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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고후4: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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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권진관 형제 |
| 참고 : | 새길교회 |
형제자매 여러분, 시간이 살같이 흐른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 잠을 못 이루던 때가 바로 엊그제였는데 이젠 창문을 닫지 않으면 춥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수양회를 기다리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 샌가 수양회는 지나갔고, 이제 여름휴가들을 마치고 오랜만에 만나는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수양회가 성공적이 될까 혹은 잘못 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이 기억이 생생한데 이제 우리는 전남 장성 수양회 이후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우리 공동체는 시간 속에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시간은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데 우리는 그 시간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시간은 태풍처럼 휘몰고 우리 앞을 지나가는데 우리는 그 뒷자락이라도 잡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은 결코 우리의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게 하고 시간을 멈추게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신화적인 이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시간을 멈추게 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데 시간은 지나가고, 그 시간이 남긴 발자취는 늘어나는 흰머리와 약해져가는 육체입니다. 그래서 옛시인은 이렇게 읊었습니다:
인생은 풀과 같은 것, 들에 핀 꽃처럼 한번 피었다가도
스치는 바람결에도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 수 없는 것...
시편 103편의 기자의 말처럼, 시간은 우리 곁을 쏜살같이 지나가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결에 스러지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번 한총련 사태를 보면서 저의 지나간 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학 1학년 때 데모로 경찰서로 잡혀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의 나이가 만 19세였으니까 미성년자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빨리 나이를 먹어야 성인 취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만 20세 되던 때 종로 5가의 문리대 앞에서 혼자 막걸리를 마시며 그 시간을 기념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미국 유학을 갔다 돌아오니 금방 40이 되고 이제는 그렇게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의 뒷자락을 매일 저녁 잡아당기고 붙들고 늘어지지만 그 다음의 아침은 영락없이 찾아오고 맙니다. 이렇게 시간은 나를 뿌리치고 쏜살같이 달아나 버리고 맙니다.
한총련 이야기가 잠깐 나왔습니다마는 저는 한총련의 입장과 생각을 전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생각의 상당부분, 특히 그들의 주체사상에 대한 맹종은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고 한다면 수정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주제가 시간입니다마는 한총련 학생들에게는 시간이 흐르지 않은 듯합니다. 아직도 이전의 생각에 고착되어 있다고 보여집니다. 대학에 몸담고 있는 저는 이 젊은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했다는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통일에 대한 열정, 그리고 그들이 현정부의 통일 정책과 실제 행동에 대해 매우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무 무리한 폭력적 사태를 빚은 것은 학생들에게도 큰 책임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들을 마치 적으로 규정하거나 이적단체로 규정하는 것, 그리고 단순한 폭력집단이라고만 생각하는, 그래서 발포까지도 불사하겠다고 공공연히 공포하는 정부의 입장도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 학생들은 기껏해야 20대 전후입니다. 20대 중반 이하의 젊은이들은 결국 이 사회의 자녀들입니다. 자녀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미우나 고우나 우리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은 아마 귀여운 자녀가 아니라 말썽꾸러기 미운 자녀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우리 사회의 자녀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자녀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는 그 잘못을 꾸중하고 매를 들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며, 결국 우리 품안에서 내쫓지는 않는 범위 내에서 그들을 훈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의 입장에 있는 정부의 태도, 경찰의 태도는 매우 성숙치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말은 제가 학생들의 나이 때에 그러한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는 관용과 여유, 포용력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약할 때는 그러한 것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나 정부는 그만큼 자신이 없는 것같이 보입니다. 우리 학생들 속에서 세월의 변화를 느낄 수 없듯이, 우리 정부를 볼 때에도 세월의 변화,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시간은 흐르고 역사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지는 오래 되었는데 학생들과 정부는 모두 이전 시대의 발상에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시간에 따라 우리는 우리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나이든 사람들은 그만큼 성장해야 합니다. 몸은 늙지만, 마음은 계속해서 발전하여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성경 말씀의 주제라고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은 빨리 지나고 있는데, 아직도 이전의 생각과 이전의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오늘 바울 선생이 하신 말씀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두 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인간의 가장 어려운 수수께끼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불교에서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고(苦)이다. 그것은 생로병사 하는 시간 속에 있는 고가 바로 인생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을 고통의 바다, 즉 고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시편 103편의 말씀처럼 시간 속에 있는 인생은 허무하기만 하다는 것입니다. 시간 속에 있는 인생의 허무함을 전도서에서는 이렇게 한탄하고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한 세대가 가면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이 땅은 영원히 그대로이다...
하늘 아래 새것이 있을 리 없다.
'보아라, 여기 새로운 것이 있구나!' 하더라도 믿지 말라.
그런 일은 우리가 나기 오래 전에 이미 있었던 일이다.
지나간 나날이 기억에서 사라지듯
오늘 세월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 것을
전도서는 시간의 허무함을 힘써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전도서도 인생을 시간 중심으로 본 것입니다. 시간은 인생을 허무한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본문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는 우리의 외적 인간이 낡아진다고 하는데 이것도 시간 속에 있는 인생의 허무의 불가피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시간이 가져다주는 허무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이길 수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시간을 거슬러서 이기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 주제를 넘는 생각입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시간을 멈추게 할 수도 없고 시간으로부터 해방될 수도 없는 것이므로 우리는 시간 자체를 거스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함께 창조하셨으며, 우리 인간은 모든 피조된 생물과 마찬가지로 운명적으로 시간과 함께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시간의 허무함 속에서만 살도록 하나님께서 운명지어 주셨는가 하는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수수께끼를 풀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의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렇게 허무한 존재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이라는 수수께끼에 대해 성서는 대답해 주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내적 인간은 도대체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기에 시간의 허무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우리 내적 인간의 마음속에는 기억하고, 판단하고, 희망할 수 있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저는 오늘 그 중에서 우리가 기억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시간의 허무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나온 시간 속에서의 삶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기억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귀중한 선물입니다. 우리 새길공동체는 지난 한 주간을 그냥 허무하게 지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내적 인간은 지난 주 동안에 있었던 일, 특히 전라남도 장성에서 있었던 수양회의 일을 기억합니다. 시간 속에 있었던 그 수양회의 경험은 우리들에게 아주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기 때문에 수양회 동안의 시간의 가치가 우리들 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내적 인간을 위해서 시간은 오히려 축복이 됩니다. 내적 인간이 기억을 하는 한 시간은 허무한 것이 아니라 축복이 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삶 속에 있는 아름다운 시간들, 가치 있는 시간들, 새로운 것을 깨달았던 시간들, 예를 들면 지난주에 있었든 수양회와 같은 것들을 기억할 수 없다면 우리들의 삶은 무미건조해지고 허무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 속에 있었던 일들은 기억으로 남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가에 따라 우리의 내적 인간의 모습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의 시간은 그 자취를 기억 속에 남기기 때문에 시간 자체가 그냥 허무한 것만은 아닙니다. 시간 속에서 우리는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고, 그 가치 있는 일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 남기 때문에 나와 늘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이란 중요하며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을 하지 않는다면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억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동물과 다를 바 없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전에 아름다운 시간, 가치 있는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지금의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내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시간들, 가치 있는 시간들을 기억하는 사람일 수록 지금 현재를 가치 있게 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미래의 보다 가치 있는 시간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 문제의식 없이 동물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 속에서 가치 있는 것을 전연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의 현재의 삶도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아무런 희망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 앞을 지나가는 시간들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기억하게 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자신들의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신명기 26장에 보면 햇곡식을 바치며 드리는 제사 중에 이스라엘 공동체는 자신들의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예식을 가집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야훼 앞에 아래와 같이 아뢰어야 한다.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에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 몸붙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불어나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집트인들은 우리를 억누르고 괴롭혔습니다. 우리를 사정없이 부렸습니다.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하나님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는 우리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우리가 억눌려 고생하며 착취당하는 것을 굽어 살피셨습니다. 그리고 야훼께서는 억센 손으로 치시며 팔을 뻗으시어 온갖 표적과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모두 두려워 떨게 하시고는 우리를 에집트에서 구출해 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이 곳으로 데려 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 즉 야훼여, 주께서 주신 이 땅의 햇곡식을 이제 제가 이렇게 가져왔습니다."(신명기 26:5-10)
우리 공동체도 이전의 기쁘고 즐거웠었던, 슬프고 가슴이 아팠던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9년여 전에 어디에서부터 우리 공동체를 시작했고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어떻게 성장해 왔고, 무엇을 했는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개인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렇게 기억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은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을 사는 존재는 아닙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우리의 외적인 인간을 늙게 하고 결국은 죽게 합니다. 우리는 물리적인 시간을 잡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우리를 뿌리치고 쏜살같이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인간은 기억을 통하여 지나가는 시간들을 우리 안에 끌어안고 간직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내적인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은 그냥 지나가서 없어지는 허무한 것이 아니라, 그리하여 들에 핀 꽃처럼 한번 피었다가 이내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은 기억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자신의 자취를 남겨 놓는 것입니다. 기억은 과거의 시간을 무의미한 것으로 지나가게 하지 않고, 그것을 오늘 나에게 반추시켜 줍니다. 그리고 오늘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기억은 위대한 것, 그것은 너무 크고 끝이 없는 인간 내면의 방이라고 했고, 또 신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억은 우리의 인생과 시간을 허무한 것이 되지 않도록 막아줍니다. 그 기억 안에 들어 있는 많은 보화들을 얼마나 많이 발견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내적 인간은 점점 더 새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지난 시간을 한탄합니다. 그 시간들이 잘 못 보내졌다고 후회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하자고 제안합니다. 비록 아주 부정적인 경험들이 과거에 점철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보다 창조적인 것으로 기억 속에서 재해석하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의 시간 속에 있던 경험들을 끌어내어 반복하는 것이며, 재해석하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70년대를 암흑기로 보냈습니다. 그 때는 유신치하였기 때문에 일체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 시기를 대학생으로 보냈고, 그 시기 동안에 저의 20대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저는 감옥에도 들어가고 감시도 받으며, 정말 부자유한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그 시간을 잊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불행한 시기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그 시기를 나의 인생의 가장 귀중한 시기라고 생각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의 미래를 위한 삶의 지표와 가치관을 이 시기의 경험과 일들을 기억함으로써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저는 그 이후 어려운 일을 겪어왔습니다. 그러한 때를 다시 생각해 보면 정말 기억하기조차 싫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가 가장 귀중한 때요, 그 때 우리는 귀중한 지혜와 가치를 얻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일하셨다는 사실을 지금 반추하고 기억하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난 세월은 이렇게 어려운 시간으로만 채워진 것은 아닙니다. 아름답고 기쁜 세월도 많았습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삶을 통해서, 그리고 가정 생활을 통해서 시간 속에서의 아름다움, 영광된 것들을 경험했음을 기억합니다. 그러한 기억도 우리의 내적인 삶을 풍부하게 해줍니다. 그러한 기억들은 앞으로 우리가 미래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기대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기억이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통하여, 시간 속에서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날로 새로워지고 풍부해집니다.
오늘은 성 어거스틴의 기도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 주님, 그러면 당신은 내 기억 안의 어디에 계시는 것입니까? 내 기억 안의 어디에 계시는 것입니까? 거기에 당신을 위해서 어떠한 거처를 만들어 놓으셨습니까? 거기에 당신을 위하여 무슨 성소를 지으셨습니까?...
당신은 어떤 물체의 영상도 아니오 살아있는 사람들의 감정도 아닙니다. 또한 당신은 마음 자체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 마음의 주님이 되시고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변합니다만 이 모든 것들을 초월하여 계시는 당신은 불변하십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내가 당신을 알게 된 때부터 내 기억 안에 거하기로 택하시었습니다...
당신이 내 안에 계셨건만 나는 나 밖에 나와서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 계셨건만 나는 당신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부르시고 소리질러 귀머거리된 내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또한 당신은 당신의 빛을 나에게 번쩍 비추사 내 눈의 어두움을 쫓아버렸습니다....
내가 장차 당신과 온전히 연합하게 될 때는 나에게 더 이상 슬픔과 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 때에 내 생은 당신으로 충만 되어 참된 삶이 될 것입니다. 아멘. (어거스틴의 고백록, 25-28장에서 발췌)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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