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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 불행과 절대적 행복

고린도후 한완상............... 조회 수 2827 추천 수 0 2007.12.17 00: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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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후2:8-11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인간의 행복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불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행.불행이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비교해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구멍가게 주인은 떠돌이 실직자에 견주면 행복하지만, 동시에 성공한 기업가에 견주면 초라해 보이고 불행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미인대회에 美로 뽑힌 미인도 眞에 견주면 불만일 수도 있습니다. 한 달에 백만원을 버는 사람은 50만원 버는 사람보다 행복하다고 느끼지만, 300만원 버는 사람에 견주면 불행해집니다.
개인과 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원인으로 우리는 상대적 불행감, 또는 상대적 박탈감(relative deprivation)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들과 자기를 비교하여 자기 처지를 열악하거나 불행한 것으로 느끼는 것이 바로 상대적 박탈감입니다. 이것에 시달리는 사람은 자기를 남보다 더 낫게 보이려고 올곧게 노력하기보다는 남을 내려 깎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기에 항상 긴장과 마찰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같은 상대적 빈곤의식 또는 박탈감이 사회로 널리 확산되면 그 사회의 안정도 크게 흔들리게 됩니다. 사회에는 불평분자로 가득 차게 되기에 따뜻한 공동체 삶은 어려워집니다. 삭막하고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서는 상대적 박탈감을 어떻게 극복해서 참 행복에 이르는 지를 가르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비결을 사도 바울의 신앙체험에서 찾아봅시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세속의 모든 욕심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갖은 고난과 고통을 오히려 감수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겪었던 어려움을 새삼 확인하면서 그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하는 그의 행복한 모습을 다시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상대적 박탈감을 이겨내는 그의 믿음의 삶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그가 겪었던 어려움에 주목해 봅시다.
첫째로, 그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환난 속에서 찌그러지거나 주저앉게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상황에 편안히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자기를 견주어 상대적 불행감을 갖게 되기 쉽습니다. "왜 내 팔자가 이런가"하고 자탄(自嘆)하기 쉽습니다. 저도 1980년 여름, 전두환 싹쓸이에 걸려 갖은 고통을 남산 지하실에서 겪으면서, 심한 상대적 박탈감을 뼈저리게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로 상처를 받는 지경에 처했어도 찌그러지지 않았음을 감사했습니다. 사방이 포위되어 출구가 없는 딱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완전히 찌그러진 인간에 견주어 아직도 건재한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꽉 막힌 곳(dead end)이란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끝장난다〉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항상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모든 것이 새 출발을 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어려움 속에서 오히려 감사할 수 있습니다.
둘째 번 어려움은 난처한 상황에 빠지는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번 당혹스러운 경우를 체험했습니다. 어떻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릴 수 있나? 어떻게 죽은 자가 부활할 수 있나? 등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은 물음을 받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그러한 당혹스러운 질문에 접하게 됩니다. 왜 의인은 비참하게 죽는데 악인은 승승장구할까요? 우리는 이 같은 난처한 도전을 받게되면 "에라 모르겠다 때려치우자" 또는 "예수 믿기 힘들구나, 불가사의한 일이 너무 많아"하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한 질문을 받을 필요없이 평안하게 사는 사람들과 자신을 견주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헌데 사도 바울은 결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지금은 거울처럼 희미하여 부분적으로 알고 있으나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인 것이 사라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원수들에 의해 쫓겨다녔습니다. 주위는 온통 적으로 둘러싸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같으면 버림받았다는 엄청난 상대적 불행감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결코 버림받았다는 불행감을 갖지 않았습니다. 스테반이 보았던 것처럼, "서셔서 응원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도스도엡스키도 한 때 독방 감방에 갇혔을 때 독방 작은 곁문이 열릴 때마다 "형제여 힘내시오. 우리도 함께 고통 당하고 있소"라는 주님의 속삭임을 들었다고 합니다. 바울의 행복감을 그도 감방에서 느꼈겠지요.
넷째로, 사도 바울은 매를 맞고 거꾸러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또한 상대적 불행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자탄(自嘆) 불만(不滿)을 내뿜을 것입니다. 바울도 가마리앨 문하에 있던 그의 동문들의 안일한 처지와 비교하여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었겠지요. 헌데 사도 바울은 망하지 않고 죽지 않았음을 행복하게 여겼습니다. 전투에는 참패했어도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여유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은총을 믿어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넘어지지 않는 데 있지 않습니다. 환난을 당하지 않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더 자주 짓눌리고, 더 난처한 일 당하고, 더욱 박해받고, 더 자주 거꾸러집니다. 허나 십자가의 은총으로 그 곤경에서 다시 힘차게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도 교통사고 당합니다. 당해도 그는 장애인이 되지 않았음을 감사드립니다. 코가 깨어져도 자만의 코가 깨어졌음을 행복하게 여깁니다. 장애인이 된다 해도 죽지 않았음을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어도 예수 안에서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돌을 맞아 죽었던 스테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었음은 바로 그의 죽음 속에서의 행복을 극명하게 나타내 줍니다. 이것이야말로 참 행복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행복을 지닐 수 있는 비결로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고후 4:10). 그가 예수의 죽음을 자기 몸 깊숙이 지니고 다닌다 함은 그 존재 속 깊숙이 예수의 생명, 예수의 부활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죽음 속에서 부활승리의 기쁨을 맛보았던 사도 바울은 세상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상대적 불행감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남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더 손해보았다는 얄팍한 계산을 아예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곧 밀알의 죽음이었습니다. 밀알이 죽고 썩어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듯, 바울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의 체험에서 풍성한 생명의 기쁨을 체험하여 참 행복을 느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속한다고 믿어 보이는 〈오늘, 여기〉의 삶 속에서 보이지 않는 종착점의 환희를 향해 꾸준히 달려가는 나그네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또 다른 비결이었습니다. 나그네길에서 겪는 고통, 외로움, 난처함은 일시적인 것이며 장차 겪게 될 기쁨에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 확신은 〈지금, 여기〉에서의 어려움을 이겨내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1등을 향해 달려가는 장거리 선수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은 상대적 불행을 참 행복으로 이어주는 다리요, 곤경 속에서 행복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라 하겠습니다. 저도 1980년 여름 서대문 교도소에서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젊은 교도관이 내 감방 문을 따고 느닷없이 들어왔습니다.
"한 교수님, 제가 잠시 교수님 앉은자리에 한번 앉아 보고 싶은데, 혹시 누가 오는지 건물 입구를 지켜봐 주세요."
"교도관이 공무집행 아닌데 죄수 방에 들어 올 수 없지 않소, 웬일이요?"
"아니, 교수님 앉은자리에 한번 앉아보면, 저도 행복해 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문이나 지켜주세요" 하고 내 자리에 앉아 내 흉내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자기보다 행복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성서, 사회학 전문서적을 읽는 흉내를 내면서
"내가 이 책들을 교수님처럼 다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잠시 보초가 되었습니다. 교도관은 잠시 죄수 역을 맡았습니다. 평소에 교도관이라는 직업에 지독한 열등감을 품었던 젊은이였기에, 당당히 죄수노릇 하는 내가 부러웠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믿음이 약해 때때로 심한 상대적 박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여 감사해 보려고 무진 노력했는데, 그런 내 노력이 그 교도관의 눈에는 당당한 행복감으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간에도 안동교도소에 갇혀 우겨쌈을 당하고 있어도 찌그러지지 않음을 감사하며, 난처한 일 당해도 절망하지 않으며, 핍박을 당해도 버린 바 되지 않고, 거꾸러짐을 당해도 망하지 않았음을 감사하려고 애쓰는 믿음의 종, 이병설 선생이 있음을 잊지 맙시다. 그는 외로움과 괴로움 속에서도 십자가의 은총으로 자기 이름이 여호와의 명단 속에 있음을 확신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쉰들러 명단에 이름이 적힌 유대인들이 나치 학살에서 벗어날 수 있었듯이, 예수님의 리스트에 십자가 은총으로 우리 이름이 적히게 되었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떠한 곤경에서도 기뻐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 행복감이요 은총이요 특권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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