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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학생의 고난

고린도후 길희성............... 조회 수 1837 추천 수 0 2008.06.15 08:29:03
.........
성경본문 : 고후1:3-7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하루는 저녁 늦게 느닷없이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한신대 친구 교수의 전화였습니다. 내용인즉 당신이 빨리 인터넷으로 들어가서 상담에 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 더니, 내가 누구에게 상담하겠다고 한 일이 없는데 어리둥절했습니다. 그것도 인터넷에서 하라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인터넷이라면 공포의 대상인 내가 거기서 누구의 인생상담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인즉, 얼마전 철학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철학문화연구소에서 대화 방을 개설했고, 거기에 철학적 인생상담 코너가 있는데, 지금 어느 한 여학생이 상담을 필요로 하는 데 종교 문제이므로 당신이 꼭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얼마 전 거기에 이름을 걸어 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즉시 나에게 참여가 강요되리라고는 생각 못했기에 참으로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한참 다른 일로 바쁜데 그런 일로 전화를 받으니 짜증이 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의 고집에 굴복하고 들어가 보겠다고 응낙을 했습니다. 인터넷 대화 방이란 함부로 가담할 일이 못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생전 얼굴 한번 보지도 못한 사람을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내 귀중한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니 하며 투덜거리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게다가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직 한 번도 내 손으로 인터넷 대화 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것도 또 하나의 주저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평소에 이미 갖고 있는 책과 잡지도 다 못 읽는 터에 무슨 정보가 부족하다고 인터넷을 헤집고 다니는지 모르겠다고 인터넷 실력을 자랑하는 동료 교수들을 비웃으면서 애써 외면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없으나, 이번만은 하여튼 급한 일이라니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한 여학생의 고민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고민의 내용인즉, 그가 중학교 2학년 때 교회 오빠들하고 등산을 갔다가 그들로부터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입은 상처는 그의 인생에 치명적인 고통으로 남아 7년이 지난 지금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래 공부를 참 잘 했는데 - 글을 읽어보니 아닌게 아니라 꽤 똑똑한 학생처럼 보였습니다 - 그것으로 인해 공부의 의욕도 잃고 시시한 대학에 가게 되었고, 하기도 싫은 전공을 택해 어영부영 지금 대학 3학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에 회의가 들고 남자들은 모두 혐오하게 되어 지금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지만 도무지 사랑을 할 생각이 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교회 오빠들한테 당했다는 생각이 더욱 그를 혼란으로 몰아 넣었으며 신앙의 위기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 글을 읽은 순간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이 엄청난 불행을 겪은 학생에게 내가 무엇을 말할 수 있으며, 그것도 모두 '동물들'이라는 비난을 받는 남자의 부류에 속한 나로서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하는 것이 나의 첫 반응이었습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컴퓨터를 꺼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그런 짐을 안겨 준 그 친구가 원망스럽기조차 했습니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이런 걱정 안 할 터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기왕지사 알아버렸으니 컴퓨터를 꺼버린다고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의 큰 숙제가 생긴 셈이며, 마음의 큰 부담을 안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이 주일이라 교회에 참석은 했지만 이 문제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교회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더 이상 이 부담을 미룰 수도 없어 어쨌든 대답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나로서는 신앙적 응답을 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내가 무슨 성폭력 상담전문가도 아니지만, 애초에 이 문제가 나의 관심으로 들어 온 것이 그 학생이 당한 고통이 일면으로는 신앙적 고민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단 주저하는 마음도 생겼습니다. 왜냐 하면, 신앙의 논리에 호소해 보아야 이 학생에게 무슨 설득력이 있겠습니까? 이미 신앙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데, 입에 발린 신앙 얘기가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또 이미 많은 좋은 말들을 다 듣고 식상해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무슨 뾰족한 위로의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욥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고난과 시련이 닥칩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 했기에 이토록 가혹한 시련을 주십니까? 친구들이 찾아와서 위로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온갖 변명을 다 늘어놨지만 욥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욥의 생각은 너도 한 번 당해 봐라, 그렇게 쉽게 정당화되는가 라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문제를 푸는 길은 그래도 신앙 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서는 가장 더러운 경험, 가장 극단적인 한계 상황적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헤어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미워도 하나님, 원망스러워도 하나님 밖에는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가능성 이외에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도저히 회복할 길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그 피해자라면, 그래도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안 계시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무신론적 상황을 가정하고 그 가운데서 해결방안을 모색해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원망스러운 하나님이기는 하나, 그러한 하나님이나마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도대체 누구에게 그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애당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그런 엄청난 불행은 단지 자기가 운이 나빠서 당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원망도 항의도 할 대상이 없고, 단지 시간이 가서 기억 속에서 악몽이 지워지기를 바랄 뿐일 것입니다. 그 이상의 무슨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자니 그가 당한 고통이 너무나 허무하고, 너무나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사실, 욥의 경우에 'Why?' 라는 그의 집요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기하지 않았던 또 다른 질문은 'Why not?'이라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도 않는데, 의로운 사람이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이 벌을 받아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으며, 인생에 도덕적 의미가 존재한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욥이 그렇게 집요하게 따지면서 항의를 하는 것도 결국은 그가 아직도 암암리에 하나님의 존재를 상정하고, 인생에 도덕적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전제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등의 따질 이유조차 없고, 그야말로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생은 처음부터 부조리한 것이니 묻고 따지고 하지도 말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노벨상을 수상한 바 있는 유태인 작가 엘리 위젤이 하나님의 백성, 선민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에서 당한 그 엄청난 비극을 말하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면도 이스라엘일 수 있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면서도 이스라엘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없이는 결코 이스라엘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원수 같은 하나님도 안 계시는 것보다는 계시는 것이 낫다는 조소적인, 그러나 인생의 벼랑 끝에서 그나마 인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지막 몸부림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나님은 계셔도 탈, 안 계셔도 탈입니다. 믿지도 못하고, 안 믿자니 더 허무합니다. 옛날 81년도 미국에서 광주의 비극에 접했을 때 가졌던 참담했던 느낌과 똑 같은 느낌을 이 여학생의 고통에 접하면서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결국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런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불행에서 그래도 의미를 발견하게 하고, 선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발견할 수 없는 순전히 악 그 자체로 보이는 사건 속에서 그래도 무언가 선을 찾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닙니까? 그리고 선이 끝내 악을 이기고, 의미가 무의미를 극복하며, 인생을 긍정하고 살려는 의지가 인생을 부정하고 죽어버리려는 의지보다 강해야만 하고 또 강해도 좋다는 이유를 말해주는 것이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나의 생각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엄청난 인생의 도덕적 부조리와 비극의 의미를 우리가 풀 수 있다면, 나는 그 열쇠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쥐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욥의 억울한 고난, 이스라엘이 당한 참혹한 비극, 80년대 초 광주의 비극, 그리고 이 한 여학생이 당한 고통, 더 나아가서 지금도 북한을 위시하여 세계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는 무고한 어린아이들의 굶주림,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힘없는 사람들의 실직과 절망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무고한 자의 고난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를 위한 고난이며 나 때문에 받은 고난이라면, 저들의 고난 역시 우리를 위한 고난, 나를 위한 고난일 것이며, 지금도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고난일 것입니다.
우리는 무고한 자의 고난을 접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 자신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는 '작은 자들의 고난에서 나의 고난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옥에 갇힌 자, 주리고 목마른 자, 병든 자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난이 예수 자신의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무고한 자들의 고난은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과 같이 타자를 위한 고난, 남을 위한 고난이요, 구원의 의미와 힘을 지닌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인류가 만들어 낸 사상 가운데 가장 숭고한 사상은 대고(代苦), 즉 대신 받는 고난이라는 사상입니다. 이사야 53장에서 가장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 사상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이사야 53:3∼6)

끝도 없는 이스라엘의 억울한 고난을 생각하다 고민 끝에 나온 이스라엘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리고 억울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한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도 대신 받는 고난으로 보았습니다.

이 대고가 진리가 아니라면, 아니 진리가 될 수 없다면, 즉 무고한 자의 고난이 아무 의미도 없는 단지 우연한 불운에 지나지 않는다면, 나는 도저히 인생의 도덕적 의미를 긍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죄 없는 자들의 고난이 남을 위한 대고가 아니라면, 인류 역사를 통하여 흘린 무수한 사람들의 억울한 피와 눈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으며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굳이 의롭게 살 필요도 없고, 굳이 자기희생을 자취할 필요도 없으며, 재수 없는 놈만 고생하다가 죽는 것이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인생의 최고 목표는 가능한 한 고통과 고생을 피하는 일 이상이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너무 기계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유 일회적 사건으로만 보도록 세뇌를 받았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그야말로 'Once and for all' 사건으로서, 이 단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모든 인류의 죄가 대속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구원 사건은 지금도 억울한 자들의 죽음 속에서 무수히 반복되고 있는 사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십자가의 구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2,000년 전에 예수가 당한 고난과 지금 나의 죄가 무슨 상관이 있기에 그가 나를 대신해 죽었다는 말입니까? 내가 그를 죽인 것도 아니고, 내가 그에게 어떤 잘 못을 한 일도 없는데 말입니다. 아닙니다. 지금도 무수히 많은 그리스도가 바로 나 때문에, 나의 무관심, 나의 탐욕 때문에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한 사건으로서 나를 구원하는, 나를 위한 죽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여학생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확실히 그는 자기 잘못으로 그런 엄청난 시련을 겪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왜곡된 이 사회의 성문화의 희생자입니다. 어쩌면 여성을 성의 대상으로만 보고 포르노 문화에 젖어 있는 우리 사회 남성들 전체의 잘못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며, 그들을 대신한, 그들을 위한 대고의 고통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의 말씀대로,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이 가엾은 여학생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십자가라는 악의 극치를 전환하여 인류를 구원하는 선의 도구로 삼으셨듯이, 그 여학생의 고난에도 그러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나는 감히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서 요즈음 선풍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구성애씨의 이야기도 해 주었습니다. 내가 듣기로는 그도 어렸을 적에 오빠라는 사람한테 성폭행 당한 경험이 있는데, '보라, 그는 지금 그 상처를 극복하고 얼마나 큰 일을 하고 있는가' 라고, 상처 입은 조개가 진주를 품고 있듯이, 고통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고통 그 자체가 인생의 적은 아닙니다. 다만 무의미한 고통, 맹목적인 고통이 정말로 인생의 적입니다. 사람은 의미 있는 고통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극심한 고문도 참으며, 순교도 당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의미한 고난은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벌써 몇 주일 전부터 전 세계 교회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고난주간을 지내고 있으며, 금주가 그 마지막 주간입니다. 오늘은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이지만 본격적인 고난 주간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십자가에 대한 명상을 추상적으로 하지 맙시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먼 옛날 단 한번 일어나서 인류를 구원한 기적적 사건이 아닙니다. 옛날 나와 상관없이 일어난 그 고난을 억지로 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고 아무리 해 보았자 실감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지금도 무수히 일어나고 있는 억울한 자들의 고난을 발견하지 않는 한, 그리하여 그들의 고난이 바로 나를 위한, 나 때문에 일어나는 고난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우리들의 묵상은 한낮 일시적인 감상주의일 뿐이고 공허하고 추상적인 교리를 뇌까리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잊지 않고서 오늘도 교회를 찾는 것은 조금이라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에 무수히 많은 그리스도들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빚진 마음, 나 때문이라는 양심의 가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복음에 빚을 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책만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도 남을 위한 십자가를, 남을 위한 고난에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억울한 자들의 고난이 대고라는 숭고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해서, 행여 그들의 고난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거나 그들의 고난을 방치하고 방관만 해도 좋다는 어리석은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도 그들의 고난에 참여하고 나누며, 남을 위한 대고의 역사에 뛰어들지 않는 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 고백은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무고한 자들의 고난에 대한 완벽한 이론적 해결은 없습니다. 결국 고난은 함께 지고 나누는 실천을 통해서만 극복될 것입니다.

오늘 읽은 사도 바울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삼아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다고"까지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온갖 환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라고 말하면서 고린도 교회 사람들의 고난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실로,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을 잊지 않으며,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기쁨을 누리고, 위로를 받은 고난의 공동체였습니다. 고난과 죽음 속에서 진정한 생명의 길을 그들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한 여학생이 당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오늘 고난주간을 맞아 인생의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은총의 수단이 되었다면, 이것 역시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아니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그 학생에게는 미안하다 못해, 불경스러운 일이 되지나 않았나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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