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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편지

고린도후 길희성............... 조회 수 2623 추천 수 0 2008.03.10 14: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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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후3:1-2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누가 저더러 "크리스천입니까?"라고 물으면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이것은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며, 자신 있게 대답하는 사람은 아마도 질문의 의미를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 단순하게 이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교회에 다니는 자', '기독교라는 종교에 관여하고 있는 자'라는 제도적 의미라면 우리들은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 부르는데 별로 주저하거나 회피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이라는 말에는 여러 차원의 뜻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이란 말이 쓰이는 용도와 의미하는 바는 세 가지로 구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방금 말한 제도적 의미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속한 사람, 교인이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교회에 몸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들을 충실히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크리스천의 의미를 보다 엄격하게 정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누가 우리더러 당신은 성서에 나오는 각종 이야기들과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들을 모두 충실히 믿느냐고 묻는다면 한참 주저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기 어려운 기적사화들이나, 만찬가지로 이해하기 어려운 교회의 교리들 - 삼위일체 신론, 기독론, 속죄론, 동정녀 탄생, 부활과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 등 - 모든 전통적인 교리들을 문자 그대로 다 삼킬 수 있느냐는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저 자신은 그러합니다. 또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오히려 믿기 어려운 것은 믿지 못하겠다고 정직하게 말하고, 전통적인 교리에 새로운 해석과 이해를 시도하던지 아니면 믿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든지 하는 것이 더 양심적인 일일 것입니다. 세 번째 의미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로 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크리스천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같은', '그리스도를 닮은', 혹은 '그리스도에 속한'이라는 뜻을 지니게 됩니다. 사실 이것이 크리스천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였지만, 그것이 점차 제도적인 의미에서의 크리스천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게 된 것입니다. 이 본래적인 뜻, 세 번째 뜻이야말로 제일 어렵고 엄격한 의미에서의 크리스천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의미에서의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쓰면 놀랍게도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제도와 교리의 율법주의에서 해방시켜주는 해방적 의미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적어도 크리스천의 범위를 기독교라는 제도의 울타리에 국한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금세기 최고의 카톨릭 신학자 칼 라너가 얘기하듯이, 교회 밖에도 그리스도적으로 사는 익명의 크리스천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이런 세 번째 의미에서, 당신은 크리스천이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저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분명히 나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 기독교라는 제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니까 첫째 의미는 아무 문제없이 받아들일 수 있고, 성서해석이나 교리 문제는 나 나름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신학적인 견해가 어느 정도 확고하게 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누가 나를 이단이니 뭐니 비난해도 눈 하나 깜짝 안할 자신이 있으니까 두 번째 의미도 아무 문제 없는데, 세 번째가 괴로운 일입니다. "당신은 크리스천입니까?"라는 물음이 "당신은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처럼 살고 있습니까?"라는 물음으로 이해된다면, 아마도 우리 가운데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그렇다고 대답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깊은 뜻에서의 크리스천이란 말의 의미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너무나 쉽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혹은 어느 교회에 다니는 것이 무슨 자랑거리나 벼슬을 한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을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만약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세 번째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한다면, 기독교인이면서 기독교인 아닌 사람보다도 못한 인격이나 행동을 하는 신자의 수는 많이 줄어들 것이며, 기독교인이라면서 건전한 상식과 양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짓을 하는 사람은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자신을 기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과 그리스도인은 정말 다른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교회라는 제도에 속한 사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 이 둘은 불행하게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무슨 일을 하든, 무슨 생각을 하든, 이것이 진정 그리스도의 마음일까, 이것이 그리스도가 원하는 행동일까, 이것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적인가라고 묻는다면, 기독교라는 제도와 집단의 이름으로 가해진 수많은 죄악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세 번째 의미에 대하여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크리스천이란 뭐니뭐니 해도 그리스도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 전부가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 규정되는 존재들이 크리스천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그리스도에 의해 형성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와 끊을 수 없는 관계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끼리도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신약성서는 일련의 전치사들로써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그리스도를 위하여'(for Christ), '그리스도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Christ) 등과 같은 표현들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 영원한 영으로 역사 하시면서 우리들의 몸과 마음, 우리들의 행동과 삶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뜻이며, 크리스천이란 이렇게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 존재와 우리 삶의 근본으로 깔고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렇게 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단어로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종', '그리스도의 군사', '그리스도의 대사'(ambassadors of Christ),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고 오늘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각각 그 강조하는 바가 다르나 우리 믿는 이들의 존재를 그리스도와 연관시켜 정의하고 있다는 데에는 매한가지입니다. 이런 표현들에서 유의할 점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가 주어이며 우리는 술어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가 주체, 주인이고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그의 종, 군사, 대사, 향기, 편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라는 주어에 부착된 술어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그리스도를 섬기는 종,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는 군사,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하는 대사, 그리스도의 냄새를 발하는 향기, 그리고 그리스도가 쓰는 편지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주어이며 주체이며 주인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인격과 우리 삶을 주장하기 때문이며 우리의 참 자아를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내 안의 그리스도'라고 부르며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들 존재의 근거요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우리 인생을 편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각자 자기 생각과 행동으로 날마다 인생의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남에게 우리 자신을 표현하고 의사 전달을 하면서 살고 있으며, 인생의 편지를 기록으로 남기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인생의 편지는 시작과 끝이 있으며 누군가에 의해 읽혀지기 마련이며 어딘가에 기록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 통의 긴 편지를 쓰고 가는 존재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긴 편지를, 어떤 사람은 짧은 편지를 남깁니다. 또 어떤 이는 편지를 쓰다가 종결도 못 짓고 가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횡설수설하는 편지, 어떤 이는 앞뒤가 잘 맞는 깔끔한 인생의 편지를 남기고 가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허겁지겁 서두르면서 편지를 쓰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차분하게 편지를 씁니다. 어떤 사람은 시시한 사연만 늘어놓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눈물과 감동이 있는 편지를 씁니다. 추한 편지가 있는가 하면 아름다운 편지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오래 오래 기억될 편지를 쓰고 가는가 하면 어떤 이는 곧 잊혀질 편지를 쓰고 갑니다.
바울 사도는 그야말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편지들을 남긴 사람이지만, 그의 삶 자체가 또한 하나의 감동적인 편지였고, 지금 그는 자기가 복음을 전해 준 고린도교회 사람들을 가리켜 자기를 통해 전달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칭찬과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잉크로 쓴 편지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편지며, 돌 비에 쓴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비에 쓴 편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쓰는 편지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편지, 그리스도에 관한 편지라기보다는 그리스도가 쓰는 편지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리스도가 쓰는 편지이기에 우리 삶이 그리스도를 전하고 증거 하는 편지, 그리스도에 관한 편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란 우리 안에서 우리 마음과 행위를 주관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쓰시는 편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들 각자의 인격과 개성이 사라지고 우리 모두가 자유의지도 없는 로봇 같은 사람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부여해준 타고난 성격이 다르고, 우리의 재능과 은사가 다르고, 우리가 처한 환경도 다를 수밖에 없기에 주님께서는 우리들 각자에게 바라는 바도 다르고 각자가 해야할 일도 다릅니다. 모두가 천편일률적인 편지를 쓴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디서 무엇을 하든, 다시 말해 우리가 어디서 어떤 인생의 편지를 쓰든,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 쓰는 편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고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하며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서에 나타난 예수의 제자들의 성품을 보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된 후에도 그들 각자의 강한 개성은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은 열정적이고 약간 투쟁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는가 하면, 베드로는 우유부단한 면이 있었고, 스테반 같은 이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아름답게 그리스도의 편지를 쓰고 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가 쓰는 편지가 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앞에서 나의 생각, 나의 주장, 나의 사상이 꺾이고 사라져야 합니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나를 주장하도록 자신을 포기하고 맡겨야합니다. 자기를 비우고 비워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설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나를 채워야 합니다. 나의 욕심, 나의 혈기가 팔팔하게 살아 있으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설자리가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편지를 쓰게 되지 결코 그리스도의 편지를 쓸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는 어떤 내용을 담는 편지일까요? 우리들이 쓰는 그리스도의 편지는 모두 같은 내용, 공통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공통의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은 우리들 개개인이 다르지만 그 내용, 그 증언하는 바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2,000년 전 유대 땅에서 쓰시고 간 편지와 같은 내용의 편지여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한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한없이 인간을 사랑했던 삶의 기록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위해 자기를 철저히 비운 삶입니다. 그럼으로써 이기심과 탐욕이 지배하는 죄악 세상에 새로운 인간상을 보여주고 죽음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역사의 물줄기를 흐르게 한 사람입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삶을 살다가 간 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삶을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고대로 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칼캇타 빈민촌에서 일생을 가난한 이들을 섬기면서 살고 있는 사랑의 수녀회 소속 테레사 수녀에게서 봅니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가냘픈 생명의 촛불을 기적과도 같이 은총으로 이어가면서 그는 80평생이 훨씬 넘도록 철저히 자신을 비우고 낮고 천한데서 살고 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철저히 무력한 한 여인이 그토록 전 세계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자신의 삶의 비결을 말하기를 자기는 하나님의 연필이라고 합니다. 연필은 연필을 쥔 자의 의도대로 글을 쓰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연필은 다시 말해 하나님의 편지라는 뜻과 마찬가지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자기 뜻을 전달하고 펴시는 단순히 하나님의 편지, 그리스도의 편지인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철저히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과 가난한 이들 앞에서 자기를 없애고 오직 사랑의 하나님의 얼굴만 나타나게 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는 곧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하나님의 화신이 된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 이것만이 인간을 구원하는 힘이요 길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아무도 믿지 맙시다. 온 나라를 볼모로 잡고 정치 싸움하는 정치인들 믿지 맙시다. 민주화 투쟁했다는 사람도 믿지 맙시다. 목청 높여 정의를 외치는 사람도, 양심적인 지식인이라는 사람도 믿을 것이 없습니다. 살다보니 인간은 모두 50보 100보의 차이밖에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이제는 속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인간을 구원하고 역사를 속량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을 철저히 비우는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뿐이라는 것을 요즈음 저 자신을 돌아보면서, 주위 사람들을 보면서, 그리고 역사를 지켜보면서 뼈저리게 느낍니다. 모든 것이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이요 제스처이며, 모두가 권력을 잡겠다고 떠들어대며 떡 하나 더 먹겠다고 아우성치는 소리입니다. 남이 하면 죽일 놈이요 자기가 하면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권력의 의지로 보는 니체와 포스트모더니스트 후예들이 차라리 솔직한 것 같습니다. 혁명을 한다 해도, 개혁을 한다 해도 속지 맙시다. 혁명을 한 자나 개혁하겠다고 나선 자나 다 그 놈이 그 놈입니다. 애당초 김영삼 정권을 조금이라도 믿었던 것이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그는 역사에 큰 죄를 지은 자입니다. 군사독재는 본래부터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현정권이 보이고 있는 추한 모습이 남길 폐해는 심각합니다. 누가 해도 별 수 없다는 냉소주의를 낳았습니다. 자기와 더불어 앞으로 올 모든 정권, 모든 정치인들을 함께 오물통에 넣고 퇴장하는 비참하고도 웃기는 정권이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새해에는 우리가 바라는 것, 꿈꾸는 것들이 많이 있을 것이며, 누구나 간절한 소망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바라는 것, 무엇을 더 얻고자 하는 것, 무엇을 더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소망은 될지언정 크리스천들의 바램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얻은 자들인데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더불어 다시 오실 주님만을 기다리면서 주어진 환경에서 항시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주님의 편지를 열심히 쓰는 일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올 한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매우 우울하다 해서 우리는 특별히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역사란 다 그런 것이 아닙니까? 나 자신을 포함하여 죄인들이 엮어 가는 죄악의 역사인 것입니다. 내가 죄인인데 누구를 향해 돌을 던지겠습니까? 사회정의를 부르짖기에 앞서 내 안에 있는 불의와 탐욕을 먼저 없애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죄악의 역사를 속량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마음을 비우고 덜고 하여 우리 삶을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도록 사는 것일 뿐입니다. 내가 쓰는 편지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쓰는 편지가 되도록 말입니다. 올 한해는 조용히 자신을 성찰하면서 그리스도의 편지를 쓰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나의 삶이 그리스도가 친히 쓰시는 한 통의 아름다운 편지가 되도록, 그러기 위해서는 늘 기도에 힘쓰고 하나님께서 그의 사람들을 통해 우리들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인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테레사 수녀가 자기를 하나님의 연필이라 했지만, 테레사 수녀와 같은 소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해맑은 아름다운 시를 많이 쓰고 있는 이혜인 수녀의 몽당연필이라는 수필의 일부를 읽어 드림으로써 오늘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몽당연필로 시를 쓰면 왠지 더욱 단순하고 소박하고 차분한 마음이 된다. 맑고 온유하고 따스한 마음이 된다.
남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스스로 작아지는 겸손의 삶을 내게 다시 깨우쳐 주는 몽당연필, 그는 또한 나 자신과 삶의 유한성을 보게 해 준다.
나의 삶도 어쩌면 한 자루의 연필과 같은 것이 아닐까. 내가 쓰는 연필들이 닳고닳아 차츰 작아지듯이 나의 삶도 언젠가는 조용히 닳아서 끝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아침마다 새로 맞는 나의 매일매일도 한 자루의 새 연필과 같은 것. 나는 기쁘고 고마운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고 열심히 깎아 써야하겠다.
나 역시 한 자루의 연필이 되어 자신을 깎이는 겸손과 사랑의 서약을 더욱 새롭게 해야겠다.

우리 모두 깎이고 깎여 조그마한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열심히 그리스도의 편지를 쓰도록 합시다. 우리 모두가 테레사 수녀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올해에는 자신을 비우고 작은사랑 하나라도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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