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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 사람, 속 사람

고린도후 길희성............... 조회 수 2247 추천 수 0 2008.06.02 19:4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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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후4:7-12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나무들이 옷을 벗고 앙상한 가지들을 드러내는 계절입니다. 사람들은 추워서 오히려 옷을 끼워 입는데 나무들은 무성했던 잎들을 여위고 벌거숭이로 찬바람을 견디어야 하니 가여운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음산하게 부는 바람이 다가올 추운 겨울을 예고하는 듯 합니다. 벌써 올 한 해도 다 간 기분이고 곧 연말을 맞을 것입니다. 몇 일전 학교에서 봉투 하나를 전달받았습니다. 열어보니 크리스마스 씰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아, 속절없이 또 한 해가 저무는구나'하는 생각이 스치면서 왠지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꼈습니다. 연말이 다가오면 공연히 억울한 생각, 왠지 허전하고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감정은 아닐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이러한 기분은 우리들의 존재와 삶에 대하여 무언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즉 소중한 인생을 허비했다는 생각, 마땅히 해야 할 일, 마땅히 인간으로서 살아야 할 삶을 살지 못했다는 생각, 존재와 당위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허전함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옷을 끼워 입어도 언젠가는 우리도 나무들처럼 결국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벌거숭이가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안 벗으려고 발버둥쳐도 소용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옷은 자기를 가리우는 것이요 치장이요 가식이요 거짓입니다. 우리는 이 가식과 위선의 옷을 언젠가는 훌훌 벗어버리고 나의 있는 그대로의 초라한 모습을 싫어도 보여주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인생의 겨울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오는 법이며 나 홀로 벌거숭이가 되어 외로운 저승길을 떠나게끔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던 모든 짓거리들, 모든 거짓 동작들을 멈추고, 인생의 연극무대에서 조용히 퇴장할 때가 옵니다.

그 때가 되면 사실 우리의 벌거벗은 몸보다도 더 부끄러운 것은 우리의 벌거벗은 영혼일 것입니다. 그나마 우리를 감싸주던 몸마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우리를 떠나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부패하고 썩어 문드러져 흙으로 돌아갈 것이고 우리의 외로운 혼은 갈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할 것입니다. 힌두교나 불교에서는 우리가 옷을 바꾸어 입듯이 몸도 바꿔 입는다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한 몸을 벗고 또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환생을 믿습니다. 그러나 윤회를 믿지 않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한 번 몸이 허물어지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지 다시 몸을 입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부활할 때 이 썩을 몸을 던져버리고 부패하지 않는 몸, 영적인 몸으로 변화하여 영생을 누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하튼 옷도 몸도 다 벗어버리는 때가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봉독한 말씀에서 우리의 몸을 '땅에 있는 장막 집'(tent)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막 집이 무너질 때 우리가 벌거숭이가 되지 않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으로 갈아입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장막에 거하면서 무거운 짐에 눌려 신음하고 있으나 하늘로부터 오는 집으로 덧입기를 원한다고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 죽을 몸이 생명에 삼켜지기를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시들어버리고 만물이 죽음의 겨울을 기다리고 있는 이 계절에 오늘 우리는 바울 사도의 말씀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사도신경을 통해 우리는 "영생을 믿사오며"라고 고백합니다. 이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교 신앙, 성서적 신앙에서는 우선 영생이란 것은 인간 안에 내재한 인간 스스로의 가능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이른바 영혼의 불멸성을 믿는 것은 힌두교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자의 신념이지 본래 성서의 사상은 아닙니다. 성서적으로는, 영혼이든 육체든 다 유한하고 죽는 존재입니다. 인간에게 영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은총이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성서는 죽음을 아주 현실적으로, 비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결코 소크라테스처럼 영혼이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하여 해방을 누리는 과정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와 예수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달관하면서 독배를 즐겁게 마셨지만 예수는 절망하면서 쓴잔을 마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육체는 물론이요 인간의 영혼도 그 자체로서 불멸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대하여서만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생명의 영, 부활의 영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생명의 영이 종말에 우리도 일으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그리스도교의 영생신앙입니다.

교리적으로는 그런데, 막상 우리는 생활 속에서 이러한 영생에 대한 확신이나 희망을 가지고 살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영생보다는 죽음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허무한 마음이 더 지배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해가 다르게 달라지는, 아니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자신의 육체를 보면서 우리는 인간의 유한성을 뼈저리게 느끼며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야말로 형이상학적 고독감입니다. 설령 죽음이 별거냐고 큰 소리 치는 사람, 살만큼 살았으니 아무 때 죽어도 큰 한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막상 세상을 하직하려고 하면 이게 아닌데, 이게 인생의 전부는 아닐 텐데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무언가 아쉬운 생각, 무언가 못 다했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며, 이것은 결코 생에 대한 단순한 미련이나 맹목적인 집착만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 인생은 어쩌면 죽음과의 끊임없는 싸움일 것입니다.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는 어떤 의미와 가치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깊은 의미에서 인생인지도 모릅니다. 인생이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생존 경쟁 이상의 것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죽음마저도 망쳐버릴 수 없는 궁극적 의미, 죽음마저도 우리로부터 앗아갈 수 없는 어떤 영원한 가치를 찾아 헤매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로 쇠약해 가는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면서,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면서 이러한 우리의 소망과 노력이 결국에는 다 부질없는 짓일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빤히 알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비극은 여기에 있습니다. 영생을 믿지 못하는 현대인, 역사와 시간의 세계만을 아는 회의주의자들인 것입니다.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사는 사람들, 그래서 그냥 허무를 안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현대인들입니다. 그야말로 뻥 뚫린 가슴, 구멍 뚫린 삶을 그대로 응시하면서 사는 날까지 만이라도 즐겁게 살자는 것이 현대인들의 보편적 인생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거의 본능적으로 죽음을 이기는 어떤 거대한 의미를 찾아보려고 발버둥 대는 것이 우리 현대인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얼마전 한 재벌의 죽음이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자기가 죽으면 화장을 해달라는 그가 남긴 유언 때문이었고, 가족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가 어떤 심정으로 그랬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사회에 교훈을 남기려는 뜻보다는 세상을 미련 없이 깨끗하게 떠나겠다는 생각, 구질구질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인생을 정리하겠다는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저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기의 무엇인가가 남기를 원하는 것, 자기가 남긴 무엇을 통해 - 그것이 자기 자손이든 자기가 창업한 회사이든, 자기가 사랑하는 단체, 교회, 국가이든 - 기억되기를 원하고 그것을 통해 영원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지만, 이것을 구차한 욕심으로 여기고 깨끗이 떨쳐버리고 그는 같습니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그것이 과연 다일까요? 사실, 화장하라는 유언 자체야 그리 어려울 것은 없는 일입니다. 죽어서까지 누구에게 폐 끼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정말 화장 하나만으로 인생이 깨끗이 정리되고 청산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은 남습니다. 정말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한 세상이라는 말입니까? 죽음으로 모든 책임은 면해지는 것입니까?

남의 얘기할 것이 무엇 있습니까. 이렇게 낙엽이 거리에 뒹구는 계절이 되면 초라해질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한번쯤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영생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지금 여기서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것도 좋으나 지금 여기서 영생을 경험하지 못하면 미래에 대한 확신도 어려운 법입니다. 아무리 예수의 부활을 믿고 우리도 따라서 부활할 것이라 생각해도, 이런 미래적 영생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일 뿐입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의 생명,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에 동참하는 경험을 갖고 싶은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오늘의 말씀은 이 점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두 가지 생명, 혹은 두 가지 인간이 있다고 말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겉 사람은 낡아가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겉 사람이 '낡는다'는 말은 실감나는 표현입니다. 우리의 육체와 정신 모두 낡은 기계나 물건처럼 녹이 쓸고 낡은 옷처럼 좀이 쏠거나 삭아버린다는 뜻입니다. 낡아서 폐기처분 해야 될 때가 점점 가까워 온다는 말입니다. 세파에 부딪치고 시달리기 때문이요, 자기 스스로 자기 몸을 학대하기도 하니까요. 이렇게 낡아 가는 자신의 존재를 지켜보는 일은 실로 괴로운 일입니다. 만약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 전체라면 우리는 살면 살수록 점점 더 비관적이 될 것이며 희망을 가질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러한 낡아 가는 몸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몸, 또 하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으며, 이 몸은 오히려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외적 조건이나 환경이 어떠하든, 우리의 몸이 쇠약하거나 병들거나 죽음에 직면해 있거나 혹은 우리의 가족관계, 직장생활이나 경제적 여건, 그리고 우리가 처한 사회적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에 굴하지 않는 또 하나의 자아, 또 하나의 감추어진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속 사람은 겉 사람이 당하는 고난과 오히려 반비례하여 생명력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겉 사람이 시들고 위축되면 될수록 속 사람은 더욱 더 새로워지면서 생명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이중적 존재이며 우리들의 삶은 이중적 삶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니, 이중적이라기보다는 외유내강적 삶이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입니다. 겉 사람은 연약하고 보잘 것 없으며, 초라하고 날마다 부패해가나 속 사람은 그 반대로 날마다 싱싱하게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중 인간이며, 이중적 자아를 가졌다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프로이드 식의 이중적 자아, 위선적 자아는 아닙니다. 에고와 수퍼 에고의 끊임없는 갈등으로 파악되는 위선적 존재가 아니라, 영생을 얻기 위하여 겉 사람과 속 사람, 영과 육, 썩어 없어질 존재와 날마다 새로워지는 생명의 끊임없는 싸움을 벌이는 이중적 자아의 삶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의 싸움은 패배해도 이 싸움만은 패배해서는 안 되는 싸움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싸움에서만은 승리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 일로 낙심하지 않고 모든 고난과 역경도 견디어 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환난을 당해도 곤경에 빠지지 않으며, 난처한 일을 당해도 절망에 빠지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을 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고후 4:8∼10)

그리스도인들은 이 예수의 생명을 소중히 간직하고 키우면서 그 재미와 그 보람으로, 그 평화와 기쁨으로 사는 존재들입니다. 이 속 사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기쁨,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발견하면서 좌절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에 희망을 두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애쓰는 존재들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생명, 이 생명의 기쁨과 신비를 간직하고 늘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나날이 새로워 갑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룩해 줍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4:16-18)

바울이 말하는 이 속 사람은 곧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예수의 생명을 잉태하여 키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머지 않아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것이지만, 동정녀 마리아만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예수의 생명을 잉태하여 품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동정녀 예수 탄생을 나와는 상관없는 어느 특별한 존재에게 일어난 먼 옛날의 사건으로만 생각하면, 그것은 정말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믿기 어려운 신화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어떠한 존재이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사건입니다. 즉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을 잉태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이야기는 인간의 구원이 어디 있는가를 말해주는 영원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야 비로소 우리도 새로운 존재로, 영생을 누리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예수의 생명, 속 사람을 키우는 삶은 어떠한 삶이며 그 길,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혹은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를 위하여 늘 몸을 죽음에 내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자신이 이 십자가와 죽음을 통한 생명의 길을 보여주신 분이기에, 그의 생명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그 죽음의 길에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성을 키우기 위하여 무슨 특별한 영적 훈련이라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일상적 삶을 접어두고 산에 가서 기도를 한다든지 조용한 곳으로 피정을 간다든지 혹은 심령 대 부흥회에 참여하여 열광을 한다든지와 같은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의 그리스도의 생명을 키우는 가장 확실하고 구체적인 방법은 삶의 순간 순간마다 자기의 이기적 욕망을 죽이는 삶, 생의 중대한 결단의 고비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자기 스스로 죽음을 짊어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건화 시키는 것입니다. 겉 사람을 죽이면 죽일수록 속 사람은 나날이 새로워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영성입니다.

저는 사실 이 새길교회에 올 때마다 늘 죽으러 온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형제자매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적어도 세상에서 하던 짓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돈을 벌려고, 돈을 따라 움직이다가 교회는 돈을 내기 위해 옵니다. 세상에서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지만 교회에서는 시간 아까운 줄 모르고 보냅니다. 우리 모두 세상에서는 제 잘난 맛에 큰소리 치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교회에 와서는 나 죽었소 하고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교회에서만 그럴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도 일상적 삶 속에서도 그래야 하는 데 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와서는 좀 죽는가 싶었던 겉 사람이 치열한 생존경쟁이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만 되면, 아니 운전대만 잡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곧바로 되살아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좀처럼 잘 죽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죽는 연습을 하기 위해 그나마 교회를 찾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는다"라고 자신의 삶의 양식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으면 죽을수록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은 쑥쑥 자라날 것이며,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라면 자랄수록 우리는 더 철저히 죽음의 길을 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새 생명, 곧 예수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안에 자라고 있는 예수의 생명을 서로 확인하고 가꾸어 나가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실을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안에서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는 내적인 생명의 힘을 감지하고 확인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신앙적으로는 아무 소용없는 존재들입니다. 죽은 존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대놓고 겉 사람만 치장하고 자랑하면서 사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아무리 교회 일을 많이 한다 해도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자라지 않으면 우리는 공허하게 느낄 것이며, 우리 교회가 아무리 많은 선교와 봉사활동을 한다 해도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이 예수의 생명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면 그것은 결국 겉 사람을 뽐내는 허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사업을 벌리고 무슨 활동을 하고 무슨 운동이나 투쟁도 다 좋지만 역시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 각자가 자기 자신 안에서 예수의 생명을 간직하고 가꾸어 나가는 일입니다. 이것 없이는 모든 것이 겉 사람만을 장식하고 키우는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493장에 있는 이호운님의 가사입니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 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주 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찬송과 기도로 주 함께 살리라.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맛보니, 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

우리 나라가 현재 겪고 있는 이 총체적 위기 또한 따지고 보면 실속 없이 겉모양만 치장하다가 속까지 썩어버린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겉은 번지르르하나 속을 드려다 보면 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번 국정 감사를 통해서도 보았지만 정말 속속들이 썩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는 것이 우리 나라입니다. 뚜껑을 열어보는 곳마다 다 부실이요 다 썩어 있습니다. 단군 이래 최대 부실공사라는 경부고속철, 농어촌 구조개혁을 위해 퍼부은 수조 원의 돈, 각종 국민연금 기금, 부실 공사, 부실 채권, 부실 기업, 썩지 않은 곳이 없고 해먹지 않은 곳이 없는 게 우리 나라입니다. 그러고도 아직 망하지 않은 것이 정말 기적과도 같습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 없고 부끄러워하는 사람 없습니다.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식의 이른바 '배째라 주의'가 판을 치는 기막힌 세상이 되었습니다. 조그마한 사업하다 망하면 큰 고통을 받지만 일을 크게 벌리다 망하면 오히려 큰 소리 치는 게 우리 현실입니다. 재벌들은 얼렁뚱땅 이번만 넘기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 내부로부터 새 생명이 움트고 새 살이 돋아나기 전에는 진정한 위기 극복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더 당해야, 더 확실하게 죽어야 진정으로 우리 사회가 다시 살 것이라고 생각 있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개혁이란 한 마디로 새 살이 돋아나도록 죽은 살, 썩은 살을 도려내는 일입니다. 겉 사람은 죽고 속 사람이 자라도록 하는 일입니다.

무성했던 잎들을 다 여위고 차가운 바람에 무방비로 노출된 나무들은 생명의 작업을 중지하고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무들은 엄동설한 속에서도 속 생명을 키우는 작업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늦여름과 초가을에 일년초들이 떨어뜨린 씨앗 또한 땅 속에 묻혀 썩어 문드러지건만 놀랍게도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면서 새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덜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요한 12: 24-25) 이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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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42 시편 영혼의 회복을 주심은 시23:3  김남준 목사  2008-06-06 2141
17441 요한계시 마지막 추수 계14:장  강종수 목사  2008-06-08 1472
17440 고린도전 하나님의 동역자 고전3:9  이승남 목사  2008-06-11 3066
17439 누가복음 역사의 예수를 따라 눅7:33-35  권진관 형제  2008-06-15 1554
17438 신명기 삼가 잊지 말라 신8:11-20  박동현 목사  2008-06-15 1984
17437 고린도후 어느 여학생의 고난 고후1:3-7  길희성 형제  2008-06-15 1837
17436 마태복음 전통적 가치와의 갈등과 극복 마5:38-42  최만자 자매  2008-06-15 1603
17435 출애굽기 망각의 죄 출22:20-26  박충구 목사  2008-06-15 2023
17434 누가복음 하나님 닮기: 거룩하신 하나님, 자궁의 하나님 눅6:38  한완상 형제  2008-06-15 2156
17433 누가복음 부모의 권위 눅12:51-53  한인철 목사  2008-06-15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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