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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과 새것

고린도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621 추천 수 0 2008.09.18 1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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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후5:16-2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03.7.10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0절에서 기독교 입장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그분을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합시오. 이것은 결국 하느님께서 우리를 시켜 호소하시는 말씀입니다. 바울을 여기서 자기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사절이라고 지칭하고 있으며, 자기의 일이 바로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바로 오늘의 기독교인이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가 전하려는 근본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화해를 통해서 우리는 모든 것들과의 화해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하나님이 누구인지, 화해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우리가 잘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 문제를 배우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적대관계?

하느님과 화해하라는 바울의 이 간절한 호소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관계라는 사실을 전제하는 말인데, 이게 옳은가요?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의 비정상적인 관계에 대해서 성서는 여러 곳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미 창세기 초입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합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는 그들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섬기다가 당하는 시련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함으로써 하나님과 적대적인 상태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이 둘러쳐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논리는 기독교 교리의 골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익숙합니다. 최소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세례 문답 공부를 통해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그렇게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개별 신자들은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니까 그러려니 할 뿐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대개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 신앙의 추상성입니다. 교리는 교리일 뿐이지 우리의 현실적 삶과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실존적 의미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또는 심리적이거나 감상적인 차원에서 어렴풋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가 단지 피를 나누었다는 혈연적 관계에서만 밀착되기 때문에 서로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가깝다고 느끼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올바른 관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녀들도 부모들은 한 인간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때만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좀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그 실체적 진실을 우선 명확히 해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문제가 단지 신문보도처럼 순수하게 객관적이어야만 한다거나 어떤 학술 활동처럼 논리적이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비록 신앙의 신비한 하나님을 인식하고 신뢰하는 인간의 태도이긴 하지만 그 대상, 그리고 그 대상과 자신의 관계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비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을 만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과 우리가 적대적인 관계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 대답은 현재 우리가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면에서 구원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합니다. 구원이라는 말이 너무 종교적이라고 생각한다면 행복이라는 단어로 바꾸어서 생각해보십시다. 우리는 지금 참된 행복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 무엇을 한다고 해도 인간은 영원한 만족감을 갖지 못하고 또 다시 불안해합니다. 그게 참으로 이상하지요. 자기가 원하던 것을 소유하게 되는 그 순간부터 다른 것을 원하기 때문에 불안해집니다. 간혹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여러 관점에서 분석되어야만 합니다. 정신병원에 앉아서 '나는 왕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의 말이 틀렸다고 단정지을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만약 행복을 아무런 근심과 걱정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한다면 이 정신병자가 바로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단순히 걱정과 근심을 모르는 상태만을 행복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최소한 객관적으로 행복한 조건과 그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행복하다는 그 사람의 말이 용납됩니다. 정신병자 같은 극단적인 경우를 빼놓는다면 누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을까요? 이런 행복에 겨워하는 장면을 머리 속에 그릴 수 있습니다. 해산의 고통을 끝내고 새 생명체에게 젖을 주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야말로 행복한 것 같습니다. 옳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도 길게 가지 않습니다. 이 아기는 자라면서 늘 아프고, 이런 저런 일로 속을 썩입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애간장이 녹습니다.

결혼식장에 들어서 있는 신혼부부의 환한 모습도 역시 행복한 장면입니다. 이 두 사람은 상대방을 평생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얼마 안 가서 원수처럼 싸우게 될 것입니다. 많은 수가 금새 이혼하고, 거기까지는 안 가더라도 이혼의 위기를 버텨내며 살아갑니다. 아마 적지 않은 부부가 결혼을 후회할 것입니다. 우리 삶을 이렇게 분석해 가다가는 모든 게 불행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의 삶을 무조건 미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부분도 있고 추한 부분도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 자체로 추함을 갖고 있으며, 슬픈 일들이 그것 자체로 기쁨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결국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여기서 완전한 행복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해탈을 말하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위에서 행복이라는 개념으로 바꿔서 생각해본 구원은 우리의 능력으로 쟁취해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루지 못했으며, 그것을 성취해낼 수 있는 능력도 없다는 이 사실이 단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곧 인간의 죽음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숙명적으로 임하게 될 죽음은 인간의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젊음, 건강, 출세, 돈, 명예, 미모를 무력화시킵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것들이 흡사 블랙홀 같은 죽음 가운데로 빨려 들어간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인간이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기울였던 모든 수고가 헛일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의 전도서 기자는 이런 수고의 허무를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 만사 헛되다.(전 1:2). 이런 종교적 직관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우리가 우리의 삶을 조금만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죽음으로 귀결되는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은 그것 자체로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서는 이런 우리의 실상을 가리켜서 하나님과 적대적인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성서의 인식이 옳다고 봅니다. 만약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마 종말 이후에 시작될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시비자체가 없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우리가 그런 생명과는 전혀 다른 한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이 상태가 곧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리킵니다.

세속적인 표준

바울은 이런 인간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길이 바로 하나님과 화해하는 데 있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적대적 관계로 인해서 인간에게 찾아온 죽음의 길을 극복하려면 당연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 있습니다. 성서 전체의 메시지가 바로 이 한 마디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기독교적인 의식을 갖고 있다면 이런 명제가 아주 그럴 듯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명제가 실질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설명하라면 좀 어려워합니다. 평소에 별로 생각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라는 대답을 할 것입니다. 이런 대답도 역시 남에게 배운 것에 불과하지 자기 스스로 깊이 생각의 과정을 거쳐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대답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한다는 것은 이 땅의 토대와 전혀 다른 토대에서 살아가려는 결단이며 그런 삶의 태도입니다. 그 이유는 이 땅의 기준들은 그것 자체가 하나님과 적대적이고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6절에 이렇게 진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대목은 '세속적인 표준'이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헬라어 '싸르크스'(육)에서 온 세속적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육체 자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되고, 배가 고프면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는 이런 육체적 한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육체는 이미 하나님의 창조 사건이기 때문에 이것은 부정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헬라 철학의 한 분파인 영지주의의 주장입니다.

자기의 판단 기준을 세속적인 표준에 두지 않겠다는 바울의 이 진술은 이 세상에 한정되는 것에 중심을 두고 사는 것을 포기하겠다는 뜻입니다.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인간 중심적인, 특히 이기적인 생각에 머물러 있게 마련입니다. 현대 영어번역판에는 이 세속적인 표준이 human standards로 되어 있는 걸 보면 상당히 그럴듯한 삶의 방식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세속적인 표준이라는 것이 어느 시대에서나 가장 중심적인 가치관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예컨대 오늘 새만금 간척 사업도 역시 세속적인 표준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전북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려는, 말 그대로 '휴먼 스피릿'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정치인들의 이기적인 생각, 또는 지역주의의 복잡한 역학관계가 포함되었습니다. 어쨌든지 이 세상은 그럴듯하게 포장된 이런 세속적인 표준에 의해서 작동됩니다. 바울은 이제 이런 표준으로 세상을 보지 않게 되었다고 진술합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속적인 표준으로 이해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잡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초기 기독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인간적인 판단에 따라서 평가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의 생각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즉 부활한 그리스도를 위한 삶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잘못된 지식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바울은 예수님의 지상 생활에 대한 축적된 지식 자체가 믿음을 이룬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입니다(바레트, 국제성서주석, 고린도후서, 225). 바울은 예수님이 살아있을 때 한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에는 예수님의 사도들이 살아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외에도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바울이 예수님에게 대해서 무언가 아는 척 하는 게 별로 탐탁지 않다고 생각한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과 갈등 가운데서 기본적으로 자신이 예수님이 직접 임명한 사도는 아니지만 부활한 주님을 만났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지도자들에 비해서 전혀 모자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자기들의 경험 안에서만 판단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제한적인 경험 안에서 판단하는 것이 곧 세속적인 표준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속적인 표준은 폐쇄된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려진 마음과 전혀 반대되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이 늘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오랜 역사와 경험에 의해서 타당한 것으로 판단된 것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상당히 그럴듯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결정적인 요소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들어올 가능성이 막혀있습니다. 일종의 고정관념에 묶여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결국 썩고 죽습니다. 흡사 고인물이 썩는 것과 비슷합니다.

새것

일반적으로 정치와 종교가 가장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라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정치보다도 종교가 훨씬 보수적입니다. 그게 참으로 이상합니다. 성서는 늘 새로운 세상을 선포하고 있는데 교회는 늘 있던 대로의 세상을 유지시키려고만 합니다. 무언가 바꾸어야한다고 말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봅니다. 사실은 이 세상의 메인 스트림은 늘 보수적으로 자기의 자리를 지키려고 합니다. 철학자들이 새로운 것을 말하면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으로 몰아갑니다. 이미 소크라테스가 그런 죄명으로 독사발을 받고 죽은 예가 있습니다. 아테네의 젊은이들에게 쓸데없는 것을 가르친다고 말입니다. 디오게네스나 니체도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없었습니다. 전혀 새로운 것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전혀 새로운 생명을 불러일으킨 분이십니다. 그에 의해서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17절에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우리의 삶이 비록 이 땅의 한계 안에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런 낡은 것이 물러가고 새것이 나타납니다. 우리에게 무슨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새로운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새로운 것을 가르치시다가 낡은 것에 묶여 있는 바리새인과 제사장들, 그리고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셨지만 하나님은 그 예수님에게 결정적으로 새로운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그 사실을 믿습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고 믿습니다. 결정적으로 새로운 그것이 무엇일까요?

부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오직 예수님에게서 이 사건이 유일회적으로 발생했습니다. 이 부활사건만이 결정적으로 새로운 것입니다. 이 부활 사건은 십자가 사건의 극복입니다. 십자가는 세속적 표준의 근원입니다. 앞서 말한 바리새인과 제사장과 총독 빌라도는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완벽하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켰습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세속적 표준의 승리입니다. 낡은 것들의 승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로부터 살려내심으로써 낡은 질서에 의해서 작동되는 이 세상에 새것을 개입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이 세상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가르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기존의 질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무덤 속에 잠잠히 들어 앉아있어야만 했습니다. 정치와 경제의 힘들이 어떤 새로운 질서를 억압함으로써 침묵하게 만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누가 보더
라도 예수님은 외롭게 의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다가 거대한 세력 앞에서 무참하게 처형당한 것입니다. 이 세계의 역사는 대개 여기서 정리되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그런 것이 우리의 합리적인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깨졌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이 사건이 이해되지 않았고, 따라서 믿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차츰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 부활의 빛 아래서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이 명백하게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세속적인 표준으로 바라보지 않고 새로운 표준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초기 기독교인들입니다. 바울도 역시 이런 경험을 한 소수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해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났을까요? 세속적인 표준이 아닌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하나님과의 화해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속된 말로 '죽었다 깨도' 세속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에게서는 하나님과의 화해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다른 삶의 토대를 인정하겠습니까? 그래서 자기 스스로 참된 만족과 영생을 획득할 수 있을까요? 못합니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을 알고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불의한 상태로부터 의로운 상태로 인정해주시는 길밖에는 하나님과 인간이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19절 말씀이 이를 의미합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한 우리는 낡은 것, 세속적인 표준이 아니라 새것, 하나님의 표준에서 살아가기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이것이 단지 말로서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그대로 적용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억지로 노력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만 우리가 이런 신앙적 수행 과정을 성실하게 추구하게 된다면 지혜의 영이신 성령께서 연약한 우리를 도와서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토대에서 살아가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7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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