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성공적인 대인관계를 위하여

고린도전 조용기 목사............... 조회 수 1879 추천 수 0 2008.09.23 23:03:12
.........
성경본문 : 고전13:1-3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3년 2월 2일 주일설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 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성공적인 대인관계를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은 어찌할 수 없이 혼자살수는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와 형제와의 관계를 맺으며 성장하면서 학교, 동창, 이웃, 상하관계 속에 살아야만 합니다. 인간관계를 원만히 잘 이끌어가는 사람은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얼굴모습이 다 다른 것처럼 개성과 성격이 다 다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내 마음대로, 내 개성대로 살아가면 상호 부딪힘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최선의 인간관계를 갖고 삶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본론>

1.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내 중심으로 살지 말고 항상 이해하며 살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우리가 서로 함께 살며 서로 이해하고 살려면 반드시 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자기의견만 말하고 상대가 따라만 오기를 원하면 이것은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우리 애들 교육할 때 일방적인 내 의견만 말하지 않고 애들의 의견도 들어가면서 키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을 몰랐는데 애들이 커서 늘 하는 말이 “아버지는 일방적으로 명령만 하고 우리말은 듣지 않는다.” 저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애들에게는 내가 명령만 하는 되는 일이지 애들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결과로 애들의 마음속에 굉장한 상처를 입히고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구겨졌다는 것을 지금 생각할 때 지금다시 애들을 키운다면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일방적인 자기 의견만 말하고 상대가 다만 따라오기를 원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대화가 되지 않지요. 혹은 상대의 이해만을 요구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의견만 상대에게 강요를 하려고 자꾸 이해해 달라고만 요구하면 이것도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롬15:2에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고 말했었습니다. 요사이 부부문제가 많이 생겨서 가정이 파괴되는데 부부들이 서로 대화를 잘하지 않고 싸우는 일이 많습니다. 대개 보면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가 있는데 공멸 형이 있습니다. 함께 싸움이 붙으면 그 자리에서 ‘너 죽고 나 죽자’ 공멸 형입니다. 남편 죽이고 아내도 죽이고 우리 다 박살내어 버리자. 그 다음에는 잠복 형이 있습니다. 전부 말을 듣고는 마음에 감추고 언제 기회가 있으면 화산처럼 폭발해 버리겠다. 그러는 잠복 형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대화형이 있습니다. 실타래 풀듯이 말로써 서로 다 풀어 나가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가 우리가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데 절실히 필요하지요. 상대의 말에 귀를 우리가 기울일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상대의 말을 이해하려고 우리는 노력을 해야 됩니다. 아에 상대를 이해 안하려고 하면 들을 필요 없지요.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어야 됩니다. 남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식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약1:19에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사소통의 약 50% 이상이 듣는데 사용되는 것이므로 급한 입보다 참는 귀가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남에게 말하는 것 보다도 들어주는 것이 굉장히 설득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에 말을 들어보고 이해해 안 되는 것은 솔직히 질문을 하세요. 내 생각과 다르고 틀리고 오해되는 말을 해도 중간에 말을 끊지 말고 숨은 생각이 무엇인지 알려고 이해를 하고 질문을 해야 됩니다.

잠12:18에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다고 말했습니다.  말이 우리의 병을 고치는 양약 같다.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그러므로 상대에게 이해 안 되는 것은 질문을 해요. 무조건 하고 오해하지 말고 남편의 말이 이해가 안 되면 남편에게 그 무슨 말이냐 물어 보십시오. 아내에게도 부드러운 말로 그것이 무슨 말인지. 부모에게도 자식에게도 이웃에게도 물어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찌하든지 우리가 서로 대화를 할 때 상대의 처지에 서서 생각해 보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꾸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면 마음에 분노가 생깁니다. 우리교회 고등학교 영어선생을 하시던 어른이 한번 굉장히 학교에서 어려운 일을 당했답니다. 동료교수에 대해서 너무나 마음에 분노가 차고 “저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느냐? 저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느냐?” 하루 종일 마음에 고통이 다가왔는데 나중에 기도를 하니까 성령께서 마음에 말씀하기를 “그럴 수도 있다.” 그 말씀을 듣고 그래. 그럴 수도 있다니까 그만 속이 싹 풀려 버리더랍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항상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렇게 하면 마음이 괴롭지만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면 마음이 풀리는 것입니다.

빌2:4에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 자기중심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 편에 서서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서로 이해하고 존중해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잘살 수 있지요. 옛날 어떤 동네에 한 가난한 사람의 집 바로위에 큰 부자 집이 살았는데 그 부자 집에서 밤낮 구정물을 흘러 보내니까 가난한 사람의 마당으로 그냥 구정물이 싹 흘러가는데 썩은 냄새가 나고 온갖 더러운 찌끄래기가 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부자집에 가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집이 위에 있으니까 구정물을 부으니 우리 앞마당으로 흐르는데 좀 하수도관을 박아서 다른 데로 돌려주십시오.” 그러니까 그 주인이 허리에 손을 탁 얹고서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여보시오. 물은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러니 자연의 법칙을 누가 막으리요. 우리 집에서 구정물이 흐르면 낮은 집에 있으니까 물이 흘러가지 않소. 물 흘러가는 것 싫거든 집 팔고 가세요.” “그래요? 알았습니다.” 내려와서는 그 아랫집에 있는 사람이 높이 굴뚝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부엌에다가 온갖 공해나는 폐타이어로부터 시작해서 온갖 것을 다 태웠습니다.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막 나는데 연기는 원래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윗집을 막 덮었습니다. 그러니 윗집에서 내려와서 말했습니다. “아이고 굴뚝을 이렇게 높여서 연기가 우리 집을 덮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밑에서 팔짱을 끼고 “원래 자연법칙에 의해서 연기는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인데 난들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윗집에서 할 수 없이 집을 팔고 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서로 이해를 하고 대화를 했으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해하지 않고 자기 고집만 부리면 서로가 다 고통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2. 동정하라

둘째로, 우리가 인생을 잘살기 위해서는 온유하게 서로 동정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감정적인 존재입니다. 모두 관심과 호의를 가지고 따뜻하게 마음을 감싸주기를 원합니다. 강도만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는 예루살렘에서 떠나 예배 보러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졌는데 율법주의자인 제사장인 와서 손짓만하고 비평과 판단만 하고 지나갔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의식을 주장하는 레위사람이 와서 보고 종교적인 의식만 잠깐 집행해주고 지나갔습니다.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짐승에서 내려서 그에게 포도주를 붓고 기름을 바르고 붕대로 감아주고 짐승에 태워서 주막집으로 데려다가 돌봐 주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참 선한 이웃이냐. 여기에 율법적으로 교훈이나 하고 지탄이나 하고 간 제사장이냐, 아닙니다. 종교적인 의식이나 베푼 레위 사람이었더냐. 그것도 아닙니다. 누가 좋은 이웃이냐. 동정과 사랑을 베푸신 선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오늘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크고 적은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삽니다. 모든 사람들은 참된 따뜻한 관심과 호의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벧전 3:8에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라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불쌍히 여기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대화할 때도 몰인정하게 마십시오. 여러분 부부간에 한평생을 살 때 처음에는 육정으로 살고 그 다음에는 인정으로 살고 나이 늙으면 불쌍히 여겨서 동정으로 산다고 합니다. 부부간에 서로 대화할 때도 여러분 부인이 이야기하는데 남편은 신문만 드려다 보고 ‘어 어 어 어’ 모욕적으로 느낍니다. TV만 들여다보고 무슨 말을 해도 고개만 끄덕끄덕. “낮에 내가 무슨 말 했지요?” “몰라. 무슨 말 했어?” 그러면 굉장히 모욕을 느끼지 않습니까? 항상 대화중에 눈과 입을 서로 바라보면서 대화를 해야 됩니다. 남편이 이야기하면 부인이 남편 얼굴을 딱 쳐다보세요. 눈과 입을 쳐다보세요. 부인이 이야기하면 부인의 얼굴을 쳐다보세요. 어린아이가 자식들이 이야기한다고 무시하지 말고 얼굴과 입술을 쳐다보십시오. 그래야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대화중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면 이야기하는 사람이 굉장히 모욕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대인관계의 기본이 경청하고 이해시키는 것입니다.

미국 카네기공대 졸업생을 추적 조사해본 결과에 직장과 사업에 성공한 요인을 살펴보니 지식이나 기술은 단지 5%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85%는 입, 손, 발을 통한 성실한 인간관계가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발표했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진지한 태도로 관심을 표명하고 동의와 이해가 될 때는 머리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어주십시오. 그러면 가장 가까운 부부간에도 그렇고 부모 자식 간에 그렇습니다. 이웃 간에도 서로의 대화중에서 이해가 될 때는 머리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어주면 말하는 사람의 마음이 굉장히 좋습니다. 대화중에 적대적인 표현을 하지 말아야 됩니다. 내 얼굴에 찡그리고 적대감을 가지고서 이웃을 노려보면 많은 사람이 움츠리지 않습니까? 사람이 말을 할 때 마음에 거스리더라도 얼굴을 찌푸리지 말고 적대감정을 나타내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전도할 때나 부부간에 논쟁을 해서 이기면 백해무익입니다. 전도할 때 서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냐 안살아계시냐 논쟁을 합니다. 내가 이기면 절대 예수 안 믿습니다. 그러니 전도할 때 전도만 하고 저쪽에서 거역하고 반역하거든 그냥 듣고 논쟁은 하지 마십시오. 논쟁해봤자 소용없어요. 부부간의 싸움도 그렇습니다. 남편이 이기면 찬밥 먹고 아내가 이기면 남편이 밖으로 돕니다. 그러니 부부간 싸움에 이기는것마다 손해가 없습니다. 여러분 그저 부부간 싸움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잠15:1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케 한다고 했습니다. 잠25:15에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어마어마한 말입니다. 부드러운 말을 하면 그것이 상대방의 뼈를 꺾어요. 강한 말을 하면 상대의 뼈를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까운 사람끼리 부모 자식 간이라도 부부간이라도 이웃에 부드러운 대답을 하면 뼈를 꺾습니다. 원수가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물러갑니다. 그러나 강한 말은 뼈를 강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려고 하는 사람이나 나라는 완악하게 만듭니다. 바로왕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자꾸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결국에는 홍해수가에서 왔다가 홍해 수에 들어가서 다 죽었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강성을 가지면 부러지고 망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동의와 동정은 개별적이지요. 내가 동의는 하지 않더라도 동정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말은 내가 다 동의는 못하지요. 동의 못한다고 주먹을 휘둘고 싸워서는 되지 않지 않습니까? 동정은 해야 돼요. 동정은 남의 경우를 이해하고 같은 느낌을 가지고 남의 불행을 가엾게 여겨 온정을 베푸는 것입니다. 마음은 동정을 합니다. 그러나 동의는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딤전6:18에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솝우화에 보면 두 친구가 산길을 가다가 한 친구가 보니까 곰이 수풀에서 나옵니다. 그러니 자기만 살겠다고 친구에게 피하라고 말도 안하고 달려가서 나무위에 기어 올라가 버렸습니다. 늦게야 친구가 보니까 곰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래서 못 달아난 친구는 땅에 엎드렸어요. 왜냐하면 곰은 죽은 동물은 먹지 않습니다. 아예 엎드려서 죽은 체를 했습니다. 곰이 와서 이리 뒤적 저리 뒤적 해보고 코로 냄새를 맡아보니까 숨을 안 쉬고 있으니까 ‘아~ 죽었구나!’ 곰이 그냥 걸어갔습니다. 한참 만에 친구가 나무에서 내려와서 “야~ 곰이 너를 뒤적뒤적 하더니 귀에 대고 무슨 말을 속삭속삭하고 갔는데 무슨 말을 하냐 위기 때 친구를 버리고 달아난 놈 하고는 절대로 친구하지 말라.” 그렇게 하더랍니다. 서로 동정할 수 없으면 친구가 되지 말아야 됩니다. 자기중심으로만 살고 어려움을 당할 때 친구를 버리는 것은 참으로 우리가 진실로 인간의 대화생활에 부적절한 것입니다.

3. 칭찬에 인색하지 말라

셋째로, 우리는 서로 좋은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칭찬에 인색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마음을 긍정적으로 대하도록 결심을 해야 됩니다. 마음이 비평적, 부정적으로 대하면 항상 결점만 보이고 결점을 찾게 됩니다. 굉장히 잘못된 심정이요, 자기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마음이 부정적으로 되어 있으면 별 도리 없이 자꾸 다른 상대의 부정적 인면, 결점만 찾아내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자기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7:3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하게 생각하면 선하게 보게 되고 선하게 말하게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장점과 능력을 항상 발견하고 그를 돋보이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한 가지 이상의 장점과 능력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온갖 것을 지으매 적당하게 지었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아내는 남편을 왕으로 대우하고 남편은 아내를 왕비로 대해 주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러면 가장에서 여러분 아내가 남편을 왕으로 대접하면 좋아안할 남자가 아무도 없어요. 임금님 대하듯이 대해주라. 그리고 또 남편은 아내를 왕비 대하듯이 대해줘라. 서로 그렇게 존귀하게 여기면 여러분 서로 화해하고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7:12에도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의 화목은 결혼하기 전에 눈을 부릅뜨고 단점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고 난 다음에 일단 결혼을 했으면 그때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장점만 바라보고 단점은 바라보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장점과 능력을 발견해서 돋보이게 하면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하는 일에는 아낌없이 칭찬을 하십시오. 우리는 칭찬에 너무나 능통하지 못합니다. 아주 야박하리만큼 칭찬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난하라면 하루 종일 입에 침이 마르도록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잘하는 일에 아낌없이 칭찬할 줄 알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칭찬은 상대를 황홀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황홀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 사람이 굉장히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칭찬을 들으면 황홀해지고 그 다음에는 굉장히 행복해지는데 자기가 행복해 지는 데 남을 여러분 해칠 리가 있겠습니까?
잠16:24에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칭찬, 선한 말은 마음에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된다. 이렇게 좋은데 우리가 가까운 사람끼리 서로 칭찬을 안 하느냐. 남편을 칭찬하고 아내를 칭찬하고 부모를 칭찬하고 자식을 칭찬하고 이웃을 칭찬하면 그 말이 꿀송이 같다. 마음에 달고 뼈로 양약이 되게 한다. 이런 좋은 일을 왜 우리가 안하겠습니까? 여러분 문서에 보면 칭찬할일이 생겼을 때는 즉시 칭찬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나중에 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칭찬하라. 잘한 점을 구체적으로 칭찬하라. 너 이것 이것 이것 참 잘했다고 칭찬하라. 가능한 한 공개적으로 칭찬하라. 부인을 칭찬하고 싶거든 애들 있는데서 칭찬해요. 몰래 방에 들어가서 귀에 대놓고 칭찬하지 말고 애들 있는데서 “야~ 너희 어머니 정말 보통 여자 아니다. 음식솜씨도 좋거니와 사람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좋으냐?” 황홀함을 느낍니다. 아내 된 여러분 남편을 칭찬할 때 애들이나 시집식구들 앞에서 칭찬하라구요. “아~ 우리 남편, 정말 내가 봐도 굉장히 훌륭하다. 내가 데리고 살기에는 아까운 사람이다.” 구체적으로 칭찬해 주십시오. 남편이 황홀감을 느끼잖아요. 그 부인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하게 여기겠습니까? 그리고 결과보다는 과정을 칭찬하십시오. 결과는 잘못되었을지라도 지나온 과정은 잘한 것이 많습니다. 그런 것을 들어서 우리가 칭찬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칭찬은 힘이 있어요. 적을 아군으로 원수도 은인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칭찬이 늘어나면 원망도 없어집니다. 칭찬은 돈 안 들고 기 살리는 대단한 처방입니다. 칭찬은 사람을 바꾸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잘하는 일에 아낌없이 우리가 칭찬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칭찬을 잘하는 사람은 훌륭한 남편, 훌륭한 아내, 부모, 자식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칭찬하는 데는 큰 에너지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비용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찬에 인색한 사람은 인생에 실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4. 용서하라

넷째로, 우리는 모든 일에 늘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미움과 분노는 어마어마한 스트레스가 됩니다.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우리가 미워하고 분노하면 다 파멸되어 버리고 맙니다.

약1:20에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잠16:32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했습니다.  과장된 것 같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다고 그랬습니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더 낫다. 그렇게 하나님이 인정한 것입니다. 고로 주님은 주기도문에서 미워하는 자 일이 있거든 먼저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마6:14~15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한 것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는 것이 이와 같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널뛰기와 같습니다. 한사람이 널을 잘 뛰면 다른 사람이 높이 올라가서 또 잘 뛰고 뛰고 뛰는 것처럼 우리가 용서하면 하나님 용서를 받고 우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우리 하나님의 용서를 받자는 상대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일곱 번 용서하는 것이 참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가서 “주님 이웃이 나에게 해를 끼쳤을 때 내가 일곱 번만 용서하면 됩니까?” 주님께서 베드로보시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죄를 짓고 돌아서서 잘못했다 하거든 용서해 줘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490번을 용서하라는 말인데 여러분 하루에 490번 용서하라는 것은 무한대로 회개하거든 용서해 주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눅17:3~4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회개도 안하는데 용서해 줍니다. 용서해 줍니다 하고 돌아다니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눅6:37에는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칭찬은 사랑에서 나오고 비난은 원망에서 나오고 칭찬하면 칭찬이 비난하면 비난이 돌아오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닙니까?

5. 화해하라

다섯째로, 우리는 항상 화해하고 살아야 됩니다.  담을 쌓아놓고 살지 말아야 돼요. 화해란 인간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항상 같이가요. 용서하면 화해해야 됩니다. 용서를 해주고 난 다음 화해 안하면 소용이 없어요.
고후5:18~21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하고 우리를 의롭게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합니다. 용서는 상대적으로 용서를 받는 것이지만 화목은 서로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완성이 화해인 것입니다. 미움의 담을 헐어버리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인간과 만물과 화해하신다. 하나님과 화해했으므로 우리는 지금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용서만 받았을 때는 움츠리고 있지만 화해를 했을 때는 웃음소리가 성전에 가득합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우리가 찬미하고 감사하고 나가면 하나님 웃음소리가 성전에 가득하시고 왜,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와 화해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부간에 싸웠을지라도 서로 용서하고 난 다음 그 다음에는 악수하고 서로 포옹하고 화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는 했지만 화해는 못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갈지라도 나는 화해는 못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 많이 있어요. 용서하고 난 다음에 화해하지 못하면 그 용서는 얼마 있지 아니하여 효과가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엡 2:14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고 말했습니다. 골1:20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하나님 보십시오. 우리와 화목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살전5:15에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나는 아주 어린아이 같은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어요. 옛날에 저의 목사고 은사인 L.P. Richard 목사님이 부산에 계셨는데 John Hurston 목사님이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그 Richard 목사님 마당에 임시 거하는 곳에 주거용차를 대놓고서 그 집에서 잠시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이 Richard 목사님이 여러 가지 면에서 Richard 목사님이 Hurston 목사님하고 뜻이 안 맞았어요. 하루는 대판으로 싸웠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목사님이 뛰어와서 마당에다 줄을 그었습니다. 그 주거용 자동차하고 자기 집하고 줄을 쫙 긋고 “이것 건너만 오면 가만 안 둔다 말이지.” 그래서 어린 아이 장난 같습니다. 노인들이 싸워 가지고서 줄을 그어놓고 “나도 건너 안 갈테니까 너도 건너오지 말라” 그렇게 했다가 나중에 서로 용서하고 그 다음에는 하루 나오더니만 줄을 발로써 싹싹 지워버리더랍니다. 그러니까 “용서했으니까 이제 건너와도 괜찮다.”
여러분 항상 마음에 줄을 그어 놓으면 안돼요. 용서했으면 줄을 지워버려야 돼요. 우리는 서로 화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나갈 때 어떤 마음으로 나갑니까? 우리는 용서받았다고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용서만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화해했습니다. 그러므로 화목하다고요. 용서만 받았더라면 마음에 움츠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해해 버렸습니다. 화목했습니다. 이제는 과거가 다 없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악수하고 하나님과 포옹하고 하나님 품에 안겼으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강하고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있습니다. 용서만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인 것입니다. 옆에 분들에게 당신은 하나님과 화해한 분입니다. 그렇게 인사해 주십시오. 그러니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막힌 담이 없습니다. 자유 왕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놀라운 특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막힌 담이 없이 하나님 앞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고 마음대로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으니 이처럼 위대한 은혜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6. 사랑하라

여섯째로, 우리가 좋은 인간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사랑하며 살아야 됩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주셨으니 독생자를 주셨으니. 사랑이란 것은 항상 이웃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이지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행20:35에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눅 6:38에도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지요. 똑같은 요단강물을 받는데 요단강물을 받아서 자꾸 밑으로 보내주는 갈릴리바다는 물이 청명하고 고기들이 많이 살고 그 물을 가지고서 온갖 농경수로 식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요단강물을 받는 사해는 어떠합니까? 사해는 해발 400에서 500미터로 낮습니다. 물을 자꾸 받아만 들이고 전부 물이 증발하기 때문에 물이 흘러 내려가지 않습니다. 받기만 받고 내보내지를 않아요. 그러므로 보통 바닷물은 염분이 3%인데 그곳에 염분은 25%입니다. 물고기가 못삽니다. 사람이 들어가도 빠져죽지 않습니다. 뜹니다. 그 물은 농경수도 못쓰고 식수로도 못씁니다. 죽은 바다인 것입니다. 똑같은 요단강물을 받아도 받는 데로 내어 보내주는 갈릴리호수는 살아있는 호수지만 받기만 받고 안내주는 사해는 죽은 바다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로 받았으면 그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자기가 그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살아있지만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만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에 구두쇠가 되면 쉬 얼마 있지 아니하여 그 영혼도 죽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주는 것이고 또 적극적입니다. 사랑은 소극적이 아닙니다. 할 수 없이 떠밀려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것 적극적으로 사랑하지 않습니까? 할 수 없이 의무와 책임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가 수고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보십시오. 우리가 어디 구했습니까? 구하지도 안는데 우리를 사랑하사 친히 사람으로 오셔서 당신이 적극적으로 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몸을 찢고 피흘려 우리의 죄를 다 대속하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는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는 얼마나 적극적인 사랑이 아닙니까?
요일3:18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랑은 적극적으로 이웃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어떤 농부가 좋은 옥수수 씨앗을 얻었어요. 그래서 그 옥수수를 자기 밭에다 심고 기다리는데 추수 때 보니까 그냥 토종 옥수수 알갱이가 꽉 들어차 있습니다. 개량옥수수로 슈퍼옥수수가 열릴 줄 알았는데 토종이 그대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실망해서 밭 뚝에 턱을 고이고 앉아서 가만히. 바람이 이웃집 옥수수 밭아서 자기 밭으로 불고 있어요. 늘 바람이. 가만히 보니까 이웃집 옥수수 밭 꽃가루가 자기 밭으로 불어와서 전부 교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슈퍼옥수수 씨앗을 심어도 꽃가루는 이웃 밭에서 바람을 타고 날라와서 자기 옥수수에 교배를 시키므로 전부 토종옥수수 밖에 안 생겨나요. 알았다. 그 이듬에는 슈퍼옥수수 씨앗을 두 배를 구해가지고서 이웃 농군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것 좋은 옥수수니 심으라고. 그래 그 슈퍼옥수수 가루가 자기 밭으로 바람을 받아서 날라오니까 전부 슈퍼옥수수가 되고 말은 것입니다. 보십시오. 나누면 너도 살고 나도 살고 다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만 살겠다고 하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것입니다. 사랑은 건설적인 것이지요. 그것은 허다한 허물을 덮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머니가 어린 아이가 잘못해서 울고 올지라도 치마폭으로 안고 눈물을 흘리는 애 눈물을 닦아주고 용서해 주고 그러면 마음이 얼마나 어린아이가 치료받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릴 때 어머니 치마폭에 머리를 박고 울면서 어머니의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한 두 번은 다 있을 것입니다.

벧전4:8에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잠10:12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사랑하는 자는 허물을 가립니다. 부모가 자식이 잘못한 것 알면서도 자식의 허물을 다른 사람에게 자꾸 감춥니다. 왜냐, 사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친정어머니가 딸을 비난하면 열 번 변명을 하고 감춥니다. 며느리 핍박하면 한술 더떠가지고 함께 비난을 합니다. 율법적인 관계는 무엇이든지 율법으로 보기 때문에 허물을 들춰내지요. 율법은 허물을 들춰내는 것이 율법적 사명입니다. 사랑은 죄를 용서하고 덮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웃과의 좋은 관계를 가지려면 율법의 안경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안경으로 갈아 끼워 허다한 허물을 용서하고 덮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자꾸 과거를 들춰내지 마십시오. 더구나 여성들은 기억력이 너무 좋아서 부부싸움 하면 시집올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살아온 것 다 들춰냅니다. 남편에게 “그냥 내가 시집올 때 당신 얼마나 나를 고생시켰으며 과거에 얼마나 내가 눈물로 살았는지 내가 정말로 가슴에 피멍을 갖고 살아온다.” 싸움하면 할 때마다 그 말을 합니다. 그러면 남편이 도저히 감당을 못합니다. 과거는 용서했으면 다 잊어 버려야 돼요. 과거를 들춰내지 마십시오. 남편도 아내도 부모도 자식도 이웃도 친구가 되고 서로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과거의 허물을 들춰내지 마십시오. 용서하고 덮어 버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기억도 않는다고 말하셨습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이 무엇 하나 모르지 않는 것이 없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보혈로 씻은 우리들이 하늘나라에 들어오면 우리의 과거를 기억도 아니 하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덮어버린 것입니다.

잠10:12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은즉 우리도 적극적으로 건설적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에 대한 꿈을 잃지 않습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고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가진 게 사랑입니다. 여러분 롬5:5에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하나님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넝마 같은 인생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세상을 다 날 버리고 나도 나를 버렸더라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씻으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면 새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끈질긴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소망을 우리가 받아들였으니 우리도 이웃에 대해서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는 소망을 가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포기하면 안돼요.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 안했는데 우리가 왜 우리 이웃을 포기합니까? 끝없는 소망을 가지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롬 8:28,32 말씀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는 끝없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날 부부관계, 부모, 자식관계가 잘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더구나 오늘 젊은 세대는 직업교육이나 세상교육에만 전념하여 인간관계의 교육이 부족하므로 많은 가정이 마찰과 불화와 파괴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함을 알고 이해하고 동정하며 칭찬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며 사랑할 수 있는 힘이 항상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자격이 없습니다. 내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 주지요. 구제해도 사랑 없는 다른 동기로 하면 그것이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우리는 어찌하든지 내 가장 가까운 부부간에 부모 자식 간에 내 형제간 이웃 간에 우리는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우리 자신이 행복하고 이웃을 행복하게 만들고 이러한 것이 우리 인생생활에 성공하게 만드는 85%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이웃과 좋은 관계를 갖고 사는 기술이 부족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우리는 이해하고 동정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화해하고 화평한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576 고린도전 계속 모드로 중단없이 일하라. 고전3:1-2  전병욱 목사  2009-02-21 1758
575 고린도전 성령이 주는 저항력과 똑똑함 고전2:6-16  전병욱 목사  2009-02-21 2203
574 고린도전 하나님의 밭에 좋은 농부 고전3:6-9  전원준 목사  2009-01-03 2161
573 고린도전 복음과 복 고전1:22-24  강종수 목사  2008-11-02 1899
572 고린도전 부활의 기쁨 고전15:50-5  조용기 목사  2008-10-22 1992
» 고린도전 성공적인 대인관계를 위하여 고전13:1-3  조용기 목사  2008-09-23 1879
570 고린도전 영광은 환난이 피우는 꽃이다 고후4:17  조용기 목사  2008-09-23 1815
569 고린도전 낡은 것과 새것 고후5:16-21  정용섭 목사  2008-09-18 1621
568 고린도전 기독교인의 근심 고후7:10-11  강종수 목사  2008-09-08 1391
567 고린도전 가시와 은혜 고후12:1-10  조용기 목사  2008-09-06 1931
566 고린도전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6:1-2  조용기 목사  2008-09-06 2686
565 고린도전 나는 누구인가? 고전12:1-3  권진관 형제  2008-06-17 2212
564 고린도전 하나님의 동역자 고전3:9  이승남 목사  2008-06-11 3079
563 고린도전 머리칼을 가리는 게 그리도 중요한가? 고전11:1-16  정양모 신부  2008-06-02 1772
562 고린도전 철든 교회: 증언과 전도 고전9:19-23  한완상 형제  2008-05-19 2060
561 고린도전 주님의 부활 고전15:12-22  조용기 목사  2008-05-13 1933
560 고린도전 강함이 되는 약함 고전1:27-29  한태완 목사  2008-04-16 2257
559 고린도전 죽은 자의 부활 고전15:21-23  김남준 목사  2008-04-11 1920
558 고린도전 죽은 자의 부활 고전15:21-22  김남준 목사  2008-04-02 780
557 고린도전 거울처럼 희미하나 성숙한 믿음 고전13:9-13  한완상 형제  2008-04-02 2142
556 고린도전 제사Ⅱ 고전10:14-22  장경동 목사  2008-03-10 2217
555 고린도전 그리스도인의 책임 고전4:1-13  한태완 목사  2008-02-21 2153
554 고린도전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이후 고전15:20-28  소재열 목사  2008-01-21 2067
553 고린도전 영적 지혜: 우리의 공동체와 삶을 사건화하자 고전2:6-16  권진관 형제  2007-12-07 1670
552 고린도전 카리스마 공동체 고전12:4-13  길희성 형제  2007-12-07 1971
551 고린도전 자기를 준 예수와 그의 교회 고전11:23-26  김상근 목사  2007-12-06 2029
550 고린도전 양보의 미덕 고전10:23-24  한태완 목사  2007-12-02 2301
549 고린도전 약점과 허물 고전1:26-31  한태완 목사  2007-11-30 2462
548 고린도전 각자의 사명 고전12:12-31  한태완 목사  2007-11-24 2886
547 고린도전 연약하고 부족함을 통하여 드러나는 영광 고전1:27  한태완 목사  2007-11-11 2170
546 고린도전 비교의식을 피하라 고전12:14-25  한태완 목사  2007-11-07 2557
545 고린도전 아름다움과 조화. 고전12:12-31  한태완 목사  2007-11-07 2086
544 고린도전 그리스도인의 자유 고전6:19-20  한태완 목사  2007-11-07 2184
543 고린도전 사랑 file 고전13:1-13  강종수 목사  2006-11-12 1986
542 고린도전 신령한 일을 아는 자 file 고전2:14-16  강종수 목사  2004-06-13 2085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