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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고린도후 길희성............... 조회 수 3551 추천 수 0 2008.05.19 15:3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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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후2:1-10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요즈음 IMF 사태로 모두가 의기소침해 있습니다. 한참 잘 나가던 나라가 갑자기 한 방 얻어맞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모두가 불안해합니다. 기업들은 연일 도산하고 군살 빼기, 거품 빼기, 구조조정 등으로 이미 실직을 했거나 아니면 언제 당할지 모르는 긴장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루에 일만 명 정도가 실직을 당한다고 하니 본인은 물론이요 그 가족들의 고통까지 생각하면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업자 수가 이미 100만을 훨씬 넘었다고 하며,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이제부터 진짜 고통이 시작될 것이라고 합니다. 스트레스는 쌓여만 가고, 한국인 특유의 패기는 찾아보기 어렵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감을 상실한 채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최근 외국에 다녀온 사람들은 말하기를 해외에서도 기를 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누가 한국 얘기라도 꺼내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라고 합니다.

어째서 나라꼴이 이렇게 되었는지 자꾸만 묻게 됩니다. 물론 경제적 이유가 첫 번째입니다. 수십 년 자본주의라는 것을 해 놓고 이제 와서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자본주의의 심각한 문제점들을 개선하고 보완해 나가도 시원치 않은 판에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하니 말입니다. 정치적 이유도 있습니다.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개혁의지의 부족,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고 앞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의 결여 등이 함께 작용하여 위기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근본적으로는 나라 전체의 도덕적 실패에 위기의 원인이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합니다. 무엇보다도 과욕과 교만에서 온 것입니다.
우선 과욕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돈 벌어 잘 살아 보자는 일념 아래 정신없이 달려가다가 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꼴이 되었습니다. 혹은 중병에 걸린지도 모르고 계속 뛰다가 갑작스럽게 제동이 걸린 것입니다. 아니면, 너무 많이 그리고 너무 급하게 먹다가 급체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모두가 과도한 욕심에 제 정신을 잃고 판단력이 흐려진 것입니다. 개인은 개인대로 자기 삶을 조용히 성찰할 여유가 없었으며, 사회는 사회대로 나라는 나라대로 전체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여유와 지혜가 없었습니다. 특히 대권 경쟁을 앞에 놓고 모든 국민의 관심이 이 큰 떡을 누가 먹을까 하고 거기에만 정신을 쏟고 있는 사이에 집안의 기둥뿌리가 썩어서 집이 곧 무너지게 되는 줄도 모른 채 모두가 정치 놀음에 놀아났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자신의 모습을 냉정하게 볼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또 우리가 좀 잘 산다고 그 동안 얼마나 교만했습니까? 그것도 남의 돈 빌려다가 잔치하는 줄도 모르고 돈 좀 있다고 그 동안 얼마나 건방을 떨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보다 몇 배 잘사는 선진국 사람들도 100달라라면 벌벌 떠는데 우리는 그것을 우습게 여겼으며, 온갖 구박을 당하면서 우리 대신 3D 업종에 종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얼마나 업신여겼습니까? 또 해외 교포들한테도 우리가 얼마나 마음의 상처를 안겨 주었는지 모릅니다. 요즈음 고국을 바라보는 교포들의 심정은 착잡하다고 합니다. 이민을 오기 잘 했다는 만족감을 오랜만에 느끼지만, 이것은 동시에 자기들이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고국이 그만큼 잘못되었다는 것을 뜻하기에 착잡한 마음, 슬픈 만족감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교만에 눈이 어두워 주제 파악을 못하고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린다고 외국 언론들이 비아냥거렸건만 아랑곳하지 않고 마셔대더니 결국 이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 김영삼 정권의 쓸쓸한 말로를 지켜봤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결국 오만이었습니다. 권력을 쥐고 나서 교만에 눈이 어두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했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습니다. 실로 죄 가운데 가장 무서운 죄는 교만과 독선의 죄라는 것을 새삼 실감합니다.

그러나 실패와 좌절, 고난과 위기 그 자체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그것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무감각입니다. 만약 우리가 좌절과 시련을 통해 더 성숙해지고 지혜로워진다면 지금의 시련은 우리에게 값진 시련이 될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더 신앙의 힘을 발휘해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살길을 제시할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되 감당 못할 시련은 안 주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우리는 환난 가운데 기뻐합니다. 그것은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품격을 낳고 품격은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라고(로마 5:3-5) 했습니다.

요즈음 같이 우울한 때에 과연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까 고민하던 중 제 귓전을 맴도는 말씀은 오늘 아침 읽은 사도 바울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푸셨다는 말씀, 그의 은총이 우리에게 이미 차고 넘치도록 족하다는 것, 그러니 고난을 피하려 하지 말고 그대로 안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여러 교우들과 함께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무엇을 더 얻으려고 부질없는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은혜가 이미 네게 족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잘못, 가장 큰 죄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 이미 우리에게 와 있는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과욕을 부리고 또 교만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권능을 받아 많은 능력과 재주를 지녔던 사람입니다. 비록 못 생기고 말은 눌변이기는 했으나 그의 서신을 볼 때 글은 뛰어난 사람이었고, 생각과 사상이 깊었으며, 적극적이고 정열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적을 행하는 권능이 있는가 하면 방언도 할 수 있었습니다. 또 오늘 아침 읽은 말씀에 의하면, 바울은 놀라운 신비체험도 했습니다. 신비체험이기에 우리로서는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하늘 가장 높은 곳까지 끌려 올라가는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낙원에 올라가서 "인간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말을 거기서 들었습니다"라고 자기의 체험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많은 은혜를 입고 능력을 받은 바울이었건만, 그도 인간적으로, 육체적으로는 매우 취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 그가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고초는 차치하고라도(고 11:23-27절) 그에게는 한 가지 불치의 병이 있어서 줄곧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것이 어떤 병이었는지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그는 그것을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권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진다"라는 응답만을 받고 가시 같은 병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받은 이러한 기도의 응답은 우리가 눈여겨 볼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직접적인 응답이 아니라 간접적인 응답, 응답 아닌 응답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고차적인 응답입니다. 우리는 물론 기도할 때 직접적인 응답을 구합니다. 삶의 매우 구체적인 문제들을 안고서 구체적인 응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기도합니다. 특히 자기 몸이 병에 걸렸을 때 그 기도는 간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 기도의 응답이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더 고차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문제가 있어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문제를 해결해주는 응답이 아니라, 그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응답입니다. 다시 말해서 더 이상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응답입니다. 바울이 이 특정한 기도에서 받은 응답은 바로 이러한 응답이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잘못 간구하는 기도를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구하며, 나의 생각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은 간접적인 응답을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울의 예에서 발견합니다. 바울이 들은 응답은 이러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권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진다"라는 것입니다.

이 두 마디는 언뜻 보면 서로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무슨 은혜가 족하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그가 받은 은혜가 이미 너무도 많으니 더 받을 생각은 말라는 말입니까? 물론 그렇게도 생각해 불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사절 때 밤낮 하듯이 "너의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는 식으로 풀이하면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 욕심이 많아서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새카맣게 잊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것만 골똘히 생각하면서 우리의 욕망을 채우려 합니다. 우리가 지금 IMF로 고통을 당하고 있기는 하나, 옛날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아니 불과 20년 전 70년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며, 또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가 어디 한둘입니까? 멀리 볼 것 없이, 우리 북한 동족들이 당하는 고난에 비하면 우리의 고난은 사치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모든 것 -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큰 일에 이르기까지 - 을 축복, 은총으로 깨닫지 못하고 너무나 당연시하면서 언제나 부족해 하는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그런 한 우리에게는 행복이란 요원한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요즈음 실직이 만연하다 보니 우리는 새삼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요 축복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깨닫기 이전에는 얼마나 불평불만이 많았습니까?
하지만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다"는 말을 이렇게만 해석하면 그 다음 말, 즉 "나의 권능은 약한데서 완전해진다"는 말이 연결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내 은혜가 족한 이유를 밝히는 말로 해석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의 약함 속에서 나의 권능이 드러나기 때문에, 너의 약함 자체가 곧 나의 은총이라는 말입니다. 너의 약함 그대로가 이미 나의 은총이며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의 약함을 없애려고 간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약함 속에서 나의 은총을 확인하면서 약함을 그대로 안고 살라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주어진 기도의 응답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너의 고난, 너의 육체의 찌르는 가시 같은 병은 바로 너를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너를 교만하게 하지 않고 너의 약함 가운데서 오히려 나와 더 가까워지고 나를 의지하여 나의 권능으로 너를 더 강하게 하려 하는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이것이 그가 받은 기도의 응답이었고 이것이 그에게 족한 은총이었습니다.

이루어 달라고 매달리는 것도 신앙이지만 포기하는 것은 더 큰 신앙입니다. 나의 뜻을 강요하는 기도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더 큰 신앙입니다. 예수께서도 그러기 때문에 주기도문에서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먼저 간구한 다음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통을 앞에 두고 기도하실 때, 할 수만 있으면 이 쓰라린 고통을 피하게 해 달라고 자기의 뜻을 간절히 아뢰었지만, 나의 뜻대로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포기의 기도를 올린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바울 사도의 말씀 가운데서 여러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더 깊이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바울이 이러한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 얻게된 영적 깨달음, 특히 고난의 의미에 대한 그의 신앙적 깨달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이 기도의 체험을 통해서 고난의 의미를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해석하는 높은 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우리들의 상식과는 180도 달라진 것입니다. 그는 고난을 단순히 피하려는 자세, 고난을 이기려는 보통 사람들의 자세가 아니라, 고난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 아는, 아니 고난 때문에 감사할 줄 아는 더 성숙한 자세를 이 기도를 통하여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피하는 고난이 아니라 자취하는 고난을 배웠으며,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까지 승화하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해지며 모욕을 당하며 궁핍과 박해와 곤궁을 당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것은 내가 약할 그 때가 내가 강한 때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보통 사람들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정신적 경지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가까워지기 위한 고난, 그리스도를 닮는 고난, 그리고 그리스도가 못 다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기 위한 고난을 바울은 이 기도를 통해서 배우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고난의 적극적인 의미를 깨닫고 고난을 오히려 감사하면서 자기 몸을 찌르는 가시 같은 병을 그대로 안고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단순히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얻는 정도가 아니라 그 병으로 인해, 자신의 약함으로 인해 더 감사하고 더 기뻐하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앓고 있는 이 불치의 병이 자기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사탄을 통해 자기를 치는 것이라고 해석했으며, 자신의 약함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자취하기로 하였습니다. "내가 약할 그 때가 바로 내가 강한 때"라는 것을 그는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제거하는 신앙이 아니라 고통을 승화하여 안고 사는 신앙, 고통을 축복으로 전환하는 신앙이야말로 보통 사람들의 신앙을 능가하는 바울 사도 특유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능은 인간의 약함 속에서 완전해진다는 역설의 진리를 깨달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고난 속에서도 감사하고 나아가서 기뻐하는 법마저 터득한 것입니다. 바울은 심지어 자신의 약함을 이제 자랑하겠다고 까지 말합니다. "내가 꼭 자랑해야 한다면 나는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겠습니다"라고(고후 11:30) 합니다. 생각할수록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졌던 놀라운 영적 체험을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었지만 "나 자신에 관해서는 약한 것밖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정작 자랑할만한 것은 접어두고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바울의 이 태도에서 우리는 역설적 신앙의 극치를 봅니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마치 강함을 추구하는 자들의 신앙을 비웃기라도 하듯, 크고 강한 것을 추구해온 한국 교회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는 경지로까지 신앙의 역설을 철저하게 밀고 나갑니다.

바울은 이러한 역설적 진리를 어떻게 깨달았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고전 1:18∼25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통해 인간의 약함이 하나님의 강함이며 인간의 어리석음이 하나님의 지혜임을 깨닫게 된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결국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의 은혜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축복이며, 약함이 강함이며 좌절과 실패가 참다운 승리임을 우리에게 알게 해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바울은 고난 속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신앙의 지혜를 배운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패배가 곧 승리이기에 패배는 없고 오직 승리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확신에 찬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실로 세상을 거꾸로 사는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세상이 잘 나간다고 낙관할 때 멸망의 징조를 읽으며 세상이 절망할 때 희망의 징표를 읽는 것이 신앙인의 책임입니다. 강하다 할 때 약함을 알며 약할 때 참으로 강해질 수 있음을 아는 것이 신앙의 지혜입니다. 이 진리를 증언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며 존재 이유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지난 30년간의 고도 성장에 도취되어 풍요 속의 빈곤, 번영 속에 도사리고 있는 멸망의 징조를 읽지 못했고 사회와 같은 장단에 놀아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의 약함과 고난을 단순히 참고 견딜 뿐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고 자랑할 줄 아는 신앙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이러한 참회와 겸손을 통해서만 우리의 좌절은 승리로 변할 것이고, 우리 민족의 고난이 자업자득의 당연한 고난, 그래서 단순히 참고 견디어야할 고난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 그리스도의 고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되어서 부활의 기쁨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라는 말로 우리가 요즈음 당하는 어려움을 위로하려 합니다. 정말 그러기를 모두가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눈으로 보면, 전화위복은 저절로 운 좋게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역사에 공짜는 없는 법입니다. 또 전화위복이란 언젠가 앞으로 이루어질지 모를,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의 막연한 복이 아닙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전화위복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현실입니다. 다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느냐, 어떠한 자세로 고난을 대하느냐에 따라 전화위복도 되고 회복할 수 없는 파멸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고난이 우리의 오만함을 치시는 하나님의 채찍이요 축복임을 알고, 약함 속에 진정한 하나님의 강함이 있음을 깨달아서 남의 고통을 나누는 고난, 남을 위한 고난, 그리스도의 고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승화될 때, 우리의 고난은 진정 고난이 아니라 축복의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탐욕과 교만을 그대로 둔 채 잠시 참으며 고통이 지나가기만 기다린다면, 우리의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정주영씨가 두 번째 자서전을 냈다는데, 그 내용을 신문에서 보니 모든 것이 온통 김영삼 대통령 잘못이고 자기 잘못, 재벌의 잘못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는 것을 보고서 기가 막혔습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희망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전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온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해서 온갖 기가 막힌 사연들이 담긴 금붙이들을 선뜻 내놓는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우리 나라의 부자들은 정말 지독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온 금이 10분의 1도 안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온 나라가 그렇게 법석을 떠는데도 금괴를 가지고 있는 부자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역시 민중이 그리스도라는 민중신학자들의 말은 깊이 새겨 볼만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당하여, 우리는 더욱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우리의 고난을 의미 있는 고난, 값진 고난, 그리스도의 고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남과 나누는 고난, 남을 위한 고난으로 승화시키는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요즈음 화두는 인 것 같습니다. 고통을 통해 더 성숙하게 된 야곱을 배워 고난 속에서 더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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