그 십자가의 놀라운 자기 비움의 효험이 우리 공동체 안에서 육화되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이란 자기를 빈 그릇으로 만드는 은총의 힘입니다. 그 빈 그릇에 영원한 것을 채워 담아내는 겸손한 힘입니다. 이 힘으로 우리는 새길공동체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키워나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그 놀라운 자기 비움의 융통성이야말로 바로 이 같은 믿음의 본보기입니다. 이 본보기를 따라 열심히 달려갈 때 새길공동체는 철이 들어갈 것입니다. 열한살을 먹으며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철이 들어야 하겠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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